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다 쓰고 나서 살피니, 황미나 님이 연재를 다시 한다고 하네요. 그러나, 이 글에서 표절과 창작이라는 고갱이를 놓고 해야 할 말을 다 적었기에 글을 손질하거나 고치지 않고 그대로 둡니다.
황미나
‘창작’과 ‘표절’과 ‘상상력’은 아주 다른 테두리입니다. 두 가지 다른 누리에서 살아가면서 뜻밖에 거의 똑같아 보이거나 아주 똑같은 창작품이 나올 수 있는 일입니다. 이와 달리 거의 비슷한 누리에서 살아가면서 슬프게 거의 똑같이 보이거나 어떠한 창작품 밑얼을 불러일으키는 모양새가 나타나기도 합니다.
하나부터 열까지 빈틈없이 똑같을 때에는 도둑질입니다. 그러나, 하나라도 똑같거나 하나라도 비슷할 때에도 도둑질입니다. 흔한 말로 ‘표절’이란 말을 쓰기도 하지만, 제대로 말하자면 ‘베끼기’이거나 ‘훔치기’입니다.
그런데 하나부터 열까지 빈틈없이 똑같지만 ‘훔치기’도 ‘베끼기’도, 또 ‘시늉하기’나 ‘흉내내기’마저 아니곤 합니다. 왜냐하면 ‘배우기’이기 때문입니다. ‘가르치기’이기 때문입니다. ‘모시기’라든지 ‘따르기’일 때에도 하나부터 열까지 빈틈없이 닮곤 합니다.
앞선 사람들 땀방울과 슬기와 보람을 밑거름으로 삼아 알뜰히 배우는 사람이 있습니다. 알뜰히 배우는 첫무렵에는 거의 똑같이 따르는 듯 보이지만, 차츰차츰 제 빛깔을 내고 제 무늬를 그리면서 제 목소리를 내는 사람이 있어요. 아이가 제 어버이 삶을 물끄러미 지켜보고 하나하나 똑같이 따르면서 차츰 배우듯, 스승과 제자 사이에는 가르치며 배우는 매무새가 삶으로 고스란히 나타납니다.
아이가 자라는 모습을 보며 ‘제 어버이를 베꼈다’라든지 ‘제 어버이를 훔쳤다’라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제 어버이가 걷는 길을 똑같이 따를지라도 ‘도둑질’이라 일컬을 사람은 누구도 없습니다. 한길을 서로 즐겁게 어깨동무하면서 걸어가니까요.
장사에는 동무장사가 있습니다. 서로서로 한뜻 한마음이 되어 장사를 함께할 때에 동무장사입니다. 둘이는 한 가게에서 함께 일할 수 있고, 다른 가게를 차리며 나란히 일할 수 있습니다. 중국사람들은 중국땅을 벗어나 온누리 어디를 가더라도 중국사람거리를 이룹니다. 서로 ‘중국 밥집’을 차린달지라도 값을 더 싸게 해서 판다든지 무얼 한다든지 하며 피 튀기며 다투지 않습니다. 제 살 깎아먹기를 하지 않아요. 한국사람도 미국이나 일본에 가서 ‘한국사람거리’를 만들곤 합니다. 그렇지만 중국사람거리처럼 북적거리거나 아름답거나 살가이 어우러지지 못합니다. 한국땅에서도 똑같습니다. 순대골목이니 냉면골목이니 하지만, 가게마다 다 다른 빛깔을 찾아보지 못합니다. 서로 값을 낮춘다든지 부피를 늘린다든지 할 뿐입니다.
한국땅에서 한국말을 하는 한국사람들한테는 참다이 창작이나 상상력이라는 문화가 삶으로 뿌리내리지 못합니다. 착하고 참다우며 곱게 내 삶을 일구도록 배우지 못하는 배움터요 마을이며 집입니다. 제도권학교이고 제도권사회이며 제도권문화인 가운데 제도권예술 테두리에서 허덕입니다. 어느 집이건 이웃이나 동무는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내 이웃이나 동무를 마구 밟고 올라서서 1등이 되라고만 합니다. 돈을 더 많이 벌고 이름값은 더 높이 얻으며 힘은 더 세져야 한다고 들볶거나 등떠밉니다.
연극이든 영화이든 문학이든 ‘재연’이라고 있습니다. 우러르는 작품에 바친다는 뜻과 넋으로 ‘밑바탕이 되는 어느 창작품’에 있는 이야기를 되살리거나 새롭게 바꾸면서 바치는 작품입니다. 데즈카 오사무 님 아톰 만화를 우라사와 나오키가 님이 ‘새로운 로봇 만화’로 다시 그리는 일이라든지, 최규석 씨가 김수정 님 둘리 만화 ‘비꼬아 다시 그리는’ 일이 이와 같습니다.
‘다시 그리기’를 하든 ‘비꼬아 그리기’를 하든, 새롭게 그리려는 사람들 자유이며 창조이며 상상력이라 할 만합니다. 누구나 다시 그릴 수 있고 비꼬아 그릴 수 있어요. 딱히 의무가 없는 권리요, 문화이며 예술이라 합니다. 구태여 ‘첫 창작품을 일군 사람’ 마음을 헤아려야 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만, 첫 창작품을 일군 사람이 보기에는 내 작품을 바탕으로 다시 그리거나 비꼬아 그릴 때에 반가이 여길 수 있으나 못마땅히 여길 수 있어요. 자그마한 대목 하나를 따오는 일 하나 때문에 몹시 거슬릴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훔치기나 베끼기란 ‘아주 자그마한 대목 하나’ 때문에 훔치거나 베끼기 때문입니다. 줄거리를 훔치거나 이야기를 훔치지 못합니다(때로는 이런 짓을 서슴지 않는 사람마저 있어 사람들을 놀래킵니다만). 주인공 노릇을 하는 사람이라든지 큰 고빗사위를 훔치거나 베끼지는 않아요(때때로 이런 짓까지 일삼는 사람이 있어 사람들 뒷통수를 칩니다만).
독자 자리에 선 사람은 이런 창작도 보고 저런 창작도 볼 수 있습니다. 둘을 견주며 어느 쪽이 한결 낫다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첫 창작을 내놓은 사람은 사람들이 이러거나 말거나 제 길을 조용히 걸을 수 있어요. 아무렇거나 내 삶을 알차고 사랑스레 꾸리면 ‘온누리 모든 사람이 다 알아보아 주지 못할지라도 참속을 헤아리며 보듬는 사람’이 다문 하나라도 있기 마련이니까요.
가르치기와 배우기는 서로한테 도움이 되고 보탬이 됩니다. 스승은 제자를 가르치면서 새로운 길을 틉니다. 제자는 스승한테서 배우며 새로운 눈을 뜹니다. 지식과 정보로 사귀거나 만나는 사이라면 스승과 제자가 아닙니다. 슬기와 깜냥을 북돋울 때에 비로소 스승과 제자입니다.
가르치고 배우는 사이일 때에는 언제나 즐겁습니다. 내가 너를 따르든, 네가 나를 좇아가든 즐겁습니다. 고마워요. 그러나 베끼거나 훔치는 사이일 때에는 노상 괴롭습니다. 미우며 슬픕니다. 가슴이 찢어집니다. 도둑맞은 사람은 1원짜리 쇠돈을 앗기든 1000원짜리 종이돈을 털리든 똑같이 생채기를 받습니다. 1억 원이나 도둑맞아야 생채기를 받지 않아요. 팔다리가 잘릴 때에만 아프지 않습니다. 손톱 둘레에 거스러기가 생겨도 아파요. 파를 썰다가 손가락을 베어도 아파요. 살짝 꼬집어도 아픕니다. ‘흔하고 널린 설정이니 표절이 아니다’라는 말은 있을 수 없습니다. 마음과 마음이 오가는 일이에요. 하나부터 열까지 똑같다 하지만 ‘이는 도무지 표절이 아니에요’ 하는 말이 나옵니다.
손쉬운 달걀부침에도 ‘요리법’이 있고, 뜨개질이든 바느질이든 영어로 일컫는 ‘레시피’가 있습니다. 이 요리법에는 모두 저작권이 있어요. 다만, 저작권이 있는 사람이 굳이 저작권을 내세우지 않으니 누구나 거리낌없이 나누며 씁니다. 종이학을 접든 종이배를 접든 한결같이 저작권이 있어요. 그렇지만 첫 창작자가 이러한 저작권을 누리려 하지 않으니 누구나 ‘거저로 마음껏’ 쓰면서 새로운 종이접기 길을 틉니다.
문학이든 그림이든 사진이든 만화이든 …… 문화와 예술은 법정에서 옳고 그름을 따질 수 없고, 법정에 옳고 그림을 맡겨서는 안 됩니다. 법으로 따진다면야 저작권법이 있으니 첫 창작자는 제 권리를 지킬 수 있어요. 돈으로 갚음을 받습니다. 그런데 문화와 예술을 하는 사람한테 돈이란 무슨 쓸모가 있을까요. 사람들이 알아주는 이름값이란 무슨 보람이 있나요. 게다가 법정소송을 하면 제아무리 짧아도 한두 해는 걸리고, 2심이나 3심을 간다면 자그마치 열 해나 써야 해요. 창작을 하는 사람한테는 한 달만 제 일을 못해도 괴로워 죽을 판인데, 법정소송에 가면서 제 일을 못하면 그야말로 죽음보다 더 아프며 힘든 노릇입니다. 표절, 곧 도둑질로 받은 생채기를 법정소송으로 옮기려 하지 않는 까닭은 ‘작품은 잃었어도, 그러니까 내 창작과 상상력은 빼앗겼어도 내 시간을 잃거나 빼앗기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는 앞으로 다른 작품을 내놓으며 내 새로운 창조와 상상력을 일구고 싶기 때문이에요.
요즈음 불거지는 말밥을 살피면 더없이 슬픕니다. 한국땅 눈높이는 아주 낮기 때문입니다. 황미나 님이 지나치게 받아들였다고 여길 수 있고, 연속극 작가가 옳을는지 모릅니다. 황미나 님은 ‘어느 연속극이 내 만화에서 밑생각을 훔쳤다’고 따로 밝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황미나 님은 더는 만화그리기를 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이 일을 놓고 숱한 말이 오가지만, 황미나 님이 받은 생채기를 짚는 말은 거의 찾아보지 못합니다. 아마, 황미나 님이 받은 생채기뿐 아니라, 다른 이 밑생각과 창조와 상상력을 훔친 사람 마음이 얼마나 메마르거나 팍팍할 뿐 아니라 가엾거나 딱한가까지 짚을 수 있는 사람 또한 거의 없는지 모릅니다.
황미나 님이 ㅂ이라는 작품을 더는 안 그리기로 한 일은 아주 잘했다고 느낍니다. 굳이 아쉬워할 일은 없으니까요. 황미나 님은 당신이 새내기 만화쟁이였을 때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샘물처럼 시원하게 솟아나는 끝없는 창조와 상상력으로 우리들을 즐겁게 하는 만화를 그린 분이에요. 가끔 긴머리 싹뚝 잘라 주지, 하는 마음으로 짧은머리 다시금 기르면 됩니다.
아무쪼록, 아름다움과 사랑스러움과 믿음직함이 고루 어우러지면서 따사롭고 너그러운 새 만화를 즐거이 그리시면 좋겠습니다. 나무는 가지 한둘이 뚝 부러져도 이듬해에 새 가지를 씩씩하게 다시 냅니다. 리영희 님이든 이오덕 님이든 수십만 권에 이르는 책을 읽으셨을 텐데, 당신들이 쓴 글은 모두 ‘창작’이었지, 어느 글 한 조각조차 ‘베끼기’라든지 ‘훔치기’라든지 어설픈 글이 태어난 적이란 없습니다. (4343.12.22.물.ㅎㄲㅅ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