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살림말 2024.4.20.


믿고 거르는 번역가 : 나한테는 “믿고 거르는 번역가”가 대단히 많다. 낱말책을 쓰는 사람은 ‘한글책’은 웬만하면 거의 몽땅 읽어내려고 해야 하는데, ‘국내창작’뿐 아니라 ‘외국번역’도 나란히 살필 노릇이다. 1992년부터 두 갈래 한글책을 읽어 오며 느낀 바를 갈무리할 수 있다. “믿고 거르는 번역가”란, “이분은 또 엉터리로 옮겼구나 하고 처음부터 ‘믿는(?)’다는 뜻”인데, 네 가지를 들어 보겠다. 


㉠ ‘글쓴이 글빛’이 없고 ‘옮긴이 글버릇’만 있다 : 글을 쓴 사람은 모두 다른데, 다 다른 사람이 쓴 다 다른 글이 아니라, 어느 옮긴이가 적은 글결만 춤추니, 이런 글은 ‘옮김(번역)’이라고 말하기에 참 창피하다. 


㉡ ‘우리말’을 모른다 : 어찌 된 일인지, 우리나라에서 ‘번역가·통역가’라는 이름으로 돈을 버는 분들치고, 우리말을 꾸준히 새롭게 갈고닦거나 익히거나 배우는 분을 찾아보기 어렵다. 우리말을 모르는 깜냥으로 어떻게 ‘이웃글을 우리글로’ 옮기는가? 수수께끼이다. 이웃말을 아무리 잘 할 줄 알더라도 우리말을 엉터리로 쓴다면, 한 마디조차 제대로 못 옮기거나 틀리게 옮기거나 잘못 옮기기 일쑤이다. 


㉢ 이웃나라·우리나라 살림(문화)을 모른다 : ‘옮기다’란, 저곳에 있는 길과 삶을 이곳에 오도록 잇는 일이다. ‘오’도록 이으려면 ‘온(모든)마음’으로 마주하면서 받아들일 줄 알 노릇이다. 이웃나라 사람들이 어떻게 하루를 누리고 살면서 살림길을 이었는지 헤아리면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어떻게 하루를 짓고 사랑하면서 살림길을 이었는지 함께 짚을 적에 비로소 ‘옮길(번역·통역)’ 수 있다. 이웃나라 살림(문화)을 익히려는 품을 들이듯, 우리나라 살림을 익히려는 품을 깊고 넓게 들여야 한다. 두 나라 살림을 모르고서 어떻게 말을 옮기나? 두 나라 살림은 모르는 채 ‘이웃말’만 좀 할 줄 안대서 덥석 옮김님 노릇으로 밥벌이를 하는 분이 지나치게 넘친다.


㉣ 삶·살림(일상생활)을 모른다 : ‘글’은 ‘말’을 담은 그림이다. ‘말’은 ‘마음’을 담은 소리이다. ‘마음’은 삶을 새긴 자국이다. ‘삶’은 우리가 스스로 누리거나 보내거나 지내거나 맞이한 하루이다. 모든 말은 삶을 나타내게 마련이니, “말을 알고 싶다”는 뜻이라면, “마음에 담는 삶부터 알고 싶다”는 길을 걸을 노릇이요, 삶과 살림과 사랑과 사람과 숲부터 배우고 익히고 삭여서 알아보고서야, 비로소 말과 글을 다루는 일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 ‘옮김님(번역가)’은 ‘살림짓기’하고 너무 동떨어진 채 ‘바쁘게 일(번역작업)에 매달’리더라. 아기한테 천기저귀를 대면서 돌보고 먹여살린 적이 없다면 ‘기저귀’나 ‘아기’라는 낱말을 제대로 풀이하지 못 한다. 죽어라 글만 들여다보는 눈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가?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립니다.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우리말꽃》,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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