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살림말 / 숲노래 책넋

2025.8.20. 안 검증된 책을 쥔다



  ‘검증된’이라고 할 적에는 종이(자격증·졸업장)를 내어주는 곳에서 받아들인다는 뜻이지 싶다. ‘검증 안 된’이라고 할 적에는 누구나 스스럼없이 어울리는 살림자리에서 느긋이 주고받으면서 함께 누린다는 뜻이라고 느낀다. ‘검증된 책’만 읽는 사람이라면, 스스로 굴레에 갇히는 셈이다. ‘검증된’도 ‘검증 안 된’도 아닌, 손이 가는 책을 그저 안 가리면서 읽을 적에는 스스로 눈을 틔우는 셈이다.


  곰곰이 보면 ‘반가운 책’이건 ‘안 반가운 책’이건 ‘읽기 성공’이나 ‘읽기 실패’가 아닌, 다 다른 길을 읽는 이야기라고 느낀다. 언뜻 보면 ‘책을 잘못 고를 기회’란, “그동안 마주할 일이 드물거나 없던 여러 목소리를 지켜보고 살펴보고 귀담아듣는 고마운 틈”이지 싶다. 책읽기를 한다면 틈을 낸다는 뜻인데, 좋아하는 책만 야금야금 즐기는 길이지 않다. 책읽기를 하려고 틈을 낼 적에는, 눈과 귀와 머리와 마음과 생각을 활짝 틔우는 새길을 배우려는 하루여야지 싶다.


  그래서 우리는 ‘잘못 고를 기회’라기보다는 “나랑 다른 이웃을 만나서 마음을 섞는 말을 나눌 틈”을 스스로 누리는 ‘열린읽기’를 할 노릇이지 싶다. 반갑거나 즐거운 책도 읽고, 안 반갑거나 안 즐거운 책도 ‘열린눈’을 북돋우고 가꾸는 길이라고 할까. 이쪽 책도 읽고 저쪽 책도 읽기에 고르게 자란다. 이런 책도 쥐고 저쪽 책도 쥐기에 곱게 피어난다. 날개돋이를 하는 나비는 왼날개랑 오른날개가 빈틈없이 똑같아야 비로소 바람을 타고서 하늘을 난다. 사람도 같다. 왼다리랑 오른다리가 나란해야 뚜벅뚜벅 즐겁게 걷고 타타타타 신나게 달린다. 왼손과 오른손을 나란히 다루기에 글을 톡톡톡 칠 뿐 아니라, 짐을 나르고, 아기를 안고 두바퀴를 달리며 새살림을 짓고 빚는다. 우리는 ‘온책(온갖 책)’을 곁에 둘 노릇이다. 왼책도 오른책도 아닌, 이쪽 책이나 저쪽 책도 아닌, 그저 ‘온책’과 ‘가운책’을 살필 노릇이다.


  우리나라는 ‘민주주의’라 일컫고, ‘민주주의 = 대화 + 타협’이라고 여기는데, 한자말 ‘대화’는 우리말로 옮기면 ‘이야기’이고, ‘이야기 = 잇는 길·말·마음’을 나타낸다. 그러니까, 나하고 다른 너를 마주보면서 서로 어떤 마음과 길과 삶인지 주거니받거니 하는 ‘이야기(대화)’를 할 적에 비로소 바른길(민주)일 테니, 우리는 나랑 다른 길을 가는 사람하고 틈틈이 섞여서 차분히 말을 나눌 노릇이다. 길(정치성향)이 다르대서 등지거나 손가락질을 한다면, 터럭만큼도 바른길(민주)이 아닌 막짓(독재)일 뿐이다. 다르니까 만난다. 서로 다르니까 순이(여성)하고 돌이(남성)가 만나서 얘기를 할 노릇이다. 다르니까 다른 몸과 마음과 빛이요, 다르기에 끝없이 이야기를 하고 마음을 주고받는 사이에 서로 헤아리는 사랑을 스스로 길어올린다.


  우리나라는 허울만 ‘민주’인 터라, ‘내가 해야만 올바르’고 ‘남(놈)이 하면 안 올바르’다고 자르거나 갈라치기 일쑤이다. 책읽기조차 우리는 으레 ‘좋아하는 책’만 쥐느라, 스스로 안 배우고 담벼락을 쌓는다. ‘안 좋아하는 책’을 굳이 챙겨서 읽을 뿐 아니라, 앞으로는 ‘좋아하고 안 좋아하고’를 훌쩍 뛰어넘어서, “그저 내가 스스로 아름답게 배우는 길에 이바지하는 길동무인 책”을 모두 기꺼이 읽고 새기면서 가다듬는 길에 서야 하지 않을까?


ㅍㄹㄴ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을 쓴다. 《풀꽃나무 들숲노래 동시 따라쓰기》,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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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노래꽃

노래꽃 . 기다릴 때면



다가가기 어려워서 기다린다

다가서는데 그냥 쭈뼛거린다

막상 다가와 주는데 달아난다

또 숨다가

다시 나와서

다르게 마음을 먹고서 달린다

언제 닿을는지 모르지만

다른 너랑 나랑 다다를 곳을

두근두근 기다려 보고

쓰다듬고 가다듬고 보듬고서

웃는 노래를 담아서

들길을 따라서


2025.6.15.해.


ㅍㄹ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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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노래꽃

노래꽃 . 여름잎



늦봄이 깊어가니

노랗게 물드는 가랑잎이 하나둘

마당에 떨어지고

동박나무 후박나무는 새롭게

푸른잎을 내놓는다


박새와 물까치와 직박구리가

후박꽃을 쪼고

제비와 꾀꼬리는 벌레를 잡고

나는 모든 새를 지켜보고 바라보고


이제

온숲은 새롭게 여름잎이다


2025.5.18.해.


ㅍㄹ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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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우리말


 알량한 말 바로잡기

 종말 終末


 지구의 종말 → 푸른별 끝 / 푸른별 벼랑

 당연한 종말로 취급하고 있었던 것이다 → 마땅히 떠난다고 여겼다

 종말은 다가오고 있었다 → 마지막은 다가온다 / 끝난다

 종말을 고하다 → 끝을 맺다 / 떠나다 / 가다 / 다하다 / 닫다


  ‘종말(終末)’은 “계속된 일이나 현상의 맨 끝”을 가리킨다고 합니다. ‘가다·오다’나 ‘끝·끝나다·끝마치다·끝맺다·마지막’이나 ‘벼랑·벼랑끝·벼랑길·낭떠러지’로 다듬습니다. ‘그만두다·그치다·접다·젖다·집어치우다·치우다’나 ‘멈추다·멎다·서다·끊기다·막다·막히다’로 다듬지요. ‘거두다·걷다·나오다·내려놓다·놓다·내치다’나 ‘되다·다되다·다하다·닫다·닫히다·뒤로하다’로 다듬을 만합니다. ‘떠나다·마감·마무르다·마치다·마음을 접다·매듭·맺다·밟다’로 다듬고, ‘손떼다·손털다·해치우다·헤어지다’나 “안 가다·가지 않다·안 되다·되지 않다”로 다듬으면 돼요. ‘사라지다·없다·죽다’로도 다듬고요. ㅍㄹㄴ



시장 매커니즘에 대한 지나친 과대평가나 그의 역사는 종말을 고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 장사 얼개를 너무 높이 여기는 눈길이나 발자취는 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 장사판을 크게 띄우는 눈길이나 발자취는 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희망의 근거》(김근태, 당대, 1995) 301쪽


우리 세대에 종말을 고할 또 하나의 생물로 기록될 상황이다

→ 우리 또래에 마지막을 알릴 또 다른 숨결로 남을 듯하다

→ 우리한테 마지막이 될 또 다른 숨붙이가 될 듯하다

→ 우리 때에 마지막이 될 또 다른 목숨붙이가 될 듯하다

《우리 동물 이야기》(박병상, 북갤럽, 2002) 167쪽


나는 종말이 다가왔다는 느낌이 들어서

→ 나는 끝이 다가왔다고 느껴서

→ 나는 끝난다고 느껴서

《타자기를 치켜세움》(폴 오스터·샘 메서/황보석 옮김, 열린책들, 2003) 23쪽


우리는 이 세상에서 무엇을 하고 있으며, 어쩐 종말을 향해 가는가

→ 우리는 이곳에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끝맺으려 하는가

→ 우리는 이 땅에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마치려 하는가

《신을 찾아서》(바버라 에런라이크/전미영 옮김, 부키, 2015) 17쪽


하수종말처리장 40개와 같았다

→ 물살림터 40곳과 같다

→ 거름터 40군데와 같다

→ 구정물터 40곳과 같다

《바다맛 기행 2》(김준, 자연과생태, 2015) 284쪽


사랑이 사라지는 순간 인류를 종말을 맞이할 것입니다

→ 사랑이 사라지면 사람은 죽습니다

→ 사랑이 사라지면 사람은 없습니다

→ 사랑이 사라지면 사람도 사라집니다

《당신은 시를 쓰세요, 나는 고양이 밥을 줄 테니》(박지웅, 마음의숲, 2020) 120쪽


운명의 천사가 내려와 종말을 고하는 것을

→ 빛님이 내려와 죽음을 말한다고

→ 고운빛이 내려와 끝을 밝힌다고

《Q.E.D.iff 12》(카토 모토히로/최윤정 옮김, 학산문화사, 2020) 193쪽


즉 이대로 내달리게 되면 인류는 종말을 맞을 수밖에 없어요

→ 곧 이대로 내달리면 사람들은 끝장을 맞을 수밖에 없어요

《인권으로 살펴본 기후위기 이야기》(최우리와 다섯 사람, 철수와영희, 2023) 41쪽


세상 사람들은 종말의 위기로부터 간신히 회복한 세계에서

→ 사람들은 벼랑끝에서 힘겹게 벗어난 곳에서

→ 사람들은 끝장난 고비에서 겨우 살아난 데에서

《특별할 것 없는 아쿠타 1》(이나이 카오루/김수연 옮김, 서울미디어코믹스, 2025) 6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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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우리말


 알량한 말 바로잡기

 선불 先拂


 선불로 받다 → 먼저 받다 / 고지로 받다

 선불로 주다 → 미리 주다 / 앞삯으로 주다

 선불을 얻어 쓰다 → 당겨쓰다 / 앞당겨 쓰다

 이번 달 밥값을 선불해 주었다 → 이달 밥값을 미리 치렀다

 월급을 선불해 주었다 → 달삯을 먼저 치렀다


  ‘선불(先拂)’은 “일이 끝나기 전이나 물건을 받기 전에 미리 돈을 치름”을 가리킨다고 합니다. ‘당기다·앞당기다’나 ‘고지·고지품·앞돈·앞삯’으로 손봅니다. ‘먼젓돈·먼저 받다·먼저 치르다·먼저 셈하다’나 ‘미리돈·미리 받다·미리 치르다·미리 셈하다’로 손볼 만해요. ‘첫돈·첫밗돈·처음돈·첫삯’이나 ‘들돈·들임돈·들임삯·들삯’으로 손보아도 어울려요. ‘보냄몫·보내는몫’이나 ‘밑돈·씨앗돈·씨앗삯’으로 손보고요. 이밖에 낱말책에 한자말 ‘선불’을 둘 더 싣는데 다 털어냅니다. ㅍㄹㄴ



선불(仙佛) : 1. 신선과 부처를 아울러 이르는 말 2. 선도(仙道)와 불도(佛道)를 아울러 이르는 말

선불(先佛) : [민속] 탁발승이나 고사 소리꾼이 돈이나 곡식을 얻으러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꽹과리 따위를 치며 하는 염불



아예 10년치 선불로 낼 테니

→ 아예 열 해치 먼저 낼 테니

→ 아예 열 해치 미리 낼 테니

《쌍망정은 부숴야 한다 1》(후지타 카즈히로/서현아 옮김, 학산문화사, 2017) 16쪽


자연스레 여자력이 올랐는지 선불 받았어

→ 저절로 가시내힘이 올랐는지 앞돈 받았어

→ 저절로 가싯힘이 올랐는지 먼젓돈 받았어

《CITY 3》(아라이 케이이치/이은주 옮김, 대원씨아이, 2019) 119쪽


선불이었어

→ 먼저 받았어

→ 먼저 치렀어

《지젤 알랭 5》(카사이 수이/이청 옮김, 대원씨아이, 2019) 15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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