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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역하는 말들 - 황석희 에세이
황석희 지음 / 북다 / 2025년 5월
평점 :
다듬읽기 / 숲노래 글손질 2025.10.25.
다듬읽기 278
《오역하는 말들》
황석희
북다
2025.5.30.
틀린글씨나 틀린곳을 누가 짚어 주면 고맙습니다. 미처 놓치거나 스친 데를 누가 알리면 반갑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배우되 이웃과 동무가 사근사근 이야기하는 말을 들으면서 새삼스레 깨닫곤 합니다. 넘어지기에 일어서고, 자빠지기에 기운내며, 밤에 잠들기에 새벽에 하루를 엽니다.
《오역하는 말들》은 책이름부터 알쏭합니다. 우리말은 ‘말들’이라 안 씁니다. 우리말에서 ‘말’이나 ‘글’에는 ‘-들’을 안 붙입니다. 비나 눈에도 ‘-들’을 안 붙여요. 풀이나 나무나 씨앗에도 ‘-들’을 안 붙여요. 바닷물이나 구름이나 바람이나 별에도 ‘-들’을 안 붙입니다. 이 얼거리를 읽지 않는 탓에 “틀리게 옮기”게 마련이니, 틀린 줄 누가 짚거나 가르치거나 알리면 넙죽 절을 할 일이라고 봅니다.
스스로 못 배우거나 안 배운 곳을 이제 좀 배우라고 알리는 손길이 있는데 “지금도 오역 지적을 받으면 늘 아프고(6쪽)”처럼 일본말씨로 첫머리부터 핑계를 대는 책이라면, 그야말로 보잘것없습니다. 팔뚝이나 등에 글씨를 안 새겼다지만, 이미 이 책으로 “오만방자한 문장으로 타투를 새(9쪽)”긴 셈입니다.
아무래도 우리 스스로 모르는구나 싶은데, ‘옮김말씨(번역체)’는 ‘옮기다(번역하다)’가 아닙니다. 옮겼으면 ‘옮김말씨’가 아닌, 그저 ‘말씨·우리말씨’입니다. 옮기다가 말았거나, 옮기는 시늉에서 그쳤거나, 제대로 안 옮겼거나, 옮기는 척을 했기에 ‘옮김말씨(번역체)’라고 합니다.
이웃글을 “잘 옮겨”야 하지 않습니다. 이웃글을 “마음으로 옮기”면 됩니다. 동무나 이웃하고 만날 적에 “겉으로 들리는 소리”만 받아들인다면 ‘이야기’가 아닌 ‘겉훑기’입니다. 흐르는 말소리에 어떤 마음과 뜻과 생각을 얹는지 속으로 헤아리고 짚으면서 “나는 어떤 마음인지” 주고받을 적에 비로소 ‘이야기’라고 합니다.
이웃글을 옮기는 일이란, 이웃사람하고 처음으로 만나서 이 나라 뭇사람한테 다리를 놓는다고 할 만합니다. 다리를 어떻게 놓고 싶은지 곱씹고, 다리를 왜 놓으려는지 살피고, 다리를 놓는 동안 스스로 무엇을 배우며 어떻게 거듭나고 싶은가 하고 생각할 노릇입니다. 이 세 가지를 품으면 ‘옮김말씨’가 아닌 ‘옮긴글’입니다. 이 세 가지 가운데 하나라도 잊는다면 ‘옮긴글’이 아닌 ‘옮김말씨(옮기는 흉내인 말씨)’입니다.
ㅍㄹㄴ
《오역하는 말들》(황석희, 북다, 2025)
지금도 오역 지적을 받으면 늘 아프고
→ 잘못 옮겼다고 짚으면 아직도 아프고
→ 틀린 곳을 나무라면 오늘도 아프고
6쪽
오만방자한 문장으로 타투를 새기지 않은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 철없는 글씨를 몸에 새기지 않아 얼마나 숨돌렸는지 모른다
→ 쪼잔한 글을 몸에 그리지 않아 얼마나 한숨돌렸는지 모른다
→ 도도한 글씨를 살에 새기지 않았기에 망정이다
→ 그래도 막나가는 글을 살그림으로 새기지 않았다
9쪽
나를 보호하기 위한 무의식적 방어 기제일지도 모른다
→ 문득 나를 지키려는 몸짓일지도 모른다
→ 불현듯 나를 지키려는 짓일지도 모른다
17쪽
결국 터지지도 못하는 휴화산이면서 기저에선 부글부글 끓고 있는 거다
→ 끝내 터지지도 못한 주제에 밑에선 부글부글한다
→ 뭐 터지지도 못하면서 밑바닥에선 끓는다
19쪽
하지만 더 자연스러운 표현이 이미 존재한다면 굳이 부자연스러운 번역체를 쓸 이유가 없다
→ 그런데 더 부드러이 쓸 수 있다면 굳이 딱딱하게 옮김말씨를 쓸 일이 없다
→ 그러나 알맞게 쓸 말씨가 있다면 굳이 엉성하게 옮김말씨를 쓸 까닭이 없다
25쪽
어떤 경우엔 토착어가 가진 정서적 함의와 문화적 맥락이 탈각되기도 한다
→ 때로는 밑말에 흐르는 마음과 살림결이 빠지기도 한다
25쪽
언중에 의해 사용되지 않는 말은 사실상 사어死語다
→ 사람들이 쓰지 않으면 옛말이다
→ 사람들이 안 쓰면 죽은말이다
→ 사람들이 안 쓰는 말은 죽는다
→ 사람들이 안 쓰면 사라진다
26쪽
평생 꿈도 못 꿀 호사다
→ 꿈도 못 꿀 호강이다
→ 꿈도 못 꿀 봄꿈이다
→ 꿈도 못 꾸도록 넘친다
37쪽
경력 페이지 늘리는 재미를 얼마나 좋아했냐면
→ 길자취 늘리기를 얼마나 재미나게 했냐면
→ 걸음꽃을 늘리며 얼마나 좋아했냐면
44쪽
요새 뮤지컬을 자주 번역하면서 양가적인 감정을 느낀다
→ 요새 춤노래를 자주 옮기면서 두 마음이다
→ 요새 판노래를 자주 옮기면서 둘을 느낀다
67쪽
지금이야 그런 글들이 워낙 많아져 어렵지만 그때만 해도 일일이 찾아다닐 만했다
→ 요새야 그런 글이 워낙 늘어서 어렵지만 그때만 해도 하나하나 찾아다닐 만했다
79쪽
책을 내고 책에 대한 평을 듣고 내 글을 돌아보는 과정에서 느끼는 게 많다
→ 책을 내고 책느낌을 듣고 내 글을 돌아보는 길에서 여러모로 느낀다
→ 책을 내고 책느낌글을 읽고 내 글을 돌아보면서 이모저모 느낀다
83쪽
나는 그 표현에 딱히 의미를 두지 않고 의례적인 칭찬으로 생각했다
→ 나는 그 말을 딱히 뜻있게 듣지 않고 그냥 띄운다고 여겼다
→ 나는 딱히 뜻있다고 안 듣고 가볍게 추켜세운다고 보았다
83쪽
자연스러운 구어체로 말하자면 “네가 뭔데 날 정의해?” 같은 거다
→ 흔히 하는 말로 “네가 뭔데 날 나눠?”와 같다
→ 우리가 하는 말로 “네가 뭔데 날 매겨?” 같다
90쪽
또 다른 누군가가 이 말은 원어로 무엇이었을까를 상상하며
→ 또 다른 누구한테 이 말은 워낙 무엇이었을까 그리며
→ 다른 사람은 이 말이 처음에 무엇이었을까 헤아리며
98쪽
별 차이 없는 것 같으면서도 문장이 순식간에 힙해진다
→ 그리 안 다른 듯하면서도 글이 확 반짝인다
→ 썩 안 다른 듯하면서도 글월이 갑자기 새롭다
→ 비슷한 듯하면서 글자락이 어느새 다르다
→ 그냥저냥 같으면서도 글결이 톡톡 튄다
101쪽
의미에서 탈선한 문장이 여러 채널을 오랫동안 거치며 정역의 탈을 쓰면 문장은 물론이고 화자의 의도도 곡해된다
→ 무슨 뜻인지 모를 글이 여러 곳을 오랫동안 거치며 바른글이란 탈을 쓰면 글에다가 글쓴이 마음도 비튼다.
→ 뜻모를 글이 이곳저곳 오랫동안 거치며 바른글이란 탈을 쓰면 글이 뒤틀리고 글쓴이 뜻도 뒤틀린다
101
꿈을 향해 가는 여정의 목적은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이지 스릴이 아니다
→ 꿈을 바라보며 나아갈 뿐, 아슬아슬하게 가지 않는다
→ 꿈으로 가는 길일 뿐, 아찔하게 가지 않는다
120
빽빽하게 짜인 계획 속에 살지만 반드시 건설적이고 실용적인 시간만이 필요한 건 아니다
→ 빽빽하게 짠 대로 살지만 반드시 낫거나 알찬 때만 있어야 하지 않다
→ 빽빽하게 살지만 반드시 훌륭하거나 알뜰한 나날만 보내야 하지 않다
147
결혼과 육아의 가장 끔찍한 케이스만 모아서 지옥도처럼 전시하는
→ 가장 끔찍한 꽃가마와 아이돌보기만 모아서 불늪처럼 보여주는
→ 가장 끔찍한 함께살기와 아이돌봄만 모아서 불바다처럼 늘어놓는
174
우리가 아이를 철저히 무시했고 아이를 우리 대화에 끼워 주지 않았다
→ 우리가 아이를 아주 얕봤고 아이를 우리 얘기에 끼워 주지 않았다
→ 우리가 아이를 무척 깔봤고 아이를 우리 이야기에 안 끼워 주었다
191
사실상 아무것도 못 누렸지만 빈고에 허덕이진 않았다
→ 여태 아무것도 못 누렸지만 가난에 허덕이진 않았다
→ 이제껏 아무것도 못 누렸지만 굶고 허덕이진 않았다
221
나의 온기를 나누거나 타인의 온기를 인식하는 것은 감각의 영역 같기도 하다
→ 내 숨결을 나누거나 이웃 숨결을 느끼는 삶은 마음길 같기도 하다
→ 내 숨꽃을 나누거나 다른 숨꽃을 느끼는 길은 마음살이 같기도 하다
278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을 쓴다. 《풀꽃나무 들숲노래 동시 따라쓰기》,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