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마 인형
가브리엘 뱅상 지음 / 별천지(열린책들) / 2009년 10월
평점 :
품절




 손 맞잡고 다 같이 노는 겨울에
 [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35] 가브리엘 벵상, 《꼬마 인형》(열린책들,2003)



 아침에 두 손이 꽁꽁 얼어붙을 때까지 눈을 쓸다가 들어옵니다. 더 쓸어야 하지만 손가락이 아린 데다가 아침을 차려야 하기에 나중에 더 쓸기로 하고 들어옵니다. 우리 식구한테는 자동차가 없으니 굳이 길을 신나게 쓸지 않아도 됩니다. 사람이 걸을 자리만 쓸어도 돼요. 우체국 일꾼하고 택배 일꾼이 오간다거나 이오덕학교 자동차가 움직일 때에 미끄럽지 않도록 눈길을 씁니다. 그러나 애써 눈길을 쓸어 놓아도 택배 일꾼은 지난 한 주 동안 아무도 찾아오지 않습니다. 우체국 일꾼은 꼭 한 번 들렀습니다.

 눈을 쓸면서 생각합니다. 우리 딸아이가 두 살쯤 더 먹는다면 아빠 곁에서 겨울날 눈을 함께 쓸지 않겠느냐고. 앞으로 이태는 아빠 혼자서 눈쓸기를 도맡고, 이동안은 아빠 곁에서 눈밭을 마음껏 밟으면서 놀라 하면 좋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 보면, 내 어릴 적 살던 동네에서 큰눈이 내리면 저랑 또래 아이들은 눈밭에서 신나게 놀았고, 어른들은 주섬주섬 모여 눈을 치웠습니다. 우리들한테 눈을 쓸라느니 무어라느니 하지 않았다고 떠오릅니다. 어린이가 밟아도 눈 발자국이 나서 눈을 쓸기에 조금 까다롭지만, 어른이 밟을 때만큼 까다롭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아이들은 눈밭에서 뒹굴며 놀아야 합니다. 손이 시린 줄을 모르도록 놀고, 볼이 발개지도록 놀아야 해요. 눈싸움은 누가 가르쳐야 하는 놀이가 아닙니다. 눈을 어떻게 뭉쳐야 하는가를 애써 어른들이 가르칠 까닭이 없습니다.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놀며 동무한테서 배우고 언니나 오빠나 형한테서 배웁니다. 눈을 굴러 눈사람 빚기 또한 구태여 어른한테서 배우지 않습니다. 스스로 익히거나 형제 자매 남매끼리 눈누리에서 뒹구는 동안 시나브로 익힙니다.

 겨울이기에 겨울나라 눈밭에서 놉니다. 봄이 새롭게 찾아오면 봄누리 꽃밭에서 놉니다. 여름을 다시금 맞이하면 여름철 물가에서 놉니다. 가을을 새삼스레 맞아들이면 가을녘 들판에서 구슬땀을 흘리며 일놀이를 하겠지요.


― “나랑 놀자 ……. 그런데 놀러 나가면 주인 할아버지한테 혼나겠지!” (25쪽)


 온통 눈누리가 된 시골집에서 바깥마실은 꿈을 꾸지 않습니다. 용하게 눈이 살짝 멎은 날 낮에 읍내 장마당 마실을 하면서 먹을거리는 장만해 놓았습니다. 애 아빠가 잘못하는 바람에 그만 집안 물이 얼어붙어 멧중턱 이오덕학교를 오르내리며 물을 길어 써야 하지만, 그런대로 지낼 만합니다. 바보스러운 애 아빠 때문에 집식구가 애먹지만, 그만큼 애 아빠는 물이 얼마나 대수로우면서 고마운가를 다시금 느낍니다. 요사이는 멧골자락에서도 땅을 파서 땅속물을 뽑아올려 쓰거나 수도물을 이어서 쓰는데, 아득히 먼 옛날까지도 아닌 우리네 어머니 아버지랑 할머니 할아버지 적 시골마을과 멧골마을에서는 겨울날 물을 어떻게 썼으려나요. 우물물은 겨울에도 녹지 않았으려나요. 겨울에 우물마저 얼어붙으면 어찌해야 하나요. 눈 덮인 길에 우물물을 길어올 때에 손은 얼마나 시렸을까요. 겨우내 빨래는 어찌 하고 설거지랑 밥하기는 어떻게 했으려나요.

 아이가 스물아홉 달 나이에 집안에 물이 얼어붙어 애먹는 삶을 헤아리는지 모르는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아예 모르지는 않으리라 생각하는데, 왜냐하면 예전에는 집에서 빨래하고 씻기고 했으나 이제는 집에서 빨래를 못하고 씻기지도 못해요. 멧길을 터벅터벅 걸어 올라가서 빨래하고 씻긴다든지, 어제처럼 읍내 마실을 가서 읍내 목욕탕에서 씻긴다든지 하면 몸으로 알아채겠지요.


― “가질래?” (63쪽)


 눈누리가 된 집이다 보니 집안에서 퍽 오랫동안 지냅니다. 이오덕학교 언니 오빠들은 겨울방학을 맞이했습니다. 눈오는 날 눈쓸기를 하면 아빠 따라 아이도 눈밭에서 뛰어다닙니다. 그렇지만 집에 있을 때라면 아빠가 밥하는 곁에 찰싹 달라붙어 불가에서도 두려움 없이 놉니다. 불가에서 놀다가 아빠나 엄마한테 꾸지람을 듣지만 달리 놀거리가 없습니다. 밥하는 아빠가 아이를 더 살피면서 자그마한 일거리라도 주어야 합니다. 밥을 먹이고 나서는 밥상을 치울 때에 밥상 닦기 같은 일거리를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노래를 부르며 아이랑 함께 춤을 춘다든지, 종이를 펼쳐 놓고 아이는 그림을 그리도록 하고 아빠는 글을 쓴다든지, 아이한테 그림책을 읽어 주다가 아빠는 아빠대로 아빠 책을 읽고 아이는 아이대로 아이 책을 읽도록 이끌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놀아 주고 저렇게 놀아 주다가도 아이는 혼자서 종알종알 떠들면서 잘 놀기도 합니다. 망가진 사진기를 들고 사진을 찍어 준다 하기도 하고, 요 인형 조 인형을 집어들고 놀기도 하며, 볼펜이나 크레파스를 들고 이곳저곳에 그림을 그리며 놀기도 합니다.


― “또 오려무나.” “그럴게요.” (75쪽)

 

 ‘말’이 거의 안 나오는 그림책 《꼬마 인형》을 펼칩니다. 아이는 아빠나 엄마가 이 그림책을 펼쳐 이야기 살결을 붙여 읽어 주어도 좋아하고, 저 혼자 펼쳐서 읽으면서도 좋아합니다.

 그림이 따사로우면서 보드랍거든요. 그림결이 포근하면서 너그러워요. 하나도 투박하지 않은 굵직한 금으로 이루어진 그림이요, 수수하면서 살가운 손길로 이루어진 그림이야기입니다. 할아버지가 작은 ‘어린이 손인형’을 꼬물거리면 어린이 손인형은 살아숨쉬는 놀이동무가 되고, 할아버지가 작은 ‘늑대 인형’을 쪼물딱거리면 늑대 인형은 무시무시한 이빨로 어린이 손인형을 잡아먹을 듯 무섭습니다. 그림책을 넘기는 아빠랑 아이는 함께 웃고 함께 울며 함께 손을 잡습니다.


― “드디어 꼬마 손님이 하나 왔군.” (9쪽)


 《꼬마 인형》에 나오는 ‘사람 어린이’는 혼자서 ‘할아버지 손인형 연극’을 보러 찾아오고, 할아버지는 딱 한 사람인 관객인 어린이 앞에서 즐겁게 손인형 연극을 선보입니다. 사람 어린이는 할아버지 연극에 빠져들면서 어린이 손인형하고 놀고파 하고, 늑대 손인형한테서 어린이 손인형을 살려내려고 하는데, 그림책 《꼬마 인형》 마지막 쪽을 덮을 무렵, 어린이도 할아버지도 서로 손을 맞잡거나 어깨동무를 하면서 골목길에서 마음껏 뛰놉니다.

 두 사람한테는 손인형 연극도 재미나겠지만, 무엇보다 서로서로 마주 바라보면서 웃고 떠들고 달리며 춤추는 놀이가 가장 재미납니다. 우리 집 딸아이가 온갖 놀잇감을 보여줄 때보다 엄마나 아빠가 함께 손을 맞잡고 놀 때에 가장 즐거워하듯, 《꼬마 인형》 어린이 또한 살가운 눈빛과 따뜻한 손길로 함께 놀 벗이 가장 고마워요.

 집식구들 둘러앉아 아침을 먹고 밥상을 치우니 어느새 열두 시를 넘고 한 시 가깝습니다. 오늘도 하늘에는 흰구름 가득하지만 햇살이 따사롭게 내리쬡니다. 한 시를 넘고 두 시쯤 되면 우리 집 마당에도 햇볕이 넓게 드리우겠지요. 아침나절 쓸어 놓은 길은 눈이 말끔히 녹을 테고요. 이 즈음 해서 아이랑 손 잡고 밖으로 나와 아빠는 눈길을 마저 쓸고, 아이는 눈밭을 더 뛰어놀라 해야겠다 싶습니다.

 겨울이라고 날마다 눈이 오지 않으며, 어쩌면 한 해 두 해 뒤틀리는 날씨 때문에 앞으로는 눈 구경 하기 몹시 힘들는지 몰라요. 큰도시에서는 큰눈 때문에 길이 막힌다고 시끄러운데, 멧골자락에서는 큰눈이든 작은눈이든 눈쓸기를 할 때에는 손가락 아리며 고달프지만, 아이하고 신나게 뒹굴며 놀 수 있어 호젓합니다. 아이랑 아빠 숨소리와 목소리만 멧골에 울려퍼집니다. 때때로 눈산에서 먹이를 찾는 작은 새들 지저귀는 소리를 듣고, 바람이 살랑 불면 바람결에 나뭇가지에서 호도독 떨어지며 날리는 눈소리를 들어요. 집안 물은 얼었으나 골짜기 냇물은 졸졸 흐릅니다. 가느다란 냇물 소리를 듣는 가운데, 아이가 눈 밟으며 내는 뽀도독 소리를 듣습니다. 화학방정식 소금이든 흙이든 연탄재이든 뿌리지 않는 길에서 놀 수 있어 좋은 시골마을 겨울 하루입니다. (4343.12.30.나무.ㅎㄲㅅㄱ)


― 꼬마 인형 (가브리엘 벵상 글·그림,열린책들 펴냄,2003.4.20.(2009.10.30. 다시 나옴)/9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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