숲노래 책읽기 / 가난한 책읽기
바보와 얼간이
‘바보’는 아직 잎갉이를 하는 작은벌레를 가리킨다. 애벌레와 같은 사람이 천천히 꿈을 그리며 나아갈 삶을 노래하는 이름이다. ‘얼간이’는 예나 이제나 안 배우고 안 지으면서 남눈에 스스로 휘둘리는 몸짓을 나타낸다. 사람으로서 사람빛을 잊기에 딱하게 바라보는 이름이다.
모든 ‘알’은 애벌레를 거쳐서 고치를 지나고는 찬찬히 나비로 깨어나려고 이곳에 태어난다. 모든 ‘씨’는 흙한테 포근히 안겨서 제때와 제철을 읽는 날까지 하늘바라기로 자라나려고 이곳에 맺는다. 모든 ‘사람’은 살림을 짓는 삶을 몸소 일구는 사이에 사랑을 배우고 익혀서 나누려는 뜻으로 이곳에 온다.
내가 지내는 전남 고흥 도화면인데, 2011년에 처음 깃들 즈음, 면소재지 어린배움터는 200 어린이가 넘고 우글우글했다. 면소재지 푸른배움터도 여러 칸(학급)에 바글바글했다. 그무렵 이 시골이 하루가 다르게 무너지고 사라질 줄 내다본 사람은 아주 드물거나 없었다고 느낀다. 그렇지만 젊은이도 아기도 없는 마을이 수두룩했다. 나는 서른여섯 살에 이 시골에 깃들었다. 둘레에서 놀랐다. “한창 젊은데 왜 서울에 안 있고 이 막장까지 왔수? 애까지 둘이나 데리고? 서울에서 사고쳤나?” 같은 소리를 거의 모두라 할 시골사람한테서 들었다. 나는 뿌리내리는 나무로 살아가서 숲을 이루려고 곁님과 아이들하고 스스로 시골로 찾아왔다. “시골아이를 서울로 등떠미는 낡은 배움틀을 얼른 버리고서, 이곳 아이들이 어린배움터나 푸른배움터만 마친 뒤에 이 시골에서 조촐히 즐겁게 작게 보금자리를 짓고 일구는 길을 함께 새로 배우고 나눌 일입니다.” 하고, 고흥서 만나는 누구한테나 말했으나, 다들 한결같이 비웃거나 흘려넘겼다. “작가 양반은 젊어서 그런지, 참 쓰잘데없는 걱정만 하는구만. 그래서 작가 양반인가?” 같은 소리를 실컷 들었다.
다가올 2026년에 도화면 어린배움터와 푸른배움터 모두 ‘입학예정자’가 ‘0’이라고, ‘위기’라고 시끌하다. 이제서? 이제서야? 지난해에는 아마 ‘1명 입학’인 줄 안다. 지난해에는? 그러께는? 바글대던 여러 칸이 “한 칸 열 아이”도 안 될 만큼 줄어드는 동안에는? “한 칸 두세 아이”로 확 줄어든 때에는? 여태 손놓고 팔짱끼고 등돌리면서 “뭐, 몇 해 있으면 딴 데(학교) 가니까 걱정없지.” 하던 그들이 하나둘 떠오른다. 그러니까 그들(교사)은 다섯 해마다 자리를 옮기니까, 시골배움터가 아슬하든 벼랑끝이든 닫을 판이든 쳐다볼 까닭도 일도 없다. 시골 할매할배는 어린배움터나 푸른배움터가 닫든 말든 까맣게 모르는데다가 아예 아무 마음이 없다. 면장이나 군수나 공무원도 다른 자리로 곧 옮길 테니까 그들과 나란히 아무 눈길도 마음도 없다.
여태 “서울로!”를 외치면서 “인서울 탈고흥” 푸름이한테 목돈을 장학금이랍시고 잔뜩 쏟아부은 굴레를 누가 꾀하고 누가 길미를 챙겼는지 뉘우치는 빛이 없다. 이 작은 시골 고흥에서는 몇 해 앞서까지 “서울대 합격 1000만 원, 연고대·이화여대 합격 500만 원, 그럭저럭 인서울 대학교 300만 원, 서울권 대학생은 4년 동안 기숙사 무료제공”이라는 장학금을 오래도록 펴왔다. 시골에서 나고자라서 푸른배움터까지 마치고서 논밭짓기를 하겠다는 젊은이한테는 10원조차 베푼 적이 없다. 그나저나, 지난 열 해 즈음에 걸쳐서 고흥을 비롯한 ‘인구소멸예정지’에 흘러든 나라돈은 2000억을 훌쩍 넘는 줄 안다. 어쩌면 1조쯤 들어왔을 수 있다. 이 돈은 어느 주머니로 쏙쏙 들어갔을까? ‘태양광·풍력 보상금’도 오지게 많은 줄 아는데, 다 누구 뒷주머니와 앞주머니에 숨었을까?
새길찾기는 아주 쉽다. 모든 어린씨 푸른씨가 “졸업장 없는 학교”를 누리면 된다. “교과서 안 쓰는 하루”를 살림짓기로 갈아엎으면 된다. 모든 급식실을 닫고서 도시락을 싸거나 손수 밥짓기를 하면 된다. ‘학교 주차장’을 논밭으로 바꾸면 된다. 교육부를 통째로 닫고서, 시골은 시골대로 서울과 큰고장은 서울과 큰고장대로 ‘손수짓기(자급자족)’를 배우고 익히며 나누는 새판을 짜는 데에 목돈과 품을 들이는 얼거리를 짤 노릇이다.
바보는 벼랑끝에 서면 드디어 눈을 뜬다. 벼랑끝에서 스스로 날아오를 길을 연다. 얼간이는 벼랑끝에서도 얼뜬 짓과 말로 노닥거리다가 슥 미끄러지고 나서야 “나 살려!” 하고 운다. 얼간이는 죽을 판에도 얼을 못 차리다가 죽는다.
‘오늘’은 도화면이지만, ‘모레’에는 고흥읍과 도양읍이다. ‘글피’는 전라남도요, 이레 뒤에는 온나라가 되겠지. 우리는 국회의원에 군의원·시의원·도의원·구의원 따위를 뽑을 까닭이 없다. 모든 ‘의원’은 제비뽑기로 그 고장 17살 푸른씨한테 맡겨야지 싶다. 돈·이름·힘을 거머쥔 늙고 낡은 꼰대를 싹 벼슬판에서 솎을 노릇이다. 군수와 시장도 뽑을 까닭이 없다. 면장과 구청장이 돌아가면서 맡으면 된다. 국회의원이라면, 그 고을 20살 젊은이 가운데 제비뽑기로 한 해씩 맡기면 된다.
참으로 쓰잘데없는 뽑기를 확 줄이고서, 고을마다 마을마다 어린배움터하고 푸른배움터를 제대로 돌보면서 고을사람과 마을사람이 더 작고 조촐히 스스로 하루짓기를 하도록 이바지하면 된다. 밑돈(기본소득)이란, 이렇게 “마을 스스로 살림짓기”를 이루어 가면서 펴면 된다.
오늘 이른아침에 부산으로 일하러 길을 나선다. 가르치거나 배우는 사람은 마을과 집에서도 또 먼길을 나서면서도 배우고 가르칠 노릇이라고 본다. 2025.11.21.
ㅍㄹㄴ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을 쓴다. 《풀꽃나무 들숲노래 동시 따라쓰기》,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