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대와 통하는 우리말>에 실을 네 번째 글. 

가. 우리말 생각 ㉣ 우리 겨레 말글


 아저씨는 네 살짜리 아이와 막 태어날 아이를 돌보는 어버이입니다. 둘레 분들은 저처럼 ‘어버이’라는 낱말을 쓰지 않습니다. 다들 ‘부모(父母)’라는 낱말만 쓰셔요. 저도 때에 따라서는 ‘부모’라는 낱말을 쓰지만, “어머니와 아버지를 아울러 가리키는 우리말”인 ‘어버이’라는 낱말을 한결 좋아합니다. 저는 제가 좋아하는 낱말을 즐겨써요.

 그러고 보니, 저는 ‘즐겨쓰다’라는 낱말을 붙여서 씁니다. 말사랑벗들은 알까 모르겠는데, 동무들이 인터넷을 켤 때면 차림판 한쪽에 ‘즐겨찾기’라는 자리가 있어요. 인터넷이 처음 나오던 때에는 영어로 ‘favorite’이라고 적혔는데, 나중에 이처럼 한글이자 우리말 이름 ‘즐겨찾기’가 붙었어요. 누가 이 이름을 지었는지 모르지만 참 잘 지었다고 느낍니다. 이 이름은 처음에는 낱말책에 안 실렸지만, 이제는 떳떳하고 당차게 낱말책 올림말이 되었어요.

 인터넷을 켤 때면 늘 이 낱말 ‘즐겨찾기’를 생각합니다. “즐겨서 찾아가는 곳을 한 데에 묶었”을 때에 ‘즐겨찾기’라 하듯이, ‘즐겨-’라는 앞마디를 발판 삼아서 ‘즐겨먹다’나 ‘즐겨쓰다’나 ‘즐겨읽다’나 ‘즐겨보다’ 같은 새 우리말을 지을 수 있어요. ‘애용(愛用)하다’라 하기보다는 ‘즐겨쓰다’라 하면 좋고, ‘애독(愛讀)하다’라 할 때보다는 ‘즐겨읽다’라 하면 나으며, ‘애청(愛聽)하다’라 하지 말고 ‘즐겨보다’라 하면 훨씬 즐겁습니다.

 아저씨가 이 글을 쓰는 내내 네 살짜리 아이는 아빠 무릎에 앉거나 등에 업히거나 옆에 나란히 앉아 책을 펼쳐 놓고 아빠가 함께 읽어 주기를 바랍니다. 아빠 된 몸으로서 글만 쓸 수 없으니, 글 쓰던 손을 멈추어 아이와 함께 그림책을 넘깁니다. 가위 바위 보 하는 그림이 나오면 “감자에 싹이 나서 잎이 나서 가위 바위 보” 노래를 불러 주고, 공 차는 모습이 나오면, “공을 차네.” “공을 잡네.” 같은 말을 들려줍니다. 그림책에 나오는 언니가 댕기를 예쁘장하게 맸으면 “댕기를 맸네.” 말하고, 아이는 곧바로 “댕기 맸네.” 하며 따라합니다.

 말사랑벗들은 ‘댕기’라는 낱말을 들어 본 적이 있나 모르겠군요. 으레 ‘리본(ribbon)’이라는 소리만 듣지 않았나 싶어요. 얼마 앞서는, 옆지기하고 이야기를 하면서 아이한테 ‘세모뿔’이라고 가르쳐야 하느냐 ‘삼각뿔’이라 가르쳐야 하느냐를 놓고 머리를 갸웃갸웃했습니다. 우리말로 ‘세모’랑 ‘네모’를 가르치고 싶으나, 아이가 학교에 든다든지 여러 가지 책(수학책)을 익힌다든지 할 때에는 어김없이 ‘세모’나 ‘네모’라는 낱말은 없고 ‘삼각(三角)’과 ‘사각(四角)’이라는 낱말만 있기 때문입니다. 학교와 교과서와 사회를 헤아린다면 우리 아이 또한 ‘삼각’이랑 ‘사각’이라는 낱말로 배워야 할 테지요. 게다가 ‘삼각팬티’라고만 하지 ‘세모속옷’이라 말하는 사람은 없어요. ‘삼각관계’라 일컫지 ‘세모사이’라 일컫는 사람 또한 없고요.

 길에서도 비슷합니다. 우리 식구는 ‘세거리’와 ‘네거리’와 ‘건널목’과 ‘거님길’ 같은 낱말을 쓰지만, 다른 분들은 ‘삼(三)거리’와 ‘사(四)거리’와 ‘횡단보도(橫斷步道)’와 ‘인도(人道)’라는 낱말을 쓰셔요.

 《건방진 우리말 달인(기초편)》이라는 책을 읽다 보면 “경기 지방 사투리거든(19쪽).”이라는 대목이 나와요. 꽤나 많은 분들은 이처럼 엉터리 말을 아무렇지 않게 쓰는데, 말하는 사람이나 책을 내놓는 사람이나 읽는 사람이나 조금도 깨닫지 못해요. 이 말마디가 얼마나 엉터리인지를 몰라요. 그래서, 어떤 이는 “고통과도 같은 괴로움”이라 말하고, 어떤 분은 “나와 다른 타인”이라 말하기도 하며, “축제가 열리고 개최된다”라 말하는 사람마저 있습니다. “살다가 거주했습니다”라 말하는 사람이라든지 “쉽게 평이하게 쓴다”고 말한다든지 “길을 걸으며 하이킹을 한다”고 말하거나 “배려의 마음”을 이야기하기도 해요. 말사랑벗들은 이 말이 엉터리인지 아닌지 알겠어요?

 차근차근 짚어 볼게요. 먼저, ‘사투리’는 “어느 한 지방에서 쓰는 말”을 가리킵니다. ‘지방말’이나 ‘지역말’이 ‘사투리’예요. 어떤가요. 이렇게 풀이해 보면 알 만한가요. “경기 지방 사투리”라 적은 글은 “경기 지방 지방말”이라 적은 꼴이에요. “경기 사투리”라 적거나 “경기 지방 말”이라 적거나 “경기도 고장말”이라 적어야 올발라요. ‘고통(苦痛)’은 ‘괴로움’을 가리키는 한자말이에요. 그러니까 “고통과도 같은 괴로움”이란 얼마나 멋없는 말인가요. ‘타인(他人)’이라는 한자말은 ‘남’, 곧 ‘다른 사람’을 일컬어요. “나와 다른 타인”이란 말이 안 되는 말이랍니다. 자, 이제 다른 엉터리 말이 왜 엉터리 말인지는 말사랑벗들이 하나하나 살펴보겠어요?

 손수 낱말책을 뒤적이면서 말뜻을 찬찬히 헤아리다 보면, 어른이든 어린이이든 푸름이이든, 우리가 주고받거나 펼치는 말글 가운데 옳지 못하거나 어이없거나 알맞지 못한 대목이 지나치게 많은 줄 깨달으리라 생각해요. 우리들은 ‘한겨레’라고는 하지만 정작 한겨레답게 한겨레 말을 하지 못하는 판이에요. 겨레말을 제대로 생각하지 못하고, 겨레글을 옳게 쓰지 못해요. 겨레말이 튼튼하게 자리잡지 못하니까 겨레얼을 한껏 북돋우지 못합니다. 겨레글을 알차게 가꾸지 못하니까 겨레넋을 싱그럽거나 슬기롭게 다스리지 못해요.

 동무들은 일본에서 살아가는 한겨레를 어느 만큼 아는가요. 일본에서 살아가는 한겨레인 유미리 님이 쓴 책을 읽어 보았나요. 나중에 한번 찾아서 읽어 보셔요. 사기사와 메구무라는 분도 있는데, 이분은 그만 스스로 목숨을 끊었어요. 이름에서 엿볼 수 있듯 ‘일본 국적’인 분인데, 소설을 쓰던 어느 날, 자료를 찾느라 당신 할머니랑 할아버지 발자취를 알아보다가 당신 할머니가 북녘사람임을 알아채고는 깜짝 놀랐답니다. 당신한테 1/4만큼 한겨레 피가 흐르는 줄을 느즈막하게 알았는데, 당신 어버이는 이런 일을 몰랐거나 얘기를 안 했대요. 그러니 이름부터 아예 일본 이름인 ‘사기사와 메구무’였겠지요. 이분이 쓴 소설 가운데 《당신은 이 나라를 사랑하는가》라는 작품이 있어요. 저는 이 작품을 읽으며 눈물이 핑 돌고 가슴이 아팠어요. 유미리 님이 쓴 《훔치다 도망치다 타다》를 읽으면서도 가슴이 촉촉했습니다. 이분들, 이른바 ‘재일조선인’이라는 한겨레 문학을 읽다 보면, 남녘에서 살아가는 사람 가운데 ‘일본에 한국사람이 사는 줄 까맣게 모르는 사람’이 아주 많다는 대목이 얼핏설핏 나옵니다. 참 그럴까 하고 놀라다가는, 요즈음 사람들 말매무새와 마음밭을 들여다보면 참 그렇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입니다.

 우리는 남녘땅 사람들만 한겨레인 줄 알기 일쑤이고, 북녘땅이나 일본땅이나 중국땅이나 러시아땅에 똑같이 한겨레가 살아가는 줄 생각하지 못하거나 살피지 않기 일쑤예요. 더구나, 이 나라 바깥 한겨레만 제대로 모르는 우리들이 아니라, 이 나라 안쪽인 남녘땅에서 함께 살아가는 한겨레를 제대로 모르기 일쑤예요. 이제 ‘이웃사촌’이라는 낱말은 옛말입니다. ‘이웃’이라는 말조차 쓰기 멋쩍습니다. ‘동무’라든지 ‘벗’이라는 낱말을 쓰면서 사귈 만한 살가운 사람은 얼마나 되려나요. ‘어깨동무’나 ‘씨동무’라 할 만한 사랑스러운 사람은 얼마나 되나요. 남을 살피기 앞서 나 스스로 내 둘레 사람들한테 ‘이슬떨이’나 ‘길동무’나 ‘너나들이’ 노릇을 하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말사랑벗님들을 비롯해, 저나 제 둘레 모든 사람들, 곧 우리 한겨레가 어깨동무하면서 즐거이 쓸 우리말이란, 남녘을 비롯해 북녘과 일본과 중국과 러시아에서 골고루 서로서로 아끼고 사랑하는 넋으로 나눌 말입니다. 남녘땅 테두리에서 살핀다면, 대학교를 나온 사람들이라든지 기자나 법관이나 정치꾼이나 공무원이나 교사 같은 사람들만이 아니라, 저잣거리 장사꾼이랑 시골 농사꾼이랑 바닷가 고기잡이랑 공장 일꾼 누구나하고 사이좋게 나눌 말이 한겨레 우리말입니다.

 초등학교만 나온 사람이나 초등학교조차 못 나온 사람하고도 즐거이 나눌 수 있을 때에 아름다운 우리말입니다. 할머니 할아버지하고도 슬기롭게 나눌 만한 말이어야 좋은 우리말입니다. 어린 동생하고도 재미나게 나눌 만한 말일 때에 고운 우리말입니다. 우리들은 우리 겨레가 사이좋게 어깨동무할 ‘한겨레 말삶’을 헤아리면서 차근차근 일구어야 훌륭하면서 사랑스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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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12.25. 

 읍내로 아이를 데리고 차를 얻어 타고 돌아올 일이 있어 케익을 하나 사 보았다. 아이는 뻥터뜨려를 들고는 아빠한테 쏠까나 한다. 이 녀석아, 사람한테 겨누지 마라. ㅠ.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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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12.27.  충청북도 음성군 읍내리. 

오래된 흙벽 창고 건물이 하나 빼고 모조리 헐렸다. 그러고 보니, 흙벽 창고를 안 보이게 쌓아 놓던 담벼락도 곧 허물겠네. 이 그림도 가뭇없이 잊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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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 인형
가브리엘 뱅상 지음 / 별천지(열린책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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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 맞잡고 다 같이 노는 겨울에
 [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35] 가브리엘 벵상, 《꼬마 인형》(열린책들,2003)



 아침에 두 손이 꽁꽁 얼어붙을 때까지 눈을 쓸다가 들어옵니다. 더 쓸어야 하지만 손가락이 아린 데다가 아침을 차려야 하기에 나중에 더 쓸기로 하고 들어옵니다. 우리 식구한테는 자동차가 없으니 굳이 길을 신나게 쓸지 않아도 됩니다. 사람이 걸을 자리만 쓸어도 돼요. 우체국 일꾼하고 택배 일꾼이 오간다거나 이오덕학교 자동차가 움직일 때에 미끄럽지 않도록 눈길을 씁니다. 그러나 애써 눈길을 쓸어 놓아도 택배 일꾼은 지난 한 주 동안 아무도 찾아오지 않습니다. 우체국 일꾼은 꼭 한 번 들렀습니다.

 눈을 쓸면서 생각합니다. 우리 딸아이가 두 살쯤 더 먹는다면 아빠 곁에서 겨울날 눈을 함께 쓸지 않겠느냐고. 앞으로 이태는 아빠 혼자서 눈쓸기를 도맡고, 이동안은 아빠 곁에서 눈밭을 마음껏 밟으면서 놀라 하면 좋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 보면, 내 어릴 적 살던 동네에서 큰눈이 내리면 저랑 또래 아이들은 눈밭에서 신나게 놀았고, 어른들은 주섬주섬 모여 눈을 치웠습니다. 우리들한테 눈을 쓸라느니 무어라느니 하지 않았다고 떠오릅니다. 어린이가 밟아도 눈 발자국이 나서 눈을 쓸기에 조금 까다롭지만, 어른이 밟을 때만큼 까다롭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아이들은 눈밭에서 뒹굴며 놀아야 합니다. 손이 시린 줄을 모르도록 놀고, 볼이 발개지도록 놀아야 해요. 눈싸움은 누가 가르쳐야 하는 놀이가 아닙니다. 눈을 어떻게 뭉쳐야 하는가를 애써 어른들이 가르칠 까닭이 없습니다.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놀며 동무한테서 배우고 언니나 오빠나 형한테서 배웁니다. 눈을 굴러 눈사람 빚기 또한 구태여 어른한테서 배우지 않습니다. 스스로 익히거나 형제 자매 남매끼리 눈누리에서 뒹구는 동안 시나브로 익힙니다.

 겨울이기에 겨울나라 눈밭에서 놉니다. 봄이 새롭게 찾아오면 봄누리 꽃밭에서 놉니다. 여름을 다시금 맞이하면 여름철 물가에서 놉니다. 가을을 새삼스레 맞아들이면 가을녘 들판에서 구슬땀을 흘리며 일놀이를 하겠지요.


― “나랑 놀자 ……. 그런데 놀러 나가면 주인 할아버지한테 혼나겠지!” (25쪽)


 온통 눈누리가 된 시골집에서 바깥마실은 꿈을 꾸지 않습니다. 용하게 눈이 살짝 멎은 날 낮에 읍내 장마당 마실을 하면서 먹을거리는 장만해 놓았습니다. 애 아빠가 잘못하는 바람에 그만 집안 물이 얼어붙어 멧중턱 이오덕학교를 오르내리며 물을 길어 써야 하지만, 그런대로 지낼 만합니다. 바보스러운 애 아빠 때문에 집식구가 애먹지만, 그만큼 애 아빠는 물이 얼마나 대수로우면서 고마운가를 다시금 느낍니다. 요사이는 멧골자락에서도 땅을 파서 땅속물을 뽑아올려 쓰거나 수도물을 이어서 쓰는데, 아득히 먼 옛날까지도 아닌 우리네 어머니 아버지랑 할머니 할아버지 적 시골마을과 멧골마을에서는 겨울날 물을 어떻게 썼으려나요. 우물물은 겨울에도 녹지 않았으려나요. 겨울에 우물마저 얼어붙으면 어찌해야 하나요. 눈 덮인 길에 우물물을 길어올 때에 손은 얼마나 시렸을까요. 겨우내 빨래는 어찌 하고 설거지랑 밥하기는 어떻게 했으려나요.

 아이가 스물아홉 달 나이에 집안에 물이 얼어붙어 애먹는 삶을 헤아리는지 모르는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아예 모르지는 않으리라 생각하는데, 왜냐하면 예전에는 집에서 빨래하고 씻기고 했으나 이제는 집에서 빨래를 못하고 씻기지도 못해요. 멧길을 터벅터벅 걸어 올라가서 빨래하고 씻긴다든지, 어제처럼 읍내 마실을 가서 읍내 목욕탕에서 씻긴다든지 하면 몸으로 알아채겠지요.


― “가질래?” (63쪽)


 눈누리가 된 집이다 보니 집안에서 퍽 오랫동안 지냅니다. 이오덕학교 언니 오빠들은 겨울방학을 맞이했습니다. 눈오는 날 눈쓸기를 하면 아빠 따라 아이도 눈밭에서 뛰어다닙니다. 그렇지만 집에 있을 때라면 아빠가 밥하는 곁에 찰싹 달라붙어 불가에서도 두려움 없이 놉니다. 불가에서 놀다가 아빠나 엄마한테 꾸지람을 듣지만 달리 놀거리가 없습니다. 밥하는 아빠가 아이를 더 살피면서 자그마한 일거리라도 주어야 합니다. 밥을 먹이고 나서는 밥상을 치울 때에 밥상 닦기 같은 일거리를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노래를 부르며 아이랑 함께 춤을 춘다든지, 종이를 펼쳐 놓고 아이는 그림을 그리도록 하고 아빠는 글을 쓴다든지, 아이한테 그림책을 읽어 주다가 아빠는 아빠대로 아빠 책을 읽고 아이는 아이대로 아이 책을 읽도록 이끌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놀아 주고 저렇게 놀아 주다가도 아이는 혼자서 종알종알 떠들면서 잘 놀기도 합니다. 망가진 사진기를 들고 사진을 찍어 준다 하기도 하고, 요 인형 조 인형을 집어들고 놀기도 하며, 볼펜이나 크레파스를 들고 이곳저곳에 그림을 그리며 놀기도 합니다.


― “또 오려무나.” “그럴게요.” (75쪽)

 

 ‘말’이 거의 안 나오는 그림책 《꼬마 인형》을 펼칩니다. 아이는 아빠나 엄마가 이 그림책을 펼쳐 이야기 살결을 붙여 읽어 주어도 좋아하고, 저 혼자 펼쳐서 읽으면서도 좋아합니다.

 그림이 따사로우면서 보드랍거든요. 그림결이 포근하면서 너그러워요. 하나도 투박하지 않은 굵직한 금으로 이루어진 그림이요, 수수하면서 살가운 손길로 이루어진 그림이야기입니다. 할아버지가 작은 ‘어린이 손인형’을 꼬물거리면 어린이 손인형은 살아숨쉬는 놀이동무가 되고, 할아버지가 작은 ‘늑대 인형’을 쪼물딱거리면 늑대 인형은 무시무시한 이빨로 어린이 손인형을 잡아먹을 듯 무섭습니다. 그림책을 넘기는 아빠랑 아이는 함께 웃고 함께 울며 함께 손을 잡습니다.


― “드디어 꼬마 손님이 하나 왔군.” (9쪽)


 《꼬마 인형》에 나오는 ‘사람 어린이’는 혼자서 ‘할아버지 손인형 연극’을 보러 찾아오고, 할아버지는 딱 한 사람인 관객인 어린이 앞에서 즐겁게 손인형 연극을 선보입니다. 사람 어린이는 할아버지 연극에 빠져들면서 어린이 손인형하고 놀고파 하고, 늑대 손인형한테서 어린이 손인형을 살려내려고 하는데, 그림책 《꼬마 인형》 마지막 쪽을 덮을 무렵, 어린이도 할아버지도 서로 손을 맞잡거나 어깨동무를 하면서 골목길에서 마음껏 뛰놉니다.

 두 사람한테는 손인형 연극도 재미나겠지만, 무엇보다 서로서로 마주 바라보면서 웃고 떠들고 달리며 춤추는 놀이가 가장 재미납니다. 우리 집 딸아이가 온갖 놀잇감을 보여줄 때보다 엄마나 아빠가 함께 손을 맞잡고 놀 때에 가장 즐거워하듯, 《꼬마 인형》 어린이 또한 살가운 눈빛과 따뜻한 손길로 함께 놀 벗이 가장 고마워요.

 집식구들 둘러앉아 아침을 먹고 밥상을 치우니 어느새 열두 시를 넘고 한 시 가깝습니다. 오늘도 하늘에는 흰구름 가득하지만 햇살이 따사롭게 내리쬡니다. 한 시를 넘고 두 시쯤 되면 우리 집 마당에도 햇볕이 넓게 드리우겠지요. 아침나절 쓸어 놓은 길은 눈이 말끔히 녹을 테고요. 이 즈음 해서 아이랑 손 잡고 밖으로 나와 아빠는 눈길을 마저 쓸고, 아이는 눈밭을 더 뛰어놀라 해야겠다 싶습니다.

 겨울이라고 날마다 눈이 오지 않으며, 어쩌면 한 해 두 해 뒤틀리는 날씨 때문에 앞으로는 눈 구경 하기 몹시 힘들는지 몰라요. 큰도시에서는 큰눈 때문에 길이 막힌다고 시끄러운데, 멧골자락에서는 큰눈이든 작은눈이든 눈쓸기를 할 때에는 손가락 아리며 고달프지만, 아이하고 신나게 뒹굴며 놀 수 있어 호젓합니다. 아이랑 아빠 숨소리와 목소리만 멧골에 울려퍼집니다. 때때로 눈산에서 먹이를 찾는 작은 새들 지저귀는 소리를 듣고, 바람이 살랑 불면 바람결에 나뭇가지에서 호도독 떨어지며 날리는 눈소리를 들어요. 집안 물은 얼었으나 골짜기 냇물은 졸졸 흐릅니다. 가느다란 냇물 소리를 듣는 가운데, 아이가 눈 밟으며 내는 뽀도독 소리를 듣습니다. 화학방정식 소금이든 흙이든 연탄재이든 뿌리지 않는 길에서 놀 수 있어 좋은 시골마을 겨울 하루입니다. (4343.12.30.나무.ㅎㄲㅅㄱ)


― 꼬마 인형 (가브리엘 벵상 글·그림,열린책들 펴냄,2003.4.20.(2009.10.30. 다시 나옴)/9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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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여 침을 뱉어라
이효인 / 예건사 / 199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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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삶으로 껴안으면 한결 따스하겠지
― 이효인, 《영화여 침을 뱉어라》



- 책이름 : 영화여 침을 뱉어라
- 글 : 이효인
- 펴낸곳 : 영화언어 (1995.1.15.)


 생각을 열어젖히는 글을 읽을 때면 반가우며 고맙고 기쁩니다.

 한창 생각을 열어젖히다가 생뚱맞다 싶은 이야기가 나오면 슬프면서 안쓰럽고 기운이 빠집니다.

 영화 이야기를 적바림하는 이효인 님이 쓴 《영화여 침을 뱉어라》를 두 권째 장만하여 다시 읽다가 〈객담 1. 아이를 재우며〉라는 꼭지가 있어 곰곰이 살핍니다. 아이 없이, 또 옆지기 없이, 그예 혼자서 자전거 하나에 기대어 살던 2006년에 이 책을 처음 마주하며 읽을 때에는 그닥 눈여겨보지 않고 지나친 꼭지를 새삼스럽다고 느끼며 차근차근 읽습니다.

 2010년 12월 한겨울을 보내는 오늘은, 저 또한 아이 하나를 재우면서 밤잠이 달아나 깊은 밤에 멀뚱멀뚱 깬 몸입니다. 머잖아 둘째가 태어나 두 아이를 먹이고 입히며 씻기고 재우는 나날을 보내야 할 어버이인 내 삶입니다. 그런데 글이름은 “아이를 재우며”이지만, 막상 아이하고 보내거나 부대끼는 삶 이야기는 나오지 않습니다. 외려 뜬금없는 빗댐말을 읽으며 눈살을 찌푸립니다.

 한숨 한 번 길게 내쉽니다. 이내 눈살을 풀며 헤아립니다. 나는 이런 얼토당토않은 빗댐말을 쓰지는 않지만, 내가 쓰는 빗댐말을 못마땅해 한다든지, 나는 웬만해서는 빗댐말은 안 쓰지만 내가 살아가는 모습을 꾸밈없이 적바림하는 글조차 싫어할 사람이 있을는지 모르겠다고 느낍니다.


.. 요즘 젊은 평자들의 글들이 젊은 여자들의 똥꼬치마처럼 짧게 파닥거리는 것이라면 최 선생의 글은 방귀를 슬쩍 흘러내리고도 겉체면을 유지할 수 있는 깡다구와 품격을 동시에 갖춘 것이다 ..  (189쪽)


 거친 말투를 쓴다고 해서 거친 사람이지 않습니다. 거친 말투로 여린 몸과 마음을 가린다거나 덮는다거나 지키기 일쑤입니다. 말투가 거친 사람일수록 몸이나 마음은 더없이 조그마하며, 말투가 보드라운 사람일수록 몸이나 마음은 몹시 크기 마련입니다.

 거친 말투를 받아들여야 했던 내 지난날을 곱씹습니다. 갖은 욕지꺼리와 주먹다짐이 아니고는 살아남을 수 없던 군대살이를 떠올립니다. 참말 군대에서는 갖은 욕지꺼리와 주먹다짐 아니고는 살아남을 수 없었을는지 새삼 되씹습니다. 어쩌면 욕 한 마디 않고 주먹다짐 한 번 없으면서 잘 살아남을 뿐 아니라 둘레 사람들한테 따스한 사랑을 나눌 만했는지 모릅니다. 이렇게 해 보려는 사람이 거의 없어 이루지 못할 뿐인 꿈일는지 모릅니다만, 나부터, 군대살이를 하던 지난날 착하면서 참다이 지냈어야 하지 않느냐 싶습니다.


.. 문화의 정체성을 가지지 못한 사회에서 가장 위력을 발휘하는 것은 상품 자본의 논리라는 것이다. 상품 자본의 논리는 끊임없이 무차별 대중들에게 적합한 형태의 ‘물건’을 요구한다. 이 물건은 상품으로서의 가치와 수명을 위하여 끊임없이 자기 변신을 꾀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모든 변신은 상품성의 기준을 넘지 않는 것이어야 한다. 요약하자면, 이국적인 것을 선호하는 기호, 자기 문화에 대한 열등감, 상품성을 갖추기 위한 사회적 압박 그리고 이런 풍토에서 파생된 정신분열증 등이 ‘탈권위 쿠테타’와 한국의 ‘천민 자본주의’와 맞물리면서 일본의 영화 문화를 쫓아가고 있다는 말이다 ..  (181쪽)


 《영화여 침을 뱉어라》라는 책은 영화를 좋아하거나 사랑하거나 아끼고픈 이라면 헌책방마실을 하면서 찾아 읽을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만 한 책 하나 찾고자 다리품을 아끼지 말아야 하며, 이쯤 되는 책 하나 차근차근 새겨읽으며 마음닦이를 한다면 더욱 훌륭하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이 책은 징검돌이거나 디딤돌입니다. 길동무이거나 옆지기가 될 만한 책이라고는 느끼지 않습니다. 길동무는 사랑스러운 벗이요, 옆지기는 믿음직한 너나들이입니다. 《영화여 침을 뱉어라》는 틀림없이 깊고 너른 생각과 마음씀을 보여줍니다. 그렇지만 영화라는 문화에 이론이라는 지식을 엮는 데에 그칩니다. 영화라는 삶에 사람이라는 사랑을 여미지는 못합니다.

 영화를 읽으면서 영화를 파헤치는 눈썰미를 갈고닦는 좋은 동무인 《영화여 침을 뱉어라》라 할 만하지만, 영화를 사랑하면서 영화와 함께 살아가려는 길에는 걸맞지 않는 무거운 짐입니다.

 그런데, 우리 둘레에는 영화를 말하는 책이 몇 가지나 있으려나요. 한국 영화를 말하는 책이란, 한국이나 나라밖이라는 틀을 넘어 영화 문화를 다루는 책이란 얼마나 있는가요. 아직 ‘영화 삶’을 바라기는 힘듭니다. 섣불리 ‘영화 누리’를 꿈꿀 수 없습니다. 앞으로 천천히 씩씩하게 이룰 꿈입니다. 낮은 자리가 아니라 여느 수수한 자리에서 서로서로 포근하며 너그러이 감싸안으면서 북돋울 꿈이에요. (4343.12.30.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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