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책숲마실 . 마을책집 이야기


푸른씨와 열손가락 (2025.11.13.)

― 창원 〈책방19호실〉



  어릴적부터 거울 없이 살기를 바랐습니다. 누가 저를 보며 ‘얼굴’이나 ‘몸매’로만 따지는 말짓이 다 성가셨습니다. 남이 나를 겉모습으로 쳐다보기를 안 바란다면, 나부터 누구나 속빛으로 마주할 노릇이라 여겼어요. 어느덧 거울 없이 서른 해 남짓 살아오며 하루하루 더 속으로 물든다고 느낍니다. 스스로 어떤 눈빛인지 알아볼 때에만 거울을 찾아서 눈망울만 들여다봅니다. 우리는 제 눈망울에 흐르는 빛이 사랑인지 시늉인지 허울인지 가릴 적에만 거울을 보면 됩니다.


  셈겨룸(입학시험)을 치른다는 새벽에 길을 나서자니, 고흥읍 푸른배움터 앞조차 붐빕니다. 온갖 아이어른이 잔뜩 모여서 “힘내! 잘해!” 하고 외치며 꽃다발에 뭘 안기는데, 참 쓰잘데기없습니다. 우리나라는 ‘주민등록증’을 처음 받을 적에 아직 “열손가락 그림따기(십지 지문 채취)”라는 바보짓을 합니다. 말썽꾼(범죄자)일 적에만 따면 되는데 그저 모든 푸른씨한테서 “열손가락 그림따기”를 하지만 정작 이 대목을 눈여겨보거나 따지는 어른은 없다시피 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푸른배움터만 마치고서 ‘시골에서 흙살림을 지으려’는 푸른씨를 북돋우는 나라길은 아예 없습니다. 어린배움터만 마치고서 살림길을 펴려는 푸른씨를 헤아리는 나라길도 없어요. 그저 셈겨룸만 쳐다보며 등을 떠미는 굴레입니다.


  낮에 창원대학교에서 이야기꽃을 폈습니다. 경남 벼슬꾼(공무원)은 ‘다시배움(재교육)’을 하는 틀이 있군요. 놀랐습니다. 우리는 어느 나이·자리에 있든 늘 새롭게 배워야 어른다우면서 사람빛을 스스로 짓습니다.


  일을 마친 뒤에 가을나무 사이를 걷고, 골목집 곁으로 거닐면서 〈책방19호실〉로 찾아갑니다. 오늘은 여는 날로 알았는데 책집지기님한테 딴일이 있는지 잠겼습니다. 갑자기 바쁠 수 있게 마련입니다. 책집 앞에서 등짐을 내리고서 땀을 들입니다. 볕바라기를 하면서 노래꽃 한 자락을 씁니다. 책집 앞에 글종이를 꽂고서 다른 책집을 찾아가기로 합니다.


  올겨울은 겨울답게 추울 테지만 알맞게 추운 날씨를 이을 듯합니다. 여태 눈감은 분이 많아도 바야흐로 눈뜨는 이웃이 늘어납니다. 미움이나 불길이나 손가락질이 아닌, 사랑과 꿈과 들숲바다를 품는 마음이 늘어나요. 우리 마음에 따라서 날씨가 바뀌니, 올겨울과 새봄은 고루 덮는 흰눈과 즐겁게 돋는 씨앗으로 밝을 테지요.


  한 해 내내 언제나 포근포근 ‘책빛날’이기를 비는 마음입니다. 책벌레한테는 책빛날이요, 누구한테나 ‘숲빛날’이면서 ‘사랑날’에 ‘살림날’이기를 바라요. 푸른씨뿐 아니라 어린씨와 어른씨도 ‘푸른날’이기를 바랍니다.


ㅍㄹㄴ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을 쓴다. 《풀꽃나무 들숲노래 동시 따라쓰기》,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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