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살림말 / 숲노래 책넋

2025.7.20. “혼자 했다”는 마음



  이른바 ‘종편’이라고 하는, ㅈㅈㄷ(조중동)이 꾸리는 곳 가운데 하나인 ‘채널A’라고 있다. 이곳에서 여러 해째 〈티처스〉라는 풀그림을 내보낸다. 밑동은 ‘성적을 부탁해!’이고, ‘일타강사 여러 사람’이 ‘수학·영어 점수’를 높이는 길을 잡아 주는 듯하지만, 정작 이 풀그림을 들여다보면, 아이들 ‘입시점수 잡아주기’는 거의 핑계나 허울 같고, 1시간 10분에 걸친 줄거리는 거의 모두 ‘아이랑 이야기하기’이다.


  우리집 아이들은 초등학교를 하루조차 나가지 않았고, 열여덟 살과 열다섯 살에 이르도록 시골집에서 조용히 함께 지내면서 같이 배우고 나누는 살림길을 걸어간다. 그런데 이런 두 아이하고 꼬박꼬박 〈티처스〉를 함께 지켜본다. 왜 그러한가 하면, ‘한집안을 이루는 아이어른’이 서로 어떤 사이로 지내면서 서로 어울리고 스스로 길을 찾는 나날을 지을 노릇인가 하는 대목을 생각하는 즐거운 밑거름으로 삼을 만하거든.


  지난 2025년 7월 13일에는 ‘아이를 의사로 만들려고 용쓰는 아버지’ 이야기가 나왔다. 고작 열다섯(중2)인 아이는 ‘10년치 생활계획표’에 따라서 ‘하루하루 타임라인을 끊는 굴레’를 꽤나 오래 이었더라. 지난 2015년에 나온 프랑스 만화영화 〈어린 왕자〉에 나오는 아이하고 똑같다. ‘의사 되기’만 바라보며 ‘10년치 생활계획표’를 짜준 아버지는 아버지로서 여러모로 대단하기는 하되, 이런 틀대로 아이가 푸른날을 보낸다면, 푸른날에 떠올릴 삶은 하나도 없다.


  오늘날 한국·일본 적잖은 어린이와 푸름이는 ‘오늘’이라는 ‘삶’이 없이 ‘대학교’만 바라보는 굴레에 밀려가는 물결이다. 일본은 한국만큼 밀려가지는 않는다고 느낀다만, 아이들 삶에 ‘놀이’하고 ‘노래’가 송두리째 빠졌다. 더욱이 푸른날 가운데 열일곱∼열아홉 살에는 어떤 놀이도 노래도 곁에 두면 안 된다고 여기기까지 한다.


  놀이와 노래는 누구나 스스로 찾아서 짓는 삶이다. 게임이나 레크리에이션이나 대중가요나 락이나 여러 ‘음반’은 ‘놀이·노래’가 아니다. 스스로 지어서 누려야 놀이에, 스스로 지어서 불러야 노래이다. 그런데 오늘날 숱한 아이들은 ‘놀이·노래’가 송두리째 없다. 둘레에 다른 어른이나 또래가 없이 호젓하게 놀고 노래할 틈이 없더라.


  다만, 아이들이 ‘놀이·노래’를 누리는 바탕이 꼭 있어야 한다. 아이들은 어버이가 집안을 사랑으로 돌보고 가꾸는 곳에서 ‘놀이·노래’를 스스로 지어서 누린다. 어린날뿐 아니라 푸른날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니까 오늘날 어린이하고 푸름이는 ‘놀이·노래’를 까맣게 잊고서 ‘대학입시 수험공부’에 얽매이더라도, 집에서 밥하고 빨래하고 치우는 어버이가 있어야 한다. 엄마아빠가 밥이며 옷이며 집이며 다 갖추어서 베풀어 주는 터전이기에 ‘놀이·노래’이건 ‘대학입시 수험공부’이건 할 수 있다.


  요즈음 온나라(한국) 어린이·푸름이를 돌아보면, 손수 밥을 지을 줄 아는 아이를 거의 못 본다. 전기밥솥으로도 못 짓기 일쑤이다. 설거지를 할 줄 안다든지, 빨래나 걸레질이나 비질을 아는 아이도 그야말로 드물다. 시골에서 나고자란 아이들조차 나락이며 나락꽃을 모르고, 모내기를 언제 하는 지도 모르고, 낫과 호미가 무언지 모르고, 숱한 아이들이 길바닥에 그냥 쓰레기를 버리고, 시골버스에서 그냥 손전화를 시끄럽게 켜서 떠들고 그렇다. 아니, 아이들은 엄마아빠가 태우러 오는 쇳덩이(자가용)에 몸을 실으면 그만이다.


  아이어른이라는 사이는 그냥 만나는 둘일 수 없다. 둘이 서로 꿈으로 그려서 비로소 만나고 한집안을 이룬다. ‘나’를 보면 ‘아이’가 보이고, ‘아이’를 보면 ‘나’를 알 수 있다. 둘은 늘 함께 흐른다. 그러니까, 아이가 스스로 길찾기를 할 수 있는 바탕이라면, 집안일을 맡아서 하는 어버이가 꼭 있어야 한다. 집에서 든든히 지키고 살피고 돌보는 어버이라는 어른이 있는 줄 알기에, 아이들은 느긋이 바깥누리에서 스스로 나아가고 싶은 길을 헤아릴 수 있다.


  우리가 어버이요 어른이라면, 아이를 북돋울(응원) 일이 딱히 없다고 느낀다. 어버이요 어른이기에, 아이 곁에서 늘 새롭고 즐거운 ‘스승’이다. 스승이라는 사람은 그저 스스로 하고 몸소 보이는 자리일 뿐, 이래라저래라 시키지 않는 몫이다. 어버이는 가끔 아이한테 잔소리를 할 수 있되, 늘 ‘곁스승’으로서 온삶으로 온길을 보여주게 마련이다.


  스스로 해내는 또다른 빛이기를 바라기에 아이를 낳아서 돌본다. 언제나 이뿐이라고 느낀다. 그런데 아이가 스스로 해내기까지 보금자리에서 온갖 살림살이를 일구고 지은 어버이가 있게 마련이다. 또한, 우리가 사람으로서 살아가자면, 사람 곁에 들숲메바다와 해바람비와 풀꽃나무가 나란히 있다. 누구나 ‘혼자·스스로’ 하되, 언제나 ‘같이·함께’ 하기에 다 다르게 빛나는 삶이자 살림이다.


  “혼자 했다”는 마음인 아이들이 꽤나 많더라. 그런데 이 아이들이 ㅅㄱㅇ이건 ‘in 서울’이건 어느 곳에 붙는다고 할 적에 “혼자 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 아이들이 대학입시에 목을 매달 적에 누가 밥을 해줬는가? 누가 빨래를 해줬는가? 누가 아이들 터전을 쓸고닦고 정갈하게 치웠는가? 누가 아이들을 집과 배움터 사이로 실어날라 주었는가? 그리고 날마다 숨을 쉬는데, ‘숨’이란 무엇인가?


  혼자 해내거나 혼자서 이루는 일은 아예 없다. 우리가 글을 쓸 적조차, 훈민정음을 만든 임금이 있었고, 훈민정음을 가다듬어서 한글로 바꾼 주시경 님이 있었고, 이 한글을 지킨 수수한 사람들이 있었다. 우리 마음을 담는 말인데, ‘우리말’은 ‘서울 표준말’이 아닌, 먼먼 옛날부터 손수 밥옷집을 지으면서 아이를 돌본 수수한 시골사람이 지은 ‘사투리’가 밑동이다. 매듭은 우리 손으로 짓되, 우리가 혼자 매듭을 짓기까지 곁에서 함께 잇고 흐른 숱한 숨결을 바라볼 노릇이라고 느낀다. 우리는 함께 걸어가면서 빛나고, 같이 나아가면서 즐겁고, 나란히 이야기하면서 새롭다. 함께 노래한다. 같이 논다. 나란히 춤춘다.


ㅍㄹㄴ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을 쓴다.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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