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살림말


이슬아 파본 : 인쇄소나 제본소에서 잘못 다루는 바람에 다친 책을 ‘파본’이라 한다. 인쇄소나 제본소에서는 말끔히 다루었지만, 책을 엮으며 미처 살피지 못해 잘못 찍힌 바람에 새책집에 넣을 수 없다고 여겨 ‘일부러 책을 찢거나 잘라서 종이쓰레기터(폐지처리장)에 보내려고 하는 책’도 파본이라 한다. 인쇄소·제본소를 잘 거친 책을 끈으로 묶다가 끈 자국이 남아도 파본이 된다. 갓 태어난 책을 창고로 실어나르다가 그만 잘못 만져서 접히거나 구겨지거나 긁혀도 파본이 된다. 새책집에 손님으로 찾아온 이가 책을 함부로 놀려서 손때를 묻히거나 구김살을 내어도 자칫 파본이 될 수 있다. 일부러 칼을 대어 한두 쪽이나 여러 쪽을 잘라내어도 파본이 된다. 이들 파본은 안타깝지만 새책으로 팔 수 없다. 아니, ‘보는책’으로는 내놓을 수 있되, ‘파는책’으로는 다루지 않을 일이다. 파본이 가는 길은 둘이다. 첫째, 종이쓰레기터이다. 둘째, 헌책집이다. 앞으로 새종이가 되어 태어나기를 바라며 종이쓰레기터에 보내는데, 구김살이 지거나 접히거나 살짝 찢어진 책쯤이라면 헌책집에서 꽤 눅은 값으로 새로운 임자를 만나도록 할 수 있다. 새것으로 사고팔 수는 없어도, 책은 줄거리를 읽는 쓰임새이기에 손때나 얼룩이 졌더라도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대목이 있다. 그런데 헌책집에 파본을 내놓아, 이 책을 눅은 값으로 이웃이 만나기를 바라더라도 ‘제작부수 5퍼센트 밑’으로 해야겠지. 종이가 되어 준 숲이 버려지는 일이 아깝다고 여길 수 있을 텐데, 그렇게 치면 길에 굴러다니는 모든 광고종이나 알림종이도 똑같다. 우리 손을 거쳐서 더 아깝다고 여긴다면, 이런 책은 종이쓰레기터에 보내지 말고, 조용히 이웃에 0원으로 선물을 줄 노릇이다. 그리고 파본을 둘레에 선물로 준다면, 선물로 준다는 말을 하지 않고, 그 파본을 밖에 알리지 않는다는 다짐을 받고서 줄 노릇이겠지. 그리고 이때에도 ‘선물하는 파본은 제작부수 5퍼센트 밑’이어야 한다. 세금하고도 얽히는 일이니까.


글쓰는 이슬아 님이 이녁 어느 책을 ‘실수본’이란 이름을 붙여서 조금 에누리한 값으로 책집에 넣어서 팔았다고 한다. ‘아직 법을 몰라서 파본을 그렇게 책집에 넣어서 팔았다’고 할 테지. 큰가게에서는 ‘보조개 능금(흉이나 멍이 지거나 긁힌 능금. 이른바 파과)’을 팔기도 하니, 어느 모로 보면 ‘보조개 책’을 팔려고 나선 셈이기도 하다. 법으로 본다면, 글쓴이가 책에 이름을 적는 일도 ‘책을 망가뜨리는 짓’으로 친다. 법으로 치면 ‘글쓴이 서명본도 똑같이 파본’이 된다. 글쓴이가 책에 이름을 적어 넣으려면 손님이 먼저 그 책을 사야 한다. 그 책을 아직 사지 않았는데 미리 글쓴이 이름을 적어 넣으면 ‘책 파손 행위’로 여긴다.


그렇다면 왜 ‘파본’ 제도가 있을까? 왜 조금이라도 다친 책을 새책집에서 함부로 못 다루도록 할까? 글쓴이 이름을 적은 책이라든지, 제본·인쇄·편집에서 그만 잘못이 드러난 책(파본)을 ‘특별한정판(5퍼센트 밑)’으로 다룰 수도 있는 뜻은 무엇일까? 왜 숱한 출판사는 제본·인쇄·편집에서 아주 작은 티끌 하나가 드러나도 책을 바로 거두어서 모두 종이쓰레기터로 보낸 다음에 새로 찍어서 넣을까? 이 대목은 누가 낱낱이 알려줄 일은 아니다. 스스로 생각해 보고서 스스로 조용히 깨달아야 할 일이다. 나라 곳곳에 의젓하게 문을 여는 마을책집을 헤아리려는 마음이 있다면 ‘정본하고 실수본’을 ‘작은 마을책집 책시렁에 더 부피를 차지하도록 놓기’를 할 노릇이 아니라, ‘제대로 찍은 책 하나만 작게 놓아, 다른 책하고 어우러지도록 할’ 노릇이 아닐까. 숱한 다른 출판사가 아무것도 모르는 채 한 가지 판으로만 마을책집에 책을 넣을까. ‘우리도 특별한정판을 같이 놓고서 곱으로 책을 알리거나 팔고 싶어!’ 하고 나서면 책판이 어떻게 돌아갈까. 많이 팔린 책이라면서 겉그림이나 껍데기를 바꾸면서 ‘똑같은 책을 여러 판’으로 마을책집 책시렁을 채워 버리면, 그만큼 마을책집 책시렁에서 밀려나야 하는 책이 있다.


다시 말한다면, 몇 가지 책만 더 많이 팔아도 좋다고 여긴다면 ‘파본을 파본 아닌 실수본’이란 이름으로 슬쩍 눙쳐서 팔리라. 우리 책도 너희 책도 다같이 사랑받으면서 마을책집에 다 다른 책이 사이좋게 어우러지면서 마을책꽃이 피어나기를 바란다면, ‘파본이 생겼으면 조용히 종이쓰레기터로 보내고서 새로 찍든’지, 아니면 ‘5퍼센트를 남기고 종이쓰레기터로 보낸 뒤, 5퍼센트는 선물로 나눠 주려고 쓰거나 헌책집에 그냥 주든지 할 일’이다. 이 대목을 여태 몰랐으면, 글쓰기를 멈추고서 이 대목을 깊고 넓게 배우러 다녀야지. 법도 스스로 찾아보고 읽어서 새기고, 오랫동안 책일을 곧바르게 일구어 온 숱한 출판사 일꾼한테 이야기를 여쭈어서 들을 노릇이리라.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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