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살림말 / 숲노래 책넋
가난한 책읽기 . 전주하루
순천에서 기차를 탈 적에도, 전주에서 기차를 내릴 적에도 사람물결이다. 전주 시내버스를 타려고 걷는데 시내버스나루도 사람물결이다. 택시나루도 엄청 밀린다. 전주마실을 하는 분이 많은 줄은 알지만 대단하다. 다만 서울에 대면 썩 많지는 않다. 아침저녁 서울은 그야말로 죽음터 같다.
나는 어느 곳에서든 책집을 바라본다. 전주라면 마땅히 책집마실부터 할 노릇이다. 늦은아침은 늦은아침책을 살피고 들추고 새기고 읽는다. 책집에 들자 벼락비가 시원스레 들이붓는다. 빗소리를 끼고서 책빛을 헤아린다. 책집 골마루에 앉아서 서서 쪼그려서 거닐면서 책시렁을 둘러본다.
한낮은 한낮책을 돌아보고 짚고 넘기고 읽는다. 이러고서 가볍게 노래수다(시쓰기교실)를 꾸린다. 오늘 이 고장에 번지는 가을비를 생각하며 노래를 여미고서, 삶말(삶을 담은 말·속담) 한 가지를 스스로 뽑아서 다음 노래를 써본다. 부산으로 가져가는 낫을 꺼내어 보여주고서 “낫과 ㄱ”을 볼는지, “낫과 벼베기”를 볼는지 곱씹는다.
어느새 두 시간이 흐른다. 자리를 마무른다. 책집 골마루와 책시렁을 더 둘러보면 책을 더 집어서 헤아리다가 더 살 텐데, 다음에 새로 마실하자고 생각한다. 이만큼 누린 하루를 기뻐할 적에 새마실을 그리지. 더더 자꾸자꾸 누리려 하면 등짐이 찢어진다. 오늘은 여기까지 고르자.
전주버스나루로 옮긴다. 시내버스 일꾼은 아지매이고, 1990년대 대중노래가 라디오에서 나오자 콧노래로 따라부른다. 전주는 버스아지매가 콧노래를 즐기는구나. 콧노래아지매한테 노래책(동시집) 한 자락을 드리고 싶다고 느끼지만 오지랖 부리지 말자.
부산 가는 시외버스를 기다리는 곳에 인천 가는 시외버스를 기다리는 할배가 셋 둘러앉아서 꽤 시끄럽다. 왜 이렇게 떠벌떠벌 왁자지껄일까 하고 흘깃하고는, 등짐에서 책을 꺼내어 읽는다. 갑자기 펑 소리가 난다. 떠벌이 할배 가운데 한 분이 맞이칸 바닥에 술을 쏟는다. 이미 술집에서 거나하게 마신 듯싶다. 전주에서 비싼술을 사서 집으로 가려는 길이지 싶은데, 콸콸콸 쏟아지며 술냄새가 번진다. 세 할배 가운데 한 사람이 뒷간에 가서 밀걸레를 챙긴다. 바닥을 닦는다. 그래도 치우는 손은 있구나.
요즘 시외버스는 불을 다 끄기만 한다. 자리마다 불을 못 켠다. 곧 겨울이기에 일찍 해가 지니, 작은불을 챙겨야겠다. 어스름이 앉으면 시외버스에서 책읽기를 못 누리고, 글쓰기도 못 즐긴다. 요즘 시외버스는 불도 못 켜지만 미닫이를 짙게 덮어서 매우 어둡다. 버스길은 바깥구경조차 안 하면서 잠드는 곳으로 여기는 듯하다.
그리 졸립지 않지만 눈을 감고서 고요히 꿈을 그려 본다. 부릉부릉 달리는 길이 아닌, 훨훨 구름을 가르고 별 사이를 지나는 새길이라고 그려 본다. 이 시외버스를 함께 탄 모든 손님도, 전주에서 놀러다니거나 일하는 모든 이웃도, 부산에서 살림하거나 고단한 모든 이웃도, 고흥에서 별바라기에 풀벌레노래를 즐기는 우리집 세 사람도, 나란히 파란하늘을 빛씨앗으로 품는 오늘 하루를 고이 마무르며 앞길을 밝게 열기를 바라는 꿈씨앗을 추스른다.
함께 살아가는 길이다. 숲으로 노래하는 삶이다. 파랗게 쉬며 짓는 오늘이다. 세 시간쯤 흐르자 부산 노포나루에 닿는다. 뒷간에서 손낯을 씻는다. 전철을 갈아탄다. 아까 읽다 만 책을 마저 읽는다. 하루글도 조금 여민다. 마을책집 〈책과 아이들〉에 닿는다. 이곳 길손채에 깃들어 짐을 내려놓는다. 땀으로 흥건한 옷을 빨래하고 몸을 씻는다. 이제 등허리를 펴고 누워서 곯아떨어진다. 2025.9.6.
ㅍㄹㄴ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을 쓴다. 《풀꽃나무 들숲노래 동시 따라쓰기》,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