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맛

 


  책 한 권을 읽더라도 책맛을 깊이 느끼면 삶맛 또한 알뜰히 느낍니다. 책 한 줄을 읽더라도 책맛을 널리 느끼면 삶맛 또한 살가이 느낍니다. 책 백 권이나 책 천 권을 읽더라도 책맛을 고루 느끼면 삶맛 또한 예쁘게 느낍니다.


  책 한 권을 읽기는 읽되, 책맛이 아닌 ‘책 줄거리’나 ‘책 지식’으로 기울어진다면, 책맛을 조금도 느끼지 못하고 맙니다. 책 한 줄을 슥 훑기는 하되, 책맛이 아닌 ‘책 정보’만 얼추 살피면, 정작 책맛을 하나도 못 느끼고 맙니다.


  책은 많이 읽어도 되고 적게 읽어도 됩니다. 책은 날마다 읽어도 되고 날마다 안 읽어도 됩니다. 글은 일찍 깨쳐도 되나 글을 영 모르는 채 살아도 됩니다.


  글을 몰라 부끄러울 사람은 없습니다. 책을 안 읽어 부끄러울 사람은 없습니다. 글이나 책을 모른대서 부끄러워야 한다면, 대학교를 안 다녔거나 나라밖으로 배우러 다녀오지 않은 사람 또한 부끄러워야 합니다. 고등학교만 마쳤거나 초등학교만 마친 사람도 부끄러워야 합니다. 또한, 정규직 아닌 비정규직일 때에도 부끄러워야 하고, 장애인이나 따돌림받는 사람이라 할 때에도 부끄러워야 하겠지요.


  사람은 책을 읽기 앞서 사람이어야 합니다. 스스로 사람이지 않고서 책을 먼저 손에 쥔다면 아름다운 꿈을 누리지 못합니다. 언제나 가장 먼저 스스로 사람인 줄 느껴야 합니다. 사람다움을 갖춘 뒤에라야 비로소 책을 읽거나 사랑을 나누거나 꿈을 꿀 수 있습니다. 사람다움을 갖추지 않았다면 책 만 권을 읽더라도 사랑이나 꿈이나 웃음을 누리지 못합니다.


  책맛을 느끼고 싶다면 스스로 삶을 누려야 합니다. 삶을 즐겁게 누리고, 삶을 예쁘게 누리며, 삶을 살가이 누릴 때에, 시나브로 내 넋이 싱그러이 피어납니다. 내 넋이 싱그러이 피어날 때에, 천천히 책 한 권 읽을 수 있고, 천천히 책 한 권 읽으면서 내 삶길을 곰곰이 되짚습니다.


  책을 읽고 싶으면 읽되, 맨 먼저 사람이 될 노릇입니다. 종이책을 손에 쥐고프면 손에 쥐되, 밭에 고구마싹을 묻어 고구마를 키운 다음 즐겁게 고구마를 캐 볼 노릇입니다. 씨감자를 칼로 썰어 재를 묻힌 다음 내 작은 텃밭에 심어 봐요. 씨감자에서 맺힌 알을 즐겁게 거두어 봐요. 콩 한 알 심어서 몇 알을 거둘 수 있는지 살펴봐요. 볍씨 몇 알 건사해서 집에서 벼를 심어 봐요. 내 아름다운 날을 누리고, 내 사랑스러운 넋을 누리며, 내 밝은 꿈을 누려요. (4345.11.16.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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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돌보는 넋 (도서관일기 2012.11.13.)
 ― 전라남도 고흥군 도화면 동백마을, ‘서재도서관 함께살기’

 


  한 사람이 읽을 수 있는 종이책은 몇 천 권이라느니 이만 권쯤 된다느니 하는 말이 있으나, 한 사람이 종이책을 몇 권 읽을 수 있는지 어느 누구도 모릅니다. 스스로 읽은 책을 숫자로 세는 사람이 있을는지 모르나, 숫자로 세는 뜻이 부질없을 만큼 책을 읽거나 안 읽는 사람이 많아요. 따지고 보면 그래요. 내 은행계좌에 돈이 얼마나 있느냐는 대수롭지 않아요. 1억이 있든 1억 100원이 있든 9999만 원이 있든 다르지 않습니다. 100만 원이 있든 99만 원이 있든 101만 원이 있든 다르지 않아요. 곧, 내 은행계좌에 1만 원이 있거나 100만 원이 있거나 1억 원이 있거나 똑같은 셈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라 할 텐데, 책을 한 권 읽었거나 열 권 읽었거나 백 권 읽었거나 천 권 읽었거나 만 권 읽었거나 늘 같아요.


  돈을 더 많이 가졌대서 더 대단하거나 훌륭하거나 아름답거나 즐거운 삶이 되지 않습니다. 책을 더 많이 읽었대서 더 똑똑하거나 슬기롭거나 참답거나 착한 넋이 되지 않습니다.


  스스로 벌어들인 돈을 스스로 얼마나 아름다이 나누거나 쓸 줄 아느냐에 따라 내 돈이 빛이 나거나 흐리멍덩해집니다. 스스로 읽은 책을 스스로 얼마나 삶으로 녹여서 하루하루 누리거나 즐길 수 있느냐에 따라 내 책읽기가 빛이 나거나 흐리멍덩해져요.


  느즈막한 낮나절 가을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날씨에 나로섬에서 책손님이 찾아듭니다. 낮나절이라지만 하늘이 찌푸려 어둡습니다. 우리 서재도서관은 건물 반쪽만 덩그러니 빌렸기에 전기도 물도 쓸 수 없어, 이렇게 찌푸린 날에는 창가에 서도 책을 읽기 수월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도서관에 들어와 책시렁 사이를 누비면서 책마다 풍기는 ‘곰팡내’도 맡고, 곰팡내 사이사이 깃든 ‘책을 빚은 사람 넋’을 헤아리다 보면, 책으로 누리는 삶이란 무엇인가를 스스로 생각해 볼 수 있어요.


  ‘이 많은 책’이 아니에요. 이 책들 가운데 내 삶을 내 손으로 열도록 이끌 ‘아름다운 책 하나’ 만날 수 있으면 돼요. 곧, 도서관에는 책이 아주 많아야 하지 않습니다. 도서관에 굳이 10만 권 100만 권 1000만 권을 갖추어야 하지 않아요. 다문 열 권이나 백 권을 갖춘 조그마한 도서관이라 하더라도, 이 도서관을 찾아온 사람들 마음을 살찌우거나 북돋울 만한 ‘이야기가 있을’ 때에 비로소 도서관이라는 이름이 걸맞아요.


  으리으리하거나 번듯한 건물을 세워야 도서관이 되지 않아요. 사서자격증 가진 일꾼 여럿이 지켜야 도서관이 되지 않아요. 컴퓨터나 인터넷으로 책을 살펴보거나 찾아볼 수 있어야 도서관이 되지 않아요. 도서관이 되려면 오직 한 가지를 갖추어야 해요. 책에 깃든 넋을 책손 누구라도 한 가지씩 받아먹으면서 책손 스스로 삶을 살찌우는 길을 즐거이 열도록 도을 수 있어야 도서관이 될 수 있어요.


  그러니까, 책방이라 한다면, 새책방이든 헌책방이든 ‘책을 사서 읽을 책손’이 책 하나 장만하면서 스스로 삶길을 열도록 돕는 책을 갖춘 데가 ‘책방’이랄 수 있어요. 책을 돌보는 넋이란, 서재도서관을 열어 이웃들한테 이런 책 저런 책 마음껏 돌아보고 만지도록 하는 넋이란, 살가운 이야기 한 자락으로 서로 사랑을 일구는 징검다리가 되듯, 살가운 책 한 권으로 서로 꿈을 이루는 징검돌이 되고픈 빛 한 줄기에 있습니다. (ㅎㄲㅅㄱ)


* 도서관 지킴이 되기 : 우체국 012625-02-025891 최종규 *
* 도서관 지킴이 되어 주는 분들은 쪽글로 주소를 알려주셔요 (011.341.71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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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텔레비전 책읽기

 


  굳이 스스로 생각을 하지 않아도 모든 이야기가 술술 흐르기에, 멀거니 바라보기만 하면 됩니다. 드러누워서, 잠결에, 한손에 과자나 술잔을 들고서, 밥을 먹는 동안, 옷을 갈아입는 동안에도, 텔레비전은 혼자서 온갖 이야기를 끝없이 들려줍니다. 귀만 열면 됩니다.


  이리하여, 텔레비전을 보면 볼수록 사람들은 생각을 차츰 잊는데, 나중에는 아예 ‘스스로 삶을 생각하기’를 잃습니다. 텔레비전에서 모두 들려준다고 여겨, 텔레비전에 나오지 않는 이야기는 아예 모르거나 믿지 않아요. 텔레비전에 나오는 이야기만 알거나 믿어요. 텔레비전 바깥에서 흐르는 삶은 조금도 느끼지 못하고 들여다보지 못하며 생각하지 못합니다.


  텔레비전과 한몸이 되고 말아, 끝내 생각하는 힘이나 마음을 잊거나 잃은 사람이 되면, 책을 읽을 수 없겠지요. 어쩌다가 어떤 종이책 하나 손에 쥔다 하더라도, 생각주머니 없는 사람이 책을 손에 쥘 적에는 줄거리 훑기나 글자 살피기를 넘어서지 않아요. 책읽기란 ‘글쓴이 생각 읽기’인데, 글쓴이가 어떤 넋으로 책 하나를 온 슬기를 그러모아 엮었는가 하는 대목을 생각하거나 살피지 못해요.

  ‘글쓴이 생각 읽기’인 책읽기이기에, 책읽기를 하는 사람은 스스로 생각을 북돋우는 길을 천천히 찾습니다. 생각을 스스로 북돋우면서 내 삶을 스스로 살찌우는 길을 가만히 돌아봅니다. 그런데 ‘생각을 읽는 책’이 아닌 ‘생각을 잊도록 하는 텔레비전’으로 조금씩 기울어지면, ‘생각을 잊도록 하는 텔레비전’에 조금이라도 마음을 두면, 스스로 깊이 사랑하는 길하고 등을 지고, 스스로 넓게 꿈꾸는 자리하고 고개를 돌려요. 이제 ‘이야기를 엮는 사람’ 삶하고도 멀어집니다. 내 이웃과 동무가 엮는 이야기를 느끼지 못하고, 나 스스로 엮는 이야기를 알아채지 못해요.


  텔레비전이 사람살이를 망가뜨리듯, 학교교육이 사람살이를 망가뜨립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길을 밝히는 배움뜻이라 한다면 사람살이를 북돋우지만, 오늘날 한국 사회 학교교육은 아이들한테 ‘대학입시 지식조각’만 열두 해에 걸쳐 집어넣은 다음, 대학교 네 해 동안 ‘도시에서 회사원 되는 지식조각’을 새삼스레 집어넣어요. 곧, 지식조각만 머리에 그득 차는 바람에, ‘스스로 생각하며 일구는 삶’은 도무지 깨닫지 못하다가는 그만 ‘내 마음기둥’이나 ‘내 마음밭’이 무엇인가를 느끼지 못해요.


  생각이 죽는 사람은 마음이 죽고 사랑이 죽으며 꿈이 죽습니다. 생각이 죽는 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웃음이 죽고 기쁨이 죽으며 신(신나는 놀이)이 죽습니다. 남이 시키는 대로 구릅니다. 남이 말하는 대로 듣습니다. 남이 보여주는 대로 믿습니다. 여기에서 ‘남’이란 ‘텔레비전’이거나 ‘손윗사람’이거나 ‘권력자’입니다. 생각이 사는 사람은 ‘내’가 마음속에서 말하는 소리를 듣고, ‘내가’ 가슴속에서 노래하는 꿈을 듣습니다.


  여러모로 말썽거리가 많아 ‘ㅈㅈㄷ신문 없애기’라든지 ‘방송 뜯어고치기’를 소리높여 외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몇 가지 신문을 없애거나 방송을 뜯어고친다 하더라도 말썽거리는 사라지지 않아요. 가장 큰 말썽거리는 바로 내 마음이거든요. 내 마음이 텔레비전 앞에서 흔들리지 말아야 하고, 내 눈길이 신문글에 휘둘리지 말아야 해요. 내 마음은 내 삶이 베푸는 기운으로 살아야 해요. 내 눈길은 내 사랑이 보여주는 모습으로 빛나야 해요.


  이것을 없애거나 저것을 몰아내지 않아도 돼요. 나 스스로 새 사람이 되고, 나 스스로 아름다움을 찾으며, 나 스스로 삶을 즐거이 누리면 돼요. 텃밭을 일구면 내 삶이 바뀌고, 내 삶이 바뀌면 마을이 바뀌며, 마을이 바뀌면 나라가 바뀌어요. 내가 내 삶자리에서 내 삶을 아름답게 누리지 못하면, 마을도 나라도 다람쥐 쳇바퀴로 흐를 뿐이에요. 삶을 읽는 책을 느껴야 해요. (4345.11.14.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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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찍기
― 사진을 찍는 까닭

 


  내가 국민학생이던 1985년 무렵, 집에서 굴러다니던 전자동 작은 사진기로 구름을 스무 장 남짓 처음 찍을 때, 사진찍기란 무엇인지 딱히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무렵 그 사진기로 골목놀이 하는 동무들을 찍었으면 어떠했을까 싶기도 하지만, 동무들과 누리던 골목놀이는 ‘사진 한 장’으로조차 안 남았으나 내 몸과 마음에는 깊이 아로새겨졌어요. 종이에 남는 사진이 따로 없더라도 언제나 환한 그림으로 낱낱이 떠올리며 즐길 수 있어요.


  1998년에 후배한테서 빌린 사진기로 ‘내 사진’이라 할 사진을 처음으로 찍었습니다. 신문사지국에서 신문배달을 하며 사진기를 두 차례 도둑맞고, 전철 짐칸에 사진기를 놓고 내린다든지, 사진기 가방을 전철 바닥에 깜빡 놓고 내린다든지, 택시에서 졸다가 그만 사진기 가방을 두고 내린다든지, 이러저러하면서 새 사진기를 자꾸자꾸 어렵사리 되사곤 했는데, 한 해 두 해 흐르고 흐르는 동안 ‘사진 찍는 까닭’을 따로 생각해 보지는 않았습니다. 어쩌면 굳이 생각하지 않아도 될 일이라 할 수 있는데, 찬찬히 돌아보면, 사진을 찍는 사람으로서 사진찍기란 무엇인가 하는 대목을 늘 마음 깊이 아로새기면서 되뇌어야 하겠다고 느끼기도 합니다.


  그래서 오늘 곰곰이 생각을 기울입니다. 나는 사진을 왜 찍는가.


  나는 내 삶이기에 사진을 찍습니다. 나는 내 삶을 누리면서 사진을 찍습니다. 내 삶을 즐기기에 사진을 찍고, 내 하루를 스스로 빛내기에 사진을 찍습니다. 예전에는 나도 ‘감동(感動)’이라는 한자말을 빌어 ‘사진 찍는 까닭’을 얘기하기도 했습니다만, 이제 이 한자말은 안 씁니다. 왜냐하면, 국어사전에서 ‘감동’ 말뜻을 찾아보면 “크게 느끼어 마음이 움직임”이라고 나와요. 곧, ‘내 마음이 움직이’는 일이 ‘감동’이고, 내 마음이 움직이는 일이란, 스스로 ‘내 삶을 누리’는 일이에요. 한 마디로 간추리자면, ‘삶 = 사진’인 셈이에요. 살아가기에 사진을 찍고, 살아가니까 사진을 읽는 셈이에요. 다시 말하자면, 살아가기에 글을 쓰고, 살아가니까 글을 읽어요.


  스스로 마음이 즐거이 움직일 적에, 이 기쁜 느낌을 사진으로 담습니다. 꼭 이웃이나 동무하고 나눌 뜻은 없습니다. 스스로 마음이 즐거이 움직이면, 내 마음에는 즐거운 꿈과 사랑이 깃들어요. 즐거운 꿈과 사랑은 내 얼굴빛을 환하게 적십니다. 내 삶이 차근차근 거듭나요. 나를 마주하는 사람은 환하게 거듭나는 내 얼굴빛을 바라보며 즐거운 꿈과 사랑을 시나브로 받아먹습니다. 나는 나대로 내 고운 얼굴빛을 스스로 즐깁니다.


  ‘좋은 느낌’을 받기에 사진으로 찍어서 나누지는 않는다고 느낍니다. ‘좋은 느낌’은 그대로 좋은 느낌입니다. 나 스스로 ‘좋은 느낌’으로 살아가며 ‘좋은 사람’으로서 ‘좋은 삶’을 즐겨요. 스스로 새롭게 거듭나고 언제나 해맑게 다시 태어나요. 이때에 내 손에 사진기를 들면 사진찍기를 하고, 이때에 내 손에 연필이 있으면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려요.


  곧, 사진이란 늘 삶을 찍습니다. 글이란 언제나 삶을 씁니다. 그림이란 노상 삶을 그립니다. 내가 사진을 찍는 까닭이라면 오직 하나입니다. 내가 스스로 삶을 누리면서 즐겁게 빛내기 때문입니다. 나 스스로 삶을 누리지 못하거나 삶을 즐기지 못하거나 삶을 빛내지 못할 적에는 사진을 못 찍습니다. 글도 못 씁니다. 그림도 못 그려요. 아이들한테 자장노래 한 가락조차 못 불러 주어요. 아이들과 맛나게 나눌 밥도 못 할 뿐더러, 아이들이 입을 고운 옷이 되도록 빨래하는 일조차 못 하고 말아요.


  삶이 즐거우면 어떠한 일이든 합니다. 삶이 즐겁지 못하면 어떠한 일도 못 합니다. 삶이 즐거우면 어떠한 사진이든 마음껏 누립니다. 삶이 즐겁지 못하면 아무런 사진도 못 찍습니다. 그러니까, 삶이 즐겁지 못한 사람이 손에 사진기를 쥔대서 ‘사진’을 찍지는 못해요. 사진기 단추는 신나게 누른달지라도 스스로 ‘마음속 즐거운 빛줄기’가 없으면 디지털파일이나 필름을 수없이 낳기는 할 터이나, ‘사진’이라는 이름을 붙일 만한 이야기는 태어나지 못해요. (4345.11.13.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2 - 사진책 읽는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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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읽어 주는 누나

 


  누나가 동생한테 그림책을 읽어 준다. 다만, 그림을 보여주며 읽혀야 읽어 주는 셈이 될 테지만, 책은 혼자 들고 머리도 혼자 박고서는 읽어 준다. 동생은 그저 그림책 껍데기만 바라보면서 누나 목소리를 듣는다. 그런데 동생은 누나 목소리만 들으면서도 재미난 듯하다.


  그러고 보면, 아이들한테 책을 읽힌다 할 적에도 어떤 줄거리 어떤 그림을 꼭 이러저러하게 보여주어야 재미나다거나 도움이 된다고 할 수 없지 싶다. 아이들은 제 어버이 목소리 고운 결을 듣고 싶은 마음이지 싶다. 굳이 그림을 보지 않아도 된다. 애써 그림책 줄거리를 들어야 하지 않다. 어버이 목소리를 들으면서 따순 사랑을 받아먹고픈 마음이라고 느낀다. 어버이 목소리에 깃든 너른 꿈을 받아먹고, 그림책을 찬찬히 읽는 어버이 보드라운 살결을 부비고 싶은 마음이지 싶다.


  아이들은 지식을 배우려고 태어나지 않는다. 어른들은 지식을 가르치려고 아이를 낳지 않는다. 아이들은 삶을 누리고 즐기려고 태어난다. 어른들은 삶을 예쁘게 짓고 알차게 빛내려고 아이를 낳는다. (4345.11.13.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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