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살림말 / 숲노래 책넋
가난한 책읽기 . 있을 때
있을 때에 잘하라고들 하는데, 있을 때에는 늘 그저 스스로 살아낸다고 느낀다. ‘잘하려’고 하니까 오히려 어깨에 힘이 들어가서 엇나가거나 틀리거나 잘못하기 일쑤라고 느낀다. 봄에 봄을 잘 느껴야 하지는 않아. 올해 맞는 봄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오늘 이 하루를 노래하면 넉넉하다. 누가 얘기하기에 한 마디도 안 놓치려고 애쓸 까닭이 없다. 다 놓치거나 흘려도 된다. 함께 있는 마음을 느끼면서 기쁘게 어울리기에 느긋하다.
“있을 때 잘해.” 같은 말은 으레 짐이고 버겁고 떨리고 고단하다. “있으니까 기쁘고 반갑고 고마워.” 같은 마음이면 된다고 본다. ‘잘하려’고 하지 말자. 잘 읽거나 잘 쓰거나 잘 듣거나 잘 먹거나 잘 쉬거나 잘 자거나 잘 놀거나 잘 사거나 잘 말하거나 잘 글쓰거나 잘 일하거나 잘 살림하거나 잘 걷거나 잘 달리거나 잘 보거나 잘 보거나 잘 익히려고 힘쓰지 말자. “너랑 함께 있는 나”를 차분히 돌아보면서 바람 한 줄기를 마시고 내쉬면 된다.
거의 마흔 살이 되어서야 “사랑해.”라는 말소리를 나즈막이 혀에 얹을 수 있었다. 얼추 마흔 해를 수줍고 쑥스러운 마음으로 살았다. 아이들은 스스럼없이 “사랑해.”라는 말소리를 구슬이 구르듯 노래하더라. 놀랍고 대단하고 조금씩 기운을 내보았다.
풀한테 먼저 “사랑해.” 하고 속삭인다. 나무한테 넌지시 “사랑해.” 하고 읊는다. 돌과 모래와 흙한테, 바람과 비와 해한테, 별과 밤과 새한테, 개구리와 뱀과 두꺼비한테, 노린재와 나비와 모기한테, 싱싱칸과 두바퀴와 비누한테, 그릇과 수저와 고무신한테, 옷과 집과 쌀한테, 나와 너와 우리한테 가만히 “사랑해.” 하고 들려준다.
하루 한 마디씩 천천히 이야기한다. 오늘부터 새로 말을 한다. 말로 내놓기 창피하면 글로 적는다. 글로 온벌(100)쯤 적고서 말로 한벌(1) 이른다. 이르는 소리가 차츰 익숙하면 이제 이름으로 피어난다.
나는 ‘잘하는’ 사람이 아닌 줄 똑똑히 아니까 걱정스럽지 않다. 나는 말더듬이라는 몸으로 태어났으니 종 더듬거나 많이 더듬을 수 있다. 때로는 한 마디조차 안 더듬고서 한나절을 말했다면, 잠자리에 눕는 밤에 빙그레 웃는다. “와. 내가 오늘은 솔솔 부는 바람처럼 말을 했어.”라든지 “이야. 내가 오늘은 여름비마냥 시원시원 말을 했네.” 하고 스스로 북돋운다.
더듬고 꼬이고 버벅인 날은 어느 말씨를 더듬고 꼬고 버벅였는지 되새기며 끝없이 혼잣말을 하며 두바퀴를 달리고 빨래를 하고 밥을 하고 일을 한다.
나는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나를 ‘사랑하’는 길 하나만 바라본다. 오로지 이 하나이다. 미끄러지든 넘어지든 부딪히든 히히 하하 호호 웃다 보면, 꽃이 자고 별이 돋고 밤새가 울고 풀벌레가 다독인다. 2025.9.8.
ㅍㄹㄴ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을 쓴다. 《풀꽃나무 들숲노래 동시 따라쓰기》,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