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집 - 책들이 탄생한 매혹의 공간
프란체스카 프레몰리 드룰레 지음, 이세진 옮김, 에리카 레너드 사진 / 윌북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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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쓰는 사람은 왜 도시를 떠나는가
 [책읽기 삶읽기 40] 프란체스카 프레몰리 드룰레·에리카 레너드, 《작가의 집》



 20세기를 대표한다는 책을 쓴 스무 사람이 어떠한 집에서 살면서 글을 썼는가를 돌아본다는 책 《작가의 집》을 읽습니다. 저로서는 이 《작가의 집》에 실린 스무 사람이 ‘20세기를 대표하는 글쓰는 사람’이라고는 느끼지 않습니다. 이 가운데에는 노벨문학상을 탄 사람이 있고, 아주 널리 이름난 사람이 있으나, 이들을 놓고 20세기를 대표한다고 섣불리 말할 수 있을까 궁금합니다.

 어느 한 세기를 대표한다는 사람을 ‘인기투표’ 하듯이 뽑을 수 있겠지요. 그러나 온누리 수많은 사람들이 수많은 책을 내놓아 다 다른 즐거움과 기쁨을 나누어 준 일을 돌아본다면, 이런 말은 참으로 부질없으며 덧없습니다. 헤르만 헤세나 어니스트 헤밍웨이나 버지니아 울프나 장 지오노 같은 사람들을 20세기를 대표하는 스무 사람에 넣을 수 있겠으나, 저로서는 어니스트 톰슨 시튼이라든지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이라든지 중 자오정 같은 사람을 넣고 싶습니다. 어쩌면, 《침묵의 숲》을 쓴 레이첼 카슨을 넣을 수도 있겠지요.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나 피에르 로티 같은 사람을 넣을 수도 있으나, 하이타니 겐지로나 미우라 아야코를 넣을 수도 있을 테며, 저는 한국사람이니까 리영희나 이오덕이나 이원수나 박경리나 권정생을 넣을 수 있을 테고요.

 《작가의 집》에 실린 스무 사람이란, 20세기를 대표한다기보다, 이 책을 쓴 프랑스사람이 좋아하는 글쟁이라고 여겨야 옳겠다고 봅니다. 더구나, 20세기를 대표한다는 사람은 온통 서양사람이며, 거의 다 서유럽에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이 책을 쓴 사람 스스로 좋아하는 스무 사람인데다가 서유럽 둘레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일컬어야 올바른 이야기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가만히 보면, 세계문학전집이라는 이름으로 세계문학을 살필 때에도 언제나 유럽문학이 한복판에 섭니다. 베트남문학이나 중국문학이나 필리핀문학이나 멕시코문학이나 칠레문학을 살피는 사람은 아주 드뭅니다. 우리도 어느새 이런 틀에 젖어듭니다. 세계문학이라 하면, 말 그대로 세계를 아우를 뿐 아니라 세계를 돌아보는 문학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황순원이나 조정래를 나라밖으로도 읽혀야 한다는 소리가 아니라, 수많은 나라와 겨레마다 아름다운 말꽃을 피우거나 일군 손길과 삶을 껴안을 때라야 비로소 세계문학이라는 이름을 붙일 만하다고 느낍니다.


.. 스웨덴의 모르바카 저택은 그녀(셀마 라게를뢰프)의 일가가 몇 대에 걸쳐 살면서 정을 붙인 곳이다. 그 땅에는 전통, 흥미로운 모험담, 겨우내 난롯가에서 도란도란 나누는 신기한 옛이야기가 풍부했다 … 장 지오노는 이 프로방스의 소박하고 아름다운 마을에서 1895년에 똑똑한 무정부주의자이지만 고독했던 이탈리아계 구두장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  (134, 170쪽)


 다시금 생각하면, 《작가의 집》은 그저 “글을 쓰던 사람들이 살던 집”을 하나하나 찾아가서 살핀 다음 적바림한 책이라고만 말해야 옳습니다. 어느 한 세기를 대표한다든지 세계문학을 대표한다는 말은 알맞지 않아요. 글을 쓰고 책을 낸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작가의 집》을 쓰고자 하는 사람이 ‘어떠한 마음과 뜻에 따라’ 더 좋아하는 사람들인가를 밝혀, 이러한 사람들을 좋아하는 까닭을 찬찬히 들려주면서, 이들 글쟁이 삶과 발자취를 톺아볼 때에 한결 알차며 훌륭하리라 생각합니다.

 그나저나, 《작가의 집》에 실린 스무 사람 삶을 돌아보면, 딱 한 사람을 빼놓고는 가난에 허덕이거나 배를 곯은 일이 없습니다. 딱 한 사람조차 술과 바람피우기에 빠져 돈을 흥청망청 써댔기 때문에 남의집살이를 하듯 떠돌며 살았지, 한 사람 한 사람 돌아보면 그리 어렵지 않은 살림이거나 꽤 넉넉한 살림을 누리면서 글을 쓴 사람들입니다.

 부자가 글을 쓰면 안 된다거나 밥 굶는 걱정 없이 글을 쓴다 해서 글이 어수룩하지 않습니다. 다만, 글로만이 아니라 사진으로도 “작가들이 살던 집”을 보여주는 책인 만큼, “작가라 하는 사람들이 살던 집이 너무 으리으리하거나 크”니까, 어쩐지 높직한 울타리가 서는 듯합니다. 글 좀 쓰고 살려면 이만 한 부잣집에서는 살아야 한다는 듯한 느낌이 짙습니다. 더욱이, 《작가의 집》에 나오는 사람들은 저마다 ‘널리 사랑받으며 많이 팔리는 책’이 생기면서 이렇게 많이 팔아 돈을 버는 책이 있을 때마다 집을 넓히거나 키웠다는 이야기가 자꾸 나옵니다.


.. 1980년대 말부터 유럽의 정세는 전반적으로 어두웠다. 세계대전이 발발했고 지척에서 폭격을 당했다. 울프 부부는 수시로 폭격이 일어나고 공습경보가 빈번한 혼란스러운 도시 런던을 점점 더 멀리하게 되었다 … 1930년에 딸 알린을 데리고 정착한 부부에게 “서쪽으로 200미터 남짓 거리에 도시가 있는 언덕 비탈. 종려나무, 월계수, 살구나무, 포도나무가 어쩌면 오십 그루쯤. 모자만 한 크기의 연못과 샘”이 있는 그곳은 천국과 같았다 … 그는 파리를 싫어했고 문학계 암투들과는 거리를 두었다. 그는 언제나 마노스크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  (161∼163, 174, 183쪽)


 저 또한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생각합니다. 우리 식구들 깃든 시골집이 겨울에 덜 춥고 여름에 덜 더울 수 있도록 손질하자면 천만 원쯤 있어야 합니다. 저한테는 천만 원이란 꿈 같은 돈이며, 이만 한 목돈을 손에 쥐기란 몹시 어려우리라 느낍니다. 지난해부터 얻어 지내는 시골집도 집삯을 안 내고 거저로 고맙게 얻어 지내는 판에, 집 고칠 돈을 어디에서 얻겠습니까. 그런데, 저 또한 제가 쓴 책 가운데 어느 한 가지가 제법 팔려 한 해 사이에 다섯 쇄쯤 신나게 찍는다면 글삯으로 천만 원이 모일 수 있어요. 이렇게 글삯이 들어온다면 이 돈으로 우리 시골집을 요모조모 고치고 손질할 수 있을 테지요. 이런 꿈을 꿀 수밖에 없습니다. 나 혼자 지내는 집이 아니라, 아이와 옆지기가 함께 살아가는 집이니, 또 ‘글쓰는 사람 집’에 쌓인 숱한 책들이 비바람이나 햇볕이나 멧쥐한테 다치지 않도록 건사하자면, 아주 빼어난 집은 아니더라도(바랄 수도 없으나) 기름값이나 땔감 걱정을 덜 하면서 조용히 잘 지낼 집을 바랄밖에 없습니다.

 참말 작은 집 한 채라면, 스무 평 서른 평도 아닌 열 평 남짓 되는 멧골자락 작은 집에서 어른 둘이랑 아이 둘이랑 복닥이면서 지낼 수 있는 작은 집 한 채라면, 네 식구 먹을 푸성귀를 일굴 텃밭을 옆에 끼면서 그야말로 호젓하게 흙에 뿌리를 내리는 삶을 사랑하면서 글과 책을 함께 사랑할 만하리라 봅니다. 한 사람 몫으로 두 평씩, 마루 몫으로 네 평, 부엌 몫으로 두 평, 씻거나 빨래하는 몫으로 한 평이면 한솥밥 먹는 식구들 살림집으로 좋습니다. 뒷간은 집 바깥에 내어 똥오줌 거름을 모아 텃밭에 뿌릴 수 있도록 하면 됩니다.


.. 그(로렌스 더럴)는 이집트의 습한 무더위, 도시가 뿜어내는 심한 먼지를 싫어했다 … 두 사람(크누트 함순과 아내)은 북부의 스토게임에서 ‘노르웨이 흙을 일구며’ 살았다 ..  (266, 319쪽)


 19세기를 살던 톨스토이 님은 한 사람한테 땅이 얼마나 있어야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네, 한 사람 앞에 땅이 백 평만 되더라도 이 넓은 땅을 돌보자면 등허리가 휩니다. 천 평 이천 평이 된다면 뼈가 빠집니다. 오천 평 만 평이 된다면 일하는 식구가 커야 합니다. 재 너머 사래 긴 밭 언제 갈려 하느냐는 옛사람 말도 있습니다만, 넓은 땅을 한 사람이 어떻게 건사하겠습니까.

 넓은 땅도 한 사람이 건사하기 벅차지만, 많은 돈이나 높은 이름도 한 사람이 건사하기 힘듭니다. 은행계좌에 1억이나 10억이 쌓였다면, 아이고, 이 돈 무서워서 어찌 사는가요. 집이란 한솥밥 먹는 살붙이가 오순도순 복닥이며 살을 부빌 만한 넓이면 넉넉하고, 돈이란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게 쓰거나 나눌 만큼이면 즐겁습니다. 없으면 없는 대로 살면 되지만, 있으면 있는 대로 근심덩어리인 돈이라고 느낍니다.

 《작가의 집》에 나온 스무 사람이 “글을 쓰고 지내던 살림집”을 다시금 돌아봅니다. 스무 사람이 글을 쓰며 지내던 살림집은 하나같이 도시하고 멀리 떨어집니다. 도심지 한복판에서 지내며 글을 쓰는 사람은 없습니다. 서양은 한국처럼 아파트가 널리 퍼지지 않기도 했지만, 수풀이 우거지고 멧짐승이나 들짐승이 마당을 오가는 시골자락 살림집에서 지내며 글을 썼다고 합니다. 자연을 노래하는 글을 썼든 안 썼든, 글을 쓰는 사람들 살림집은 한결같이 도시를 등집니다.

 문득 우리 나라를 떠올립니다. 우리 나라에서 글을 쓴다는 사람들은 으레 도시로 몰립니다. 더 큰 도시인 서울로 몰립니다. 작은 도시에 머물거나 시골자락에 뿌리내리며 글을 쓰는 사람도 제법 있습니다만, 훨씬 많은 글쟁이는 도시에 몰렸고, 이 가운데 서울 안쪽에 가장 많이 우글거립니다.

 신문기자이든 잡지기자이든 방송기자이든, 기자라는 이름을 내거는 이들 또한 으레 서울에 몰립니다. 책을 만드는 일꾼이라면 아주 마땅히 서울에만 있어야 하는 줄 생각합니다.

 서울에서 살아가니까 서울 이야기를 쓰고 서울 이야기를 듣거나 읽으며 서울 이야기를 생각합니다. 서울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서울 바깥 이야기는 잘 모르며 잘 모르니까 나누지 않는데다가, 나누지 않다 보니 살갗으로 못 느낄 뿐 아니라, 미국이나 일본이나 유럽 소식보다 멀디먼 소식처럼 여깁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스스로 뿌리내린 곳에서 살아가면서 생각합니다. 살아가는 보금자리 언저리에서 생각하며 말합니다. 살아가는 보금자리를 사랑하거나 아낄 수밖에 없습니다.

 도시에서 살아가면서 4대강사업을 가로막자고 외칠 수 있을는지 모르나, 외침말은 그저 외침말이지, 내 몸부림이거나 내 움직임으로 이어지지 못합니다. 서울에서는 환경운동이나 환경사랑을 할 수 없습니다. 서울에서는 4대강사업 막는 일을 비롯해 참다운 진보나 올바른 개혁을 이루지 못합니다. 서울 같은 도시는, 스스로 흙을 일구어 먹을거리를 마련하는 평화로운 일거리와 삶자락이 아니라, 무기공장이나 자동차공장 같은 데에서라도 일해서 어찌 되든 돈을 얻어 돈으로 먹을거리를 장만하고 돈으로 살림집을 얻어 돈으로 아이들을 가르치는 얼거리이기 때문입니다. 삶이 아닌 돈이 한복판에 또아리를 트는 도시입니다.

 20세기를 대표하는 사람인지 아닌지 모르나, 20세기에 손꼽히는 글쟁이 스무 사람이 하나같이 도시하고는 멀찍이 떨어진 시골자락 살림집에 뿌리를 내리면서 글을 쓴 까닭을 알 만합니다. 돈이나 이름값이나 힘(권력)이 아니라, 사랑과 믿음과 나눔을 아끼는 넋을 글로 담고자 하는 사람들이 도시에서 살아갈 수 없습니다. (4344.2.22.불.ㅎㄲㅅㄱ)


― 작가의 집 (프란체스카 프레몰리 드룰레 글,에리카 레너드 사진,이세진 옮김,윌북 펴냄,2009.11.10./14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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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이상 : “그 이상(以上)이다”라 할 때에는 “그보다 크다”로 다듬으면 됩니다. “평균 이상이다”라 할 때에는 “평균보다 높다”로 다듬으면 되고요. 아니, 다듬는다기보다, 이처럼 이야기해야 알맞습니다. “이상(理想)을 높게 펼치라”라면 “꿈을 높게 펼치라”라든지 “뜻을 높게 펼치라”로 손질하면 됩니다. 아니, 이때에도 손질한다기보다, 이렇게 이야기할 때에 올바릅니다. 우리는 우리말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고, 제대로 가르치지 않으며, 제대로 생각하는 길을 잊은 얄궂은 사람입니다.

[이상(異常) : 정상적인 상태와 다름. 지금까지의 경험이나 지식과는 달리 별나거나 색다름. 의심스럽거나 알 수 없는 데가 있음]
※ 이상한 일
→ 다른 일
→ 무언가 다른 일
※ 이상한 느낌
→ 다른 느낌
→ 아리송한 느낌
→ 알 수 없는 느낌
※ 이상한 사람
→ 남다른 사람
→ 알쏭달쏭한 사람
→ 얄궂은 사람
→ 못미더운 사람


22. 차이 : 우리말을 담은 국어사전이 사랑스럽거나 아름답다면, 우리 말사랑벗한테 국어사전을 틈틈이 읽고 알뜰히 살피라고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우리말을 실은 국어사전이 안쓰럽거나 슬프더라도, 이 국어사전을 가만히 살피고 곰곰이 돌아보면서, 말사랑벗들 나름대로 옳고 바르게 우리말을 헤아리면서 익히면 좋겠다고 이야기하고 싶어요. 한자말 ‘차이’를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다름”이라고 풀이합니다. 이 말풀이를 제대로 읽을 수 있다면, 우리말 ‘다름’을 한자말로는 ‘차이’로 적는 셈이로구나 하고 깨닫습니다. 우리가 쓸 말은 ‘다름’이고, 중국사람이나 일본사람이 쓸 말은 ‘差異’예요. 한글로 ‘차이’라 적는다 해서 우리가 쓸 만한 낱말은 아닙니다.

[차이(差異) : 서로 같지 아니하고 다름]
※ 견해 차이가 크다
→ 생각이 크게 다르다
→ 생각이 참 다르다
→ 생각이 아주 다르다
→ 생각이 크게 벌어진다
→ 생각이 크게 갈린다


23. 접촉 : 제가 1980년대에 국민학교를 다니며 중학교로 들어설 때에는, 두 학교에서 쓰는 교과서 ‘말투’가 달랐습니다. 국민학교 때에는 쉬운 말투를 쓰지만, 중학교부터는 어려운 말투를 썼어요. 이를테면, 국민학교 때까지는 ‘세모’와 ‘네모’였으나, 중학교부터는 ‘삼각형’과 ‘사각형’이었어요. 국민학생 때 자연을 배우면서 들은 말은 ‘닿다’와 ‘맞닿다’였으나, 중학생 때부터는 과학을 배우면서 ‘접촉’이라는 말을 듣고 써야 했습니다. ‘닿은 자리’나 ‘닿은 곳’ 같은 말투는 과학하는 말투가 될 수 없고, 오로지 ‘접촉면’이라고만 해야 했어요. 고등학교까지 마치고 사회라는 데로 나오니, 우리나라 대통령과 다른 나라 대통령이 만나든, 이웃과 이웃이 만나든 으레 ‘접촉’이라는 말을 씁니다. 우리말은 ‘만나다’요 ‘사귀다’이며 ‘어울리다’인데, 이런 우리말을 듣거나 쓸 자리는 자꾸 사라집니다.

[접촉(接觸) : 서로 맞닿음. 가까이 대하고 사귐]
※ 이웃과의 접촉을 꺼리다
→ 이웃과 만나기를 꺼리다
→ 이웃과 사귀기를 꺼리다
 
 
24. 이하 : 학교에서 ‘이상-이하’랑 ‘미만-초과’가 어떻게 다른가를 배웠습니다. 그러나 ‘넘다/넘치다-모자라다’라든지 ‘웃돌다-밑돌다’라든지 ‘적다-많다’ 같은 말이 어떻게 다른가를 배운 적이 없습니다. 한눈에 알아보도록 쉬우면서 바르게 말하도록 우리말을 가르치는 어른이 없었고, 쉽고 바른 우리말을 애써 배우려는 또래 동무 또한 없었습니다. 가르치면 그저 가르치는 대로만 배워야 하는 ‘쑤셔넣기(주입식)’만 판쳤습니다.

[이하(以下) : 수량이나 정도가 일정한 기준보다 더 적거나 모자람. 순서나 위치가 일정한 기준보다 뒤거나 아래]
※ 18세 이하 관람 불가
→ 열여덟까지 볼 수 없음
→ 열여덟 살까지 못 봄
→ 열아홉 안 되면 못 봄
→ 열아홉부터 볼 수 있음


25. 작업 : 사회 한켠에서는 ‘일하는’ 사람을 일컬어 ‘근로자(勤勞者)’라 하고, 다른 한켠에서는 ‘노동자(勞動者)’라 합니다. 어느 쪽에서도 “일하는 사람 = 일꾼”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일을 하는 곳은 ‘일터’이지만 ‘작업장(作業場)’이라고만 가리킬 뿐이요, 이제는 ‘잡(job)'이라는 영어를 두루 쓰기까지 합니다.

[작업(作業) : 일을 함]
※ 작업을 완수하다
→ 일을 다하다
→ 일을 마치다
→ 일을 끝내다
→ 일을 끝맺다
→ 일을 마무리하다
→ 일을 마무리짓다


26. 계속 : 처음 듣고 말을 할 때에는 그때와 그곳에 알맞으니까 이런 말을 써야 하는구나 하고 느꼈으리라 봅니다. 나중에는 왜 이런 말을 써야 하는지를 헤아리지 않으면서 그냥 말합니다. 익숙해진다고 해야 할까요, 길든다고 해야 하나요. 참으로 좋은 말인지, 더할 나위 없이 알맞을 말인지, 여러모로 괜찮은 말인지를 살필 겨를이 없을 뿐더러, 애써 살피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냥 쓰니까 그냥 쓰는 말입니다. 자꾸 쓰면서 버릇이 되는 말입니다. 잇달아 듣고 말하다 보니 뿌리내리는 말입니다. 좋은 말도 익숙해지지만, 궂은 말 또한 익숙해집니다. 익숙해지는 말이란 참 무서운 삶이라고 느껴요.

[계속(繼續) : 끊이지 않고 잇따라]
※ 계속 진행하다
→ 그대로 이어가다
→ 끊지 않고 하다
※ 계속 걷다
→ 꾸준히 걷다
→ 한결같이 걷다
※ 계속 펼치다
→ 잇달아 펼치다
→ 자꾸 펼치다


27. 순수 : “순수한 뜻이었어.” 하는 말을 곧잘 했습니다. 이래저래 나쁜 뜻이란 없었다는 마음을 밝히려고 읊은 말입니다. 이제 와 돌이키면 “나쁜 뜻은 없었어.”라든지 “그런 뜻이 아니었어.”라든지 “해코지할 마음이 아니었어.”라든지 “일부러 한 일이 아니었어.”처럼 말해야 올발랐겠구나 싶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순수예술”이나 “순수학문”이나 “순수문학”을 이야기합니다. 오늘날 숱한 예술이나 학문이나 문학이 ‘돈을 바라보면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순수’라는 낱말을 꾸밈말처럼 붙이는구나 싶은데, “못된 생각이 섞인”다면 예술도 아니고 학문도 아니요 문학도 아니에요. 처음부터 끝까지 ‘순수’를 앞에 붙일 수 없습니다. “그냥 학문을 할” 뿐이고, “좋아하는 문학을 할” 뿐입니다.

[순수(純粹) : 전혀 다른 것의 섞임이 없음. 사사로운 욕심이나 못된 생각이 없음]
※ 순수한 애정
→ 티없는 사랑
→ 맑은 사랑
→ 꾸밈없는 사랑
→ 깨끗한 사랑
→ 고운 사랑


28. 선택 : 대통령이나 국회의원 같은 분들을 ‘뽑는’ 자리에서는 으레 ‘선거’와 ‘선택’이라는 낱말만 쓸 뿐, ‘뽑다’나 ‘뽑기’ 같은 말은 쓰지 않습니다. 그분들한테는 ‘뽑다’ 같은 낱말이 버르장머리없다고 느끼기 때문일까요. 대통령도 뽑지만, 반장도 뽑습니다. 국회의원도 뽑으나, 청소당번도 뽑습니다. 뽑는 일이랑 비슷하게 ‘가리기’와 ‘추리기’와 ‘솎기’와 ‘골라뽑기’가 있습니다. ‘추리기’와 ‘간추리기’는 또 다릅니다. 우리들이 ‘선택’이라는 한자말에 매인다면 이 숱한 우리말을 제대로 못 쓰기도 하지만, 제대로 쓰는 결마저 잃거나 잊습니다.

[선택(選擇) : 여럿 가운데서 필요한 것을 골라 뽑음]
※ 알맞은 단어의 선택이 필요하다
→ 알맞은 말을 골라야 한다
→ 읽을 책을 선택하다
→ 읽을 책을 고르다
→ 읽을 책을 가리다
→ 읽을 책을 추리다
→ 읽을 책을 뽑다


29. 설명 : 선생님들은 늘 ‘설명’합니다. 선생님들 ‘설명’을 듣다 보면, 이 설명이란 곧 ‘말씀’이나 ‘말’이나 ‘이야기’이곤 합니다. “자, 내가 설명해 줄게.”란 “자, 내가 이야기해 줄게.”예요. 그러고 보면, 이야기해 주는 일이란, 잘 모르는 사람한테 ‘알려주는’ 일입니다. 이야기란 ‘들려줍’니다. 흐리멍덩하게 알거나 어렴풋이 생각하던 대목을 환하게 ‘밝히는’ 일이기도 해요. ‘깨우쳐’ 주거나 ‘일깨워’ 주는 일이기도 합니다.

[설명(說明) : 어떤 일이나 대상의 내용을 상대편이 잘 알 수 있도록 밝혀 말함]
※ 사용법을 설명하다
→ 쓰는 법을 알려주다
→ 쓰는 법을 들려주다
→ 쓰는 법을 얘기하다
→ 어떻게 쓰는지 말하다


30. 기억 : 예전에 듣거나 겪은 일을 잘 떠올리는 사람한테 흔히 “기억력이 좋다.”고 말했습니다. ‘기억력’이란 “기억하는 힘”이고, 기억하는 힘이란 “되새기는 힘”입니다. 되새김질 잘하는 셈이고, 생각힘이 남다르다는 소리예요. 지난 일을 헤아리는 모습을 일컬으며 ‘떠올리다’를 비롯해 ‘돌이키다’라든지 ‘되돌이키다’라든지 ‘돌아보다’라든지 ‘되돌아보다’라든지 ‘뒤돌아보다’라든지 ‘되씹다’라든지 ‘되새기다’라든지 참 많이 이야기합니다. 숱한 낱말마다 쓰임새가 조금씩 다르고, 느낌과 말맛이 살짝 달라요. 우리말을 생각하는 마음을 기르면 내 넋을 한결 넉넉하고 알차게 가다듬을 수 있습니다.

[기억(記憶) : 이전의 인상이나 경험을 의식 속에 간직하거나 도로 생각해 냄]
※ 이전의 경험을 기억하다
→ 예전에 겪은 일을 떠올리다
→ 예전 일을 돌이키다
→ 예전 일을 다시 생각하다
→ 지난 일을 되새기다
→ 지난 일을 곱새기다
→ 그때 겪은 일을 되살리다

 (최종규 . 2011 - 10대와 통하는 우리말 바로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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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이용 : 어릴 적, 머리를 깎으러 ‘이발소(理髮所)’나 ‘이용원(理容院)’을 다녔습니다. 이발소나 이용원은 한자말이지만, 간판이 한자로 된 곳은 없었습니다. 아마, ‘이발소’나 ‘이용원’을 한자로 적으면 사람들이 이곳이 어떤 데인지 알아보기 힘들 테지요. 남자는 ‘이발소-이용원’을 다니고, 여자는 ‘미용실(美容室)’을 다녀야 한다 했는데, 나중에 ‘머리방’이 나왔습니다. 생각해 보면, 머리를 만지는 집이니 ‘머리방’이나 ‘머리집’이라 이름을 붙여야 옳아요. 그러니까, 저로서는 ‘이용’이라 한다면, 그리 쓸 만하지 않은 한자말이면서 ‘머리를 깎는 일’을 일컫는다고 여기지, 우리말 ‘쓰다’와 똑같이 쓸 낱말로는 다루지 않습니다.

[이용(利用) : 대상을 필요에 따라 이롭게 씀]
※ 자원의 효율적 이용
→ 자원을 알맞게 쓸
→ 자원을 알차게 씀
→ 자원을 알뜰히 씀
→ 자원을 훌륭히 씀


12. 세탁 : 제가 어렸을 때 동네 세탁소 아저씨는 동네를 돌며 “세에탁!” 하고 노래를 불렀습니다. “세에탁!” 하고 노래를 부를 때에 집에서 나와 당신 가게에 맡길 빨래감을 내놓으라는 뜻이었습니다. 어머니들은 ‘세탁소’에 ‘빨래감’을 맡겼습니다. 집에서는 누구나 ‘빨래’를 했습니다. 나중에 ‘세탁기’라는 기계가 나왔지만, 세탁기를 쓰면서 누구나 으레 ‘빨래한다’고 말했습니다. 1990년대로 접어들며 ‘빨래방’이 처음 나왔습니다. ‘머리방’과 매한가지로, 빨래를 하는 집이니 마땅히 ‘빨래집’이라 이름을 붙였어야 했는데, 한글을 1400년대에 만들었다 하지만, 정작 ‘빨래’를 옳게 쓴 때는 2000년을 코앞에 둔 요즈막입니다.

[세탁(洗濯) = 빨래]
※ 매일 세탁해야 한다
→ 날마다 빨래해야 한다
→ 날마다 빨아야 한다


13. 열심 : 말사랑벗한테 “열심히 공부해.” 하고 말하는 어버이나 선생님이 있을 테지요. 저도 어린 날부터 이런 소리를 곧잘 들었습니다. ‘공부’라는 낱말뿐 아니라 ‘열심’이란 낱말이 얼마나 싫고 지겨웠는지 몰라요. 중학생쯤 될 무렵, ‘열심’이라는 낱말을 국어사전에서 뒤적이다가 ‘바지런’이나 ‘부지런’을 한자로 옮긴 낱말일 뿐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니까, 어른들은 우리한테 “바지런히 공부하라”고 말한 셈이고, ‘공부(工夫)’란 ‘배움’을 가리키는 한자말이었어요. 이러거나 저러거나 우리한테는 골아픈 말이라 할는지 모르지만 어차피 할 말이라면, “열공”보다는 “힘써 배우라” 하고 말했으면 어떠했을까요.

[열심(熱心) : 어떤 일에 온 정성을 다하여 골똘하게 힘씀]
※ 열심히 공부하다
→ 힘껏 배우다
→ 힘써 배우다
→ 애써 배우다
→ 온힘 바쳐 배우다
→ 땀흘려 배우다
→ 바지런히 배우다


14. 지각 : 학교에서나 회사에서나 ‘지각’하지 말라고 이야기합니다. ‘늦지’ 말라고는 잘 말하지 않아요. 학교나 회사에서는 ‘조회’를 하고 군대에서는 ‘일조점호’를 합니다. ‘朝會’이든 ‘日朝點呼’이든 아침에 모이는 일이요, ‘아침모임’이에요. 가만히 보면, ‘조회’나 ‘점호’ 같은 말은 우리가 일본 제국주의자한테 짓눌리던 때 슬프게 들어와 여태껏 슬프게 옥죄는 낱말이기도 합니다.

[지각(遲刻) : 정해진 시각보다 늦게 출근하거나 등교함]
※ 지각대장
→ 늦기대장
→ 늦기쟁이
→ 늦쟁이


15. 판단 : ‘판단’ 말풀이는 ‘판정(判定)’을 찾아보도록 나오고, ‘판정’ 말풀이는 ‘판별(判別)’을 살펴보도록 나옵니다. ‘판별’이란 “판단하여 구별함”이라 나와요. 그러니까, ‘판단 → 판정 → 판별 → 판단’인 셈이랍니다. 이런 돌림풀이로 된 국어사전을 펼칠 말사랑벗은 우리말을 어떻게 배우거나 헤아릴 수 있을까 궁금합니다.

[판단(判斷) : 사물을 인식하여 논리나 기준 등에 따라 판정을 내림]
※ 정확한 판단을 내리다
→ 올바로 살피다
→ 올바로 가누다
→ 올바르게 가리다
→ 올바르게 헤아리다
→ 옳고 바르게 생각하다


16. 입장 : 흔히들, ‘立場’이라는 한자말만 일본 한자말로 여기며, 이 말을 안 써야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入場’이라는 한자말 또한 우리말이 아니에요. 우리말은 ‘들어옴’입니다. “입장하세요.”는 잘못 쓰는 말이라 “들어오세요.”라 말해라 올바릅니다. ‘입장과 퇴장’은 ‘들어오고 나가기’로 손질해야 알맞습니다. 곰곰이 살펴본다면, 지난날 한국사람은 ‘입장’ 같은 한자말을 안 썼습니다. ‘입장’이라는 일본 한자말을 어찌저찌 고쳐써야 한다기보다, 이런 말을 아예 안 쓰면 됩니다. “내 입장 좀 봐줘.”가 아니라 “나 좀 봐줘.”라든지 “나를 좀 생각해 줘.”라 말해야 올발라요. “입장 바꿔 생각해 봐.”는 “자리 바꿔 생각해 봐.”이거나 “(네가) 내가 되어 생각해 봐.”로 고쳐 주어야 합니다.

[입장(立場) : 당면하고 있는 상황. ‘처지(處地)’로 순화]
※ 내 입장이 난처하다
→ 내 자리가 딱하다
→ 내가 힘들다
→ 내가 어찌할 바 모르다


17. 이해 : 학교에서 선생님들은 언제나 “이제 이해하겠니?” 하고 물었습니다. 때로는 “이제 알겠니?” 하고도 물었습니다. 그러니까, ‘이해하다’란 ‘알다’란 소리입니다. “네가 나를 이해할 수 있니?” 할 때에는 “네가 나를 알 수 있니?”라는 뜻이며, “네가 내 마음일 수 있니?”와 같은 느낌입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란 알기 어려운 일이면서 ‘알쏭달쏭하’거나 ‘아리송한’ 일이에요. ‘알듯 말듯한’ 일이 되기도 하겠지요.

[이해(理解) : 사리를 분별하여 해석함. 깨달아 앎]
※ 이해하기 어렵다
→ 알기 어렵다
→ 헤아리기 어렵다
→ 받아들이기 어렵다
→ 깨닫기 어렵다


18. 감동 : 마음을 움직이도록 이끄는 책이 좋다고 느낍니다. 저는 ‘좋은’ 책이라기보다 ‘제 마음을 움직이도록 이끄는’ 책을 즐깁니다. 내 마음을 건드리지 못하거나 내 마음을 움직이지 못한다면,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는 소리입니다. 마음이 움직여야 사랑이고, 마음이 움직일 때에 비로소 믿음입니다.

[감동(感動) : 크게 느끼어 마음이 움직임]
※ 감동했어
→ 뭉클했어
→ 짠했어
→ 마음이 움직였어
→ 대단했어
→ 좋았어
→ 아름다웠어
→ 마음이 촉촉히 젖었어
→ 흐뭇했어
→ 가슴이 터질 듯했어


19. 제공 : ‘금품 제공’을 하듯이 ‘애정 제공’을 하는 사람이 있을까 궁금합니다. 나쁜 꿍꿍이셈인 사람은 돈을 몰래 주거나 뒷주머니에 꽂아 넣습니다. 착한 사랑을 하는 사람은 사랑을 주거나 나누거나 베풀거나 펼치거나 함께하거나 선보입니다. 저마다 선 자리에 알맞게 말을 합니다. 저마다 사랑하는 만큼 말을 가꾸거나 돌봅니다.

[제공(提供) : 무엇을 내주거나 갖다 바침]
※ 음식이 무료로 제공되고 있다
→ 밥을 거저로 준다
→ 밥을 그냥 준다
→ 누구한테나 밥을 준다
→ 아무나 밥을 먹을 수 있다
→ 밥을 거저로 먹을 수 있다


20. 시인 : 시를 쓰는 사람도 ‘시인(詩人)’입니다. 소설을 쓰는 사람은 ‘소설가(小說家)’라 합니다. 그림을 그리면 ‘화가(畵家)’라 해요. 그런데, 우리들은 ‘시꾼’이나 ‘시쟁이’, ‘소설쟁이’나 ‘소설꾼’, ‘그림쟁이’나 ‘그림꾼’이라 말하기도 합니다. 학교에서 선생님은 가르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가르침이’나 ‘가르침꾼’이라 일컬을 수 있고, 배우는 사람은 ‘배움이’나 ‘배움꾼’이라 가리킬 수 있어요. 언제나 내 모습 그대로 내 이름을 붙이면 되고, 내 모습 그대로 받아들일 때에 비로소 가장 알맞거나 좋은 이름을 얻습니다.

[시인(是認) : 어떤 내용이나 사실이 옳거나 그러하다고 인정함]
※ 과오를 시인하다
→ 잘못했다고 밝히다
→ 잘못이라고 털어놓다
→ 잘못임을 받아들이다
→ 잘못했음을 받아들이다

(최종규 . 2011 - 10대와 통하는 우리말 바로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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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시책 몇 권을 읽다가


 지난주에 서울마실과 인천마실을 하면서 여러 책방에서 동시책을 여러 권 읽었다. 갓 나온 동시책부터 요 대여섯 해 사이에 나온 동시책을 죽 읽는데, 어느 동시책이고 선뜻 책값을 치러 살 만하다고 느끼지 못한다. 지난날 이오덕 님이 우리네 동시 문화를 슬프게 꾸짖기도 했으나, 아직까지도 우리네 동시 문화란 조금도 나아지거나 발돋움하지 못한다. 게다가 섣부르거나 어설프거나 어이없다 싶을 만한 말재주 피우기가 동시인 줄 생각하는 흐름이 걷히지 않는다. 아니, 이런 거품이 더 커진다. 장삿속으로 어린이책을 내놓는다는 출판사가 아니라 하던 꽤 손꼽히는 출판사에서 내놓은 동시책이라 해서 다르지 않다. 어쩌면, 이제는 어린이책 내는 출판사가 한결같이 장삿속을 안 따질 수 없기 때문에, 말재주 피우기 동시책을 보란 듯이 내놓으면서 아이들 마음과 머리와 삶을 엉망으로 흐트리는 데에 한몫 하도록 거드는 셈 아닌가 싶다.

 그러나, 이런 동시는 예전에든 오늘이든 앞으로든 어디에서나 누구이든 쓰기 마련이다. 이런 동시가 책으로 나오느냐 안 나오느냐 하고, 이런 동시책을 어느 출판사에서 내놓느냐를 따질 일이다.

 조금 더 생각한다면, 말재주를 피우는 동시답지 않은 동시를 쓰는 까닭은, 이러한 동시를 쓰는 사람들 삶하고 이어진다. 삶부터 재주 피우듯 겉치레로 흐른다면, 이러한 삶을 꾸리는 사람이 쓰는 동시는 뻔하다. 삶을 알차게 꾸리는 사람이 동시를 알차게 안 쓸 수 없다. 삶을 즐거이 일구는 사람이 동시를 즐거이 안 쓸 수 없다. 삶을 아름다이 돌보는 사람이 동시를 아름다이 안 쓸 수 없다.

 동시란 말재주가 아니다. 그러니까, 어린이시는 말재주가 아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어른시 또한 말재주가 아니다. 곧, 시란 말재주가 아니다. 시는 말놀이 또한 아니다. 말놀이를 하면서 시를 쓸 수 있고, 말재주를 부리면서 시를 써도 나쁘지 않다. 그러나 말재주나 말놀이는 시가 아니다. 말재주를 피우든 말놀이를 즐기든, 이렇게 하고픈 사람 마음이지만, 말재주란 재주부리기이고, 놀이란 놀음놀이일 뿐이다.


.. 쏜살같이 헤엄쳐 도망가는 / 송사리 지느러미 / 얇아요 / 꽃나무 둘레에서 잉잉대는 / 꿀벌의 날개 / 참 얇아요 / 얇은 건 부지런해요 / 부지런하니까 얇은 거예요 ..  (ㅊ에서 펴낸 ㅈ시인 동시집 ㄲ에서)


 글을 더 잘 쓰도록 글재주를 갈고닦는다든지, 문학을 더 잘 하도록 문학수업을 받는다 해서 동시를 잘 쓰거나 문학을 한결 잘 하지 않는다. 내 삶을 옳게 깨닫고, 내 삶을 참다이 사랑하며, 내 둘레 사람들 삶을 착하게 어깨동무할 때라야 비로소 내가 쓸 동시이든 문학이든 제자리를 찾도록 이끈다.

 쓰이는 동시나 읽히는 동시나 참 슬프다. (4344.2.22.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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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으로는 무엇을 담을 수 있는가
 [잘 읽히기 기다리는 사진책 16] 후타가와 유키오(二川幸夫), 《日本の民家》(A.D.A. EDITA Tokyo,1980)



 사진기를 늘 갖고 다닌다 해서 내가 바라거나 꿈꾸는 온갖 모습을 사진으로 이루지는 못합니다. 사진기를 어디에나 들고 다닌다 해서 대단하거나 놀랍거나 훌륭하다 싶은 모습을 사진으로 일구지는 못합니다.

 사진기를 언제나 갖고 다니는 사람은 나 스스로 바라보거나 부대끼거나 겪거나 느끼는 삶을 차근차근 사진으로 담을 수 있습니다. 사진기를 어디에서나 손에 쥐는 사람은 내 삶에 어떤 이야기가 깃드는가를 가만히 느끼면서 이 삶이야기를 사진이야기로 다시 태어나도록 이끕니다.

 사진이란 그리 멋진 일이 아닙니다. 글이나 그림이 그다지 멋스러운 일이 아니듯, 사진 또한 썩 멋있는 일이 아닙니다. 사진은 그저 사진이고, 글은 그저 글이며, 그림은 그저 그림입니다. 사진이라서 더 손꼽을 만한 문화이지 않고, 글이라서 더 돋보이는 예술이 아니며, 그림이라서 더 아름다운 갈래가 아닙니다. 우리가 저마다 꾸리는 하루하루를 가만히 담는다든지 차분히 엮는다든지 알알이 빚도록 돕거나 이끄는 문화이면서 예술이고 삶입니다.

 어린이문학을 하던 권정생 님은 ‘동화 쓴다고 나를 대단한 사람으로 보지 말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사람들한테 손꼽히는 작품이 몇 가지 있다 해서 당신이 대단한 사람이 될 수 없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사람들이 당신 작품을 좋아하건 말건 그리 대수롭지 않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정작 대수로이 여길 대목은 나 스스로 내 삶을 얼마나 알차며 아름다이 일구느냐일 뿐입니다. 남들이 나를 우러르거나 섬긴다 해서 내가 똑바르거나 훌륭하거나 사랑스럽거나 믿음직할 수 없습니다. 남들이 나를 알아보지 못하거나 깎아내리거나 손가락질한대서 내가 멍청하거나 어리석거나 덜 떨어질 수 없습니다.

 나는 나요, 내 사진은 내 사진입니다. 나는 내가 즐기는 사진을 할 사람이고, 나는 내가 좋아하는 삶을 일굴 사람입니다.

 가장 뛰어난 글이나 그림은 없습니다. 가장 뛰어난 사진은 없습니다. 때때로 ‘광고사진 가장 잘 찍는’이라든지 ‘사람사진 가장 잘 찍는’이라든지 ‘다큐사진 가장 잘 찍는’처럼 어이없는 꾸밈말을 앞에 붙이는 사진쟁이가 있습니다. ‘가장 잘 찍는’이란 참 쓸데없는 말이지만, ‘아주 잘 찍는’이나 ‘참 잘 찍는’도 참 부질없는 말입니다. 그냥 ‘찍는’ 사진이지, 잘 찍는 사진이 될 수 없습니다. 그예 하루하루 살아가는 내 나날이지, 잘 살거나 못 살거나 가를 수 없는 내 내날입니다.

 기쁜 날은 기쁜 대로 좋습니다. 슬픈 날은 슬픈 대로 좋습니다. 어느 날은 달리기를 하다가 넘어지겠지요. 어느 날은 밥을 태우겠지요. 어느 날은 목돈이 들어와 마음껏 돈을 쓰겠지요. 어느 날은 살림돈이 바닥나서 혼쭐나겠지요.

 어떠한 나날일지라도 내 삶이요 어떠한 모습이더라도 내 얼굴입니다. 틀이 조금 기울어지거나 초점이 살짝 어긋나더라도 내 사진입니다. 빛이 조금 안 맞거나 무언가 밍숭맹숭하더라도 내 사진입니다. 어떠한 모습이든 내가 살아가는 이야기를 살포시 담을 때에 비로소 사진이라는 이름을 붙일 만합니다. 내가 살아가는 이야기를 가만히 담지 못하면서 틀이 빈틈없거나 초점이 또렷하거나 빛이 잘 맞거나 꽉 짜인 작품이라 한다면, 이때에는 무슨무슨 겉치레 작품은 되겠으나, 사진이 되지는 않습니다.

 후타가와 유키오(二川幸夫) 님이 사진을 찍고 이토 테이지(伊藤ていじ) 님이 글을 넣은 두툼한 사진책 《日本の民家》(A.D.A. EDITA Tokyo,1980)를 봅니다. 제주섬 제주시청 둘레 이도1동에 자리한 헌책방 〈책밭서점〉에서 만난 이 사진책을 장만하느라 25만 원을 썼습니다. 헌책방 헌책 하나 값이 25만 원이기에 놀랄 분이 있으리라 보는데, 이 사진책 하나는 25000엔이기도 합니다만, 25만 원이 아닌 50만 원 값을 붙이더라도 제값을 톡톡히 하는 사진책이라고 느껴 주머니를 탈탈 털었습니다. 헬무트 뉴턴 님 사진책보다 값이 더 비싼 이 사진책을 장만하면서 생각합니다. 헬무트 뉴턴 님 사진책은 돈이 되면 언제라도 살 수 있습니다. 후타가와 유키오 님 사진을 담은 《日本の民家》는 돈이 있어도 두 번 다시 사기 어렵습니다. 일본 헌책방이라면 이 사진책을 찾을 만할까요. 한국 헌책방에 이 사진책이 언젠가 다시 한 번 들어올 날이 있을까요.

 사진을 하는 사람들은 으레 서양 사진쟁이 서양 옛집 사진만을 놓고 생각합니다. 으젠느 앗제가 찍은 파리라든지 알프레드 스티글리츠가 찍은 뉴욕이라든지 하면서, 이들 작품을 일컬어 ‘세계 사진이 흘러온 발자취’라고 이야기합니다. 이러한 이야기는 틀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세계 사진 발자취’ 곁에 ‘세계 사진 발자취’ 꽁무니에도 끼지 못한다는 “일본 여느 살림집 모습”을 담은 사진이 있습니다. 후미진 골목이나 으리으리한 도심지하고는 동떨어진, ‘흙하고 벗삼아 조용히 살아오던’ 사람들 시골집이나 멧골집이나 바닷가집 사진이 있습니다.

 도시는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자취입니다. 시골은 시골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손때입니다. 도시는 어느 만큼 흐르고 나면 옛집이 스스로 무너지거나 사람손으로 허뭅니다. 도시에서 무너지거나 허무는 집이란 건축쓰레기입니다. 시골은 어느 만큼 흐르면 흙으로 고스란히 돌아갑니다. 시골에서 허물어지거나 허무는 집이란 쓰레기 아닌 거름입니다.

 아주 마땅합니다만, 도시에서 도시사람들 도시 살림살이를 사진으로 담을 때에는 도시 내음과 도시 빛깔이 깊이 배어듭니다. 시골에서 시골사람들 시골 살림살이를 사진으로 실을 때에는 시골 내음과 시골 빛깔이 깊이 스며듭니다.

 사진으로 스미는 내음이요 빛깔이면서, 사진기를 쥔 사진쟁이한테 함께 배는 내음이면서 빛깔입니다. 이는 사진을 읽는 사람한테도 나란히 스미거나 뱁니다. 도시사람 도시 이야기를 바라보는 사람한테는 도시 내음과 도시 빛깔이 스밉니다. 시골사람 시골 이야기를 마주하는 사람한테는 시골 내음과 시골 빛깔이 뱁니다.

 사진쟁이가 사진기를 들고 다니면서 손에 쥐는 곳에서 사진이 태어납니다. 사진쟁이는 사진에 담을 사람들 삶자락 이야기를 언제 어디에서 어느 만큼 사람들하고 사귀거나 만나는가에 따라, 곧 ‘사진기 쥐고 움직이며’ 사람들하고 어울리는 깊이와 너비에 걸맞게 사진을 낳습니다. 사진기만 쥐면서 막상 사람들하고 사귀지 못한다면, 이러한 몸가짐과 삶자락이 사진에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사진기를 쥐면서 사람들하고 오붓이 어깨동무를 한다면, 이러한 매무새와 삶무늬가 사진에 남김없이 나타납니다. 사람들이 사진기를 느끼지 않을 만큼 사람들 사이에서 녹아들어 함께 지내는 이웃이 되어 살아간다면, 이러한 모양새와 삶결이 사진에 알알이 깃듭니다.

 사진책 《日本の民家》는 “일본 살림집”이라는 이름을 붙일 만한, 붙여야 할 만한, 붙일 수 있을 만한 사진책입니다. ‘세계 사진 발자취’에서 이 사진책을 끼워 주든 안 끼워 주든 이 사진책은 ‘사람이 집을 짓고 마을을 이루어 살림을 꾸리는 나날’을 사진으로 알뜰살뜰 적바림한 빛살 좋은 사진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나저나, 이웃나라 일본에는 “일본 살림집” 사진책이 제법 있습니다만, 이 나라 한국에는 예나 이제나 아직 “한국 살림집”을 말하는 사진책은 거의 안 보입니다. 안승일 님이 일군 《굴피집》(산악문화,1997)을 빼고는 좀처럼 “한국 살림집”다운 한국 살림집 이야기를 펼친다 싶은 한국 사진책은 마주하기 힘듭니다. 도시 골목동네 살림집이든, 도시와 시골을 뒤덮은 아파트 살림집이든, 시골에서 흙을 일구거나 고기를 잡는 사람들 살림집이든, “여느 사람 보금자리”를 여느 사람 눈썰미와 손길과 다리품으로 담는 사람은 도무지 찾아보기 힘듭니다. (4344.2.22.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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