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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를 말하다 - 폴오스터와의 대화
폴 오스터 지음, 제임스 M. 허치슨 엮음, 심혜경 옮김 / 인간사랑 / 2014년 8월
평점 :
품절
따뜻한 삶읽기, 인문책 85
오늘 밤도 별을 보면서
― 글쓰기를 말하다
폴 오스터 이야기
제임스 M. 허치슨 엮음
심혜경 옮김
인간사랑 펴냄, 2014.8.30.
몸이 고단하면 자야 합니다. 고단한 몸은 느긋하게 쉬면서 차근차근 제자리를 찾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은 몸이 고단해도 좀처럼 잠들려 하지 않습니다. 아마 나도 어릴 적에 이렇게 놀았지 싶은데, 아이들은 누구나 곯아떨어질 때까지 놀이를 즐깁니다. 잠자리에서도 깔깔 하하 웃고 떠들면서 한 가지 놀이라도 더 누립니다.
두 아이를 가까스로 재운 뒤, 나도 아이들 사이에서 곯아떨어집니다. 이러다가 깊은 밤에 문득 잠을 깹니다. 아차 하는 생각으로 눈을 떠서 손을 더듬어 아이들을 만져 봅니다. 한가을로 접어든 시골 밤이기에, 처음 잠자리에 들 적에는 아직 더위가 있더라도 밤에는 썰렁합니다. 아이들은 자면서 이불을 으레 걷어차니, 틈틈이 이불을 여미어야 합니다. 아이들마냥 나도 똑같이 곯아떨어지면 안 되지요. 작은아이 큰아이 모두 이불을 뻥뻥 차고는 이리저리 뒹굴었습니다. 반듯하게 누인 뒤 얇은 이불을 먼저 덮고, 두꺼운 이불을 더 덮습니다.
이 아이들이 갓난쟁이였을 적에는 밤오줌이나 밤똥을 치우느라 바빴습니다. 밤에 자다가 기저귀에 쉬를 하면 얼른 갈아야지요. 축축할 테니까요. 개구지게 논 아이는 그만 밤똥을 누기도 해요. 이때에도 얼른 갈아야 합니다. 때로는 이불을 걷어야 합니다.
아이들이 씩씩하게 커서 기저귀를 뗀 뒤에는 밤오줌을 가리느라 부산합니다. 아직 스스로 밤에 일어나서 쉬를 누지 못할 무렵에는 아이가 잠든 지 서너 시간 지난 뒤 살며시 아이를 안아 오줌통에 앉혀요. 이렇게 쉬를 누이기를 석 달 넉 달 꾸준히 하면, 어느 날부터 아이 스스로 자다가 “쉬.” 하고 한 마디 뱉습니다. 그러면, 나즈막한 아이 말을 알아듣고는 부시시 일어나서 쉬를 누입니다.
.. 번역은 순전히 개인적으로 나 자신에게 시를 좀더 잘 이해시키려는 방편이었을 뿐, 그 당시에는 번역 작업의 결과물을 출판시키겠다는 생각은 없었습니다 … 번역은 글쓰기의 기본을 익히게 해 줍니다. 단어들과 친숙해지는 법을 가르쳐 주고, 자신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분명하게 볼 수 있는 안목을 길러 주죠 … 커피 잔, 시가 박스, 전화기 등과 같이 자신 앞에 있는 물건을 아무거나 하나 선택해서 그것이 어디에서 왔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10분도 채 지나지 않아 수많은 다양한 것들이 생각의 수면 위로 떠오를 것입니다 .. (31, 32, 85쪽)
큰아이가 일곱 살쯤 되니 이 아이는 밤에 혼자 일어나서 쉬를 누고는 다시 자리에 눕기도 합니다. 그러나, 아직 일곱 살 언저리이기에 쉬가 마려워 일어나기는 했지만 제자리에 서서 멍하니 있기도 합니다. 아이가 아무 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으면 바로 알아채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이 아이는 선 채 바지에 쉬를 누고 말아요.
그러면, 아이는 왜 선 채 가만히 있을까요. 아침부터 저녁까지 쉴새없이 신나게 뛰놀아서 기운을 모두 쏟았기 때문입니다. 워낙 개구지게 논 터라, 밤에 오줌을 누러 움직일 힘이 없습니다. 어버이는 이때에 아이를 이끌거나 안고서 오줌통까지 데려가서 누이고는 다시 잠자리에 눕혀야 합니다.
두 아이와 하루를 누리면서 곰곰이 생각에 잠기곤 합니다. 내가 이 아이들만 한 나이였을 적에 우리 어머니는 어떻게 했을까 하고.
우리 어머니도 밤잠을 거의 못 이루면서 살았으리라 느낍니다. 우리 어머니가 밤잠을 홀가분하게 누릴 수 있기까지 나와 형은 꽤 어머니 기운을 쏙쏙 빼먹으면서 자랐으리라 느낍니다.
.. 글쓰기는 내게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활동이라고나 할까요 … 내 머릿속에서 맴돌고 있는 것, 그러니까 내가 써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는 소재는 내 자신의 기억 깊숙한 곳에서 그집어낸 것들이란 사실입니다 … 나는 할당이 주어진 서평이나, 미리 정해진 주제에 따라 글을 써 본 적이 없습니다. 내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작가들에 대해서만 썼어요 … 내 평생 처음으로 집세 걱정 없이 장기적인 글쓰기 작업에 착수할 수 있게 된 거죠. 어찌 보면 내가 쓴 소설들은 모두 아버지가 남겨 준 그 돈에서 나온 것입니다 … 작가는 독자가 상상의 세계에 들어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 (37, 51, 57, 60, 176쪽)
시골에서 지내면 별을 볼 수 있습니다. 시골집 가운데 뒷간을 집안에 들이는 사람도 있지만, 우리 집은 뒷간이 바깥에 있습니다. 뒷간으로 가려면 마당을 가로질러야 합니다. 밤에 볼일을 보아야 하면 마당을 가로질러 뒷간으로 가야 하는데, 밤마다 쉬를 누려고 마당으로 내려서면 하늘 가득 반짝이는 별빛을 실컷 누립니다.
비록 요즈음 시골은 곳곳에 등불이 있어서 더 호젓하게 별빛을 누리기는 어렵지만, 등불 있는 데는 손으로 가리면서 하늘을 올려다봅니다. 우리 집 마당 한켠 우람한 후박나무 옆에 서서 이웃마을 등불을 가린 뒤 하늘을 올려다봅니다. 별자리를 살피다가, 내 나름대로 새 별자리를 그립니다. 저 먼 별을 바라보면서, 저 먼 별에서도 지구를 아름다운 별빛으로 마주할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가을이 무르익는 요즈음은 풀벌레 노랫소리가 잔잔합니다. 아이들이 잠들기 앞서 마을 한 바퀴를 빙 돌기도 하는데, 마을 어느 곳을 걷든, 또는 들길까지 두루 걷든, 풀벌레 노랫소리는 우리 집에서 가장 크게 듣습니다. 우리 마을뿐 아니라 다른 마을에서도 농약을 참 많이 쓰니, 웬만한 풀벌레는 살아남지 못해요. 가을 들길을 거닐어도 풀벌레 노랫소리가 거의 없습니다.
그러고 보면, 요즈음 시골에서는 할매도 할배도 풀벌레 노랫소리를 그다지 귀여겨듣지 못하시는 듯합니다. 텔레비전을 켜서 연속극이나 뉴스를 보십니다. 시골집에서조차 텔레비전 소리에 풀벌레 노랫소리가 잠기고 맙니다.
.. 나는 과학자들이 실험실의 동물을 연구하듯 내 자신을 관찰하고 있습니다 … 자신의 작품이 논의의 대상이 될 때, 말도 안 되는 소리가 허다하게 나오더라도 귀담아들을 준비를 해야 합니다 … 나의 작품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건 전통적인 스토리텔링 방식인 구비문학 형태로 전해져 내려온 동화였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 얼마 되지 않는 분량에 몇 마디 안 되는 내용만으로도 엄청난 정보를 전달합니다. 내가 생각하기에, 동화의 실제 지은이는 읽는 이, 혹은 듣는 이라는 것입니다 … 자신의 기억과 경험에 바탕을 둔 이미지를 창조하는 거죠 … 과거 200년 동안의 소설은 전형적으로 세부 사항에 치중하고, 서술적인 문장과 표면적인 특성을 드러내는 일에 열중해 왔습니다. 그 자체로 보면 멋지게 보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이야기의 핵심과는 거의 관계가 없고 실제 독자가 이야기에 몰입하는 데 방해가 될 수도 있습니다 .. (66, 70, 71, 72쪽)
도시에서도 풀숲이 어딘가 있다면, 아주 작은 풀숲에도 풀벌레가 있기 마련입니다. 조그마한 풀숲에 무슨 먹이가 있다고 풀벌레가 있으랴 싶지만, 참말 풀벌레가 있습니다. 작은 풀숲과 작은 풀벌레는 메마르거나 거친 도시 한복판에 푸른 바람을 가만히 나누어 줍니다. 쉬잖고 달리는 자동차에, 쉬잖고 손전화로 떠드는 사람들 물결이 넘치지만, 어느 한때 자동차가 안 지나가고 사람들도 없으면, 작은 풀숲에서 가늘게 비이비이 새애새애 풀벌레 노랫소리가 흐르곤 합니다.
노래란 무엇일까요. 가수가 방송에 나와서 불러야 노래일까요. 라디오에서 흐르거나 전자기기로 들어야 노래일까요.
스스로 입으로 흥얼거리는 노래는 어디 있을까요. 방송에서 흐르는 노래 말고, 우리가 스스로 지어서 부르는 노래는 어디 있을까요.
노는 아이들은 늘 노래를 불렀습니다. 동네에서 노는 아이들은 늘 서로서로 어우러져 노래를 불렀습니다. 놀이는 곧 노래입니다. 놀이를 하니 늘 노래가 흘렀습니다.
일하는 어른들도 언제나 노래를 불렀습니다. 마을에서 일하는 어른들은 언제나 서로서로 노래 한 가락으로 고단한 일을 잊었습니다. 일은 곧 노래입니다. 일을 하니 언제나 노래가 싱그러이 흘렀습니다.
.. 우리는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인식할 수 있는 안목을 길러야 합니다 … 나는 이야기가 영혼의 일용할 양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이야기가 없으면 못 삽니다 … 사람마다 자신에게 맞는 방식이 있습니다. 그게 문제죠. 글쓰기에는 왕도가 없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 글 쓰는 법을 가르칠 수 없다고 하는 겁니다. 자신에게 맞는 것을 찾아야만 합니다 … 자신이 써야 할 것을 쓰되, 그 결과에는 신경 쓰지 말아야 합니다 … 책의 마지막 원고를 타이핑하는 데에도 특정한 속도가 있어요. 그 책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이 손가락에 느껴집니다 .. (98, 107, 166, 168, 175쪽)
폴 오스터 님이 ‘글’이 아닌 ‘말’로 이야기를 들려주는 《글쓰기를 말하다》(인간사랑,2014)를 읽으면서 생각합니다. 폴 오스터 님이 ‘글’로 보여주는 소설은, 폴 오스터 님이 스스로 누리는 삶을 보여주는 노래이리라 생각합니다. 《글쓰기를 말하다》라는 책에서 ‘말’로 들려주는 이야기는, 폴 오스터 님이 스스로 즐기는 삶을 드러내는 노래로구나 싶습니다.
폴 오스터 님이 말하는 글쓰기는 바로 폴 오스터 님이 스스로 누리는 삶입니다. 이녁 삶을 쓰기에 글입니다. 이녁 삶을 말하기에 이야기입니다.
글감이 무엇이든 대수롭지 않습니다. 어떤 글감으로 이야기를 풀거나 맺든, 언제나 폴 오스터 님 스스로 즐겁게 누리는 삶이 소설 하나로 태어납니다.
.. 나는 무엇을 쓰고 있는 걸까요? 내 안에 있는 삶의 이야기겠죠 … 내가 미국인들의 언어에서 주목한 것은 사람들의 언어가 매우 투박하면서도 생생하고 독창적이라는 점이었습니다 … 우리 모두 진실을 찾고 있지 않습니까? 신뢰할 수 있을 만한 무엇, 우리를 바르고 견고하게 설 수 있게 해 주는 어떤 것 말입니다 … 책을 읽는 시간이야말로 진정 우리가 낯모르는 사람의 마음속으로 스며들 수 있는 유일한 시간입니다 … 자기 자신도 놀랄 만한 것을 써 보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자신이 전에 하던 일에 거스르는 방향으로 가 보겠다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자기가 이전에 썼던 작품을 모두 불사르고 없애야 합니다 … 세상사에 대해서 쓸 때마다 매번 다른 방식으로 접근해도 될 정도로 이 세상이 넓고 흥미로운 것만큼은 확실합니다 .. (208, 220, 236, 295쪽)
삶을 가만히 바라봅니다. 삶을 곰곰이 지켜봅니다. 바라보고 지켜보기에 천천히 느낍니다. 천천히 느끼기에 시나브로 알아챕니다. 시나브로 알아채기에 즐겁게 맞아들여 기쁘게 노래하면서 글로 엮습니다.
폴 오스터 님은 이녁이 발을 디딘 미국 사회를 바라봅니다. 그리고, 이녁 아버지를 바라보고, 이녁을 둘러싼 삶자락을 바라봅니다.
나는 내가 디딘 한국 사회를 바라봅니다. 그리고, 내가 아이들과 지내는 시골마을을 바라봅니다. 시골마을에서 한국 사회를 읽고, 시골마을 보금자리에서 숲과 들과 하늘과 바다를 곰곰이 되새깁니다.
내가 쓰는 글은 내 삶입니다. 네가 쓰는 글은 네 삶입니다. 폴 오스터 님이 쓰는 글은 폴 오스터 님 삶입니다.
삶은 모두 다릅니다. 그러니, 사람마다 쓰는 글이 다 다릅니다. 더 나은 글이나 덜떨어지는 글은 없습니다. 그저 모두 다른 글입니다. 모두 다르기에 모두 사랑스러운 글이고, 모두 다르면서 모두 재미난 글입니다. 왜냐하면, 내 삶은 내 삶대로 재미있고, 네 삶은 네 삶대로 재미있어요. 내 삶은 내 삶대로 나 스스로 아름답게 일구는 하루요, 네 삶은 네 삶대로 네가 스스로 아름답게 일구는 하루입니다.
.. 당신의 한계가 거기까지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면 그 한계를 넓혀 나갈 수 있습니다 … 소설의 아름다움은 세상에 존재하거나 존재했던 모든 것에 대해 열린 마음을 갖는 것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합니다 … 나는 앞으로도 100년은 읽힐 수 있는 책을 쓰고 싶습니다. 그리고 의미 없는 사소한 것에 독자들이 발목 잡히지 않기를 바랍니다 … 일을 하고 있을 때 환경은 작가가 들어가 있는 방이 아니기 때문이죠. 앞에 자리잡고 있는 책의 페이지가 환경입니다. 그곳이 작가가 살고 있는 세계입니다 … 《모비딕》은 그 어떤 것도 잉태하지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그저 우리를 끊임없이 사로잡는 흥미진진한 책으로 유아독존할 뿐입니다. 그런데 《주홍글씨》는 아이들을 낳았죠 .. (296, 297, 308, 329, 338쪽)
《글쓰기를 말하다》를 한참 읽다가 《모비딕》과 《주홍글씨》를 말하는 대목에서 곰곰이 생각에 젖습니다. 참말 《모비딕》은 아무 아이를 못 낳았을까 궁금합니다. 참말 《모비딕》은 새로운 숨결을 우리한테 못 불어넣었을까 궁금합니다.
나는 《모비딕》이 낳은 아이도 대단히 많다고 느낍니다. 《모비딕》이 낳은 아이는 꼭 ‘소설’로만 나타나지 않는다고 느낍니다. 과학책이나 그림책으로도 나타납니다. 동화책이나 시집으로도 나타납니다. 그리고, 종이책이 아닌 삶책으로도 나타납니다. 무슨 소리인가 하면, 새로운 소설을 낳는 아름다운 숨결이어야 아름다운 소설은 아니라고 느껴요. 새로운 숨결은 우리 삶자락 곳곳에 있습니다. 그리고, 아름다운 문학이 낳는 아이는 우리 가슴속으로 깊이 스며들면서 ‘나 스스로 내 삶에서 새로운 이야기를 지어서 누리는 사랑’으로 태어납니다.
숲에서 자란 나무를 베어 만든 종이에 글을 찍을 때에만 ‘책’이라고 느끼지 않습니다. 책을 펴내지 않더라도, 아이들과 도란도란 이야기꽃 피우는 삶이라면, 이러한 이야기꽃이 바로 책입니다. 삶책입니다. 일하면서 즐거이 노래를 부르는 삶이라면, 이러한 일노래가 바로 책입니다. 삶책이지요.
아름다운 소설 《모비딕》은 커피집 ‘스타벅스’를 낳았습니다. 스타벅스란 커피집이 어떤 곳인지 나는 잘 모릅니다만, 이 커피집을 드나드는 수많은 사람들은 저마다 수많은 이야기를 주고받습니다. 커피 한 잔을 마시면서 온갖 이야기가 끝없이 자랍니다.
.. 희망이 없다면 도대체 무슨 수로 아침에 눈을 뜰 수 있겠어요 … 책을 읽으려면 책에게 뭔가 돌려주어야 합니다 .. (345, 385쪽)
대통령을 보면 희망이 없을 만합니다. 한국전력이란 회사와 경찰과 공권력과 언론매체가 밀양이란 곳에서 하는 짓을 보면 희망이 없을 만합니다. 프랑스 문학을 프랑스말이 아닌 영어로 옮긴 책을 살펴서 다시 한국말로 옮기는 책이 나오는 한국 책마을을 보면 희망이 없을 만합니다. 입만 열었다 하면 ‘국산’을 외치는 한국사람이면서 한국 시골을 와장창 무너뜨리려는 자유무역협정 따위를 함부로 맺는 정치라든지, 이런 정치를 꾸짖을 줄 모르는 사람들을 보면 희망이 없을 만합니다. 아직도 사라질 줄 모르는 국가보안법을 보면 희망이 없을 만합니다.
그렇지요. 우악스럽거나 바보스럽거나 멍청하거나 어처구니없거나 터무니없는 모습이나 몸짓을 보면 희망이 싹틀 수 없습니다.
밤하늘에 돋은 별을 보면 꿈이 싹틉니다. 아침에 뜨는 해를 보면 꿈이 자랍니다. 가을 느즈막할 때에도 새롭게 피는 민들레를 보면, 봄하고는 사뭇 다른 꽃빛과 함께 꿈이 피어납니다. 새근새근 잘 자는 아이들이 아침에 번쩍 눈을 뜨면서 까르르 하하 웃고 뛰노는 모습을 보면 꿈이 몽실몽실 큽니다.
오늘 밤도 별을 보면서 글을 한 줄 씁니다. 오늘 하루도 아이들과 시골집에서 복닥복닥 지낸 모습을 되새기면서 글을 한 줄 씁니다. 나는 내 삶에서 맑게 흐르는 즐거운 노래를 글로 씁니다. 나는 내 하루에서 밝게 춤추는 신나는 웃음을 글로 씁니다. 새로운 하루도 즐겁게 맞이하고 싶으니 글을 씁니다. 지나가는 하루를 기쁘게 돌아보고 싶으니 글을 씁니다. 글을 써서 삶 한 자락을 이야기로 남길 때에, 어쩐지 내가 스스로 꿈을 씨앗으로 심어서 돌보는구나 싶기도 합니다. 4347.9.25.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