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책읽기 / 가난한 책읽기
2025.10.2. 운동권 아닌 작은이
‘대학교’에 들어가서 ‘학생운동’을 한 탓에 억지로 싸움터(군대)에 끌려간 사람도 제법 있지만, 모든 ‘운동권 대학생’이 끌려가지는 않았다. 나는 1995년 4월에 수원병무청에서 신체검사를 받고서 11월에 싸움터에 끌려가듯 들어갔는데, 대학교를 그만두려고(자퇴) 하니 한 달 만에 데려가더라. 그무렵 1995년에 신체검사를 받을 때에도, 1995년 11월에 훈련소에 들어간 때에도, 훈련소를 마치고서 ‘자대배치’를 받는 기나긴 길에도, 위(상관)는 우리(훈련병)더러 “너희 집안이나 친인척 빽”이 있으면 말하라고 했다. 국회의원이나 고위공무원이 있으면 꼭 말해야 한다고 하더라.
수원병무청 신체검사를 받을 적에는 국가대표 여자농구선수인 어느 분 동생이 옆에 있었는데, 나더러 “넌 면제받을 눈과 코가 있는데 왜 면제를 안 받니? 면제받는 법을 알려줄까?” 하면서 차근차근 알려주기까지 했다. 그때 신체검사를 하던 의무관 여럿도 내 눈과 코를 보더니 ‘넌 왜 진단서를 안 떼오’느냐면서 ‘진단서를 떼오면 면제인데, 집에 전화해서 어머니한테 진단서 떼는 비용 25만 원을 보내라’고 하라고, 신체검사 그 자리에서 얘기했다. 공중전화 있는 곳을 문득 보았는데, 줄줄이 서서 누구한테 전화하는 사람이 많더라.
1995년에 나는 새뜸나름이(신문배달부)로 일하며 한 달에 16만 원 일삯을 받는 터라 25만 원이라는 돈은 무척 컸다. 그래서 무슨 뜬금없이 목돈을 내라 하는지 알 길도 없고, 면제대상이면 면제를 매기면 될 텐데, 왜 집에 전화해서 어머니더러 수원병무청 의무관 앞으로 25만 원을 보내야 하는지 알 턱도 없어서 전화도 안 하고 의무관이 들려준 말도 흘려넘겼다. 이리하여 그냥 군대에 척 들어갔고, 강원도 양구 꽃등(최전방 철책)까지 갔다.
적잖은 ‘운동권 대학생’이 틀림없이 군대에 억지로 끌려가서 이슬(의문사)로 눈물앓이를 해야 했지만, ‘빽있는 운동권 대학생’은 안 끌려갔다. ‘운동권 아닌 대학생’조차 이미 군부대에서는 ‘신상조사’를 해놓은 줄 군대에 들어가서 알았는데, ‘운동권 아닌 시위 단순참가자’조차 강원도 철책(지오피)으로 끌려온 줄 지켜보기도 했다. 또한 운동권도 대학생도 아니지만 이슬(의문사)로 떠난 사람이 수두룩하다. 2008년에 나온 《돌아오지 않는 내 아들》이 군의문사를 다룬 첫 책이다. 2009년에 “군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종합보고서”가 나오기도 했다.
2025년에 《파괴된 청춘》이라는 책이 나온다. 숱한 사내가, 아니 돈없고 이름없고 힘없는 사내가 겪고 치르며 아파야 하던 멍을 다룬 책이다. 책겉에는 ‘강제징집이라는 국가폭력에 대한 최초고발’이라는 이름이 붙는다. 그렇지만 어쩐지 쓸쓸하다. 이미 피눈물로 애쓴 사람들이 일군 책이 여럿 있는걸. 굳이 ‘첫목소리’라는 이름을 붙여야 할까? 무엇보다도 ‘운동권 대학생’만 이슬로 떠나야 하지 않았는데, 그저 수수하게 살던 숱한 젊은이가 이슬이 되어야 했는데, 이슬이 되지 않았어도 어마어마하게 두들겨맞고 시달리고 들볶이고 추레질(성폭력)로 다쳤는데, 너무 ‘운동권 대학생’한테만 눈길을 맞춘 듯싶다.
그들(운동권 대학생)도 몸바쳤을 테지만, 그들이 아닌 ‘우리(수수한 순이와 돌이)’가 있다. ‘훈련병 가혹행위 여중대장 의문사’가 2024년에 벌어졌는데, 이런 일을 짚거나 따질 수 있을까? ‘여중대장’이 아닌 ‘남중대장’과 ‘남소대장’과 ‘남하사관’과 ‘남장교’ 들이 저지르는 끔찍한 짓은 아직도 고스란하다. 우리는 어제와 오늘과 앞날을 나란히 놓고서 목소리를 낼 수 있을까? 언제쯤 온목소리를 낼 수 있을까?
ㅍㄹㄴ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을 쓴다. 《풀꽃나무 들숲노래 동시 따라쓰기》,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