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책숲마실 . 마을책집 이야기


비구름 사이로 (2024.10.19.)

― 부산 〈밤산책방〉



  책을 제대로 읽자면, ‘다른 것’이 아닌 ‘사랑’이라는 길 하나면 넉넉한데, 그만 또다시 ‘다른 것’에 매이면서 스스로 흐트러지고 어지럽게 벗어나는구나 싶습니다. 내가 나를 나로서 나답게 보면, ‘나’하고 ‘너(남)’는 그저 “선 자리가 다를 뿐, 같은 숨결인 사람이면서 사랑”인 줄 알아차려요. 우리가 읽고 쓸 글이란, ‘다른 것(짐·몫·자리·벼슬·돈·이름)’이 아니라 언제나 ‘사랑’을 씨앗으로 심어서 손수 가꾸는 즐거운 빛줄기일 노릇이라고 봅니다.


  다 다른 목소리를 낼 적에 등을 돌리는 사람이라면, 그분들 스스로 귀를 닫는다는 뜻이며, 사랑을 등지는 굴레요, 겉모습과 옷차림에 얽매이는 수렁입니다. 속빛을 들여다보지 않기에 사랑이 안 피어나고, 속을 안 가꾸니 겉만 멀끔합니다.


  비구름이 꾸물거리는 한가을 저물녘에 부산 광안바다 둘레에 있는 〈밤산책방〉으로 마실합니다. 이곳은 책집지기가 없이 누구나 스스럼없이 드나들면서 다리를 쉬며 책을 살피다가 장만하는 너른책집입니다. 밤산지기님 말씀으로는 골목이건 바닷가이건 멧자락 둘레를 거닐다가 다리를 쉬며 책빛을 머금을 자리는 얼핏 많은 듯싶어도 그다지 안 많다고 합니다. 책집이란 책으로 쉬며 숨을 돌리는 집입니다.


  바깥은 비바람이 한창이고, 책집은 고즈넉합니다. 바깥은 곱게 차려입고 마실하는 사람으로 물결치고, 책집은 차분합니다. 우리는 몸을 돌보려고 천을 옷으로 지어서 두르기도 하지만, 겉모습이 돋보이기를 바라는 뜻으로 이쁘게 차려입기도 합니다. 우리는 마음을 가꾸려고 책을 읽고 글을 쓰기도 하지만, 남이 높이 사거나 잘 봐주어서 잘 팔리기를 빌며 책을 내거나 글을 쓰기도 합니다.


  이따금 《플란다스의 개》에 나오는 ‘네로’가 아로아와 아로아 아버지한테 들려준 말을 떠올립니다. 네로는 붓과 종이와 물감을 살 돈이 없습니다. 지난날 우리나라 논밭지기는 붓과 먹과 종이와 벼루를 살 돈이 없을 뿐 아니라, ‘흙지기(농자)’는 ‘나리(양반)’가 아니라서 글을 넘보거나 배울 수 없었습니다. 네로는 “가난한 주제에 그림 따위에 멋을 부리려 한다”는 꾸지람을 내내 듣지만, 아로아 아버지는 네로가 숯으로만 담은 아로아 그림을 보더니 깜짝 놀라서 큰돈을 쥐어주려 했고, 네로는 ‘돈 받으려’고 그리지 않았다고, 온사랑을 담아서 그렸을 뿐이라면서, 비싼종이에 담은 그림을 그냥 내밀었습니다.


  다 다른 삶을 다 다른 목소리로 담으려면, 나부터 스스럼없이 마음을 틔울 노릇입니다. 여름에 하늘이 활짝 열려 열매가 맺듯, 가을에는 이제 뭇볕이 저물어 가듯, 철빛을 틔우고 철눈을 열며 꿈으로 나아갑니다.


ㅍㄹㄴ


《우주 여행자를 위한 한국살이 가이드북》(희석, 발코니, 2023.7.21.첫/2024.7.17.4벌)

《처음 엄마 사전》(김민채, 취미는독서, 2024.9.16.)

《깃털, 떠난 고양이에게 쓰는 편지》(클로드 앙스가리/배지선 옮김, 책공장더불어, 2015.7.23.)

#Plumelettreaunchatdisparu #ClaudeAnsgari (2001년)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을 쓴다. 《풀꽃나무 들숲노래 동시 따라쓰기》,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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