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를 말하다 - 폴오스터와의 대화
폴 오스터 지음, 제임스 M. 허치슨 엮음, 심혜경 옮김 / 인간사랑 / 2014년 8월
평점 :
품절


따뜻한 삶읽기, 인문책 85



오늘 밤도 별을 보면서

― 글쓰기를 말하다

 폴 오스터 이야기

 제임스 M. 허치슨 엮음

 심혜경 옮김

 인간사랑 펴냄, 2014.8.30.



  몸이 고단하면 자야 합니다. 고단한 몸은 느긋하게 쉬면서 차근차근 제자리를 찾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은 몸이 고단해도 좀처럼 잠들려 하지 않습니다. 아마 나도 어릴 적에 이렇게 놀았지 싶은데, 아이들은 누구나 곯아떨어질 때까지 놀이를 즐깁니다. 잠자리에서도 깔깔 하하 웃고 떠들면서 한 가지 놀이라도 더 누립니다.


  두 아이를 가까스로 재운 뒤, 나도 아이들 사이에서 곯아떨어집니다. 이러다가 깊은 밤에 문득 잠을 깹니다. 아차 하는 생각으로 눈을 떠서 손을 더듬어 아이들을 만져 봅니다. 한가을로 접어든 시골 밤이기에, 처음 잠자리에 들 적에는 아직 더위가 있더라도 밤에는 썰렁합니다. 아이들은 자면서 이불을 으레 걷어차니, 틈틈이 이불을 여미어야 합니다. 아이들마냥 나도 똑같이 곯아떨어지면 안 되지요. 작은아이 큰아이 모두 이불을 뻥뻥 차고는 이리저리 뒹굴었습니다. 반듯하게 누인 뒤 얇은 이불을 먼저 덮고, 두꺼운 이불을 더 덮습니다.


  이 아이들이 갓난쟁이였을 적에는 밤오줌이나 밤똥을 치우느라 바빴습니다. 밤에 자다가 기저귀에 쉬를 하면 얼른 갈아야지요. 축축할 테니까요. 개구지게 논 아이는 그만 밤똥을 누기도 해요. 이때에도 얼른 갈아야 합니다. 때로는 이불을 걷어야 합니다.


  아이들이 씩씩하게 커서 기저귀를 뗀 뒤에는 밤오줌을 가리느라 부산합니다. 아직 스스로 밤에 일어나서 쉬를 누지 못할 무렵에는 아이가 잠든 지 서너 시간 지난 뒤 살며시 아이를 안아 오줌통에 앉혀요. 이렇게 쉬를 누이기를 석 달 넉 달 꾸준히 하면, 어느 날부터 아이 스스로 자다가 “쉬.” 하고 한 마디 뱉습니다. 그러면, 나즈막한 아이 말을 알아듣고는 부시시 일어나서 쉬를 누입니다.



.. 번역은 순전히 개인적으로 나 자신에게 시를 좀더 잘 이해시키려는 방편이었을 뿐, 그 당시에는 번역 작업의 결과물을 출판시키겠다는 생각은 없었습니다 … 번역은 글쓰기의 기본을 익히게 해 줍니다. 단어들과 친숙해지는 법을 가르쳐 주고, 자신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분명하게 볼 수 있는 안목을 길러 주죠 … 커피 잔, 시가 박스, 전화기 등과 같이 자신 앞에 있는 물건을 아무거나 하나 선택해서 그것이 어디에서 왔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10분도 채 지나지 않아 수많은 다양한 것들이 생각의 수면 위로 떠오를 것입니다 ..  (31, 32, 85쪽)



  큰아이가 일곱 살쯤 되니 이 아이는 밤에 혼자 일어나서 쉬를 누고는 다시 자리에 눕기도 합니다. 그러나, 아직 일곱 살 언저리이기에 쉬가 마려워 일어나기는 했지만 제자리에 서서 멍하니 있기도 합니다. 아이가 아무 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으면 바로 알아채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이 아이는 선 채 바지에 쉬를 누고 말아요.


  그러면, 아이는 왜 선 채 가만히 있을까요. 아침부터 저녁까지 쉴새없이 신나게 뛰놀아서 기운을 모두 쏟았기 때문입니다. 워낙 개구지게 논 터라, 밤에 오줌을 누러 움직일 힘이 없습니다. 어버이는 이때에 아이를 이끌거나 안고서 오줌통까지 데려가서 누이고는 다시 잠자리에 눕혀야 합니다.


  두 아이와 하루를 누리면서 곰곰이 생각에 잠기곤 합니다. 내가 이 아이들만 한 나이였을 적에 우리 어머니는 어떻게 했을까 하고.


  우리 어머니도 밤잠을 거의 못 이루면서 살았으리라 느낍니다. 우리 어머니가 밤잠을 홀가분하게 누릴 수 있기까지 나와 형은 꽤 어머니 기운을 쏙쏙 빼먹으면서 자랐으리라 느낍니다.



.. 글쓰기는 내게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활동이라고나 할까요 … 내 머릿속에서 맴돌고 있는 것, 그러니까 내가 써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는 소재는 내 자신의 기억 깊숙한 곳에서 그집어낸 것들이란 사실입니다 … 나는 할당이 주어진 서평이나, 미리 정해진 주제에 따라 글을 써 본 적이 없습니다. 내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작가들에 대해서만 썼어요 … 내 평생 처음으로 집세 걱정 없이 장기적인 글쓰기 작업에 착수할 수 있게 된 거죠. 어찌 보면 내가 쓴 소설들은 모두 아버지가 남겨 준 그 돈에서 나온 것입니다 … 작가는 독자가 상상의 세계에 들어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  (37, 51, 57, 60, 176쪽)



  시골에서 지내면 별을 볼 수 있습니다. 시골집 가운데 뒷간을 집안에 들이는 사람도 있지만, 우리 집은 뒷간이 바깥에 있습니다. 뒷간으로 가려면 마당을 가로질러야 합니다. 밤에 볼일을 보아야 하면 마당을 가로질러 뒷간으로 가야 하는데, 밤마다 쉬를 누려고 마당으로 내려서면 하늘 가득 반짝이는 별빛을 실컷 누립니다.


  비록 요즈음 시골은 곳곳에 등불이 있어서 더 호젓하게 별빛을 누리기는 어렵지만, 등불 있는 데는 손으로 가리면서 하늘을 올려다봅니다. 우리 집 마당 한켠 우람한 후박나무 옆에 서서 이웃마을 등불을 가린 뒤 하늘을 올려다봅니다. 별자리를 살피다가, 내 나름대로 새 별자리를 그립니다. 저 먼 별을 바라보면서, 저 먼 별에서도 지구를 아름다운 별빛으로 마주할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가을이 무르익는 요즈음은 풀벌레 노랫소리가 잔잔합니다. 아이들이 잠들기 앞서 마을 한 바퀴를 빙 돌기도 하는데, 마을 어느 곳을 걷든, 또는 들길까지 두루 걷든, 풀벌레 노랫소리는 우리 집에서 가장 크게 듣습니다. 우리 마을뿐 아니라 다른 마을에서도 농약을 참 많이 쓰니, 웬만한 풀벌레는 살아남지 못해요. 가을 들길을 거닐어도 풀벌레 노랫소리가 거의 없습니다.


  그러고 보면, 요즈음 시골에서는 할매도 할배도 풀벌레 노랫소리를 그다지 귀여겨듣지 못하시는 듯합니다. 텔레비전을 켜서 연속극이나 뉴스를 보십니다. 시골집에서조차 텔레비전 소리에 풀벌레 노랫소리가 잠기고 맙니다.



.. 나는 과학자들이 실험실의 동물을 연구하듯 내 자신을 관찰하고 있습니다 … 자신의 작품이 논의의 대상이 될 때, 말도 안 되는 소리가 허다하게 나오더라도 귀담아들을 준비를 해야 합니다 … 나의 작품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건 전통적인 스토리텔링 방식인 구비문학 형태로 전해져 내려온 동화였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 얼마 되지 않는 분량에 몇 마디 안 되는 내용만으로도 엄청난 정보를 전달합니다. 내가 생각하기에, 동화의 실제 지은이는 읽는 이, 혹은 듣는 이라는 것입니다 … 자신의 기억과 경험에 바탕을 둔 이미지를 창조하는 거죠 … 과거 200년 동안의 소설은 전형적으로 세부 사항에 치중하고, 서술적인 문장과 표면적인 특성을 드러내는 일에 열중해 왔습니다. 그 자체로 보면 멋지게 보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이야기의 핵심과는 거의 관계가 없고 실제 독자가 이야기에 몰입하는 데 방해가 될 수도 있습니다 ..  (66, 70, 71, 72쪽)



  도시에서도 풀숲이 어딘가 있다면, 아주 작은 풀숲에도 풀벌레가 있기 마련입니다. 조그마한 풀숲에 무슨 먹이가 있다고 풀벌레가 있으랴 싶지만, 참말 풀벌레가 있습니다. 작은 풀숲과 작은 풀벌레는 메마르거나 거친 도시 한복판에 푸른 바람을 가만히 나누어 줍니다. 쉬잖고 달리는 자동차에, 쉬잖고 손전화로 떠드는 사람들 물결이 넘치지만, 어느 한때 자동차가 안 지나가고 사람들도 없으면, 작은 풀숲에서 가늘게 비이비이 새애새애 풀벌레 노랫소리가 흐르곤 합니다.


  노래란 무엇일까요. 가수가 방송에 나와서 불러야 노래일까요. 라디오에서 흐르거나 전자기기로 들어야 노래일까요.


  스스로 입으로 흥얼거리는 노래는 어디 있을까요. 방송에서 흐르는 노래 말고, 우리가 스스로 지어서 부르는 노래는 어디 있을까요.


  노는 아이들은 늘 노래를 불렀습니다. 동네에서 노는 아이들은 늘 서로서로 어우러져 노래를 불렀습니다. 놀이는 곧 노래입니다. 놀이를 하니 늘 노래가 흘렀습니다.


  일하는 어른들도 언제나 노래를 불렀습니다. 마을에서 일하는 어른들은 언제나 서로서로 노래 한 가락으로 고단한 일을 잊었습니다. 일은 곧 노래입니다. 일을 하니 언제나 노래가 싱그러이 흘렀습니다.



.. 우리는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인식할 수 있는 안목을 길러야 합니다 … 나는 이야기가 영혼의 일용할 양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이야기가 없으면 못 삽니다 … 사람마다 자신에게 맞는 방식이 있습니다. 그게 문제죠. 글쓰기에는 왕도가 없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 글 쓰는 법을 가르칠 수 없다고 하는 겁니다. 자신에게 맞는 것을 찾아야만 합니다 … 자신이 써야 할 것을 쓰되, 그 결과에는 신경 쓰지 말아야 합니다 … 책의 마지막 원고를 타이핑하는 데에도 특정한 속도가 있어요. 그 책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이 손가락에 느껴집니다 ..  (98, 107, 166, 168, 175쪽)



  폴 오스터 님이 ‘글’이 아닌 ‘말’로 이야기를 들려주는 《글쓰기를 말하다》(인간사랑,2014)를 읽으면서 생각합니다. 폴 오스터 님이 ‘글’로 보여주는 소설은, 폴 오스터 님이 스스로 누리는 삶을 보여주는 노래이리라 생각합니다. 《글쓰기를 말하다》라는 책에서 ‘말’로 들려주는 이야기는, 폴 오스터 님이 스스로 즐기는 삶을 드러내는 노래로구나 싶습니다.


  폴 오스터 님이 말하는 글쓰기는 바로 폴 오스터 님이 스스로 누리는 삶입니다. 이녁 삶을 쓰기에 글입니다. 이녁 삶을 말하기에 이야기입니다.


  글감이 무엇이든 대수롭지 않습니다. 어떤 글감으로 이야기를 풀거나 맺든, 언제나 폴 오스터 님 스스로 즐겁게 누리는 삶이 소설 하나로 태어납니다.



.. 나는 무엇을 쓰고 있는 걸까요? 내 안에 있는 삶의 이야기겠죠 … 내가 미국인들의 언어에서 주목한 것은 사람들의 언어가 매우 투박하면서도 생생하고 독창적이라는 점이었습니다 … 우리 모두 진실을 찾고 있지 않습니까? 신뢰할 수 있을 만한 무엇, 우리를 바르고 견고하게 설 수 있게 해 주는 어떤 것 말입니다 … 책을 읽는 시간이야말로 진정 우리가 낯모르는 사람의 마음속으로 스며들 수 있는 유일한 시간입니다 … 자기 자신도 놀랄 만한 것을 써 보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자신이 전에 하던 일에 거스르는 방향으로 가 보겠다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자기가 이전에 썼던 작품을 모두 불사르고 없애야 합니다 … 세상사에 대해서 쓸 때마다 매번 다른 방식으로 접근해도 될 정도로 이 세상이 넓고 흥미로운 것만큼은 확실합니다 ..  (208, 220, 236, 295쪽)



  삶을 가만히 바라봅니다. 삶을 곰곰이 지켜봅니다. 바라보고 지켜보기에 천천히 느낍니다. 천천히 느끼기에 시나브로 알아챕니다. 시나브로 알아채기에 즐겁게 맞아들여 기쁘게 노래하면서 글로 엮습니다.


  폴 오스터 님은 이녁이 발을 디딘 미국 사회를 바라봅니다. 그리고, 이녁 아버지를 바라보고, 이녁을 둘러싼 삶자락을 바라봅니다.


  나는 내가 디딘 한국 사회를 바라봅니다. 그리고, 내가 아이들과 지내는 시골마을을 바라봅니다. 시골마을에서 한국 사회를 읽고, 시골마을 보금자리에서 숲과 들과 하늘과 바다를 곰곰이 되새깁니다.


  내가 쓰는 글은 내 삶입니다. 네가 쓰는 글은 네 삶입니다. 폴 오스터 님이 쓰는 글은 폴 오스터 님 삶입니다.


  삶은 모두 다릅니다. 그러니, 사람마다 쓰는 글이 다 다릅니다. 더 나은 글이나 덜떨어지는 글은 없습니다. 그저 모두 다른 글입니다. 모두 다르기에 모두 사랑스러운 글이고, 모두 다르면서 모두 재미난 글입니다. 왜냐하면, 내 삶은 내 삶대로 재미있고, 네 삶은 네 삶대로 재미있어요. 내 삶은 내 삶대로 나 스스로 아름답게 일구는 하루요, 네 삶은 네 삶대로 네가 스스로 아름답게 일구는 하루입니다.



.. 당신의 한계가 거기까지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면 그 한계를 넓혀 나갈 수 있습니다 … 소설의 아름다움은 세상에 존재하거나 존재했던 모든 것에 대해 열린 마음을 갖는 것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합니다 … 나는 앞으로도 100년은 읽힐 수 있는 책을 쓰고 싶습니다. 그리고 의미 없는 사소한 것에 독자들이 발목 잡히지 않기를 바랍니다 … 일을 하고 있을 때 환경은 작가가 들어가 있는 방이 아니기 때문이죠. 앞에 자리잡고 있는 책의 페이지가 환경입니다. 그곳이 작가가 살고 있는 세계입니다 … 《모비딕》은 그 어떤 것도 잉태하지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그저 우리를 끊임없이 사로잡는 흥미진진한 책으로 유아독존할 뿐입니다. 그런데 《주홍글씨》는 아이들을 낳았죠 ..  (296, 297, 308, 329, 338쪽)



  《글쓰기를 말하다》를 한참 읽다가 《모비딕》과 《주홍글씨》를 말하는 대목에서 곰곰이 생각에 젖습니다. 참말 《모비딕》은 아무 아이를 못 낳았을까 궁금합니다. 참말 《모비딕》은 새로운 숨결을 우리한테 못 불어넣었을까 궁금합니다.


  나는 《모비딕》이 낳은 아이도 대단히 많다고 느낍니다. 《모비딕》이 낳은 아이는 꼭 ‘소설’로만 나타나지 않는다고 느낍니다. 과학책이나 그림책으로도 나타납니다. 동화책이나 시집으로도 나타납니다. 그리고, 종이책이 아닌 삶책으로도 나타납니다. 무슨 소리인가 하면, 새로운 소설을 낳는 아름다운 숨결이어야 아름다운 소설은 아니라고 느껴요. 새로운 숨결은 우리 삶자락 곳곳에 있습니다. 그리고, 아름다운 문학이 낳는 아이는 우리 가슴속으로 깊이 스며들면서 ‘나 스스로 내 삶에서 새로운 이야기를 지어서 누리는 사랑’으로 태어납니다.


  숲에서 자란 나무를 베어 만든 종이에 글을 찍을 때에만 ‘책’이라고 느끼지 않습니다. 책을 펴내지 않더라도, 아이들과 도란도란 이야기꽃 피우는 삶이라면, 이러한 이야기꽃이 바로 책입니다. 삶책입니다. 일하면서 즐거이 노래를 부르는 삶이라면, 이러한 일노래가 바로 책입니다. 삶책이지요.


  아름다운 소설 《모비딕》은 커피집 ‘스타벅스’를 낳았습니다. 스타벅스란 커피집이 어떤 곳인지 나는 잘 모릅니다만, 이 커피집을 드나드는 수많은 사람들은 저마다 수많은 이야기를 주고받습니다. 커피 한 잔을 마시면서 온갖 이야기가 끝없이 자랍니다.



.. 희망이 없다면 도대체 무슨 수로 아침에 눈을 뜰 수 있겠어요 … 책을 읽으려면 책에게 뭔가 돌려주어야 합니다 ..  (345, 385쪽)



  대통령을 보면 희망이 없을 만합니다. 한국전력이란 회사와 경찰과 공권력과 언론매체가 밀양이란 곳에서 하는 짓을 보면 희망이 없을 만합니다. 프랑스 문학을 프랑스말이 아닌 영어로 옮긴 책을 살펴서 다시 한국말로 옮기는 책이 나오는 한국 책마을을 보면 희망이 없을 만합니다. 입만 열었다 하면 ‘국산’을 외치는 한국사람이면서 한국 시골을 와장창 무너뜨리려는 자유무역협정 따위를 함부로 맺는 정치라든지, 이런 정치를 꾸짖을 줄 모르는 사람들을 보면 희망이 없을 만합니다. 아직도 사라질 줄 모르는 국가보안법을 보면 희망이 없을 만합니다.


  그렇지요. 우악스럽거나 바보스럽거나 멍청하거나 어처구니없거나 터무니없는 모습이나 몸짓을 보면 희망이 싹틀 수 없습니다.


  밤하늘에 돋은 별을 보면 꿈이 싹틉니다. 아침에 뜨는 해를 보면 꿈이 자랍니다. 가을 느즈막할 때에도 새롭게 피는 민들레를 보면, 봄하고는 사뭇 다른 꽃빛과 함께 꿈이 피어납니다. 새근새근 잘 자는 아이들이 아침에 번쩍 눈을 뜨면서 까르르 하하 웃고 뛰노는 모습을 보면 꿈이 몽실몽실 큽니다.


  오늘 밤도 별을 보면서 글을 한 줄 씁니다. 오늘 하루도 아이들과 시골집에서 복닥복닥 지낸 모습을 되새기면서 글을 한 줄 씁니다. 나는 내 삶에서 맑게 흐르는 즐거운 노래를 글로 씁니다. 나는 내 하루에서 밝게 춤추는 신나는 웃음을 글로 씁니다. 새로운 하루도 즐겁게 맞이하고 싶으니 글을 씁니다. 지나가는 하루를 기쁘게 돌아보고 싶으니 글을 씁니다. 글을 써서 삶 한 자락을 이야기로 남길 때에, 어쩐지 내가 스스로 꿈을 씨앗으로 심어서 돌보는구나 싶기도 합니다. 4347.9.25.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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묶음표 한자말 198 : 대미大尾



영화의 대미大尾인 식당 장면에서, 카메라는 아예 작정하고 배우들에게 근접 거리로 다가갑니다

《폴 오스터/심혜경 옮김-글쓰기를 말하다》(인간사랑,2014) 140쪽


 영화의 대미大尾인

→ 영화에서 맨 끝인

→ 영화에서 끝 대목인

→ 영화를 끝맺는

→ 영화에서 마무리가 되는

 …



  한국말사전에서 한자말 ‘대미(大尾)’를 찾아보니, 풀이말을 “어떤 일의 맨 마지막. ‘맨 끝’으로 순화”로 적습니다. 아마 ‘대미’는 일본 한자말인 듯싶습니다. 그런데 이 한자말을 쓰는 사람이 꽤 많습니다. 이 한자말을 털거나 씻거나 다듬으려고 마음을 기울이는 사람은 그리 안 많습니다. ‘맨 마지막’이나 ‘맨 끝’으로 적어야 한다는 소리는, 우리가 예부터 이렇게 말했다는 뜻입니다.


  조금 더 헤아리면, 옛날부터 오랫동안 쓰던 ‘맨 끝’인 만큼, 이제는 ‘맨끝’과 같이 한 낱말로 적을 만합니다. ‘맨’은 매김씨입니다만, ‘저’나 ‘이’라는 매김씨를 ‘저쪽·이쪽’이나 ‘저곳·이곳’처럼 쓰임새를 넓혀 살려서 쓰듯이, ‘맨’이 붙는 낱말 가운데 ‘맨끝·맨앞·맨뒤·맨밑’쯤은 새롭게 살려서 쓸 만합니다.


  알맞게 살려서 쓸 수 있도록 할 때에 말에 힘이 붙습니다. 한국말로 새롭게 지어서 쓰는 낱말이 늘어나야 비로소 한국말을 제대로 잘 쓰는 흐름이 퍼집니다. 4347.9.25.나무.ㅎㄲㅅㄱ 



* 보기글 새로 쓰기

영화에서 끝자락인 식당 이야기에서, 촬영기는 아예 대놓고 배우들한테 가까이 다가갑니다


“식당 장면(場面)”은 그대로 둘 수 있을 테지만, “식당 이야기”나 “식당 대목”으로 손볼 수 있습니다. ‘카메라(camera)’는 ‘촬영기’로 다듬고, ‘작정(作定)하고’는 ‘대놓고’나 ‘마음먹고’로 다듬습니다. “근접(近接) 거리(距離)로 다가갑니다”에서, 한자말 ‘근접’은 “가까이 다가감”을 뜻하니 이 대목은 겹말입니다. “가까이 다가갑니다”나 “아주 가까이 다가갑니다”로 손질합니다.



대미(大尾) : 어떤 일의 맨 마지막. ‘맨 끝’으로 순화

   - 불꽃놀이가 축제의 대미를 장식했다 / 4일간의 문화재 행사의 대미를 맞는다


(최종규 . 2014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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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 안 써야 우리 말이 깨끗하다

 (2168) -의 : 문장의 뒤에


심지어 우화처럼 보이는 《유령들》에서조차도 각 문장의 뒤에 숨어 있는 화자의 존재를 느낄 수 있습니다

《폴 오스터/심혜경 옮김-글쓰기를 말하다》(인간사랑,2014) 78쪽


 문장의 뒤에 숨어 있는

→ 문장 뒤에 숨은 (?)

→ 글 뒤에 숨은 (?)

→ 글마다 뒤에 숨은

→ 글에 숨은

 …



  보기글에서만 ‘-의’만 덜어도 괜찮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장 뒤에 숨은”이나 “글 뒤에 숨은”과 같은 말투가 올바른지는 아리송합니다. “문장 뒤”나 “글 뒤”처럼 쓰려면 “문장 앞”이나 “글 앞”처럼 쓸 수도 있어야 할 테니까요. 그래서 이 보기글은 “글마다 뒤에 숨은”이나 “글에 숨은”이나 “글에서 숨은”처럼 다시 손질해야 한다고 느낍니다.


  보기글 흐름을 더 살피면, 어느 소설책에서 이야기를 이끄는 목소리가 ‘뒤에 숨는다’고 밝힙니다. 그러니 “글마다 뒤에 숨어 이야기하는 사람”으로 다듬거나 “이 글에서 뒤에 숨어 이야기하는 사람”으로 다듬으면 잘 어울리겠구나 싶습니다. 4347.9.24.물.ㅎㄲㅅㄱ



* 보기글 새로 쓰기

게다가 우화처럼 보이는 《유령들》에서조차도 글마다 뒤에 숨어 이야기하는 사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심지어(甚至於)’는 ‘게다가’나 ‘더구나’로 손봅니다. “각(各) 문장(文章)의 뒤에”는 “글마다 뒤에”로 손질하고, “숨어 있는”은 “숨은”으로 손질하며, “화자(話者)의 존재(存在)를”은 “이야기하는 사람을”이나 “이야기하는 목소리를”이나 “글쓴이 목소리를”로 손질합니다.


(최종규 .  2014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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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스레 읽어 주는 책



  훌륭하다는 책이 많습니다. 추천도서도 많고, 명작도서도 많습니다. 어른들은 아이들한테 온갖 책을 장만해서 읽힐 수 있습니다. 도서관에 가면 우리 눈길을 사로잡을 아름답거나 멋진 책이 참으로 많습니다.


  아름다운 모든 책을 다 챙겨서 읽을 수 있습니다. 훌륭하다는 온갖 책을 알뜰히 챙겨서 읽을 수 있습니다. 자, 그러면 우리한테는 어떤 책이 마음에 깊이 남을까요?


  그때그때 느낌이 다를 테니, 어느 날에는 이 책이 마음에 남을 테고, 다른 날에는 저 책이 마음에 남을 만합니다. 그런데, 이 책도 저 책도 아닌 ‘바로 그 책’이 늘 마음에 남을 수 있어요.


  훌륭하다는 책이 아닐 수 있고, 명작도서도 추천도서도 아닐 수 있으며, 거의 이름이 안 알려진 사람이 쓴 책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책 하나가 내 마음에 아주 오랫동안 남아서 언제라도 새로운 기쁨과 이야기를 나누어 주곤 합니다.


  무슨 힘일까요? 무슨 숨결일까요? 무슨 넋일까요?


  백만 권쯤 팔린 책이기에 내 마음에 남을 만하지 않습니다. 천만 권쯤 팔린 책이라서 내 마음에 남을 만하지 않습니다. 내가 아주 어릴 적에 나를 돌보던 어버이가 따사로우며 너그럽고 보드라운 사랑을 담아서 나긋나긋 읽어 준 책 하나가 내 마음에 남을 만합니다. 무럭무럭 자라는 나한테 내 어버이가 따사로우며 너그럽고 보드라운 사랑을 담아서 고운 종이에 싸서 가만히 선물한 책이 오래오래 내 마음을 채울 만합니다.


  어린이가 좋아하는 책은 어떤 책일까요? 어린이는 어떤 책을 좋아할까요? 네, 어린이가 좋아하는 책은, 어린이가 가장 좋아하는 책은, 어머니나 아버지가 살가운 목소리로 즐겁게 읽어 주는 책입니다. 어린이가 가장 좋아하면서 아끼는 책은, 어머니나 아버지가 아이를 무릎에 앉혀 따사로운 눈길로 사랑스레 읽어 준 책입니다.


  어릴 적에 이러한 책을 만난 푸름이는 ‘책’을 떠올릴 적에 무엇보다 ‘따스한 사랑’을 그립니다. 어릴 적에 이러한 책을 만난 사람이라면, 나중에 어른이 되어 스스로 삶을 꾸리거나 지을 적에 ‘따스한 사랑을 담은 책’을 곁에 두고서 마음밥으로 삼으려고 합니다.


  어린이한테 건네는 책 하나는 매우 큽니다. 아무 책이나 함부로 건넬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훌륭하다는 책만 건넨다고 일이 끝나지 않아요. 여러 사람들이 추천하거나 권장하는 책을 아이한테 읽혀 주었다고 일이 다 되지 않습니다. 아이한테 책을 읽히려 할 적에는 늘 사랑으로 읽혀야 합니다. 아이가 스스로 책을 읽을 나이가 되었으면, 아이한테 사랑을 담아 책을 선물해야 합니다. 아이가 무럭무럭 자라 푸름이 나이가 되었으면, 이때에도 교과서나 참고서나 문제집 말고, 마음을 살찌우고 생각을 북돋우는 아름다운 책을 사랑스러운 손길로 건넬 수 있는 어버이가 되어야지 싶습니다.


  시험공부를 하도록 돕는 교재는 시험이 끝나면 모두 잊히거나 사라집니다. 마음을 살찌우는 사랑을 담아서 건넨 책은 시험이 끝나도 언제까지나 이어집니다. 생각을 북돋우는 꿈을 실어서 선물한 책은 아이가 자라 마흔 살이 되거나 여든 살이 되어도 애틋하게 가슴에 남아서 즐겁게 웃음꽃 피우도록 돕는 햇볕으로 자리잡습니다. 4347.9.24.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어린이문학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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ㅅ 책꿈 키우기
48. 여행길에 챙기는 책


  전남 고흥에서 서울을 오가자면 시외버스로 네 시간 사십 분을 달려야 합니다. 시외버스 일꾼이 고속도로를 거침없이 싱싱 달리면 네 시간 이십 분 만에 닿기도 합니다. 강진이나 해남이나 장흥이나 통영이나 완도 같은 곳에서도 서울로 가자면 참 오래 걸려요. 시외버스 가운데에는 완도에서 부산을 오가는 길이 있는데, 이 버스길은 자그마치 여덟 시간이 걸립니다.

  이런 나들잇길에는 무엇을 하며 보내면 즐거울까 헤아려 봅니다. 워낙 먼길이니 눈을 감고 쿨쿨 자면 될까요. 귀를 틀어막고는 노래를 들으면 될까요. 혼자 떠나는 길이 아니라면, 둘이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텐데, 네 시간 남짓 쉬지 않고 이야기를 나누기도 쉽지는 않으리라 느껴요.

  그런데, 고흥 같은 시골에서 사는 사람이 서울로 나들이를 다녀오자면, 가는 데와 오는 데에 열 시간 가까이 걸려요. 버스 타는 곳까지 가는 겨를을 살피고, 버스가 떠나기까지 기다리는 겨를을 살피며, 시골 읍내에서 버스를 내린 뒤 마을까지 다시 들어가는 겨를을 살피면, 하루를 꼬박 시외버스에서 보내는 셈입니다.

  우리는 하루 내내 멍하니 지낼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루 내내 아무것을 안 하면서 보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루 가운데 두 시간쯤 들여 마음을 차분히 다스리면서 꿈을 품을 수 있어요. 하루 가운데 두 시간쯤 쏟아 텃밭을 가꾸거나 꽃이나 나무를 가만히 지켜볼 수 있어요. 하루 가운데 두 시간쯤 바쳐 숲길을 거닐 수 있어요. 하루 가운데 두 시간쯤 기울여 아침부터 저녁까지 누린 이야기를 글로 적어 볼 수 있습니다.

  나는 시외버스를 이틀에 걸쳐 열 시간 가까이 달려야 하면, 가방 가득 여러 가지를 챙깁니다. 시골에서 벗어나 서울로 가는 동안 읽을 책 세 권, 서울에서 볼일을 마치고 시골로 돌아오는 동안 읽을 책 세 권, 이렇게 적어도 여섯 권을 챙깁니다. 시외버스에서 글을 쓰려고 작은 노트북을 챙깁니다. 그리고 작은 공책 몇 권을 챙겨요.

  처음에는 가만히 눈을 감고 생각에 잠깁니다. 바깥마실을 가는 길에 어떤 일을 하면 하루가 기쁠까 하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이루고 싶은 꿈을 천천히 그립니다. 이러고 나서 책을 한 권 읽습니다. 시외버스는 덜덜 떨리고 바퀴 구르는 소리가 제법 크지만, 내가 사랑할 만한 아름다운 책을 손에 쥐고 들여다보면, 모든 빛과 소리를 잊습니다. 책에 깃든 이야기에만 마음을 쏟습니다. 오직 책만 들여다봐요.

  책을 한 권 다 읽으면 살며시 덮습니다. 공책을 펼쳐요. 아침부터 이때까지 떠오른 생각과 이야기를 차근차근 적습니다. 책을 읽다가 든 생각도 적고, 시외버스를 타면서 본 여러 가지 모습도 적어 봅니다. 이러고 나서 작은 노트북을 꺼내어 글을 씁니다. 책을 읽은 느낌을 쓰기도 하고, 시골과 서울이 서로 어떻게 다른 터전인가를 헤아리면서 글을 쓰기도 합니다. 내가 하는 일은 한국말사전을 쓰는 일이기에, 한국말을 알맞고 바르며 곱게 살리는 길을 곰곰이 쓰기도 합니다. 아이들과 지내는 이야기를 쓰기도 하고, 아침에 본 들꽃 이야기를 쓰기도 하며, 철마다 달라지는 날씨와 하늘빛과 들내음 이야기를 쓰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내가 쓰는 글은 내가 살아가는 이야기입니다.

  얼마 앞서 서울마실을 하는 길에 《커피우유와 소보로빵》(푸른숲주니어 펴냄,2006)이라는 책을 챙겨서 읽었습니다. 카롤린 필립스라는 분이 쓴 청소년문학입니다. 이 책은, 독일에 있는 이주노동자 이야기를 다룹니다. 독일 사회는 처음에 ‘일할 사람이 모자라’다며 이주노동자를 많이 받아들였는데, 어느 때부터인가 독일사람은 일자리를 좀처럼 얻지 못하고 이주노동자가 독일 사회 곳곳을 차지한다면서, 독일사람 스스로 예전과 다르게 ‘이주노동자를 다른 눈길로 보면서 푸대접하는 얼거리’를 건드립니다.

  한국에도 이주노동자가 많습니다. 얼마나 많은지는 통계로 잡히지 않습니다. 어쩌면 백만이 넘을는지 모릅니다. 한국에 들어온 이주노동자는 저마다 곳곳에서 일자리를 얻어 바지런히 일합니다. 이주노동자가 일하는 모습을 보면, 일요일은 거의 못 쉬고, ‘하루 여덟 시간 노동’이 아니라 ‘하루 열네 시간 노동’까지 하기 일쑤입니다. 쉬는 날도 거의 없이 아주 오래 일하는데, 이주노동자가 받는 일삯은 한국노동자하고 견주면 턱없이 적습니다.

  한국 사회를 보면, 정규직 노동자와 비정규직 노동자 사이에 여러모로 말썽이 생겨요. 똑같은 일을 똑같이 하더라도 정규직 노동자가 더 많이 받습니다. 게다가 비정규직 노동자는 보험 혜택을 못 받거나 상여금이 없거나 휴가조차 없곤 합니다. 노동자 모습만 바라본다면, 정규직과 비정규직과 이주노동자, 이런 세 가지 계급이 있다고 할 만해요.

  《커피우유와 소보로빵》에 나오는 주인공 아이 가운데 하나는 살결이 까무잡잡하다고 합니다. 이 아이는 학교나 마을에서 따돌림을 받거나 손가락질을 받으면, 제 살빛을 징그러이 여깁니다. 제 살갗을 화장품이나 물감으로 하얗게 발라 보곤 합니다. 그러고는 속으로, “샘에게 피부 색깔만큼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그리고 앞으로도 전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은 문제였다. 독일사람들 중에는 피부색을 진한 갈색으로 바꾸기 위해, 한여름에 햇볕에 나가 그을리려고 안달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83쪽).” 하고 생각해요.

  독일뿐 아니라 한국에서도 이와 똑같아요. 한국사람도 한여름에 살결을 까무잡잡하게 태우려고 애쓰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런데, 막상 ‘살결이 까무잡잡한 사람’을 보면 ‘깜둥이’라 하면서 놀려요. 어느 한쪽에서는 살결을 까무잡잡하게 태울 때에 ‘튼튼하고 보기 좋다’ 하지만, 어느 한쪽에서는 살결이 처음부터 까무잡잡한 사람을 낮잡거나 얕잡습니다.

  이야기책에 나오는 주인공 아이가 어느 날 살갗을 하얗게 발랐을 때, 이 아이 어머니는 아이더러, “다시는 이런 짓 하지 마. 알았어? 네 피부는 죽을 때까지 갈색이야. 그리고 난 내 아들의 피부가 희어지는 것 싫어! 지금 이대로가 좋아. 정말로 중요한 건 여기, 그리고 이쪽에 뭐가 들어 있는가 하는 것이야(86쪽)!” 하고 외칩니다. 아이 어머니는 아이 머리와 가슴을 쿡쿡 찔렀대요. 살빛을 보지 말고 머리와 가슴을 보라는 뜻입니다. 겉모습을 꾸미려 애쓰지 말고, 머릿속을 살찌우고 가슴에 사랑과 꿈을 담으라는 뜻입니다.

  우리한테는 눈이 있어서 무엇이든 바라봅니다. 눈은 이것을 보고 저것을 봅니다. 그러면, 우리가 눈으로 보는 것을 어떻게 느끼는가요. 이것은 아름답습니까? 저것은 밉살맞습니까? 이것은 멋집니까? 저것은 추레합니까? 아름답거나 밉살맞다는 잣대는 무엇입니까? 멋지거나 추레하다는 틀은 무엇입니까?

  시골을 둘러보면, 들에서 일하는 사람은 살짝 허름하다 싶은 옷을 입습니다. 양복을 빼입거나 까만 구두를 반짝반짝 닦아서 신은 뒤 논이나 밭에 들어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챙이 넓은 밀짚모자를 쓰고 하얀 수건을 목에 두르며 일하는 사람은 있지만, 까만 안경을 쓰고 머플러를 날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논밭에 맨발로 들어가는 사람은 있지만, 뾰족구두를 신고 논밭에 들어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살짝 허름하다 싶은 차림에 밀짚모자를 쓰는 모습은 어떻습니까? 까만 양복에 까만 구두에 까만 안경을 쓰는 모습은 어떻습니까?

  어떤 사람은 운전수를 두고는 까만 자가용을 타고 고속도로를 달립니다. 어떤 사람은 시외버스로 고속도로를 달립니다. 어떤 사람은 자전거로 일반국도를 달립니다. 어떤 사람은 두 다리로 시골길을 걷습니다. 네 가지 모습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네 가지 모습을 바라보면서 무엇을 느낄까 궁금합니다. 우리는 이 네 가지 모습 가운데 어느 쪽 길을 걷고 싶어하는지 궁금합니다.

  두 다리로 시골길을 걷는 사람은 가장 느리다고 할 만합니다. 그런데, 가장 느리다고 할 만한 사람은 들내음을 맡고 숲빛을 바라보며 하늘바람을 실컷 들이마십니다. 새와 풀벌레가 노래하는 소리를 듣다가, 저도 모르게 스스로 노래를 불러요. 나무그늘이 좋으면 풀밭에 앉아서 도시락을 꺼냅니다. 들꽃 한 포기를 쓰다듬고, 나무 한 그루를 가만히 어루만집니다. 두 다리로 걷는 사람은 온몸으로 이 땅을 밟고 느끼면서 생각합니다. 그래서, 두 다리로 걷는 사람은 온마음 가득 이야기가 샘솟습니다.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사진을 찍거나 춤을 추거나 노래를 부르려는 사람이라면, 이 땅을 두 다리로 걷는 사람입니다. 마음속에서 이야기 한 자락이 싱그럽게 솟아날 수 있어야 새로운 생각을 지어서 글을 쓰든 그림을 그리든 사진을 찍든 노래를 지어서 부르든 춤을 추든 할 수 있어요.

  서울에서 부산까지 고속철도로 빠르게 달린 뒤, 부산 바닷가 어느 저잣거리에서 회 한 접시를 술 한잔 곁들여 먹고는 다시 서울로 고속철도로 빠르게 돌아가는 일도 ‘여행’이라면 여행입니다. 그러면, 이런 여행길에서는 무엇을 보고 느끼고 겪고 생각해서 이야기를 남길 수 있을까요?

  서울에서 부산까지 사나흘에 걸쳐 자전거로 달린 사람이라면, 또는 서울에서 부산까지 시외버스로 천천히 여러 고을을 거쳐 찾아간 사람이라면, 또는 서울에서 부산까지 달포 즈음 들여 천천히 모든 마을을 두루 돌며 찾아간 사람이라면, 이들은 저마다 어떤 이야기를 남길 수 있을까요?

  가장 느리다는 사람이 가장 길고 깊으며 너른 이야기를 길어올릴 수 있습니다. 가장 더디다는 사람이 가장 맑고 밝으며 살가운 이야기를 끌어낼 수 있습니다. 밥짓기를 생각해 보아도 알 수 있어요. 가게에서 쌀을 사다가 전기밭솥에 안칠 적하고, 전화를 걸어 밥 한 그릇 시킬 적하고, 손수 논을 일구어 나락을 거둔 뒤 벼를 손수 절구로 빻고 키로 까부르고 조리로 일고 나무까지 해서 아궁이에 불을 붙여 천천히 밥을 지을 적하고, 느낌과 이야기와 삶과 생각은 모두 다릅니다.

  마실길에 책을 몇 권 챙기면서 생각에 잠깁니다. 삶을 이루는 이야기를 생각하고, 삶을 가꾸는 이야기를 그리며, 삶을 사랑으로 채우는 이야기를 가만히 보듬습니다. 4347.9.24.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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