ㅅ 책꿈 키우기
48. 여행길에 챙기는 책
전남 고흥에서 서울을 오가자면 시외버스로 네 시간 사십 분을 달려야 합니다. 시외버스 일꾼이 고속도로를 거침없이 싱싱 달리면 네 시간 이십 분 만에 닿기도 합니다. 강진이나 해남이나 장흥이나 통영이나 완도 같은 곳에서도 서울로 가자면 참 오래 걸려요. 시외버스 가운데에는 완도에서 부산을 오가는 길이 있는데, 이 버스길은 자그마치 여덟 시간이 걸립니다.
이런 나들잇길에는 무엇을 하며 보내면 즐거울까 헤아려 봅니다. 워낙 먼길이니 눈을 감고 쿨쿨 자면 될까요. 귀를 틀어막고는 노래를 들으면 될까요. 혼자 떠나는 길이 아니라면, 둘이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텐데, 네 시간 남짓 쉬지 않고 이야기를 나누기도 쉽지는 않으리라 느껴요.
그런데, 고흥 같은 시골에서 사는 사람이 서울로 나들이를 다녀오자면, 가는 데와 오는 데에 열 시간 가까이 걸려요. 버스 타는 곳까지 가는 겨를을 살피고, 버스가 떠나기까지 기다리는 겨를을 살피며, 시골 읍내에서 버스를 내린 뒤 마을까지 다시 들어가는 겨를을 살피면, 하루를 꼬박 시외버스에서 보내는 셈입니다.
우리는 하루 내내 멍하니 지낼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루 내내 아무것을 안 하면서 보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루 가운데 두 시간쯤 들여 마음을 차분히 다스리면서 꿈을 품을 수 있어요. 하루 가운데 두 시간쯤 쏟아 텃밭을 가꾸거나 꽃이나 나무를 가만히 지켜볼 수 있어요. 하루 가운데 두 시간쯤 바쳐 숲길을 거닐 수 있어요. 하루 가운데 두 시간쯤 기울여 아침부터 저녁까지 누린 이야기를 글로 적어 볼 수 있습니다.
나는 시외버스를 이틀에 걸쳐 열 시간 가까이 달려야 하면, 가방 가득 여러 가지를 챙깁니다. 시골에서 벗어나 서울로 가는 동안 읽을 책 세 권, 서울에서 볼일을 마치고 시골로 돌아오는 동안 읽을 책 세 권, 이렇게 적어도 여섯 권을 챙깁니다. 시외버스에서 글을 쓰려고 작은 노트북을 챙깁니다. 그리고 작은 공책 몇 권을 챙겨요.
처음에는 가만히 눈을 감고 생각에 잠깁니다. 바깥마실을 가는 길에 어떤 일을 하면 하루가 기쁠까 하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이루고 싶은 꿈을 천천히 그립니다. 이러고 나서 책을 한 권 읽습니다. 시외버스는 덜덜 떨리고 바퀴 구르는 소리가 제법 크지만, 내가 사랑할 만한 아름다운 책을 손에 쥐고 들여다보면, 모든 빛과 소리를 잊습니다. 책에 깃든 이야기에만 마음을 쏟습니다. 오직 책만 들여다봐요.
책을 한 권 다 읽으면 살며시 덮습니다. 공책을 펼쳐요. 아침부터 이때까지 떠오른 생각과 이야기를 차근차근 적습니다. 책을 읽다가 든 생각도 적고, 시외버스를 타면서 본 여러 가지 모습도 적어 봅니다. 이러고 나서 작은 노트북을 꺼내어 글을 씁니다. 책을 읽은 느낌을 쓰기도 하고, 시골과 서울이 서로 어떻게 다른 터전인가를 헤아리면서 글을 쓰기도 합니다. 내가 하는 일은 한국말사전을 쓰는 일이기에, 한국말을 알맞고 바르며 곱게 살리는 길을 곰곰이 쓰기도 합니다. 아이들과 지내는 이야기를 쓰기도 하고, 아침에 본 들꽃 이야기를 쓰기도 하며, 철마다 달라지는 날씨와 하늘빛과 들내음 이야기를 쓰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내가 쓰는 글은 내가 살아가는 이야기입니다.
얼마 앞서 서울마실을 하는 길에 《커피우유와 소보로빵》(푸른숲주니어 펴냄,2006)이라는 책을 챙겨서 읽었습니다. 카롤린 필립스라는 분이 쓴 청소년문학입니다. 이 책은, 독일에 있는 이주노동자 이야기를 다룹니다. 독일 사회는 처음에 ‘일할 사람이 모자라’다며 이주노동자를 많이 받아들였는데, 어느 때부터인가 독일사람은 일자리를 좀처럼 얻지 못하고 이주노동자가 독일 사회 곳곳을 차지한다면서, 독일사람 스스로 예전과 다르게 ‘이주노동자를 다른 눈길로 보면서 푸대접하는 얼거리’를 건드립니다.
한국에도 이주노동자가 많습니다. 얼마나 많은지는 통계로 잡히지 않습니다. 어쩌면 백만이 넘을는지 모릅니다. 한국에 들어온 이주노동자는 저마다 곳곳에서 일자리를 얻어 바지런히 일합니다. 이주노동자가 일하는 모습을 보면, 일요일은 거의 못 쉬고, ‘하루 여덟 시간 노동’이 아니라 ‘하루 열네 시간 노동’까지 하기 일쑤입니다. 쉬는 날도 거의 없이 아주 오래 일하는데, 이주노동자가 받는 일삯은 한국노동자하고 견주면 턱없이 적습니다.
한국 사회를 보면, 정규직 노동자와 비정규직 노동자 사이에 여러모로 말썽이 생겨요. 똑같은 일을 똑같이 하더라도 정규직 노동자가 더 많이 받습니다. 게다가 비정규직 노동자는 보험 혜택을 못 받거나 상여금이 없거나 휴가조차 없곤 합니다. 노동자 모습만 바라본다면, 정규직과 비정규직과 이주노동자, 이런 세 가지 계급이 있다고 할 만해요.
《커피우유와 소보로빵》에 나오는 주인공 아이 가운데 하나는 살결이 까무잡잡하다고 합니다. 이 아이는 학교나 마을에서 따돌림을 받거나 손가락질을 받으면, 제 살빛을 징그러이 여깁니다. 제 살갗을 화장품이나 물감으로 하얗게 발라 보곤 합니다. 그러고는 속으로, “샘에게 피부 색깔만큼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그리고 앞으로도 전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은 문제였다. 독일사람들 중에는 피부색을 진한 갈색으로 바꾸기 위해, 한여름에 햇볕에 나가 그을리려고 안달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83쪽).” 하고 생각해요.
독일뿐 아니라 한국에서도 이와 똑같아요. 한국사람도 한여름에 살결을 까무잡잡하게 태우려고 애쓰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런데, 막상 ‘살결이 까무잡잡한 사람’을 보면 ‘깜둥이’라 하면서 놀려요. 어느 한쪽에서는 살결을 까무잡잡하게 태울 때에 ‘튼튼하고 보기 좋다’ 하지만, 어느 한쪽에서는 살결이 처음부터 까무잡잡한 사람을 낮잡거나 얕잡습니다.
이야기책에 나오는 주인공 아이가 어느 날 살갗을 하얗게 발랐을 때, 이 아이 어머니는 아이더러, “다시는 이런 짓 하지 마. 알았어? 네 피부는 죽을 때까지 갈색이야. 그리고 난 내 아들의 피부가 희어지는 것 싫어! 지금 이대로가 좋아. 정말로 중요한 건 여기, 그리고 이쪽에 뭐가 들어 있는가 하는 것이야(86쪽)!” 하고 외칩니다. 아이 어머니는 아이 머리와 가슴을 쿡쿡 찔렀대요. 살빛을 보지 말고 머리와 가슴을 보라는 뜻입니다. 겉모습을 꾸미려 애쓰지 말고, 머릿속을 살찌우고 가슴에 사랑과 꿈을 담으라는 뜻입니다.
우리한테는 눈이 있어서 무엇이든 바라봅니다. 눈은 이것을 보고 저것을 봅니다. 그러면, 우리가 눈으로 보는 것을 어떻게 느끼는가요. 이것은 아름답습니까? 저것은 밉살맞습니까? 이것은 멋집니까? 저것은 추레합니까? 아름답거나 밉살맞다는 잣대는 무엇입니까? 멋지거나 추레하다는 틀은 무엇입니까?
시골을 둘러보면, 들에서 일하는 사람은 살짝 허름하다 싶은 옷을 입습니다. 양복을 빼입거나 까만 구두를 반짝반짝 닦아서 신은 뒤 논이나 밭에 들어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챙이 넓은 밀짚모자를 쓰고 하얀 수건을 목에 두르며 일하는 사람은 있지만, 까만 안경을 쓰고 머플러를 날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논밭에 맨발로 들어가는 사람은 있지만, 뾰족구두를 신고 논밭에 들어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살짝 허름하다 싶은 차림에 밀짚모자를 쓰는 모습은 어떻습니까? 까만 양복에 까만 구두에 까만 안경을 쓰는 모습은 어떻습니까?
어떤 사람은 운전수를 두고는 까만 자가용을 타고 고속도로를 달립니다. 어떤 사람은 시외버스로 고속도로를 달립니다. 어떤 사람은 자전거로 일반국도를 달립니다. 어떤 사람은 두 다리로 시골길을 걷습니다. 네 가지 모습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네 가지 모습을 바라보면서 무엇을 느낄까 궁금합니다. 우리는 이 네 가지 모습 가운데 어느 쪽 길을 걷고 싶어하는지 궁금합니다.
두 다리로 시골길을 걷는 사람은 가장 느리다고 할 만합니다. 그런데, 가장 느리다고 할 만한 사람은 들내음을 맡고 숲빛을 바라보며 하늘바람을 실컷 들이마십니다. 새와 풀벌레가 노래하는 소리를 듣다가, 저도 모르게 스스로 노래를 불러요. 나무그늘이 좋으면 풀밭에 앉아서 도시락을 꺼냅니다. 들꽃 한 포기를 쓰다듬고, 나무 한 그루를 가만히 어루만집니다. 두 다리로 걷는 사람은 온몸으로 이 땅을 밟고 느끼면서 생각합니다. 그래서, 두 다리로 걷는 사람은 온마음 가득 이야기가 샘솟습니다.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사진을 찍거나 춤을 추거나 노래를 부르려는 사람이라면, 이 땅을 두 다리로 걷는 사람입니다. 마음속에서 이야기 한 자락이 싱그럽게 솟아날 수 있어야 새로운 생각을 지어서 글을 쓰든 그림을 그리든 사진을 찍든 노래를 지어서 부르든 춤을 추든 할 수 있어요.
서울에서 부산까지 고속철도로 빠르게 달린 뒤, 부산 바닷가 어느 저잣거리에서 회 한 접시를 술 한잔 곁들여 먹고는 다시 서울로 고속철도로 빠르게 돌아가는 일도 ‘여행’이라면 여행입니다. 그러면, 이런 여행길에서는 무엇을 보고 느끼고 겪고 생각해서 이야기를 남길 수 있을까요?
서울에서 부산까지 사나흘에 걸쳐 자전거로 달린 사람이라면, 또는 서울에서 부산까지 시외버스로 천천히 여러 고을을 거쳐 찾아간 사람이라면, 또는 서울에서 부산까지 달포 즈음 들여 천천히 모든 마을을 두루 돌며 찾아간 사람이라면, 이들은 저마다 어떤 이야기를 남길 수 있을까요?
가장 느리다는 사람이 가장 길고 깊으며 너른 이야기를 길어올릴 수 있습니다. 가장 더디다는 사람이 가장 맑고 밝으며 살가운 이야기를 끌어낼 수 있습니다. 밥짓기를 생각해 보아도 알 수 있어요. 가게에서 쌀을 사다가 전기밭솥에 안칠 적하고, 전화를 걸어 밥 한 그릇 시킬 적하고, 손수 논을 일구어 나락을 거둔 뒤 벼를 손수 절구로 빻고 키로 까부르고 조리로 일고 나무까지 해서 아궁이에 불을 붙여 천천히 밥을 지을 적하고, 느낌과 이야기와 삶과 생각은 모두 다릅니다.
마실길에 책을 몇 권 챙기면서 생각에 잠깁니다. 삶을 이루는 이야기를 생각하고, 삶을 가꾸는 이야기를 그리며, 삶을 사랑으로 채우는 이야기를 가만히 보듬습니다. 4347.9.24.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