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스미추'는 인천광역시 남구청에서 내는 구청 소식지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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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빠랑 엄마랑 모처럼 나란히 인천으로 헌책방마실을 나오다.

 - 2010.12.16. 인천 배다리 아벨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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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읽기 글쓰기


 글이란, 글을 읽는 사람 몫입니다. 글을 쓰는 사람 몫이 아닙니다. 제아무리 글을 아름답고 알맞게 잘 썼어도 글을 읽는 사람이 아름답거나 알맞게 헤아리지 못하면 부질없습니다. 글쓴이한테 부질없지 않습니다. 글을 읽는 사람한테 부질없습니다. 글을 쓰는 사람은 빈틈없거나 옹글게 이야기를 들려주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무언가 제 마음속에서 샘솟는 싱그러운 물줄기가 있기에 글을 씁니다. 여기저기 엉성하거나 어리숙할 테지요. 이 엉성하고 어리숙한 가운데 깃든 보배덩어리를 읽는이가 받아들이거나 맞아들이면 넉넉합니다. 맞느냐 틀리느냐를 따지는 글읽기가 아닙니다. 나 스스로 한결 아름다우며 사랑스럽게 살아가는 길을 느끼면서 살피고자 찾아서 하는 글읽기입니다. 글쓴이는 처음부터 삶쓰기를 하듯이 글쓰기를 합니다. 읽는이 또한 처음부터 삶읽기를 하듯이 글읽기를 하면 됩니다. 삶쓰기와 삶읽기가 어우러질 때에 글쓴이와 읽는이는 마음과 마음으로 만납니다. 술자리에서 다 함께 소주 열 병을 까야 술맛이 나지 않습니다. 고작 보리술 한 병을 앞에 놓고 헬렐레 할지라도 술맛이 납니다. 가락이니 높낮이니 엉터리라 할지라도 노래하는 맛이 있습니다. 노래하는 마음이 있으니까요. 글을 쓰는 마음은 하느님 마음이나 부처님 마음이 아닙니다. 그저 조그마하며 모자란 사람 마음입니다. 글을 읽는 마음 또한 하느님 마음이나 부처님 마음이 아닙니다. 그예 작달막하며 어줍잖은 사람 마음입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 삶과 삶을 나누며 사랑과 사랑이 예쁘게 어깨동무합니다. 이 사이에서 책 하나 태어납니다. (4343.12.23.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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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홍바늘꽃 카르페디엠 15
질 페이턴 월시 지음, 햇살과나무꾼 옮김 / 양철북 / 2007년 12월
평점 :
절판




 능금나무는 전쟁을 모릅니다
 [책읽기 삶읽기 32] 질 페이턴 월시, 《분홍바늘꽃》


 20세기 첫무렵 유럽에서는 커다란 싸움판이 두 차례 벌어졌습니다. 흔히들 ‘세계대전’이라 하지만, 가만히 따지면 ‘유럽 싸움’입니다. 유럽사람들이 저희 나라나 겨레를 한껏 살찌우려는 마음으로 이웃 나라나 겨레로 총칼을 들고 밀어붙이면서 벌어진 싸움판입니다.

 그런데 이 싸움판을 벌인 나라나 겨레를 들여다볼 때에, 싸움을 일으킨 나라에서 밑바닥 자리에 있는 사람들, 이를테면 농사꾼이라든지 노동자들은 어떤 삶이었을까 궁금합니다. 밑바닥 자리에 있는 사람들 또한 이웃 나라나 겨레로 총칼을 들고 쳐들어가서 죽이고 죽으며 돈과 보배를 빼앗는 가운데 내 밥그릇을 채우는 일을 기쁘게 맞아들였으려나요. 권력자가 시키는 대로 바보처럼 따르거나 얼간이처럼 못난 짓을 하고 말았으려나요.

 유럽에서 펼쳐진 두 번째 큰 싸움판을 무대로 쓴 청소년소설 《분홍바늘꽃》을 읽습니다. 이 청소년소설을 읽으면서 곰곰이 생각해 봅니다. 싸움을 일으킨 독일 권력자는 크나크게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싸움을 일으킨 독일 권력자 뒤에는 세계 경제와 무기시장을 주름잡던 거대재벌이 있었고, 이 거대재벌은 미국에 있는 록펠러와 모건이었다고 합니다. 총칼과 같은 무기란 거대재벌이 돈을 벌어들이는 ‘공장 상품’이고, 더 큰 탱크와 더 빠른 비행기와 더 무서운 항공모함은 더 어마어마하게 큰 돈을 벌어들이는 ‘공장 인기상품’입니다.

 으레 독일하고 이탈리아만 못된 짓을 저질렀다고들 역사책에 적힙니다. 그러나 찬찬히 들여다보면, 영국이든 프랑스이든 네덜란드이든 에스파냐이든 …… 아프리카며 아시아며 중남미며 닥치는 대로 쳐들어가서 식민지를 삼았습니다. 이들 ‘힘있고 돈있으며 이름있는’ 유럽 나라들은 제 나라와 겨레 밥그릇을 더 크게 불리려고 총칼을 앞세우며 싸움박질을 했습니다. 어쩌면, 유럽에서 벌어진 큰 싸움이란 권력자끼리 맞붙은 ‘식민지 넓히기 싸움’이라 해야 알맞을는지 모릅니다. 이 나라 밑바닥 사람이든 저 나라 밑바닥 사람이든 그저 고달파야 하고 싸움터에 병사로 끌려가 총알받이가 되어야 했던 슬픈 굴레인지 모릅니다.


.. 나는 전쟁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어른들은 전쟁에 대해 이야기하고, 전보다 뉴스에 더 많이 귀를 기울였다. 나는 비행기를 보는 것이 좋았다 ..  (17쪽)


 학교에서 가르치는 한국사나 세계사는 거의 모두 ‘싸움박질을 해서 땅넓이를 얼마나 넓혔고, 정치권력자는 언제 어떻게 물갈이가 되었는가’ 하는 데에 머무릅니다. 지난날 사회와 문화를 다루는 대목 또한 ‘한 나라나 겨레를 이루는 수수한 사람들 삶’이 아닌 ‘권력자가 누리던 삶’을 다룰 뿐입니다.

 우리네 전통문화를 들여다보아도 마찬가지입니다. 궁중음식과 궁중옷을 전통문화로 다룹니다. 궁중에서 임금님과 신하들이 누리던 노래를 전통음악으로 여깁니다. 따지고 보면, 역사책을 쓰는 사람은 나라에서 돈과 지위를 받아 나라일을 적바림하는 사람이지, 여느 사람들 사이에서 살면서 여느 사람들 삶과 발자취를 살피거나 적바림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예나 이제나 마찬가지인데, 대학교수가 되어 역사를 파고들면서 역사를 쓰지, 골목동네나 시골 농삿집 사이에서 함께 밑바닥 삶을 꾸리는 가운데 역사를 파헤치거나 파고드는 사람은 없습니다.

 “재 너머 사래 긴 밭 언제 갈려 하느냐” 하고 노래하는 시는 있어도, 몸소 밭갈이 논갈이 씨뿌리기 김매기 가을걷이를 하는 가운데 ‘지식인 스스로 생활인이 되어 땀흘리는 삶을 노래하는 시’는 한 꼭지조차 없습니다.

 오늘날에도 이 흐름은 그리 바뀌지 않습니다. 집안에서 살림하고 아이 키우고 밥을 하고 빨래를 하는 나날을 노래하는 대중가요나 문학이나 영화는 얼마나 될는지요. 비정규직이든 대형마트 점원이든 중·고등학교 수험생 자리에서든 내 삶을 노래하는 대중가요나 문학이나 영화는 있기나 한지요.


.. 갑자기 짜릿한 느낌이 등골을 타고 흐르며 몸이 떨렸다. 자유였다. 아무도 나를 돌봐 주지 않을 것이다. 나를 걱정해 주거나, 뭔가를 시키거나, 제때에 먹으라고 하거나, 이를 잡으려 하거나, 다친다고 막아 주지도 않을 것이다. 어른들은 모두 다른 데 정신이 팔려 있었다. 모두들 전쟁 때문에 정신이 없었다 ..  (44쪽)


 청소년문학 《분홍바늘꽃》은 영국 런던이라는 도시에서 힘겨이 살아남은 아이들이 주인공입니다. 어른들은 어른들끼리 싸움을 일으켜 놓고는 아이들이 걱정스럽다며 ‘도시에서 내보내 시골로 옮기는’ 일을 합니다. 그렇다고 시골에 살붙이나 피붙이가 있지 않은 아이들도 많을 뿐더러, 시골로 옮기기만 한다고 아이들이 잘 살아갈 수 있지 않습니다. 어른들부터 그저 도시에서만 살고파 하면서 아이들만 달랑 시골로 보내서 무엇이 나아지겠습니까. 어른들 스스로 도시에서 득시글거리는 삶을 그치며 시골에서 손수 땅을 일구어 조용히 꾸리는 삶이라 한다면, 아이들 또한 즐거이 시골로 갈 만합니다. 어른들은 도시에서 돈을 벌거나 싸움터로 나아가 이웃 나라 사람들을 죽이는 수렁에서 허덕이는데, 아이들이 시골로 가고파 할까 모르겠습니다.

 책을 덮으며 생각에 잠깁니다. 영국이든 독일이든 프랑스이든 이탈리아이든 …… 이들 나라 사람들이 더 큰 도시를 키우지 않고, 스스로 수수하게 농사지으며 제 살림을 조그맣게 꾸리는 즐거움을 누린다면 싸움이 일어났을까 하고.

 싸움판 이야기는 떠올리기 싫어 책상맡 시집을 하나 꺼냅니다. 갑갑할 때마다 늘 펼치는 신동엽 님 시집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입니다. 책장을 죽 넘겨 〈산문시 1〉를 읽습니다. “스킨디나비아라든가 뭐라구 하는 고장에서는 아름다운 석양 대통령이라고 하는 직업을 가진 아저씨가 꽃리본 단 딸아이의 손 이끌고 백화점 거리 칫솔 사러 나오신단다 … 하늘로 가는 길가엔 황토빛 노을 물든 석양 대통령이라고 하는 직함을 가진 신사가 자전거 꽁무니에 막걸리병을 싣고 삼십 리 시골길 시인의 집을 놀러 가더란다.”

 대통령이 청와대 같은 데에서 갖가지 서류에 둘러싸인 채 일하지 않는다면, 대통령이 짐자전거에 막걸리병을 싣고는 슬슬 골목길을 달리고 고샅길을 달리며 시인 아저씨네에 놀러간다면, 온누리 어디에서고 싸움이 터질 까닭이 없습니다. 너 죽고 나 살자는 끔찍한 싸움이란 벌어지지 않습니다. 총칼을 든 싸움이든 돈뭉치로 벌이는 싸움이든 일어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경제대국이 되어야 할 까닭이 없고, 국민소득이 이만 달러이든 이십만 달러이든 되어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국민소득이 이백 달러라 할지라도 얼마든지 아름다우며 즐겁게 살아가는 길이 있어요. 국민소득이 아예 0원이랄지라도 서로서로 예쁘게 어깨동무하며 살아가는 길이 있습니다.


.. 길이 구멍투성이라서 버스가 덜컹거리며 지나갔다. 사람들은 건물 더미 사이로 좁은 길을 힙겹게 빠져나가고 있었다. 가게 진열장들에는 유리창 대신 널빤지가 대어진 채 ‘정상 영업’이라는 글씨가 페인트로 조잡하게 쓰여 있었다. 우리는 아무 말도 없이 바라보았다. 머리카락이 붉은 버스 차장 아주머니가 우리한테 몸을 기울이고 창밖을 보더니 말했다. “맙소사. 똑같이 갚아 줘야 돼!” 줄리가 나에게 물었다. “우리 편도 저렇게 (이웃나라를 폭탄으로 잿더미로 만들어 버리는 짓을) 할까?” 나는 몸소리를 치며 대답했다. “나도 모르겠어.” ..  (66∼67쪽)


 유럽에서 크나큰 싸움이 벌어지던 때, 모든 나라가 무기를 들지는 않았습니다. 몇몇 나라는 그냥 흰 깃발을 들었다고 합니다. 괜한 싸움으로 제 나라 여느 사람들이 다치거나 여느 사람들 살림집이 무너지지 않도록 흰 깃발을 펄럭였다고 합니다. 그래도 밑자락에서는 조용히 싸우는 사람이 있었다지만, 평화를 지키거나 사랑하는 길은 총칼에 있지 않음을 몸소 보여줍니다.

 한국땅에서 더 나은 교육을 꿈꾸거나 바라는 사람들이 미국으로든 독일으로든 프랑스로든 영국으로든 많이들 배우러 떠납니다. 사진을 하든 그림을 하든 문학을 하든 다들 이렇게 나라밖, 아니 유럽에서 이름난 나라들로 떠나곤 합니다. 그런데 요즈음은 이름난 나라들보다 이름이 적게 나거나 덜 나거나 안 난 나라로 가곤 합니다. 이를테면 스웨덴이나 덴마크나 핀란드로 배우러들 갑니다. 이러면서 ‘핀란드 교육혁명’이라든지 ‘스웨덴 교육혁명’을 읊습니다. 이들 핀란드이든 스웨덴이든 덴마크이든 교육을 혁명하지 않았는데, 우리 사회하고는 아주 크게 다르니까 마치 혁명이라도 되는 듯 여깁니다.

 이들 나라는 전쟁이 아닌 평화를 사랑하고, 전쟁무기 아닌 논밭연장을 만듭니다. 지식이 아닌 사랑을 가르치고, 정보가 아닌 믿음을 일깨웁니다.

 저마다 사이좋게 어우러지며 살아갈 사람임을 몸소 드러낼 뿐이니, 혁명이라는 이름은 걸맞지 않습니다. 누구나 오순도순 얼크러지며 기쁘게 웃을 사람임을 스스로 보여줄 뿐이기에, 대단한 교육이라 할 수 없습니다.

 학교에서는 시험을 치를 까닭이 없습니다. 학교는 말 그대로 배움터여야 합니다. 학교에서 교사 일을 맡은 이는 아이들이 참답고 착하며 고운 사람으로 크도록 돕는 한편, 교사 스스로 참답고 착하며 고운 어른으로 당신 넋을 지키는 길을 걸어야 합니다.

 “전쟁 반대”나 “평화 사랑”이라는 목소리를 낼 우리들이 아닙니다. 내 삶을 사랑하며 아끼는 길을 조용히 씩씩하게 걸어가야 할 우리들입니다. 내 고향마을을 아끼고, 내 보금자리인 살림집을 사랑할 우리들입니다. 성경책에는 내 한쪽 뺨을 때렸으면 내 다른 쪽 뺨도 때리라 이야기합니다. 우리 옛말에는 미운 아이 떡 하나 더 준다 했습니다. 삶은 사랑이고, 사랑은 삶입니다. 전쟁은 미움이고 미움은 전쟁인데, 전쟁이든 미움이든 삶하고는 너무 동떨어집니다.


.. 우리 집 양쪽 옆집과 건너편 집 두 채가 무너졌는데, 창문 유리가 길 끝까지 날아갔다. 우리 집이 있던 자리에는 커다란 구멍만 남았다. 하지만 사과나무는 거의 뿌리까지 둘로 가라지기는 했어도 이듬해 봄에 새싹이 돋아났고 그 뒤로 꿋꿋이 살아남았다 … 바보같이 들리겠지만, 아무리 히틀러의 폭격기가 하늘을 가득 메워도 나뭇잎이 황금빛으로 물들고 나무에서 떨어진다는 사실이 너무나 신기해 보였다. 물론 당연히 그래야 하고, 또 그렇게 되었지만 말이다 ..  (63, 76쪽)


 능금나무는 싸움이든 전쟁이든 모릅니다. 분홍바늘꽃 같은 조그마한 들꽃 또한 싸움이든 전쟁이든 모릅니다. 호박꽃이 싸움을 알까요. 오얏나무가 전쟁을 알려나요.

 전쟁무기를 만드는 사람들은 상추 한 잎보다 잘날 구석이 없습니다. 총칼을 움켜쥐며 이웃나라로 쳐들어가서 사람을 죽이거나 괴롭히는 권력자는 시금치 한 포기보다 아름다울 수 없습니다.

 나와 동무를 사랑할 길을 찾을 사람입니다. 내 터와 이웃마을을 고루 아끼는 길을 찾을 사람입니다. 《분홍바늘꽃》에 나오는 아이들은 바보스럽고 우악스러운 어른들 굴레에 빠져들지 않습니다. 처음 제 어버이한테서 목숨을 선물받던 때 느낌 그대로, 사랑과 믿음으로 이 땅에서 튼튼하고 당차게 살아내고픈 꿈을 건사합니다.

 어른들은 힘이 좀 여리면 좋겠습니다. 어른들은 돈이 좀 적으면 좋겠습니다. 어른들은 이름이 좀 없으면 좋겠습니다. 수수하고 투박하면서 고즈넉한 삶을 얼싸안는 참사람으로 아이들과 웃고 떠들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4343.12.23.나무.ㅎㄲㅅㄱ)


― 분홍바늘꽃 (질 페이턴 월시 글,햇살과나무꾼 옮김,양철북 펴냄,2007.12.5./9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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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다 쓰고 나서 살피니, 황미나 님이 연재를 다시 한다고 하네요. 그러나, 이 글에서 표절과 창작이라는 고갱이를 놓고 해야 할 말을 다 적었기에 글을 손질하거나 고치지 않고 그대로 둡니다. 



 황미나


 ‘창작’과 ‘표절’과 ‘상상력’은 아주 다른 테두리입니다. 두 가지 다른 누리에서 살아가면서 뜻밖에 거의 똑같아 보이거나 아주 똑같은 창작품이 나올 수 있는 일입니다. 이와 달리 거의 비슷한 누리에서 살아가면서 슬프게 거의 똑같이 보이거나 어떠한 창작품 밑얼을 불러일으키는 모양새가 나타나기도 합니다.

 하나부터 열까지 빈틈없이 똑같을 때에는 도둑질입니다. 그러나, 하나라도 똑같거나 하나라도 비슷할 때에도 도둑질입니다. 흔한 말로 ‘표절’이란 말을 쓰기도 하지만, 제대로 말하자면 ‘베끼기’이거나 ‘훔치기’입니다.

 그런데 하나부터 열까지 빈틈없이 똑같지만 ‘훔치기’도 ‘베끼기’도, 또 ‘시늉하기’나 ‘흉내내기’마저 아니곤 합니다. 왜냐하면 ‘배우기’이기 때문입니다. ‘가르치기’이기 때문입니다. ‘모시기’라든지 ‘따르기’일 때에도 하나부터 열까지 빈틈없이 닮곤 합니다.

 앞선 사람들 땀방울과 슬기와 보람을 밑거름으로 삼아 알뜰히 배우는 사람이 있습니다. 알뜰히 배우는 첫무렵에는 거의 똑같이 따르는 듯 보이지만, 차츰차츰 제 빛깔을 내고 제 무늬를 그리면서 제 목소리를 내는 사람이 있어요. 아이가 제 어버이 삶을 물끄러미 지켜보고 하나하나 똑같이 따르면서 차츰 배우듯, 스승과 제자 사이에는 가르치며 배우는 매무새가 삶으로 고스란히 나타납니다.

 아이가 자라는 모습을 보며 ‘제 어버이를 베꼈다’라든지 ‘제 어버이를 훔쳤다’라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제 어버이가 걷는 길을 똑같이 따를지라도 ‘도둑질’이라 일컬을 사람은 누구도 없습니다. 한길을 서로 즐겁게 어깨동무하면서 걸어가니까요.

 장사에는 동무장사가 있습니다. 서로서로 한뜻 한마음이 되어 장사를 함께할 때에 동무장사입니다. 둘이는 한 가게에서 함께 일할 수 있고, 다른 가게를 차리며 나란히 일할 수 있습니다. 중국사람들은 중국땅을 벗어나 온누리 어디를 가더라도 중국사람거리를 이룹니다. 서로 ‘중국 밥집’을 차린달지라도 값을 더 싸게 해서 판다든지 무얼 한다든지 하며 피 튀기며 다투지 않습니다. 제 살 깎아먹기를 하지 않아요. 한국사람도 미국이나 일본에 가서 ‘한국사람거리’를 만들곤 합니다. 그렇지만 중국사람거리처럼 북적거리거나 아름답거나 살가이 어우러지지 못합니다. 한국땅에서도 똑같습니다. 순대골목이니 냉면골목이니 하지만, 가게마다 다 다른 빛깔을 찾아보지 못합니다. 서로 값을 낮춘다든지 부피를 늘린다든지 할 뿐입니다.

 한국땅에서 한국말을 하는 한국사람들한테는 참다이 창작이나 상상력이라는 문화가 삶으로 뿌리내리지 못합니다. 착하고 참다우며 곱게 내 삶을 일구도록 배우지 못하는 배움터요 마을이며 집입니다. 제도권학교이고 제도권사회이며 제도권문화인 가운데 제도권예술 테두리에서 허덕입니다. 어느 집이건 이웃이나 동무는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내 이웃이나 동무를 마구 밟고 올라서서 1등이 되라고만 합니다. 돈을 더 많이 벌고 이름값은 더 높이 얻으며 힘은 더 세져야 한다고 들볶거나 등떠밉니다.

 연극이든 영화이든 문학이든 ‘재연’이라고 있습니다. 우러르는 작품에 바친다는 뜻과 넋으로 ‘밑바탕이 되는 어느 창작품’에 있는 이야기를 되살리거나 새롭게 바꾸면서 바치는 작품입니다. 데즈카 오사무 님 아톰 만화를 우라사와 나오키가 님이 ‘새로운 로봇 만화’로 다시 그리는 일이라든지, 최규석 씨가 김수정 님 둘리 만화 ‘비꼬아 다시 그리는’ 일이 이와 같습니다.

 ‘다시 그리기’를 하든 ‘비꼬아 그리기’를 하든, 새롭게 그리려는 사람들 자유이며 창조이며 상상력이라 할 만합니다. 누구나 다시 그릴 수 있고 비꼬아 그릴 수 있어요. 딱히 의무가 없는 권리요, 문화이며 예술이라 합니다. 구태여 ‘첫 창작품을 일군 사람’ 마음을 헤아려야 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만, 첫 창작품을 일군 사람이 보기에는 내 작품을 바탕으로 다시 그리거나 비꼬아 그릴 때에 반가이 여길 수 있으나 못마땅히 여길 수 있어요. 자그마한 대목 하나를 따오는 일 하나 때문에 몹시 거슬릴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훔치기나 베끼기란 ‘아주 자그마한 대목 하나’ 때문에 훔치거나 베끼기 때문입니다. 줄거리를 훔치거나 이야기를 훔치지 못합니다(때로는 이런 짓을 서슴지 않는 사람마저 있어 사람들을 놀래킵니다만). 주인공 노릇을 하는 사람이라든지 큰 고빗사위를 훔치거나 베끼지는 않아요(때때로 이런 짓까지 일삼는 사람이 있어 사람들 뒷통수를 칩니다만).

 독자 자리에 선 사람은 이런 창작도 보고 저런 창작도 볼 수 있습니다. 둘을 견주며 어느 쪽이 한결 낫다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첫 창작을 내놓은 사람은 사람들이 이러거나 말거나 제 길을 조용히 걸을 수 있어요. 아무렇거나 내 삶을 알차고 사랑스레 꾸리면 ‘온누리 모든 사람이 다 알아보아 주지 못할지라도 참속을 헤아리며 보듬는 사람’이 다문 하나라도 있기 마련이니까요.

 가르치기와 배우기는 서로한테 도움이 되고 보탬이 됩니다. 스승은 제자를 가르치면서 새로운 길을 틉니다. 제자는 스승한테서 배우며 새로운 눈을 뜹니다. 지식과 정보로 사귀거나 만나는 사이라면 스승과 제자가 아닙니다. 슬기와 깜냥을 북돋울 때에 비로소 스승과 제자입니다.

 가르치고 배우는 사이일 때에는 언제나 즐겁습니다. 내가 너를 따르든, 네가 나를 좇아가든 즐겁습니다. 고마워요. 그러나 베끼거나 훔치는 사이일 때에는 노상 괴롭습니다. 미우며 슬픕니다. 가슴이 찢어집니다. 도둑맞은 사람은 1원짜리 쇠돈을 앗기든 1000원짜리 종이돈을 털리든 똑같이 생채기를 받습니다. 1억 원이나 도둑맞아야 생채기를 받지 않아요. 팔다리가 잘릴 때에만 아프지 않습니다. 손톱 둘레에 거스러기가 생겨도 아파요. 파를 썰다가 손가락을 베어도 아파요. 살짝 꼬집어도 아픕니다. ‘흔하고 널린 설정이니 표절이 아니다’라는 말은 있을 수 없습니다. 마음과 마음이 오가는 일이에요. 하나부터 열까지 똑같다 하지만 ‘이는 도무지 표절이 아니에요’ 하는 말이 나옵니다.

 손쉬운 달걀부침에도 ‘요리법’이 있고, 뜨개질이든 바느질이든 영어로 일컫는 ‘레시피’가 있습니다. 이 요리법에는 모두 저작권이 있어요. 다만, 저작권이 있는 사람이 굳이 저작권을 내세우지 않으니 누구나 거리낌없이 나누며 씁니다. 종이학을 접든 종이배를 접든 한결같이 저작권이 있어요. 그렇지만 첫 창작자가 이러한 저작권을 누리려 하지 않으니 누구나 ‘거저로 마음껏’ 쓰면서 새로운 종이접기 길을 틉니다.

 문학이든 그림이든 사진이든 만화이든 …… 문화와 예술은 법정에서 옳고 그름을 따질 수 없고, 법정에 옳고 그림을 맡겨서는 안 됩니다. 법으로 따진다면야 저작권법이 있으니 첫 창작자는 제 권리를 지킬 수 있어요. 돈으로 갚음을 받습니다. 그런데 문화와 예술을 하는 사람한테 돈이란 무슨 쓸모가 있을까요. 사람들이 알아주는 이름값이란 무슨 보람이 있나요. 게다가 법정소송을 하면 제아무리 짧아도 한두 해는 걸리고, 2심이나 3심을 간다면 자그마치 열 해나 써야 해요. 창작을 하는 사람한테는 한 달만 제 일을 못해도 괴로워 죽을 판인데, 법정소송에 가면서 제 일을 못하면 그야말로 죽음보다 더 아프며 힘든 노릇입니다. 표절, 곧 도둑질로 받은 생채기를 법정소송으로 옮기려 하지 않는 까닭은 ‘작품은 잃었어도, 그러니까 내 창작과 상상력은 빼앗겼어도 내 시간을 잃거나 빼앗기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는 앞으로 다른 작품을 내놓으며 내 새로운 창조와 상상력을 일구고 싶기 때문이에요.

 요즈음 불거지는 말밥을 살피면 더없이 슬픕니다. 한국땅 눈높이는 아주 낮기 때문입니다. 황미나 님이 지나치게 받아들였다고 여길 수 있고, 연속극 작가가 옳을는지 모릅니다. 황미나 님은 ‘어느 연속극이 내 만화에서 밑생각을 훔쳤다’고 따로 밝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황미나 님은 더는 만화그리기를 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이 일을 놓고 숱한 말이 오가지만, 황미나 님이 받은 생채기를 짚는 말은 거의 찾아보지 못합니다. 아마, 황미나 님이 받은 생채기뿐 아니라, 다른 이 밑생각과 창조와 상상력을 훔친 사람 마음이 얼마나 메마르거나 팍팍할 뿐 아니라 가엾거나 딱한가까지 짚을 수 있는 사람 또한 거의 없는지 모릅니다.

 황미나 님이 ㅂ이라는 작품을 더는 안 그리기로 한 일은 아주 잘했다고 느낍니다. 굳이 아쉬워할 일은 없으니까요. 황미나 님은 당신이 새내기 만화쟁이였을 때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샘물처럼 시원하게 솟아나는 끝없는 창조와 상상력으로 우리들을 즐겁게 하는 만화를 그린 분이에요. 가끔 긴머리 싹뚝 잘라 주지, 하는 마음으로 짧은머리 다시금 기르면 됩니다.

 아무쪼록, 아름다움과 사랑스러움과 믿음직함이 고루 어우러지면서 따사롭고 너그러운 새 만화를 즐거이 그리시면 좋겠습니다. 나무는 가지 한둘이 뚝 부러져도 이듬해에 새 가지를 씩씩하게 다시 냅니다. 리영희 님이든 이오덕 님이든 수십만 권에 이르는 책을 읽으셨을 텐데, 당신들이 쓴 글은 모두 ‘창작’이었지, 어느 글 한 조각조차 ‘베끼기’라든지 ‘훔치기’라든지 어설픈 글이 태어난 적이란 없습니다. (4343.12.22.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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