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 1

쓸 수 없다. 담임이 뻔히 들여다보는데 일기에 그때 내 마음·뜻·생각·꿈·사랑·길을 한 줄도. 1987.12.31.


일기 2

중학교에 들어오니 드디어 일기 검사가 사라진다. 이제는 내 마음껏 일기를 쓸 수 있다. 그런데 중학교 1학년부터 새벽 여섯 시부터 밤 열 시까지 입시지옥 공부를 시킨다며 학교에 붙잡아 둔다. 막상 집에 돌아오면 연필 쥘 힘이 없다. 어쩌면 핑계일 테지만, 힘이 빠져서 일기를 못 쓴다. 게다가 기운을 내 보려 해도 날마다 똑같은 일만 벌어지는 이 따분한 학교에서 무엇을 일기에 쓸 수 있을까. 1988.4.21.


일기 3

자전거를 몰며 집집마다 돌면서 새벽을 여는 신문배달이란 얼마나 멋진 일인가. 도시에서 이보다 멋진 일거리가 또 있을까? 대학교 강의에서는 아무것도 배울 수 없다는 대목을 배운다면, 새벽 신문배달은 날마다 새롭게 배우는 것투성이라 할 수 있다. 날마다 새로우니 날마다 하루 이야기가 온몸에 새겨진다. 일기란 일기장에만 쓰지 않는구나. 비가 와서 옴팡 젖으면서 신문을 돌린 날, 장마가 져서 물바다가 된 골목에서 헤엄치며 신문을 안 적시고 돌린 날, 봄에서 여름으로 바뀐 바람맛을 먹으면서 돌린 날, 호젓한 마을길하고 다른 석탄공장 곁길을 지나가면서 동이 트려는 하늘을 바라보는 날, 아무리 불볕이라 해도 새벽바람은 이렇게 시원하면서 좋구나 하고 느끼는 날, 모두 새롭다. 1995.6.7.


일기 4

이오덕 어른이 쓴 일기가 능금상자 하나 가득 있더라. 어른이 읽은 책을 모두 하나씩 끄집어내어 책 사이에 엽서나 편지나 쪽글이 있나 하고 살피고, 이 책에 쌓인 먼지를 닦아 주다가 드디어 일기꾸러미를 찾아냈다. 면장갑을 끼고 어른 일기장을 만져야 하지만, 오늘 딱 하루만 맨손으로 일기장을 만져 보자. 아무리 고되거나 지치거나 아프거나 힘들어도 꾹꾹 눌러쓴 일기장이 놀랍다. 역사가 다른 데에 있지 않구나. 스스로 겪고 듣고 보고 하고 마주한 삶을 고스란히 옮겨적은 마흔 해치 일기장이 그대로 한국현대사로구나. 군사독재 서슬이 시퍼렇던 무렵 멧골학교 교사로서 적은 이 일기장이. 2005.2.10.


일기 5

아이가 곁에 왔다. 아기가 나한테 오면서 내 삶은 확 바뀐다. 곁님이 나한테 온 뒤로도 내 삶은 바뀌었는데, 아기는 나더러 예전처럼 살지 말라고 말없이 말한다. 온하루를 아기한테 바치느라 육아일기를 끄적일 겨를이 없는데, 어쩌다가 육아일기를 끄적일 적에 늘 느낀다. 육아일기란, 아이를 돌본 일을 적는 글이 아니다. 육아일기라고 한다면, 오늘 이때까지 어른도 어버이도 아닌, 몸만 어정쩡하게 다 자랐다고 하는 사람이 비로소 어른이나 어버이가 되어 가는 길을 새롭게 배운 엄청난 사랑을 눈물하고 웃음으로 아로새기는 글이로구나 싶다. 아이한테서 배운 사랑을 적는 글을 육아일기라는 이름으로 쓴다. 2008.9.10.


일기 6

사진일기라고 하는 글을 읽다가 너무 어이없어서 책을 집어던졌다. 어쩜 이렇게 겉멋만 반지르르한 엉터리 이야기를 사진일기라는 이름을 붙여서 책으로 냈을까? 이토록 사진도 모르고 일기도 모르면서 무슨 사진책이랍시고 내놓을까? 한참 식식거리다가 옥상마당으로 나와서 구름바라기를 한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그 사람은 그 사람이 아는 대로만 사진일기를 쓰지 않았을까? 그 사람 삶은 남한테 잘 보이려는 꾸미는 몸짓이었으니 그런 글밖에 달리 못 쓰지 않는가? 남을 탓할 일이 없다. 사진일기다운 사진일기가 없다면, 그렇게 느낀 내가 쓰면 될 노릇이다. 그래, 남 말은 하지 말자. 내 말을 하자. 내가 사진일기를 쓰면 되지. 바로 오늘부터. 2009.3.2.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삶과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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