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달이 나오는 <월간토마토>에 실은 글이다.
아마 2025년 5월호에 실었지 싶다.
다달이 올려놓으려고 하지만
어쩐지 다달이 깜빡깜빡 잊는다.
.
.
숲노래 우리말꽃
손바닥만큼 우리말 노래 25
나는 열 살에 처음 한자를 익혔는데, 한자를 익히고 보니 ‘어른들이 그냥 쓰는 얄궂거나 아리송한 말’이 하나둘 보였다. 어머니나 둘레 어른하고 곧잘 이런 말을 주고받았다. “어머니, ‘수돗물’이란 말 참 아리송하지 않아요?” “왜? 뭐가?” “‘수도’라 하면 ‘물길’이란 뜻인데, ‘수돗물’은 ‘물길물’이잖아요?” “그런가? 그러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데?” “어, 잘 모르겠지만, 말을 바꿔야 하지 않아요?” “말을 바꿔? 어떻게? 귀찮아, 그냥 써.” 마흔 해 앞서인 1984년 무렵에는 그냥 ‘수돗물’을 써야 하나 싶어 입에 안 붙었으나, 이제는 ‘꼭짓물’로 바꿔서 써 본다. 말이 안 된다고 느끼는 한 사람부터 바꾸면 될 일이지 싶다.
꼭짓물
‘수도’라는 한자말은 매우 아리송하다. 우리말로 옮기면 그저 ‘물 + 길 = 물길’인데, 다들 아무렇지도 않게 ‘물길물(수돗물)’이라는 엉뚱한 말을 쓴다. 엉뚱말을 늘 쓰면서도 엉뚱한 줄 못 느끼기 일쑤이다. ‘물길꼭지(수도꼭지)’란 꼭지를 틀면 물이 나오도록 마련한 살림을 가리키는데, “꼭지를 틀어 물이 나오는 살림”이라면 수수하게 ‘물꼭지’라 하면 된다. 집에서 물꼭지만 틀어도 물을 쓰는 살림길이라면, 슬쩍 앞뒤를 바꾸어 ‘꼭짓물’이라 할 수 있다. 낱말을 참 쉽게 짓는다고 여길 만한데, ‘물길(수도水道)’이라는 낱말부터 그저 수수하고 쉽다.
꼭짓물(꼭지 + ㅅ + 물) : 꼭지를 틀면 나오는 물. 으레 서울이나 큰고장에서 물을 쓰는 길을 가리키는데, 큰못에 가둔 물을 길게 이어서 언제 어디에서나 쓸 수 있도록 다스리는 물이다. (← 수도水道, 수돗물水道-)
비나리물
새벽에 처음 길어서 마음을 고이 다스리면서 내놓는 물이 있다. 새벽에 내놓는 ‘새벽물’일 텐데, 물 한 그릇을 마주하고서 고요히 추스르는 마음을 하나로 모아서 가만히 비손을 한다. 비나리를 이루려는 정갈한 손짓과 몸짓이 어울린다. 바로 오늘 하루를 새롭게 열면서 가꾸려는 꿈과 사랑이 만난다. 빌고 바라고 그리고 꿈을 심으면서 마음빛을 물빛으로 적신다.
비나리물 (비나리 + 물) : 동이 트려고 하는 아직 어둡고 이른 새벽에 우물이나 냇가에서 처음 뜨고는, 그릇·사발·대접에 놓은 다음에 마음 가득히 꿈·사랑을 빌면서 올리는 물. (= 비손물·새벽물. ← 정화수井華水, 정한수井-水)
속꽃나무
영어로 ‘fig’라 일컫는 나무를 한자말로는 ‘無花果’로 적는다. 우리는 한글로 ‘무화과’로 적는데, 이 나무는 “꽃을 안 맺지 않는”다. “겉으로 드러나는 꽃”이 아닌 “속으로 말리면서 맺는 꽃”일 뿐이다. 어린날 이 나무를 마을에서 흔히 보았다. 마을어른은 으레 ‘무아가’라든지 ‘뫄가’처럼 소리를 내셨다. 뭔 나무라는 소리인지 잘 알아듣지 못 했으나 그러려니 했다. 나중에 시골로 삶터를 옮긴 뒤, 마당 한켠에서 자라는 이 나무를 어른이 되어 다시 만나면서 해마다 이름을 곰곰이 돌아보았다. 말벌이 속으로 드나드는 모습을 늘 지켜보는데, 개미와 노린재와 작은 딱정벌레와 무당벌레도 속으로 드나들며 단물을 누리더라. 여러모로 본다면, 우리로서는 “속으로 맺는 꽃”이라는 뜻으로 ‘속꽃·속꽃나무’처럼 이름을 새로 붙일 만하다. 큰꽃과 작은꽃이 있고, 들꽃과 숲꽃과 멧꽃이 있다. 시골꽃과 서울꽃이 있고, 아이꽃과 어른꽃이 있다. 이른꽃에 늦꽃이 있으며, 아침꽃과 밤꽃이 있다.
속꽃 (속 + 꽃) : 속에 맺는 꽃이나, 속으로 맺는 꽃. 꽃이 겉으로 안 드러나기에 마치 꽃이 없다고 여기지만, 속으로 가만히 말려서 들어가듯 도톰하고 통통하게 부풀면서 맺는 꽃. (← 무화과無花果)
속꽃나무 (속 + 꽃 + 나무) : 속꽃을 내놓는 나무. 한봄을 지나면서 느긋이 사람손 비슷한 모습인 잎을 내놓은 뒤에, 조그마한 망울처럼 꽃을 천천히 내놓고서 속으로 꽃을 맺으면서 열매를 남기는 나무. (← 무화과나무無花果-)
ㅍㄹㄴ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을 쓴다. 《풀꽃나무 들숲노래 동시 따라쓰기》,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