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책숲마실
책이 있는 집은 길 (2020.3.10.)
― 서울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
서울 은평구 서오릉로 18
070.7698.8903.
http://www.2sangbook.com
여수문화방송에 가서 오랜만에 책이랑 헌책집 수다를 펴 보았습니다. 책수다야 으레 하지만 헌책집 수다를 해보기는 오랜만입니다. 1994년부터 모임을 꾸려 이웃님하고 헌책집마실을 다녔습니다. 고등학교를 다니던 때에는 혼자 헌책집마실을 했고, 고등학교를 마친 뒤에는 이름도 낯도 모르지만 책을 사랑하는 이웃님을 하나둘 새로 만나면서 우리가 아직 발을 디디지 않은 새로운 헌책집을 찾아나섰고, 자주 드나드는 헌책집을 새삼스레 돌아보았습니다. 요즈음처럼 마을책집(독립책방)이 곳곳에 태어나기 앞서는 ‘책사랑이’라면 으레 헌책집마실을 다녔어요. 생각해 봐요. ‘교보 부산지점’이나 ‘영풍 광주지점’으로 책마실을 다니지 않습니다. 교보나 영풍은 나라안 어디를 가도 다 똑같은 책차림이거든요. ‘알라딘 중고샵’도 나라안 어디를 가나 다 똑같습니다. 이와 달리 헌책집은 모든 곳이 달라요. 같은 서울에서 다 다른 헌책집일 뿐 아니라, 이 고장 저 고을 헌책집은 크기고 책차림도 책값도 모조리 달라요.
새책집에는 새로 나온 책만, 더구나 베스트셀러하고 유명작가 책이 한복판을 크게 차지합니다. 너무도 흔하고 판에 박힌 책이 가득합니다. 이와 달리 헌책집은 똑같은 책을 여럿 꽂거나 갖추는 일이 드물어요. 헌책집 책꽂이는 어느 고장 어느 헌책집을 가도 ‘다 다른 책을 빼곡하게 건사하는 차림새’입니다. 이러다 보니 ‘굳이 헌책집까지 책을 보러 갈 까닭이 있나?’ 하고 여기던 분이 차츰차츰 헌책집마실에 빠졌습니다. 한국에서 나온 요즈음 책을 비롯해서 해묵은 책에다가 나라밖 갖가지 책에다가 비매품까지 고루고루 품는 책숲이 헌책집이거든요.
여수문화방송은 언덕받이에 있더군요. 여수버스나루부터 방송국까지 천천히 걸었습니다. 방송국으로 오르는 멧길에 온갖 멧새랑 철새가 노래하며 반겨요. 멧길을 오르다가 슬쩍 멈춥니다. “너희가 나를 반기는구나. 너희는 이곳이 아름다운 보금자리로구나.” 저녁나절에 방송을 다 찍고서 길손집에서 묵습니다. 이튿날 아침에 고속버스를 탑니다. 서울로 싱싱 달립니다. 전철을 갈아타고 갈아타다가 드디어 바깥으로 나옵니다. 비가 오기에 비를 맞으며 새삼스레 천천히 걷습니다. 어디쯤이 서울 은평 한켠 헌책집이 있을 만한 데일까 하고 어림하면서 책집 간판을 찾습니다. 아하, 먼발치부터 간판을 알아봅니다. 비를 맞으며 사진기를 꺼내어 목에 겁니다. 먼발치 모습부터 한 칸씩 찍으면서 걷습니다. 길 건너에서 책집 모습을 담고서 건널목을 지나 책집을 오릅니다. 2층에 있으니 올라가지요. 어제 방송국도 오르고, 오늘 헌책집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으로도 오릅니다.
퍽 오래 땅밑에서 책집살림을 꾸리셨다는데, 2층에 깃든 책집은 더없이 아늑하면서 따사로운 숨결이 흐르네 싶습니다. 길가에서 문을 열고 들어설 때까지는 자동차 소리로 시끄러울 뿐 아니라, 뒤숭숭한 돌림앓이 바람으로 싸늘했다면, 디딤돌을 하나하나 밟고 들어서는 헌책집은 ‘이곳은 다른 나라야’ 하는 마음소리를 들려줍니다. 그래요, 책집 이름처럼 ‘다른 나라인 헌책집’입니다. 흔히 알거나 뻔히 알 만한 나라가 아닌 헌책집입니다. 흔한 책이나 뻔한 책이 아니라, 새롭게 읽을 어제책을 품는 헌책집입니다. 어제책을 오늘 되읽으면서 모레를 그립니다. 어제책하고 오늘책이 한자리에서 만나기에 모레책이 태어납니다. 어제가 있기에 오늘이 싱그러우며, 이 오늘을 사랑하기에 모레가 빛납니다.
어제 방송국에서 거듭 묻더든요. “왜 굳이 헌책집을 다니시나요?” 빙그레 웃어요. “글게요, 그랑께 말입니더. 무시기 헌책집을 새앙쥐 풀방구리 드나들듯 돌아댕겼을깝쇼?”
책을, 책이 되어 준 숲으로 새롭게 마주하면서 이 삶을 사랑하는 마음을 배워 기쁘게 나누는 보금자리를 두 손으로 신나게 짓는 길을 어제한테서 엿보고 오늘한테서 들으며 모레한테서 노래로 맞아들이는 재미가 아름다우니 헌책집마실을 그토록 질경이처럼 단단히 붙잡고서 하루를 살아내었지 싶습니다.
헌책집지기가 틀어놓은 노래를 들으며 《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야구》(다카하시 겐이치로/박혜성 옮김, 웅진출판, 1995)를 들춥니다. 야구를 다룬 책일까요, 그냥그냥 소설일까요. 《이브의 일곱 딸들》(브라이언 사이키스/전성수 옮김, 따님, 2002)을 보며 찌릿합니다. 따님이란 이름인 출판사를 참말 오래도록 사랑해 왔습니다만, 이 알뜰한 곳에서 펴낸 책을 이웃님한테 두루 알리려고 그렇게 이 따님 출판사 책을 다룬 느낌글을 끝없이 썼지만, 따님에서 펴낸 책은 조용히 새책집에서 자취를 감추었고, 이제 더는 새책을 내놓지 못합니다. 따님이란 곳을 눈여겨볼 마음을 앞으로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한국이란 나라에서 너무 일찍 태어난 출판사 따님일까요. 땅 + 딸 + 님인 따님이란 출판사에서 선보인 숱한 책은, 스물에서 서른이란 고개로 접어드는 길목에서 언제나 이슬떨이가 되어 주었습니다.
헌책집에서만 만난 책벗이 있습니다. 이제 저는 서울에 안 살기에 헌책집 책벗을 다시 만나기 어렵습니다만, 나라밖 책을 이 나라에 옮기는 일을 하는 책벗은 어느 날 헌책집에서 같이 책을 보다가 “여보쇼, 꽁지머리 양반, 범양사란 출판사 아나? 참 재미난 출판사야. 여기는 처음부터 출판사가 아니고 …… 그러니까, 자네도 이 책을 봐 봐.” 재미난 출판사 범양사는 이 나라 숱한 출판사에서 ‘안 건드린‘ 책을 놀랍고도 야무지게 펴내는 몫을 맡았습니다. 장사로 벌어들인 돈을 책이라는 살림길로 나누는 길을 갔던 범양사 책 가운데 하나인 《다윈 이후》(스티븐 제이 굴드/홍동선·홍욱희 옮김, 범양사, 1988)를 살살 어루만집니다.
헌책집지기랑 도란도란 말을 섞다가, 사진을 찍다가, 살짝 일어나서 춤을 추듯 골마루를 거닐다가 《線을 넘어서》(루이제 린저/홍경호 옮김, 범우사, 1975)를 봅니다. 1975년에 ‘루이제 린저 전집’이 열 자락으로 나온 적 있습니다. 중학교를 다니던 무렵부터 린저 글을 곁에 두었기에 서울 홍제동에 있던 헌책집에서 처음 ‘루이제 린저 전집’을 만났을 적에 기꺼이 장만했습니다. 얼마 뒤에 서울 노고산동에 있는 헌책집에서 ‘루이제 린저 전집’을 다시 만나서, 린저 사랑이 책벗한테 이 책꾸러미를 알려주었지요. 나중에 서울 노량진 헌책집에서도, 용산 헌책집에서도 린저 전집을 자꾸자꾸 만났습니다. 뭐, 찾으려고 하면 쉽게 만나는구나 하고 여겼어요. 이러다가 2000년 여름이 저물 즈음, 한창 잘 일하던 출판사에서 사장하고 멱살잡이를 하고서 사표를 냈습니다. 영업부 막내일꾼이 그 출판사 어떤 잘못을 풀어내는 일을 했는데요, 그 출판사 사장은 왜 시키지도 않은 ‘좋은 일’을 하느냐고, 사장이며 부장들이 우습게 보이느냐고 막말을 퍼붓고 멱살을 잡았어요. 영업부 막내일꾼인 저는 그 출판사 그 잘못 때문에 석 달 동안 애먼 손가락질을 여러 책집이며 어린이도서연구회이며 도서관이며 학교에서 고스란히 들으며 견뎌야 했는데요, 사장이나 부장들은 ‘시간이 가면 알아서 풀린다’고만 하고는 팔짱을 꼈어요. 석 달을 손가락질받이로 견디다가 도무지 안 되겠어서 어린이도서연구회 이사이며 대표이며 한자리에 부르고서 ‘출판사 사장하고 부장들 허락 없이 출판사 내부비밀’을 밝혔고, 내부비밀을 들은 분들은 ‘그런 속내가 있는 줄 몰랐다’고, 그런 계약관계와 뒷이야기를 진작 알려주었으면 얼마나 좋았겠느냐고, 굳이 숨기거나 감출 만한 일도 아니었다며, 그 고단했던 손가락질받이를 그날 몽땅 풀어없앴습니다.
아무튼 막내일꾼 멱살을 잡던 사장이 가여워 보여서 “여봄쇼 사장 나으리, 멱살은 그리 잡는 게 아님수다. 멱살이랑 요로코롬 잡으셔야징?” 하면서 제대로 된 멱살잡이를 선보였고, 그 출판사 사장님은 “야, 야, 말로 하자. 아니 최종규 님 우리, 말로 하지요?” 하고 어느새 막말씨가 고운말씨로, 높임말씨로 바뀌었습니다. ‘아, 달삯받이 일꾼 노릇은 이제 더 할 수 없겠지?’ 하고 속으로 생각합니다. 저로서는 제몸지키기(정당방위)로 맞멱살을 가뿐히 잡으면서 하루를 마감했고, 밤샘으로 제 책상을 치웠고, 한 해 동안 그 출판사에서 일하며 여러 헌책집에서 사들여 쌓아 놓던 책꾸러미도 바로 질끈질끈 쌌습니다. 날이 밝기를 기다려 짐차를 불러 차곡차곡 실어 그 출판사를 떠났습니다. 바람처럼. 그런데 그렇게 떠나기만 해서는 끝이 아니더군요. 이제 실업자인 터라 벌이가 없이 집삯을 내야 하니 빈털터리로서는 여태 장만한 아름책을 팔아야 했어요. 저 아닌 다른 사람들이 값지게 여길 만한 책을 얼추 육천 자락쯤 헌책집에 팔고 또 팔고 자꾸 팔았습니다. 석 달 동안 책팔이로 겨우 입에 풀을 발랐어요. 그때에 제 손을 떠난 책한테 “걱정 마. 이다음에 다시 돈을 벌면 너희를 꼭 품을게.” 그때 떠나간 ‘루이제 린저 전집’은 스무 해가 훌쩍 넘도록 제 손에 돌아오지 못합니다. 그때 떠나보낸 다른 책 가운데 제 손으로 돌아온 책조차 한 가지가 없기도 합니다.
‘이상북’ 지기님은 마을 푸름이하고 어깨동무하는 일을 즐겁게 하신다고 합니다. 헌책집 이상북 건너켠에 은평씨앗학교가 있다더군요. 그곳 푸름이가 선보인 《2019 씨앗 발자국》(은평씨앗학교, 2019)을 넘깁니다. 2019년 4월부터 10월까지 한 해 마실길을 갈무리했다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인디언 영혼의 노래》(어니스트 톰슨 시튼·줄리아 M.시튼/정영서 옮김, 책과삶, 2013)를 만납니다. 여태 ‘어니스트 톰슨 시튼’이란 이름만 알았는데 ‘줄리아 시튼’이란 이름이 있었군요. 어니스트 시튼이 숨을 거둔 뒤로 퍽 오래도록 그분 삶글을 널리 알렸다고 하는 줄리아 시튼 님이에요. 어니스트랑 줄리아. 줄리아하고 어니스트. 이제는 두 분 모두 하늘사람이 되어 하늘밭에서 하늘노래를 부르는 나날을 지으시겠지요.
늑대란 짐승은 조금도 사납빼기가 아니고 나쁘거나 무시무시한 짐승도 아닌 줄 뒤늦게 깨닫고는 사냥총을 버린 시튼 아저씨. 총잡이 시튼은 ‘사람 아닌 짐승’은 사람보다 한참 낮은 녀석으로 알았다면, 총을 버린 시튼은 ‘사람은 이제 사람 구실을 잃었다. 사람은 숲으로 돌아가서 숲한테서 사랑을 배워야 한다’고 노래했다고 느낍니다. 우리도 이 나라에서 총을 버릴 줄 안다면, 다시 말해 전쟁무기하고 군부대를 모조리 버릴 줄 안다면, 빨리빨리 달리자는 경제성장을 끝장낼 줄 안다면, 더 많이 팔아서 더 많이 벌자는 길은 멈출 줄 안다면, 서울 한복판에 숲을 품고, 숲 한켠에 조그맣게 마을새책집이며 마을헌책집을 가꿀 줄 안다면, 아픈 사람도 앓는 사람도 힘든 사람도 슬픈 사람도 고단한 사람도 괴로운 사람도 눈물젖는 사람도 바람처럼 사라지리라 생각합니다. 책이 있는 집은 따사로운 보금자리 같은 사랑길입니다. 그래서 책집입니다. 그래서 책길이고, 책숲이며, 책터이자, 책사랑입니다.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한국말사전을 쓰고 “사전 짓는 책숲(사전 짓는 서재도서관)”을 꾸린다. 1992년부터 이 길을 걸었고, 쓴 책으로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읽는 우리말 사전 1·2·3》, 《우리말 동시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시골에서 책 읽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우리말 바로쓰기》 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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