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책숲마실
네가 들어온다면 (2023.3.10.)
― 서울 〈햇살속으로〉
아침 일찍 청주에서 서울로 달려갑니다. 이제 나라에서는 버스에 탈 적에만 입가리개를 하면 된다고 밝히지만, 길이나 버스나루에서 입가리개를 하는 사람은 꽤 있습니다. 한동안 이 나라는 ‘밥집·찻집에 들어갈 적에는 입을 가리’되 ‘마시고 먹을 적에만 가리개를 풀라’고 시켰고, 사람들은 고분고분했습니다. 눈가림(조삼모사)은 옛이야기가 아닙니다. 잔나비한테 아침에 능금 넉 알 저녁에 석 알을 주든, 아침에 능금 한 알 저녁에 여섯 알을 주든 매한가지입니다.
‘나’를 잊고 ‘나라’에 목매달수록 넋이 사라집니다. ‘나라(정부)’는 ‘나(독립인)’를 바라지 않아요. 홀로서기를 하면서 홀가분히 살림을 짓는 사람은 스스로 삶·살림·사랑을 지으니, 나라가 시키는 일을 안 합니다. 홀로서기를 안 하거나 못 하기에 나라가 베푸는 일자리를 맞아들여서 고분고분 따를밖에 없습니다.
책이란 무엇일까 하고 돌아봅니다. 우리나라 책자취(출판역사)를 돌아보면 《용비어천가》를 비롯해 숱한 글바치는 ‘해바라기(임금 섬기기)’에 글힘을 쏟았어요. 남·나라가 시키는 대로 스스로 넋을 무너뜨린 이 나라 글바치입니다. 오늘날 숱한 책도 ‘나 스스로 하기’가 아닌 ‘남·나라가 시키는 대로 하면서 돈을 잘 벌고 이름을 드날리고 힘을 거머쥐기’라는 줄거리로 치우칩니다.
어제 청주에서 밤을 맞이하면서 “모든 책은 헌책이다”란 이름으로 노래(동시)를 지었습니다. 헌책이지 않은 책은 없고, 새책이지 않은 책은 없습니다. 숲이지 않은 책은 없고, 사랑이지 않은 책은 없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빛을 잊거나 잃는다면 헌책도 새책도 숲도 사랑도 아닌, ‘돈·이름·힘’에 얽매인 끄나풀입니다.
〈햇살속으로〉로 찾아갑니다. 길음역 가까이에서 여러 해째 책살림을 이으신다고 했는데, 오늘 알아보았습니다. 천천히 뿌리내리면서 든든히 퍼지는 책빛이 새삼스러운 마을책집입니다.
책집 골마루를 거닐면서 생각합니다. 말끔이(청소부)가 벼슬(장관·대통령·국회의원)도 맡고, 벼슬꾼이 말끔이를 맡으며, 아이 돌본 아줌마가 벼슬(시장·군수·도지사)을 하고, 벼슬꾼(시장·군수·도지사)이 아이를 돌보면서 조용히 일할 수 있다면, 이런 나라라면 아름다우리라 생각합니다.
우리가 스스로 손을 쓰면 언제나 스스로 짓고 가꾸어 누립니다. 우리가 스스로 손을 안 쓰면 언제나 남이 시키는 대로 길들어 넋이 나갑니다. 우리 손을 쓰면 살림꾼이라는 길을 가고, 우리 손을 안 쓰면 눈속임꾼(종교 지도자)이 꾀거나 홀리는 대로 길들면서 빛을 잃습니다. 햇살로, 별빛으로, 사랑으로 고스란히 녹아듭니다.
ㅅㄴㄹ
《커피집》(다이보 가쓰지·모리미츠 무네오/윤선해 옮김, 황소자리, 2019.6.25.)
《헌책 낙서 수집광》(윤성근, 이야기장수, 2023.2.8.)
《0원으로 사는 삶》(박정미, 들녘, 2022.10.28.)
《곁말, 내 곁에서 꽃으로 피는 우리말》(숲노래·최종규, 스토리닷, 2022.6.18.)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리는 사람.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선생님, 우리말이 뭐예요?》,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