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책 몇 권을 읽다가
지난주에 서울마실과 인천마실을 하면서 여러 책방에서 동시책을 여러 권 읽었다. 갓 나온 동시책부터 요 대여섯 해 사이에 나온 동시책을 죽 읽는데, 어느 동시책이고 선뜻 책값을 치러 살 만하다고 느끼지 못한다. 지난날 이오덕 님이 우리네 동시 문화를 슬프게 꾸짖기도 했으나, 아직까지도 우리네 동시 문화란 조금도 나아지거나 발돋움하지 못한다. 게다가 섣부르거나 어설프거나 어이없다 싶을 만한 말재주 피우기가 동시인 줄 생각하는 흐름이 걷히지 않는다. 아니, 이런 거품이 더 커진다. 장삿속으로 어린이책을 내놓는다는 출판사가 아니라 하던 꽤 손꼽히는 출판사에서 내놓은 동시책이라 해서 다르지 않다. 어쩌면, 이제는 어린이책 내는 출판사가 한결같이 장삿속을 안 따질 수 없기 때문에, 말재주 피우기 동시책을 보란 듯이 내놓으면서 아이들 마음과 머리와 삶을 엉망으로 흐트리는 데에 한몫 하도록 거드는 셈 아닌가 싶다.
그러나, 이런 동시는 예전에든 오늘이든 앞으로든 어디에서나 누구이든 쓰기 마련이다. 이런 동시가 책으로 나오느냐 안 나오느냐 하고, 이런 동시책을 어느 출판사에서 내놓느냐를 따질 일이다.
조금 더 생각한다면, 말재주를 피우는 동시답지 않은 동시를 쓰는 까닭은, 이러한 동시를 쓰는 사람들 삶하고 이어진다. 삶부터 재주 피우듯 겉치레로 흐른다면, 이러한 삶을 꾸리는 사람이 쓰는 동시는 뻔하다. 삶을 알차게 꾸리는 사람이 동시를 알차게 안 쓸 수 없다. 삶을 즐거이 일구는 사람이 동시를 즐거이 안 쓸 수 없다. 삶을 아름다이 돌보는 사람이 동시를 아름다이 안 쓸 수 없다.
동시란 말재주가 아니다. 그러니까, 어린이시는 말재주가 아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어른시 또한 말재주가 아니다. 곧, 시란 말재주가 아니다. 시는 말놀이 또한 아니다. 말놀이를 하면서 시를 쓸 수 있고, 말재주를 부리면서 시를 써도 나쁘지 않다. 그러나 말재주나 말놀이는 시가 아니다. 말재주를 피우든 말놀이를 즐기든, 이렇게 하고픈 사람 마음이지만, 말재주란 재주부리기이고, 놀이란 놀음놀이일 뿐이다.
.. 쏜살같이 헤엄쳐 도망가는 / 송사리 지느러미 / 얇아요 / 꽃나무 둘레에서 잉잉대는 / 꿀벌의 날개 / 참 얇아요 / 얇은 건 부지런해요 / 부지런하니까 얇은 거예요 .. (ㅊ에서 펴낸 ㅈ시인 동시집 ㄲ에서)
글을 더 잘 쓰도록 글재주를 갈고닦는다든지, 문학을 더 잘 하도록 문학수업을 받는다 해서 동시를 잘 쓰거나 문학을 한결 잘 하지 않는다. 내 삶을 옳게 깨닫고, 내 삶을 참다이 사랑하며, 내 둘레 사람들 삶을 착하게 어깨동무할 때라야 비로소 내가 쓸 동시이든 문학이든 제자리를 찾도록 이끈다.
쓰이는 동시나 읽히는 동시나 참 슬프다. (4344.2.22.불.ㅎㄲㅅ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