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짓기와 글쓰기



  오늘날에는 누구나 ‘글쓰기’를 말한다. 지난날에는 으레 ‘글짓기’를 말했고, 일제강점기와 해방 언저리에는 ‘作文’을 말했다. ‘作文’은 일제강점기에 일본 교육제도와 함께 들어온 ‘일본 한자말’ 가운데 하나이다. 해방 뒤에는 이 낱말을 한글로만 바꾸어 ‘작문’이라는 이름을 썼는데, 초등학교 어린이한테는 ‘글짓기’로 다시 말풀이를 해서 가르쳤다.


  그러면, ‘짓기’와 ‘쓰기’란 무엇인가? ‘짓다’는 “새롭게 나타나도록 하는 일”을 뜻한다. 이 뜻을 바탕으로 “이름을 처음으로 붙이다”와 “집·옷·밥을 마련하다”와 “흙을 가꾸어 먹을거리를 얻다” 같은 쓰임새가 나타났다. ‘글’이 태어나서 퍼진 지 얼마 안 된 터라, ‘글을 짓다’ 같은 쓰임새는 한참 뒤에야 나타났다. ‘짓다’는 요즈막에 들어서서야 비로소 “이야기·글·노래를 새로 내놓다”를 뜻하는 쓰임새가 나타난다.


  ‘쓰다’는 “금을 긋거나 줄을 이어서 어떤 모양이 나타나도록 하다”를 뜻한다. 이 뜻을 바탕으로 “더 잘 보이도록, 또는 잊혀지지 않도록 옮기거나 남기다”와 “떠오르는 생각이나 느끼는 마음이나 곰곰이 헤아린 이야기를 글로 나타내다” 같은 쓰임새가 나타났다.


  사람이 이룬 삶을 헤아리면, 사람은 누구나 ‘말’로 삶을 나타냈다. ‘말’로 모든 이름을 붙였다. 아주 오랫동안 말로 삶을 지었다. ‘이름짓기’라고 하듯이, 하늘이나 땅이나 풀이나 짐승이나 살림살이와 얽힌 이름을 모두 말로 지었다. 이름짓기란 말짓기요, 말짓기란 삶짓기인 셈이다. 그래서, ‘글짓기’란 이름이나 말이나 삶을 짓듯이, 생각을 지어서 이야기를 새롭게 내놓는 일을 가리킨다.


  그러나, 한국 사회는 일제강점기와 군사독재를 거치면서 ‘학교 글짓기 수업’은 ‘거짓 웅변 교육’과 ‘위문편지 쓰기’와 ‘새마을 운동 찬양’과 ‘충효 독후감 쓰기’만 일삼았다. 이런 나날이 무척 길었다. 해방 뒤부터 1990년대 언저리까지 이런 끔찍한 교육이 이루어졌다. 이리하여, 이런 바보스러운 학교교육을 떨쳐내려고 ‘글쓰기’라는 낱말을 새로 ‘짓’는다. 참말 ‘글쓰기’라는 낱말은 새로 ‘지어’서 태어났다(이오덕 님이 지은 낱말이다).


  자, 그러면 생각할 노릇이다. ‘글짓기 교육’이 ‘글쓰기 교육’으로 이름을 바꾸었는데, 학교와 사회와 학원에서 ‘글쓰기’를 슬기롭거나 아름답거나 사랑스럽게 하는가? 예나 이제나 똑같이 틀에 박힌 채 아이들을 짓누르거나 짓밟는 입시지옥만 되풀이하지 않는가? 이름은 ‘글쓰기’로 바꾸었으나, ‘글을 쓰는 일’이 무엇인지 또렷이 느끼거나 생각하지 못하면서 어영부영 흐르지는 않는가.


 ‘글쓰기’는 “우리 마음이나 생각을 수수하게 글로 밝히는 일”이다. ‘글짓기’는 “우리 마음이나 생각을 글로 새롭게 드러내는 일”이다. 글쓰기를 하든 글짓기를 하든 ‘마음·생각·뜻’을 ‘글’로 밝히거나 드러내야 즐겁다. 우리는 스스로 즐거운 마음이 되고 아름다운 생각이 되어 글을 쓸 수 있어야 한다. ‘글짓기’라는 낱말이 어떤 뜻이요, 권력자와 학교 사회가 이 낱말을 어떻게 뒤틀어 놓았는가를 살피지 못한다면, 글을 쓸 수 없다. ‘글쓰기’라는 낱말이 어떤 뜻이며, 이 낱말을 왜 새로 지었는지 헤아리지 못한다면, 글을 읽을 수 없다. 짓고 쓰며 누리는 삶을 돌아보지 못한다면, 글을 알 수 없다. 4347.11.3.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삶과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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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무가 아기를 낳는다. 나무가 낳은 아기는 바람을 타고 멀리 멀리 나들이를 다닌다. 나무가 낳은 아기는 어머니한테서 떨어져도 씩씩하다. 때로는 어머니 곁에 찰싹 달라붙고 싶어서 바로 옆에 드리우기도 하지만, 어머니처럼 우람하게 자라고 싶은 아기들은 참으로 먼 데까지 날아가서 살포시 땅에 뿌리를 내린다. 사람이 낳은 아기는 어디에서 씩씩하게 뿌리를 내리면서 자랄까. 사람이 낳아 돌보는 아기는 저마다 어떤 숨결이 되어 아름답게 자랄까. 이세 히데코 님이 빚은 《나무의 아기들》은 꿈과 사랑을 가슴에 품으면서 새근새근 잔다. 쉰 해도 자고 백 해도 잔다. 때로는 이백 해나 삼백 해를 잘 수 있다. 깨어나야 할 때 눈을 번쩍 뜨고는 쑥쑥 줄기를 올린다. 우리들 사람도 깨어나야 할 때를 슬기롭게 알아채면서 아름답게 피어나리라 믿는다. 누군가는 씨앗이 맺은 뒤 곧바로 깨어날 테고, 누군가는 씨앗 모습대로 오래오래 흐르다가 조용히 깨어날 테지. 모두 다른 삶이면서 모두 같은 사랑인 아름다운 아기요 씨앗이다. 4347.11.3.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한 줄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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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의 아기들- 2016 전국 국공립 어린이집 독서지도 연구회 선정, 2015 어린이도서연구회, 아침독서신문 선정
이세 히데코 글.그림, 김소연 옮김 / 천개의바람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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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괜찮아 ㅣ 푸른도서관 40
안오일 지음 / 푸른책들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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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사랑하는 시 41



아이들은 사랑으로 태어나서 자란다

― 그래도 괜찮아

 안오일 글

 푸른책들 펴냄, 2010.11.25.



  밤새 아이들 이불깃을 여밉니다. 여름에도 겨울에도 으레 이불을 뻥뻥 차면서 뒹구르르 구르는 아이들이기 때문입니다. 갓난쟁이였을 적에는 기저귀를 가느라 밤잠을 못 이루고, 조금 큰 뒤에는 밤오줌갈이를 하느라 밤잠을 못 이루며, 제법 큰 요즈음은 이불깃 여미느라 밤잠을 못 이룹니다. 작은아이가 열 살은 넘어서야 비로소 밤잠을 느긋하게 누릴 만할까 하고 헤아립니다.


  우리 집에 찾아온 아이들은 모두 사랑입니다. 사랑을 받아 태어났고, 사랑을 받으면서 살며, 사랑을 오롯이 돌려주면서 하루를 누립니다. 마음껏 뛰놀고 어지르면서 즐겁습니다. 신나게 달리거나 구르면서 기쁩니다. 배불리 먹고 목청껏 노래하면서 신납니다.


  할 수 없는 놀이는 없습니다. 할 수 없는 일은 없습니다. 무엇이든 곱게 생각하면서 차근차근 이룹니다. 자전거놀이를 하든 소꿉놀이를 하든 인형놀이를 하든 평상놀이를 하든 흙놀이를 하든 꽃놀이를 하든, 무엇이든 다 할 수 있습니다. 하늘을 바라보고 들을 살핍니다. 나무 열매를 함께 따고 들풀을 함께 뜯습니다. 서로 아끼면서 돕는 삶을 날마다 짓습니다.



.. 미술 숙제가 아버지 발 그려오기다 // 술 마시고 곯아떨어진 / 아버지의 발을 그렸다 // 처음으로 아버지의 발을 자세히 봤다 ..  (아버지의 발)



  아이들은 사랑으로 태어나서 자랍니다. 어른이 된 사람도 누구나 사랑으로 태어나서 자랍니다. 어른이 되었기에 더 안 자라도 되지 않습니다. 어른이 되었으니 회사에 나가 돈만 벌어야 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유치원이나 어린이집을 거쳐서 학교에 다녀야 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학교에 가려고 태어나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사랑을 받으려고 태어납니다. 아이들은 사랑을 받으면서 삶을 배우려고 태어납니다.


  아이를 낳은 어버이가 할 일은 ‘아이한테 사랑으로 삶을 가르치기’입니다. 어버이 누구나 할 일이란 ‘아이를 사랑으로 바라보며 삶을 물려주기’입니다.



.. 빈 화분에 / 꽃씨를 심고 물을 주었다 // 아기 손톱 같은 싹이 나왔다 // 예쁘게 웃어 주었다 ..  (꽃씨와 나)



  대학교에 보내려고 아이를 낳지는 않겠지요? 돈만 버는 기계로 키우려고 아이를 낳지는 않겠지요? 손자나 손녀를 보려고 아이를 낳지는 않겠지요?


  아이를 낳는 어버이는 먼저 생각을 해야 합니다. 아이를 낳기 앞서, 아이를 왜 낳으려 하는지 생각을 해야 합니다. 아이를 낳은 뒤 이 아이와 어떻게 살아갈 마음인지 생각을 해야 합니다. 아이를 낳고 나서 이 아이와 함께 ‘어버이 스스로 어떻게 삶을 지어 가꾸겠노라’ 하고 생각을 해야 합니다.


  학교가 아이를 가르치지 않습니다. 학교에 아이를 도맡길 수 없습니다. 아이는 어버이한테서 사랑을 물려받고 사랑을 배워야 합니다. 아이는 어버이 곁에서 ‘삶을 이루는 모든 것’을 이어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어버이는 아이 곁에서 ‘삶을 이루는 모든 것’을 차근차근 보여주면서 알려줄 수 있어야 합니다.



.. 약속 시간이 많이 남아 / 오랜만에 걸었다 / 차로만 다녀서일까 / 늘 지나던 길이었는데도 / 없다가 생긴 것처럼 낯선 것들이 많았다 ..  (걸어야겠다)



  오늘날 한국 사회를 살펴보면, 도시에서든 시골에서든 그저 ‘입시 지옥 구렁텅이’입니다. 어느 어버이라 하든 아이를 사랑으로 낳았을 텐데, 정작 아이들한테 삶을 가르치지 않고 ‘입시 지식’만 쑤셔넣으려 합니다. 아이들이 사랑을 배우도록 북돋우지 않고 ‘시험 공부’만 시키려 합니다.


  아이들은 ‘수험생’이 되려고 태어났나요? 아이들은 해맑은 나날을 오직 ‘시멘트 교실’에 갇혀 해도 바람도 비와 눈도 맞지 못하면서 교과서와 참고서와 문제집만 들여다보도록 태어났나요? 아이들은 왜 대학교에 가야 하고, 아이들은 왜 교과서 지식에 갇혀야 하나요? 우리 어버이들은 왜 아이들을 끔찍한 시험지옥과 입시지옥에 몰아넣을까요?



.. 체육 시간 / 달리기를 하다 넘어졌다 // 깨진 무릎을 감싸는데 / 손 하나가 다가왔다 / 싸우고 이틀 동안 말 안 하던 친구다 ..  (손)



  안오일 님이 쓴 ‘청소년시’를 그러모은 《그래도 괜찮아》(푸른책들,2010)를 읽습니다. 이 시집에 모인 시들은 거의 모두 ‘입시지옥에서 앓는 아이들을 달래는 이야기’를 다룹니다. ‘오롯이 선 한 사람’이 아니라 ‘번호표를 받고 시험지옥에서 허덕이는 소모품’이 되어야 하는 아이들을 다룹니다.


  책이름에서도 엿볼 수 있지만, 이 시집은 푸름이를 ‘달래’거나 ‘다독이’려는 뜻으로 태어납니다. 아무래도 한국 사회가 온통 입시지옥이니 이러한 시집이 태어날밖에 없구나 싶습니다.


  그러면, 어른들은 무슨 일을 해야 할까 궁금합니다. 입시지옥을 어찌할 길이 없으니, 입시지옥이 끝날 때까지 더 기운을 내서 버티라고 해야 할까요? 입시지옥에서 아이들을 건져내야 하지 않나요? 입시지옥을 따순 햇볕으로 녹여 없애야 하지 않나요? 학교가 입시지옥이 아닌 ‘사랑스러운 배움터’가 되도록 슬기를 모아야 하지 않나요?



.. 언젠가는 노란 꽃을 피울 것 같다 ..  (순영이)



  동시도 청소년시도 어른시도 모두 ‘학교 밖’으로 나올 수 있기를 빕니다. 어떤 시이든 ‘제도권 울타리’가 아닌 삶을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이들은 참말 아픕니다. 그러나, 아이들을 아프게 하는 사람은 바로 ‘우리 여느 어버이 모두’입니다. 대통령이 아이들을 아프게 하지 않습니다. 국회의원이나 시장이나 군수나 판사나 의사나 변호사가 검사나 뭐 이런저런 기자나 지식인이나 학자나 교수나 교사나 이런저런 어른들이 아이들을 아프게 하지 않습니다. 아이를 낳아 돌보는 여느 어버이가 아이들을 아프게 합니다. 왜 그럴까요? 여느 어버이 스스로 이 입시지옥에 아이들을 내몰기만 하기 때문입니다. 여느 어버이 스스로 아이들한테 교과서와 참고서와 문제집만 잔뜩 안기기 때문입니다. 여느 어버이 스스로 아이들을 입시지옥에 몰아세운 뒤 ‘삶과 사랑은 아예 안 보여주고 안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시집 《그래도 괜찮아》가 아픈 푸름이를 달래려는 넋은 예쁘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푸름이가 아파서 달래려고만 해서는 시도 문학도 글도 삶도 이야기도 될 수 없습니다. 푸름이가 아픈 뿌리가 무엇인지 읽어서 밝힐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아픈 뿌리를 뽑아서 새로운 씨앗을 심을 수 있어야 합니다.


  아무쪼록 다음 시집에서는 ‘현상 건드리기’에서 거듭날 수 있기를 빕니다. 겉만 건드린대서 아픈 생채기를 다스릴 수 있지 않습니다. 어디가 어떻게 아픈지 모르면서 ‘어머니 손은 약손’이라 말한들, 아픈 곳을 다스리지 못합니다. 아이들을 아프게 하는 뿌리를 알아채고, 아이들을 사랑스럽게 보듬는 삶을 마주하면서, 아이와 어른이 함께 배우고 자라는 기쁜 사랑을 노래할 수 있을 때에 비로소 청소년시가 튼튼하게 설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4347.11.3.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청소년문학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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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순이 47. 동생 태운 세발자전거 (2014.9.18.)


  뒷바구니에 앉아 발로 바닥을 밀던 자전거순이가 이제 앞자리에 앉아서 발판을 구르기로 한다. 동생을 뒷바구니에 태운다. 산들보라는 뒷바구니에 선다. 네 살 어린이는 뒷바구니에 설 때에 가장 알맞다. 자전거순이는 동생을 태운 뒤 힘차게 자전거를 굴린다. 마당을 빙글빙글 잘 돈다. ㅎㄲㅅㄱ

(최종규 .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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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순이 46. 누나 태운 세발자전거 (2014.9.18.)



  마음 너그러운 산들보라가 세발자전거 뒷바구니에 누나를 앉힌다. 누나를 앉히고 세발자전거를 몰겠단다. 그러나 산들보라는 발만 발판에 얹을 뿐, 뒷바구니에 앉은 누나가 발로 척척 밀면서 자전거가 구르도록 한다. 자전거순이가 노래를 부르면서 맨발로 자전거를 굴린다. ㅎㄲㅅㄱ


(최종규 .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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