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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 괴물이 된 이십대의 자화상 ㅣ 지금+여기 3
오찬호 지음 / 개마고원 / 2013년 12월
평점 :
읽으면서 굉장히 화가 많이 나고 짜증이 났던 책이다. 나의 과민반응일수도 있다. 혹은 나의 편견과 고정관념때문일 수도 있다. 내 생각의 논리적 모순이나 오류때문일 수도 있다. 저는 그런 제 자신의 오류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기 때문에, 이렇게 리뷰를 쓰게 되었고 이 책을 읽으신 분의 고견을 빌리고 싶습니다.
일단 이 책에 모든 내용을 부정하고 비판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몇몇 부분이 심히 거슬렸고, 명백히 저자가 논리적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생각하기에 그런 점들을 꼬집어 비판하고자 한다.
먼저 이 책의 요지를 이야기하자면 이렇다. 저자는 자기계발을 강요하는 사회때문에 20대들이 자기계발의 논리에 매몰되어서 사회적 약자 혹은 차별받는 사람에 대한 공감능력을 잃어버리고 자기계발의 괴물이 되어가고 있다고 해석한다. 그래서 저자는 이러한 문제와 사태를 이 책을 통해서 밝히고 있으며, 이러한 자기계발의 늪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이런 자기계발의 오류와 신화를 해체해서 '자기계발 논리의 폐해'를 줄이고자 하는 것이다. 자기계발의 신화를 해체하면서 저자가 내세우는 근거는 자기계발에 앞서서 이미 사회구조적 불평등이 존재하기 때문에 노력만 한다고되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큰 틀에 대해서는 비판하고 싶지 않다. 누구나 현재 사회의 구조적 모순과 불평등을 인식하고 있으며, 자기계발을 권하는 사회에 대한 반감을 가지고 있다. 참고 견디며 자기계발한다고 개개인의 현실과 사회적 현실이 그다지 나아지진 않는다는 것을 느끼고 있다. 그리고 저자의 주장에도 수긍이 간다. 이런 능력위주, 성과위주, 학력위주의 자기계발의 논리에 매몰되면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타적인 시각을 가질 수도 있다. 가난한 사람은 '능력이 부족해서' 또는 '노력이 부족해서' 라고 합리화시켜서 그들의 요구와 주장을 부당하다고 생각하고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내가 비판하고 싶은 것은 세부적인 부분이고 크게 세가지이다.
먼저 첫째, 저자의 '자기계발서'와 '자기계발'에 대한 비판이다. 이제는 나도 이런 비판이 지겹다. 너무도 흔하다. 저자는 개인을 자기계발로 모는 사회와 이런 사회를 대변하는 일부 혹은 대부분의 자기계발서와 자기계발만을 비판했어야 하는데, 선을 넘어서 구별없이 모든 자기계발서와 자기계발을 비판하고 있다. 심각한 오류다. 저자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서의 자기계발은 긍정한다. 밑에 저자의 글을 보자.
자기계발이 그 자체로, 수단이 아닌 목적인 게 더 바람직하다는데 무슨 설명이 필요할까. 외부의 기준에다 자기 자신을 맞추는 게 아니라, 말 그대로 '자기'의 '계발'을 위해서라면 그것이 등산이면 어떻고 드럼 배우기면 어떤가. 자기계발이 무슨 100미터 달리기가 아닌 바에야 당연히 승자도 패자도 없는 일이다. 애초에 무슨 실패니 성공이니 하는 목적성을 가진 게 아니니, 여기에 실패한 사람들을 겨냥한 '위로'라는 가식적인 포장도 필요 없다. 자기 자신을 위해 운동을 한다면, 그 과정에서 흘리는 땀이 그 정도에 상관없이 성장의 의미를 가질 텐데 왜 '남만큼' '남보다 더' 라는 비교가 등장하는가. 비교가 필요하다면 그건 '자기'계발이 아니라 그저 '타인의 만족'을 위한 계발일 뿐이다.
그러나 우리 이십대의 현실에선 '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목적을 위해 '해야 할 것 몇 가지'를 하는 게 자기계발이니 어쩌랴. -p57
이런 공정한 시각이 꾸준히 유지되었어야 하는데, 아쉽게도 자기계발에 대한 긍정적 평가는 이 때 뿐이고 책 전역에 거쳐서 자기계발과 자기계발서에 대한 비판이 이어진다. 물론 저자가 비판하고 있는 것은 취업위주의 '자기계발', 자신을 위한 자기계발이 아닌 '타인의 만족'을 위한 '자기계발'이다. 하지만 저자는 이런 자기계발을 전부처럼 묘사하여 끝없이 비판을 해대고 있다. 나는 이런 부분이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다. 결국 저자는 이러한 편견 사로잡혀 오류를 범하게 된다. (그 편견의 오류들은 세번째 부분에서 따로 비판할 것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모든 자기계발과 자기계발서가 나쁜 것은 결코 아니다. 자기계발로 모는 사회는 비판받아야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자기계발이 비판받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나쁜 자기계발서는 비판받아야한다. 하지만 자기계발서가 비판받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비유하자면, 우리는 칼이 흉기로 쓰였다고 해서 '칼' 자체를 비판하지는 않는다. 또는 돈을 만능으로 여기는 물질주의와 배금주의는 비판해도, '돈' 자체를 비판하지는 않는다. 일본이 과거 우리 민족을 억압했다고 해서 현재의 '일본'과 '일본인'을 비판해선 안된다. 물론 그러한 과오를 인정하지 않는 '일본인'은 비난해야겠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모든 '일본인'을 비난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많은 사람들이 자기계발과 자기계발서에는 이것을 혼동하는 것 같다. 왜 그러한 인식이 널리 퍼지고 쉽게 오류에 빠지는지 예상이 가지만, 아무튼 오류는 오류다. 부분을 가지고 전체로 확대해석 해서는 안된다. 성급한 일반화의 논리에 빠져서는 안된다. '자기계발' 그 자체로는 긍정도 부정도 해서는 안된다. 만약 누군가가 살인을 하기 위해서 열심히 '자기계발' 한다면 그건은 부정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가 남을 돕고 살리는 '자기계발'을 한다면 이것은 긍정적인 자기계발일 것이다.
다음으로, 학교서열화를 받아들이는 대학생들의 생각을 비판할 때, 잘못된 논증을 하고 있다. 저자의 논증은 이러한 것이다. 학교서열화를 받아들이는 대학생들에게 구체적인 학교서열화의 증거를 요구한다. 예를들면 연세대 경영학과와 지방대 경영학과 학생들간의 능력차이의 증거를 요구하는 것이다. 저자는 학생들이 구체적인 증거를 대지 못하고, 태도나 수능점수를 지적하는 것에 대해 비판한다. 일단 이 저자도 학교서열화를 인정한다. 사실 이것을 부정할 사람이 누가 있겠느냐만은. 아무튼 저자는 자신도 학교서열화를 인정하고 있으면서 대학생들의 생각을 비판하기 위해서 대학생들에게 구체적인 학교서열화의 증거를 요구하는 것이다. 그리고는 대학생들이 태도나 수능점수에 대한 것을 증거로 들면 이를 고정관념과 편견일뿐 구체적인 증거가 아니라고 일축하는 것이다. 화가난다! 이는 아주 잘못되고 비열한 논증이다. 비유하자면 이런 식이다. "신이 없다는 걸 증명해봐. 구체적인 증거를 들어서. 못하지? 너는 틀렸어. 너가 틀렸기 때문에 신은 있어. (근데 사실 나도 신은 없다고 생각해)" 이런 식이다.
저자는 학생들에게 구체적인 증거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스스로 학교서열화에 따른 학생들의 구체적인 역량차이가 없다는 것의 증거를 보여서 학생들에게 제시했어야 했다. 이는 저자가 강사이고, 그리고 보다 전문가이기때문에 그에게 요구되는 의무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하고 불쌍한 대학생들에게 구체적인 증거를 요구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의료사고가 나면 전문가인 의사가 자신의 의료행위에 잘못이 없음을 증명해야한다. 피해자 혹은 피해자 가족에게 의사의 의료행위에 잘못이 있었다는 증명을 요구해서는 안된다. 혹은 급발진사고가 나면 자동차를 만든 기업에서 차에 이상이 없음을 증명해야 하는 것이지, 소비자나 사고당사자가 차에 이상이 있음을 증명해야 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안타깝게도 이것이 지켜지고 있지는 않지만. 미국에서는 기업에서 차에 이상이 없음을 증명해야 한다.) 전문가가 자신의 주장을 근거를 대서 증명해야지, 비전문가에게 증명을 요구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그리고 심지어 저자 자신도 학교서열화를 인정하고 있으면서 말이다. 물론 저자가 이를 통해 밝히고 싶었던 것은, 대학생들의 편견과 고정관념이고 수능점수에 대한 과도한 의미부여였지만. 아무튼 의도도 불순하고 저자에게 반박 못하는 대학생이 안타까워서 화가 났다.
세번째는 첫번째와 맥을 같이하는데, 저자는 자신의 편견을 보지 못하고 있다. 자신만의 논리에 사로잡혀있다보니, 엉뚱한 비난의 화살을 여기저기에 쏘아대고 있다. 그것을 살펴보자.
<아프니까 청춘이다> 중 '아직 재테크 시작하지 마라' 챕터에는 한 개그맨의 일화가 나온다. 신인 시절부터 재테크에 관심을 가진 사람치고 성공한 개그맨이 없다는 것이 요지이다. 이유인즉, 적금 같은 것에 강방관념을 가지면 '푼돈 모으기'라는 작은 목표에만 매몰되어 개그맨이 미래를 내다보고 투자해야 할 창조적 아이디어를 고민할 시간에 행사 같은 것만 찾아다니게 된다는 것이다. 그만큼 개그맨으로서의 성장이 늦어진다는 교훈을 말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김난도 교수는 "신인 개그맨 때는 종잣돈보다 연습과 아이디어가 더 중요하다" 면서 "'코 묻은 돈' 아껴서 재테크 시작하기보다는, 차라리 다 써버려라" 라고 조언한다.
그런데 김난도 교수는 그 '푼돈' 때문에 피자를 배달하다, 대형마트 지하실에서 일하다 목숨을 잃은 이들에게는 무슨 말을 할까? 그리고 학자금 대출 때문에 이미 대학생활 때부터 빚에 찌들어 사는 수많은 청춘들에게 과연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다면, 몇 해쯤은 수입 한 푼 없더라도 견뎌보겠다는 각오"를 하라고 말할 수 있을까? -p196
저자는 김난도 교수의 글을 인용하면서 어처구니 없는 비판을 하고 있다. 명백히 저자(김난도)의 의도를 부정적으로 인용하고 곡해하고 있다. 위의 개그맨의 일화에서 김난도 교수는 현재보다 미래가치에 더 충실하는 요지의 조언을 하고 있다. 미래가치때문에 생계를 포기하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생계를 위해 그리고 빚을 갚기위해 일하지 말하고 하는 것이 아니다. 멋대로 곡해해서 비난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나아가, 혜민스님의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까지 비판하고 있다.
이때 마치 그런 세상을 치유라도 하겠다는 듯 등장한 게 바로 이른바 '힐링 담론' 이다. 대표적 힐링서의 하나로 이야기되는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은 "결국, 뭐든 세상 탓만 할 일이 아닙니다" "상대가 나를 칠 때 지혜로운 이는 굽힐 줄 압니다" "고개를 숙이면 부딪치는 법이 없다" "누가 나를 욕하면 나를 낮추십시오" 하고 속삭인다. '피로사회' 라는 말도 있듯이 이 사회는 구조적으로 개인의 에너지를 소모시키고 있는데, 그런 사회구조에 대한 불만을 '멈추면' 비로소 자신이 왜 부족한지를 알게 되고, 그러면 이 경쟁 사회에서 사랑받는 비법이 '비로소 보인다'고 말하고 싶은 걸까? 이런 '힐링'은 사회적 압박으로 인한 고통을 치유해주는 것이 아니라, 그걸 고통으로 받아들이지 않게끔 한다. 당연히 사회구조는 늘 그대로다. 결국 이런 힐링서들에 "가장 열광하는 이들은 기업의 오너와 임원들" 아니겠는가. -p188
그렇다면 달라이 라마의 <용서>는 사회의 구조적 문제와 모순, 불평등을 용서하라는 의미의 책인가?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의 <상실수업>은 사회적 상실감에 분노하고 저항해야 하는 개인을 상실을 수용하게끔 종용하는 책인가? 아니 왜 힐링서까지 걸고 넘어지는 것인가? 내가 보기에 저자는 명백히 비판을 위한 비판을, 비난을 위한 비난을 하고 있다. 힐링이 그렇게 나쁜 것인가? 우리는 몸이 아픈 사람을 치료해준다. 마음이 아픈 사람은 위로해주고 공감해주고 보둠어 준다. 물론, 저자가 무엇을 비판하려고 하는지는 알겠지만 그 방법이 잘못되어있고 편협하고 편견에 사로잡혀있다는 것이다. 힐링을 권하는 사회, 그러니깐 '병주고 약주는 사회'를 비판하려고 저자는 의도했을 것이다. 그러면 그런 사회만 비판하면 될 것이지, 애꿎은 혜민스님까지 비판하고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짜증나는 것은 책의 결론이었다. 책을 덮고 싶었지만, 그래도 저자의 결론을 듣고 싶어 끝까지 참고 보았다. 도대체가 어떤 결론과 처방을 내려 줄 것인지 궁금했다. 취직을 위한 자기계발을 권하는 사회에서 개인은 어떻해야 하는가? 자기계발해야하는가? 아니면 하지 말아야하는가? 어떻게 하란 말인가? 나는 이걸 묻고 싶었던 것이다. 결론은 이랬다. 자기계발 자체의 오류를 검증하고 자기계발의 신화를 해체해서 '자기계발 논리의 폐해'를 줄이자는 것이다. 자기계발 자체의 오류는 이런 것이다. 자기계발은 '능력주의'에 대한 신뢰와 동의를 기반으로 한다. 하지만 '능력주의'가 인정되기 위해서는 '기회의 균등', '과정의 공정', '결과의 정의' 이 세가지가 지켜져야 되는데 그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미 날 때부터 부모의 소득에 의해서 이 세가지가 불평등하다는 것이다. 동의한다. 오늘날 부익부 빈익빈이 심화되고 있는 원인이다. 부모의 소득과 재산이 자녀의 교육에 영향을 끼치고 이것이 되물림된다. 저자는 이러한 것을 인식해서 자기계발의 오류를 깨닫는 것을 해결의 첫걸음으로 제시하고 있다.
아... 화가난다. 짜증이 난다. 겨우 이것이었던가. 물론 나는 이러한 것들을 이미 알고 있어서 전혀 도움이 안 되었지만, 이러한 내용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일견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자신이 좋은 대학에 못 간 원인이 부모의 소득과 재산에 의해 결정되는 교육의 질과 양의 차이때문이라는 내용이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마치 이런 상황이 연상되었다.
문제: 가장 친한친구가 열심히 노력해도 취업이 안되서 고생하고 힘들어하고 있다. 내가 취해야할 올바른 태도는?
1. 친구의 아픔에 공감하며 함께 아파하고 위로한다.
2. 친구의 기분전환을 위해서 맛있는 것도 사주고 바람도 쐬러 나간다.
3. 친구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고 적절한 조언을 해준다.
4. 친구에게 너가 왜 이렇게 고생을 하고 있는지 구체적으로 알려준다. 그것이 해결의 첫걸음이다라는 말과 함께.
물론 주관적 감정이 많이 담긴 문제이다. 답은 1, 2, 3번이다. 4번을 택했다가는 친구와 더이상 친구가 아니게 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저자가 꼭 해결책과 대안을 제시할 필요가 있는 것은 아니다. 취업에 시달리는 20대에게 현실을 보다 더 잘 인식시켜주는 것도 일견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결국 돌아오는 질문은 울먹이는 20대의 "그래서 나더러 어쩌라고?" 일 것이다.
우리 사회가 기회, 과정이 불평등하고 그 불평등의 결과인 학교서열화가 만연하다는 것은 알겠다. 아니, 이것을 모르는 20대가 과연 있을까? 그것을 알기 때문에 열심히 자기계발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저자는 이런 20대에게 똑같은 말을 되풀이한다. "너희가 자기계발을 하고 있는 이유는 머냐하면 바로..." 내가 취업때문에 자기계발을 하고 있는 20대라면 정말 분통이 터졌을 것 같다. 아니 그래서 나더러 어쩌라고? <면접의 기술> 같은 자기계발서 읽지 말라고? <자기소개서 잘 쓰는 법> 같은 자기계발서 읽지 말고 자기계발하지 말라고? 현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라고? 우리 사회가 구조적 불평등을 내포하고 있고 능력과 성과위주로 치닫고 있는 현실을 인식하라고? 인식하면 머가 달라지나? 인식하면 자기계발 안해도 되나?
저자가 책에서 밝히고 있듯이 저자가 대학생들의 공감을 얻지 못한 이유를 알 것 같다. 저자는 대학생들을 위로하지도 못하고 있고, 힐링하지도 못하고 있으며, 해결책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더 자기계발로 몰고 있다. 저자는 그것을 아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