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 표상의 지도 - 가족, 국가, 민주주의, 여성, 예술 다섯 가지 표상으로 보는 한국영화사
박유희 지음 / 책과함께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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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책읽기

인문책시렁 131


《한국영화 표상의 지도》

 박유희

 책과함께

 2019.10.27.



한국영화사에서는 아버지에게 역사적 책임을 물은 적이 없다. 식민지화와 함께 근대가 도래하며 전근대에 속한 아버지는 무능한 존재로 전락했다. (70쪽)


20세기 한국영화사에서 아버지는 부재할 수는 있어도 부정될 수는 없었다. 식민지의 못난 아비일지라도 딸은 몸을 팔아 그를 봉양해야 했고, 아들은 그를 축출할 수 없었다. (74쪽)


재판을 둘러싼 논리와 다각적인 역사 문제들이 ‘조선인 피해자 대 가해자 일본’이라는 이분법 구도 속에 묻히고 만다. 관부 재판을 도왔던 일본 시민단체의 항의 또한 이 영화가 법정 멜로드라마의 해묵은 틀로 역사적 사실을 다루는 과정에서 결락하고 왜곡할 수밖에 없었던 문제와 연관이 있을 것이다. (168∼169쪽)


4·19가 영화에서 재현된 것도 21세기 들어서다. 4·19라는 역사적 사건 자체를 극영화에서 재현한 경우가 20세기에는 없었다. 그러다가 2004년에 개봉한 영화 〈효자동 이발사〉에서 주인공의 인생에 주요한 계기가 되는 사건으로 4·19가 등장한다. (278쪽)


대개 영화를 직업적으로 보고 비판적으로 접근하는 전문가 집단은 관습적인 영화에 대해 박하게 평가하기 마련이다. 그에 비해 일반 관객은 영화 형식이 관습적이라고 하더라도 실화의 충격이나 그것에 대한 관심도, 혹은 개인의 취향에 따라 감동을 받으면 좋은 평가를 내릴 수 있다. (438∼439쪽)



  고등학교를 마치고 서른 살이 될 무렵까지는 한국영화가 아니고서는 볼 생각을 안 했지만, 서른 살이 지나고부터는 아예 한국영화를 끊습니다. 서울살이가 아닌 숲살이를 바라는 길이고, 아이를 돌보느라 책을 들출 쪽틈을 내기도 빠듯한데다가, 한국말사전이라는 책을 쓰다 보니 어느덧 한국영화는 따분하거나 틀에 박히거나 우물개구리로구나 싶었습니다. 어쩐지 한국영화는 줄거리나 이야기가 좁아 보여요. 다루는 길도 뻔해 보입니다. 사랑을 그리기보다는 사랑타령을 그리고, 숲을 그린 영화는 찾아보기 어렵고, 별바라기로 생각을 틔우는 영화는 좀처럼 못 만납니다.


  극장에 걸어서 사람을 모으고 돈을 벌려면 어쩔 길 없이 ‘연속극을 찍어야’ 할는지 모르겠고, ‘연속극이 되어야’ 팔릴 뿐 아니라 ‘한류’란 이름으로 이웃나라로도 퍼질는지 모르겠어요. 그러나 집에 텔레비전을 들이지 않을 뿐더러 연속극이라면 아예 쳐다보지 않는 사람으로서는 한국영화에 눈이 가기는 어렵습니다.


  이런 마음을 《한국영화 표상의 지도》(박유희, 책과함께, 2019)를 읽으면서도 새삼스레 되새깁니다. 500쪽 남짓으로 도톰한 이 책은 한국영화를 ‘가족·국가·민주주의·여성·예술’ 다섯 갈래로 나누어서 다룹니다. 그동안 한국에서 나온 영화는 크게 이 다섯 가지로 묶으면 거의 다 들어간다고 여길 만하기도 하겠구나 싶습니다.


  제가 영화를 찍는다고 한다면 이 책에서 다룬 다섯 갈래가 아닌 ‘숲·사람·사랑·살림·소리’라는 다섯 갈래에 들도록 찍고 싶습니다. ‘숲·사람·사랑·살림·소리’을 영화 한 자락에 모두어 낼 수도 있어요. 이를테면 〈말괄량이 삐삐〉에는 이 다섯 가지가 모두 나옵니다. 어린이부터 누릴 만한 삐삐 이야기에서 삐삐는 숲이라는 푸른빛도, 사람다이 사는 길도, 참다운 사랑이란 무엇인지도, 손수 짓는 살림도, 또 우리 곁에 흐드러지는 숱한 소리도 고루 보여줍니다. 〈찰리와 초콜릿 공장〉도 이 다섯 가지가 모두 흘러요. 만화영화 〈우주소년 아톰〉이라든지 〈이웃집 토토로〉도 이 다섯 가지가 함께 있겠지요. 일본영화 〈스윙걸즈〉나 〈워터보이즈〉도 이 다섯 가지를 잘 보여준다고 느낍니다. 한국영화라면 〈집으로〉나 〈천하장사 마돈나〉가 이러한 결을 어느 만큼 다룬다고 느껴요.


  곰곰이 보면 《한국영화 표상의 지도》는 영화평론보다 조금 더 어려운 글입니다. 영화평론도 ‘직업 평론가’들이 ‘영화를 삶자리에서 수수하게 즐기는 사람하고 동떨어진 채’ 온갖 잣대를 들이민다고 느끼는데요, ‘한국영화가 무엇을 그리는지’를 말할 적에 구태여 논문을 써야 할까 궁금하기도 합니다. 논문보다는 이야기로, 학문보다는 삶으로, 이론이나 지식보다는 사랑으로 바라보면서 풀어낼 적에 한국영화가 달라질 새길을 보여줄 만하지 않을까요.


  제가 영화를 찍는다고 하면, ‘숲·사람·사랑·살림·소리’를 바탕으로 ‘어린이·길·바다·별·새’라는 다섯 가지를 보태고 싶습니다. 이 열 가지를 아우르는 영화라면 기꺼이 볼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서, 이런 열 가지를 고이 품는 한국영화가 나오지 않으면, 저로서는 굳이 한국영화를 볼 마음이 터럭만큼도 없습니다.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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