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fghanistan (Paperback) - Broken Promise
Moises Saman / Charta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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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깨진 꿈 앞에서 흔들리는 사진
 [잘 읽히기 기다리는 사진책 26] 모이제스 사만(Moises Saman), 《Afghanistan, broken promise》(CHARTA,2007)



 한국에서 아프가니스탄이라는 나라를 알기란 몹시 어렵습니다. 거꾸로, 아프가니스탄이라는 나라에서 한국을 알기도 매우 힘들겠지요. 한국에서 초·중·고등학교를 다니며 아프가니스탄이라는 나라를 배울 일이란 없습니다. 세계사를 다루는 교과서에서 아프가니스탄 이야기를 얼마나 실을까 궁금한데, 몇 줄쯤으로 이 나라 이야기를 다룰는지요. 몇 줄이든 몇 쪽이든 다루어 준다면 얼마나 찬찬히 들여다보거나 살피거나 헤아리는 눈썰미로 다룰는지요.

 한국사람은 이웃한 일본에서 ‘아이들한테 역사를 엉뚱하게 가르치는 교과서’를 자꾸 만든다며 나무라곤 합니다. 일본에서 정치권력을 거머쥐거나 틀어쥐려는 이들은 ‘역사 비틀기’를 합니다. 그런데 한국에서도 정치권력을 거머쥐거나 틀어쥐려는 이들은 일본 군국주의자하고 똑같습니다. 일본은 ‘일-한 역사 비틀기’를 하고, 한국은 ‘한국사람 여느 역사 비틀기’를 합니다.

 신문에 실리거나 방송에 나오는 아프가니스탄 이야기는 온통 전쟁과 테러와 약탈과 가난과 파병뿐 아닌가 싶습니다. 때때로 ‘여성 권리가 아주 끔찍하다’는 이야기가 떠돌곤 합니다. 아프가니스탄사람도 사랑을 할 텐데, 아프가니스탄사람도 밥을 먹을 텐데, 아프가니스탄사람도 일을 하고 놀이를 즐기며 살아갈 텐데, 옷을 깁고 집을 지으며 동무를 사귈 텐데, 흙을 일구고 꽃을 사랑하며 나무를 돌볼 텐데, 아이를 낳고 늙은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조용히 숨을 거둘 텐데, 숱하디숱한 사람 사는 이야기를 듣기란 참 어렵습니다.

 사진책 《Afghanistan, broken promise》(CHARTA,2007)를 읽으며 생각합니다. 페루 리마에서 태어나 에스파냐 바르셀로나에서 어린 나날을 보내다가 미국으로 건너가서 사진기자나 사진작가로 일하는 모이제스 사만(Moises Saman) 님 사진을 읽으며 생각합니다. 2004년에 《This is War》(CHARTA)를 내놓은 모이제스 사만 님은 싸움이 일어나는 곳에서 아픈 채 살아야 하는 사람과 터전을 사진으로 담습니다. 아픈 사람들이 어떻게 아프고, 슬픈 사람들이 어떻게 슬픈지를 사진으로 조용히 보여줍니다. 아픈 채 살아가고 슬픈 채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를 고즈넉히 들려줍니다.

 사람도 땅도 집도 길도 꽃도 들판도 흔들립니다. 절뚝이면서 흔들리는지 모르고, 울다가 흔들리는지 모르며, 고개를 떨구기에 흔들리는지 모릅니다. 폭탄이 터지며 땅이 흔들리는지 모르고, 탱크가 지나가며 땅이 흔들리는지 모르며, 군인들이 지나가며 땅이 흔들리는지 모릅니다.

 얼핏, 재미나다면 재미나고 무섭다면 무서운 이야기 하나 듣습니다. 미국 정부가 아프가니스탄에 보낸 군인한테 들이는 돈이 ‘군인 한 사람 앞에 해마다 100만 달러’만큼 된다고 하더군요. 2011년 1월부터 5월까지 들인 돈은 1130억 달러라고 합니다. 1억 원이 아닌 1억 달러라 하더라도 어마어마하게 큰 돈입니다. 1억 달러라 하면 1000억 원이 넘으니까요. 1130억 달러라 하면 얼마나 큼지막한 돈이 될까요.

 미국 한 나라가 고작 다섯 달 동안 ‘아프가니스탄이라는 나라 한 곳’으로 보낸 ‘싸움터 군인과 무기와 군사시설’에 들인 돈이 1130억 달러라 한다면, 이제까지 아프가니스탄에서 들인 군사비는 얼마나 되고, 지구별 곳곳에서 들인 군사비는 또 어떻게 될까 끔찍합니다. 지난날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에서 들인 군사비는 또 얼마나 될까 생각하면 훨씬 끔찍합니다. 소련에 앞서 아프가니스탄하고 이웃한 나라에서 퍼부은 군사비에다가 서양 나라가 아프가니스탄을 식민지로 삼으려고 들인 군사비는 또 얼마나 될는지 헤아리면 참으로 끔찍합니다.

 미국이며 소련이며 유럽이며, 왜 아프가니스탄에서 이토록 어마어마하게 많은 돈을 들여 군대를 보내어 사람을 죽이고 집을 허물며 땅을 망가뜨릴까요. 이토록 어마어마하게 많은 돈 가운데 1/10000이라도 아프가니스탄 논밭과 살림집과 어린이와 교육에 보태었다면, 아프가니스탄을 비롯해 지구별 평화와 사랑은 얼마나 달라지거나 거듭났을까요.

 사진책 《아프가니스탄, 깨진 다짐》에 나오는 어린이와 어른이 흔들립니다. 아니, 아프가니스탄 어린이와 어른을 바라보는 사진쟁이 손과 눈과 마음이 흔들립니다. 아니, 미국에서 살아가며 미국 언론매체에 보도사진을 보내는 노릇을 하는 ‘페루에서 태어나 에스파냐에서 자란’ 사진쟁이 몸뚱이가 흔들립니다.

 그렇지만, 아프가니스탄사람은 아프가니스탄사람대로 살아갑니다. 슬프면 슬픈 대로 살고 아프면 아픈 대로 삽니다. 슬프거나 아프지만 어김없이 사랑이 꽃피고, 메마르거나 무섭거나 차디찬 땅에서도 새롭게 아이가 태어납니다. 더 나은 시설과 문화와 교육을 누리지 못한다지만, 이곳 아프가니스탄 어린이는 한국 어린이나 미국 어린이하고 똑같이 착한 사랑과 고운 믿음을 온몸으로 예쁘게 맞아들이면서 자랍니다. 다만, 아프가니스탄 어린이가 자라는 길에는 한결 맑은 하늘이나 한껏 푸른 들판보다 번쩍거리는 총칼을 휘두르는 군인에다가 쾅쾅 귀를 울리는 폭탄소리가 익숙할밖에 없으리라 봅니다. 그러면, 탱크나 전투기나 폭탄이 보이지 않는 서울 시내 어린이는 괜찮은지요. 뉴욕 시내 어린이와 도쿄 시내 어린이는 걱정없는지요. 서울과 뉴욕과 도쿄 시내에서 살아가는 어린이는 어떠한 모습을 보고 어떠한 소리를 들으며 어떠한 나날을 보내는지요.

 어른이 일으킨 싸움이 아니라, 돈을 더 많이 벌어들이거나 거머쥐려는 힘센 나라 어른이 벌이거나 부추기는 싸움이 끊이지 않습니다. 사랑을 나누거나 믿음을 북돋우는 데에 돈을 안 쓰고, 전쟁무기 만들거나 살인훈련 받는 군인을 키우는 데에 돈을 끝없이 쓰는 ‘선진강대국’ 어른들이 저지르는 싸움이 그치지 않습니다.

 사진쟁이 한 사람은 참으로 여리디여립니다. 사진 한 장으로 무슨 말을 할 수 있는지 알 노릇이 없습니다. 사진은 온누리를 바꾸지도 못하고, 아픔이나 생채기를 보여주지도 못하며, 눈물이나 웃음 또한 담지 못하는구나 싶습니다. 그저 흔들릴 뿐입니다. 이제나 저제나 얼룩질 뿐입니다. 깨진 꿈이라기보다 깨뜨린 꿈을 찾거나 보듬거나 다스리기에는 너무도 벅찬 아프가니스탄 어린이가 총알 구멍 숱하게 생긴 벽을 바라보며 앉았습니다. 그나마 이 벽은 폭탄을 맞아 송두리째 사라진다든지 무너지지는 않았습니다. (4344.6.3.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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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할머니는 나를 모릅니다 웅진 세계그림책 100
자크 드레이선 지음, 이상희 옮김, 안느 베스테르다인 그림 / 웅진주니어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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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푸른 들판 양로원 할머니한테 마실 가는 아이
 [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49] 안느 베스테르다인·자크 드레이선, 《우리 할머니는 나를 모릅니다》(웅진주니어,2006)



 아이를 낳은 어버이는 아이하고 함께 살아갑니다. 아이가 무럭무럭 자라서 스스로 제금날 때까지 어버이는 아이하고 함께 살아갑니다.

 일찍부터 어버이 곁을 떠나는 아이라면 스무 살 무렵부터 따로 살아갈 테지요. 어쩌면 스물이 안 된 나이에도 따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스물을 갓 넘긴 나이부터 따로 살아갈 수 있어요.

 어느 아이는 서른을 넘고 마흔을 넘어도 어버이 곁을 안 떠날 수 있습니다. 오래오래 어버이하고 함께 살아가는 아이도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거의 모든 아이는 젊은 나이에 어버이 곁을 떠납니다. 학교를 다닌다거나 회사를 다닌다거나 사랑하는 짝꿍을 만난다거나 하면서 어버이 곁을 떠납니다. 어버이는 제 아이가 한창 빛나는 나이에 떠나 보냅니다. 어버이는 제 아이가 가장 빛나는 나이에 곁에서 지켜볼 수 없습니다. 아이는 참으로 빛나는 나이에 어버이가 아닌 제 마음에 드는 새로운 짝을 찾아 새로운 터전에서 새로운 살림을 일굽니다. 이무렵부터 어버이는 둘만 남거나 홀로 남은 채 기나긴 나날을 보냅니다. 어느 어버이라 하더라도 아이를 낳아 돌보던 나날보다 훨씬 긴 나날을 둘 또는 혼자서 보내야 합니다.

 한 해 두 해 열 해 스무 해 흐르고 보면, 어버이가 낳은 아이도 어버이가 되어 저희 아이한테 제 어버이가 했듯이 똑같이 하겠지요. 그리고, 이 아이도 어버이가 된 만큼 이 아이가 어버이가 되어 낳은 아이 또한 머잖아 스스로 살림을 꾸리겠다며 제금을 날 테고요.


.. 기차에서 엄마와 페트라는 꼭 붙어 앉았어요. 둘은 땅거미가 지는 저녁 하늘을 바라봅니다. “엄마, 이다음에 내가 아이를 낳고, 엄마가 내 이름을 기억하지 못 하면요, 내 아이도 엄마를 찾아가서 노래를 불러 줄 거예요.” 페트라가 말하자 엄마가 페트라를 감싸 안으며 덧붙입니다. “그래, 풀밭에서 함께 춤도 출 거야.” ..  (22쪽)


 어버이 되는 사람이 아이하고 함께 보내는 나날은 그리 안 길다 할 만합니다. 아이를 낳아 어린이를 거쳐 푸름이를 지나 어른이 되기까지 보내는 나날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습니다. 고되다면 고되고 빠르다면 빨라요. 즐겁다면 즐겁고 보람차다면 보람차겠지요.

 아이는 어버이가 저를 보살피는 매무새를 가만히 바라봅니다. 아이는 어버이가 저와 함께 살아가는 나날을 찬찬히 지켜봅니다. 아이는 제 어버이한테서 배웁니다. 아이는 제 어버이가 쓰는 낱말과 말투를 배웁니다. 어버이가 고우면서 착하고 참다이 말을 한다면, 아이는 고우면서 착하고 참다이 말을 합니다. 어버이가 어여쁘며 해맑고 싱그러이 살림을 꾸린다면, 아이 또한 어여쁘며 해맑고 싱그러이 살림을 꾸리는 버릇을 들입니다.

 어버이가 자가용을 몰면 아이도 자가용을 모는 어버이 매무새를 받아들입니다. 어버이가 두 다리로 걸어다니면서 버스를 타거나 자전거를 타면, 아이 또한 두 다리로 걸어다니면서 버스를 타거나 자전거를 타는 삶에 익숙합니다. 어버이가 책을 읽으면 아이도 책을 읽습니다. 어버이가 텔레비전을 보니 아이 또한 텔레비전을 봅니다. 어버이가 손으로 빨래를 하고 손수 걸레질을 한다면 아이 또한 손으로 빨래하기를 즐기고, 어버이 곁에서 걸레질을 도우려 합니다. 어버이가 흙을 일구면 아이도 흙을 일구려 하고, 어버이가 집일과 집살림 모두 여자한테만 맡긴다면 아이는 이러한 살림새를 시나브로 받아들입니다.


.. 페트라는 엄마하고 기차를 탔어요. 초원의 집에 가는 거예요. 초원의 집은 언덕 꼭대기에 있는 창문이 많은 집이에요. 여름이면 언덕 아래가 온통 꽃과 푸른 풀밭이라 그렇게 이름을 붙였다고 해요. 페트라와 엄마는 할머니를 만나러 가는 길입니다 ..  (2쪽)


 그림책 《우리 할머니는 나를 모릅니다》(웅진주니어,2006)를 읽습니다. 그림책에 나오는 할머니는 양로원에서 살아갑니다. 할머니는 홀로 살아가다가 당신 아이들이 양로원에 넣었기에 이곳에서 살아갈 테지요. 할머니는 홀로 살림을 일굴 만큼 기운이나 마음이나 몸이 버티지 못하기 때문에 양로원에 들어갔겠지요.

 양로원에 들어간 할머니는 당신 딸아이와 손녀를 알아보지 못합니다. 당신 손녀가 당신이 당신 딸(손녀한테 어머니)한테 가르쳐 준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니 비로소 살짝 제 넋이 돌아옵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제 넋이 돌아오기는 아주 살짝일 테지요. 당신 딸과 손녀가 집으로 돌아가고 양로원에 할머니만 홀로 남는다면, 할머니는 다시금 당신 넋을 잃을 테지요.


.. 페트라와 엄마는 긴 복도를 걸어갑니다. 따각, 따각, 따각, 발자국 소리가 반짝이는 복도를 지나가요. 벽에는 작은 그림들이 걸려 있어요. 온통 비누 냄새, 바닥 닦는 왁스 냄새예요 ..  (8쪽)


 그림책을 여러 차례 되읽으면서 곰곰이 생각합니다. 할머니네 아이하고 손녀는 할머니하고 함께 살아가기 어렵겠지요. 어버이한테서 제금난 아이들은 어버이하고 따로 살고 다른 삶을 꾸리며 다른 살림을 일구듯, 그림책에 나오는 할머니로서는 양로원에 들어갈밖에 없습니다. 양로원에서 조용히 죽음을 기다릴밖에 없습니다.

 죽음을 기다리면서 가끔 찾아오는 손님을 목빼며 기다려야 하는 할머니들과 할아버지들이 지내는 요양원이라는 곳은 온통 비누 냄새와 왁스 냄새라고 합니다. 죽음을 앞둔 사람들 몸에서 나는 고약하다는 냄새를 가리거나 씻으려고 비누를 바르고 왁스를 문지르겠지요. 삶이 있으면 죽음이 있고, 갓난아이나 어린이한테서는 보송보송하며 싱그러운 살빛과 살내라 한다면, 머잖아 흙으로 돌아갈 늙은 사람한테서는 퀴퀴하거나 고약한 빛과 내음이 감돈다 할 만합니다.

 그나저나 왜 양로원이어야 할는지 궁금합니다. 양로원을 지으면 할머니나 할아버지는 느긋하게 당신 삶을 마무리할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양로원을 지으면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낳은 아이들은 느긋하게 당신 삶을 꾸릴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양로원에 가끔 마실을 가면 손자나 손녀가 될 아이들은 할머니 얼굴과 할아버지 목소리를 잊지 않을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그러면 서양 나라 아닌 한국은 어떠할 때가 아름답거나 즐거울까요. 우리 나라에서도 할머니나 할아버지는 물 맑고 바람 시원한 시골마을 요양원으로 보낼 때에 기쁘게 당신 삶을 마무리할 수 있을까요.

 시골에서 살아가는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눈을 감는 마지막날까지 호미를 들고 김을 매거나 흙을 일굽니다. 도시에서 살아가는 할머니와 할아버지로서는 시멘트로 콱 막힌 곳에서 흙을 일구려고 몸을 쓸 수 없을 뿐더러, 할머니나 할아버지한테 집일이든 집살림이든 맡기는 아이(어머니나 아버지가 된 어른인 아이)는 없으리라 봅니다.

 책을 덮습니다. 내 삶과 내 어버이 삶을 곱씹습니다. 내가 내 어버이한테서 제금나며 살아온 지 꽤 되었습니다. 스무 살부터 제금나며 지냈고, 머잖아 어버이하고 떨어진 채 지낸 지 스무 해가 됩니다. 내 어버이는 당신 아이를 내보내고 스무 해를 보내며 어떤 삶과 꿈과 마음을 품었을까요. 앞으로 스무 해쯤 지나 우리 집 아이들이 제금난다면서 홀로 당차게 이 집을 박차고 나선다 한다면, 이때부터 나는 내 아이하고 어떠한 이음고리로 살아갈 수 있을까요.

 그림책에 나오는 할머니는 당신 아이를 잊을 수밖에 없는 삶을 보냈구나 싶습니다. 아마, 오늘날 수많은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당신 아이를 떠올리기 힘들 만큼 고단하면서 외로운 나날을 보내지 않으랴 싶습니다. 이 그림책에 나오는 어머니와 아이는 할머니한테 가끔가끔 찾아간다지만, 아예 낯 한 번 비추지 않거나 목소리 한 번 들려주지 않는 어버이와 아이가 꽤 많으리라 생각합니다. 어릴 적에는 늘 곁에 붙어 하루 스물네 시간을 보냈을 어버이와 아이인데, 어느 때부터 어떡하다가 서로서로 이렇게 갈리면서 살아갔을까요.

 우리들이 저마다 사랑하며 살아간다는 보금자리는 얼마나 사랑스럽거나 믿음직하거나 아름다울까 헤아려 봅니다. 사람들이 서로서로 좋아하며 아낀다는 삶터는 어느 만큼 좋으며 아낄 만해서 아리따울는지 가누어 봅니다.

 푸른 들판에 예쁘게 선 요양원은 시설로서 훌륭하다 할 만합니다. 다만, 푸른 들판은 크고작은 들꽃과 들풀이 숱하게 어우러지면서 맑으며 고운 푸른 빛깔을 이룹니다. (4344.6.2.나무.ㅎㄲㅅㄱ)


― 우리 할머니는 나를 모릅니다 (안느 베스테르다인 그림,자크 드레이선 글,이상희 옮김,웅진주니어 펴냄,2006.12.5./7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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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무책


 백 살을 먹은 느티나무에서 꽃을 피웁니다. 이백 살을 먹은 느티나무에서 꽃을 피우고, 삼백 살과 사백 살과 오백 살을 먹은 느티나무에서 꽃을 피웁니다. 육백 살을 먹은 느티나무 밑에는 지난해에 떨군 씨앗이 뿌리를 내려 싹을 돋은 새로운 어린나무가 자랍니다. 이제 막 한 살이 된 어린 느티나무 줄기는 갓난쟁이 손가락보다 가느다랗습니다. 몇 백 살을 먹은 우람한 느티나무 줄기는 가장 키가 크거나 가장 몸집이 크다는 어른이 팔을 벌려 안아도 안을 수 없을 만큼 굵습니다.

 한 살 난 어린나무는 백 살 먹은 느티나무 밑에든 이백 살 먹은 느티나무 밑에든 마음껏 자라납니다. 햇볕을 더 듬뿍 쬐지 못하고 물을 더 실컷 마시지 못하지만, 우람한 어른 느티나무 곁에서 어린 느티나무는 즐겁게 자라납니다.

 느티나무는 느티꽃을 피우고 느티씨를 맺습니다. 느티나무가 피우는 느티꽃에서 맺는 느티씨는 새로운 느티나무를 낳습니다. 때때로 사람들이 느티나무를 키워서 이곳저곳에 심기도 하지만, 사람이 심는 숫자와 품하고는 견줄 수 없을 만큼 어른 느티나무는 한꺼번에 수백 수천 새끼나무를 낳습니다.

 수백 수천 새끼나무 모두가 어른 느티나무로 자라나지 못합니다. 얼마쯤 자라다가 꺾이거나 밟히기도 하고, 말라죽기도 합니다. 풀을 먹고 살아가는 멧짐승이 잎을 뜯어먹어서 죽을 수 있고, 풀약을 치는 사람들 때문에 타죽을 수 있습니다. 어쩌면, 다른 무엇보다 사람들 손길 때문에 우람한 어른 느티나무 한 그루만 언제까지나 살아남고, 어른 느티나무 둘레에서 새로 자라나려 하는 어린 느티나무는 한 그루도 못 살아남을는지 몰라요.

 지난해에 모두 죽고 지지난해에 모조리 죽었어도 올해에 새로 씨를 맺습니다. 올해마저 몽땅 죽는다 하더라도 이듬해에 새롭게 씨를 맺으며, 다음해에도, 또 다음해에도 느티나무는 느티꽃을 피우면서 느티씨를 맺습니다. 먼먼 앞날, 어른 느티나무가 벼락을 맞아 쓰러진다든지, 또는 벌레가 파먹는 바람에 죽는다면, 해마다 수없이 맺고 떨군 느티씨 가운데 몇몇이 씩씩하게 줄기를 올리면서 새롭게 어른 느티나무가 되겠지요. 사람은 느티나무한테 느티나무라는 이름을 붙여 주지만, 느티나무는 느티나무라는 이름이 붙든 안 붙든 제 목숨을 고이 사랑하면서 흙에 단단히 뿌리를 내립니다. (4344.6.2.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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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전거 자장노래


 새벽 일찍 일어나 저녁 늦게까지 안 자려는 아이를 바라봅니다. 누구보다 아이 몸이 힘들 텐데 걱정스럽습니다. 아이가 낮잠을 한두 시간 새근새근 잔다면 한결 즐겁고 신나게 놀 텐데, 좀처럼 낮잠을 안 자려 합니다.

 해가 길어진 이른여름, 아이를 불러 자전거마실을 하자고 이야기합니다. 아이는 좋아서 뜁니다. 마실을 가는 길에 아이는 노래노래 부릅니다. 마실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아이는 꾸벅꾸벅 좁니다. 집에 거의 다 올 무렵 비로소 고개가 폭 꺾입니다. 이대로 집으로 들어갔다가는 다시 잠이 깰까 싶습니다. 자전거머리를 돌립니다. 마을을 조금 돌아보기로 합니다. 멧자락에 깃든 우리 집 둘레에는 아직 모내기가 멀었으나, 멧자락 아랫녘인 마을은 벌써 모내기를 마쳤습니다. 갓 모를 심은 논둑을 자전거로 달립니다. 아이는 살랑이는 바람을 맞아들입니다. 살랑이는 바람은 논자락 어린 모를 살살 건드립니다. 멧새가 지저귀는 소리를 빼고는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다. 조용한 논둑을 한창 달리다 보니 수레에 탄 아이가 옆으로 폭삭 쓰러집니다. 수레 한쪽에 머리를 기대어 잠듭니다.

 이제 아버지는 자전거를 더 천천히 달립니다. 수레가 덜 흔들리도록 천천히 자전거를 몰아 집으로 돌아옵니다. 마당에 자전거를 세웁니다. 아이 신을 벗깁니다. 안전띠를 풀고 영차 하고 아이를 안습니다. 갓난쟁이 둘째가 잠든 곁에 첫째를 눕힙니다. 첫째는 새벽 한 시 반까지 내처 곯아떨어집니다. 이러다가 새벽 한 시 반부터 새벽 다섯 시 이십오 분까지 잠들지 않고 놉니다. 이거야 원, 낮잠을 재우려고 자전거마실을 했다가, 아버지는 낮잠도 밤잠도 못 자며 눈자위가 벌겋습니다. (4344.6.2.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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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별 사진관
최창수 사진.글 / 북하우스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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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착한 사람을 사진으로 담는 나들이
 [찾아 읽는 사진책 33] 최창수, 《지구별 사진관》(북하우스,2007)


 퍽 젊다고 하는 나이에 지구별 곳곳을 찾아다니면서 사진을 찍은 최창수 님이 당신이 찍은 사진에 얽힌 이야기를 글로 담은 책 《지구별 사진관》(북하우스,2007)을 읽습니다. 사진책에 실린 사진을 살피면서 꼭 아무개 사진 느낌이 난다 하고 생각했더니, “아무튼 나는 스티브 매커리 사진을 열심히 흉내내기 시작했다. 거장의 작품을 함부로 따라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난 그 과정을 통해 내 사진이 조금씩 나아지는 걸 느꼈다(25쪽).”는 말마따나, 스티브 매커리 님 사진을 따라하는 사진이었습니다.

 스티브 매커리 님 사진이 얼마나 훌륭하거나 거룩하거나 아름답기에 굳이 이분 사진을 따라하느냐 싶습니다. 아니, 최창수는 최창수이지, 굳이 스티브 매커리 사진 느낌이 나는 사진을 찍을 까닭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생각해 보면, 다큐사진을 찍는다는 어느 분은 세바스티앙 살가도 님 사진이나 요제프 쿠델카 님 사진을 따라하려고 애쓰기도 했다는 이야기를 책에서 읽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읽으며 참 딱하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살가도 님 사진이 좋으면 마음으로 담으면 됩니다. 쿠델카 님 사진이 좋을 때에도 마음으로 옮기면 돼요.

 어쩌면 습작을 하듯이 따라할 수 있습니다. 그림쟁이 고흐 님이 밀레 님 그림을 따라 그리듯이, 얼마든지 스티브 매커리 님 사진이든 세바스티앙 살가도 님 사진이든 따라하며 찍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고흐 님이 밀레 님 그림을 따라하며 그릴 때에는 ‘밀레 붓질이 살아나는 그림’이 아니라 ‘고흐 붓질이 춤추는 그림’입니다. 좋아하는 사람 그림결을 배우면서 고개를 숙이되, 내 마음과 넋을 알뜰히 살리면서 그림으로 그렸습니다.

 사진책 《지구별 사진관》을 넘기면서 곰곰이 생각합니다. 이 사진책에 실린 사진은 ‘최창수 사진인가, 아닌가?’ 하고.

 “더 나은 사진을 찍을 수 있으리란 기대감으로 도시보다는 시골을 찾았고, 큰길보다는 골목을 헤맸고, 축제를 쫓아다녔다. 사진 찍는 게 별일이 아닌 잘사는 나라보다는 사진기를 둘러멘 내게 더 큰 관심과 사랑을 쏟아 주는 오지를 여행했다(18쪽).”는 이야기를 읽으면서 고개를 갸웃합니다. 시골에 찾아간대서 더 낫다 싶은 사진을 찍을 수 있지 않습니다. 골목을 헤맨들 잔치마당을 찾아나선들 더 낫다 싶은 사진거리를 얻을 수 있지 않아요.

 최창수 님은 ‘오지 여행’을 했다고 말합니다. 그렇지만 ‘오지’라 하는 ‘두메’란 이 지구별 어디에도 없어요. 두메가 아닌 ‘삶터’입니다. 두메로 찾아가는 사람한테는 참 깊디깊어 멀디멀구나 하고 느낄는지 모르나, ‘두메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내 보금자리에서 내 깜냥껏 즐거이 삶을 일구니까, 이러한 두메 삶자락은 ‘외딴 곳’이 되지 않아요. 살가우며 아름다운 보금자리입니다.

 여행을 하는 사람은 으레 ‘오지 여행’이라 말하지만, ‘여행길을 나서는 사람한테만 멀다’뿐, ‘여행하는 사람이 찾아간 곳’에서 ‘오래도록 살아온 사람’한테는 살가우며 넉넉한 고향입니다.

 그러니까, 사진을 찍겠다는 사람이라면 ‘여행하는 내가 외딴 곳이라 생각하는’ 사람이 더 따숩게 반기는 곳에서 더 따숩게 느낄 만한 사진을 찍을 노릇이 아니라, ‘여행하는 내가 살아가는 터전 둘레’에서 ‘가장 흔하며 너른 이웃’한테도 더없이 따숩게 느낄 만한 사진을 찍을 때에 비로소 사진다운 사진이 됩니다. 스티브 매커리라는 이가 찍은 사진이라면 이러한 사진이겠지요.

 “난간에 매달리고, 철로나 도로에 뛰어들고, 바닷물이나 빗속을 헤매는 등 갖은 위험한 상황에 온몸과 카메라를 내던졌다. 그러고는 내가 봐도 프로 같은 내 모습에 도취하곤 했다. 사진도 그렇게 찍으니 보답이라도 하듯 잘 나오는 것 같았다(34∼35쪽).”는 이야기에서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듭니다. ‘프로 같은’ 모습이란 무엇일까요? ‘사진이 잘 나오는’ 듯한 느낌이란 무엇인가요? 사진에는 프로와 아마란 부질없습니다. 아니, 사진뿐 아니라 글이든 연극이든 삶이든 마찬가지예요. 프로 살림꾼이 밥을 잘 할는지요. 여느 살림꾼이 한 밥은 맛이 없을는지요.

 남들이 알아주어야 좋은 사진이 아닙니다. 사진공모전에서 상을 받아야 좋은 사진이 아닙니다. 평론가가 손가락을 추켜세워야 좋은 사진이 아닙니다. 달력에 깃드는 사진이 되어야 좋은 사진이 아니에요.

 “나는 사진을 통해 그런 걸 이야기하고 싶었다. 인간의 행복과, 희망, 사랑, 우정. 잘사는 나라가 아닌 가난한 나라에서 피어난 것이라면 더욱 소중하고 순수할 것이었다(39쪽).” 같은 이야기에서도 고개를 갸우뚱하고 맙니다. 가난한 나라에서 피어난 사랑이기에 더욱 아름답거나 깨끗할 수 없습니다. 사랑이라면 어디에서 어떤 사랑이 되더라도 아름답거나 깨끗합니다.

 5만 원을 가진 사람이 6만 원을 가진 사람보다 더 아름답거나 깨끗할까요. 50만 원을 가진 사람이 60만 원을 가진 사람보다 더 아름답거나 깨끗한가요. 500만 원을 가진 사람이 600만 원을 가진 사람보다 더 아름답거나 깨끗하다 할 만한가요.

 가난한 나라에 가서야 비로소 사랑과 희망과 우정을 이야기하는 사진을 얻는다면, 가난하지 않다는 나라에는 사랑과 희망과 우정이 없다는 뜻이 될는지 아리송합니다. 그러면, 사랑도 희망도 우정도 없다는 가난하지 않다는 나라에서는 사람들이 무얼 하며 어떻게 살아가려나요. 사진을 찍은 최창수 님이 살아가는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는 ‘가난하지 않은 나라’인데, 이 가난하지 않는 나라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사람한테서는 사랑이나 희망이나 우정을 찾아볼 수 없이 슬프거나 외롭거나 쓸쓸하기만 할는지요.

 이리하여, 최창수 님은 “나는 프로 사진작가에 비해 실력, 장비, 경비, 일정, 교통수단 등 모자라는 구석이 너무도 많았다. 내가 더 낫다고 생각되는 건 단 한 가지, 여행과 사진에 대한 순수한 열정이었다(59∼60쪽).” 하고까지 이야기합니다. 그래요, 어쩌면 ‘순수한 열정’이 있을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사진길을 걷는 아주 많은 사람들은 이웃 일본이나 중국으로조차 마실을 못 가곤 합니다. ‘오지 여행’이든 ‘세계 여행’이든 꿈조차 못 꾸는 프로 사진쟁이가 꽤 많습니다. 참말로 최창수 님한테 더 나은 대목은 ‘순수한 열정’이라 할 만할까요. 최창수 님한테는 ‘순수한 열정’이 있어서 사진여행을 다닐 수 있었을까요.

 “이란 이후에는 대개의 유라시아 횡단 여행자가 그러듯 터키로 향할 계획이었고, 예멘이란 동네는 지구본을 돌려 보지 않는 이상 어디에 붙어 있는지 정확히 알지도 못했다(195쪽).” 같은 대목에서도 느끼지만, 지구별 어디에 붙었는지조차 모르는 나라로 간대서 한결 나은 사진을 얻지 않습니다. 더욱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모르는 나라라 한다면, 이 나라 사람이 무엇을 꿈꾸고 무엇을 사랑하며 무엇을 아끼는지를 알 턱이 없습니다. 함께 살아가는 이웃이자 동무로 찍는 사진이 아니라, 늘 스쳐 지나가면서 찍는 사진이 되는데, 스쳐 지나가면서 사람들한테 ‘웃는 모습을 보여 달라’고 바라거나 웃기는 모습을 보여주며 웃음꽃을 피울 때에 찍는 사진이란 얼마나 아름답거나 보람차거나 사랑스럽다 할 만한 사진이 될까 알쏭달쏭합니다. 무엇보다, 예멘사람은 예멘사람입니다. 최창수 님은 예멘을 몰라도 예멘사람은 예멘을 압니다. 예멘사람은 예나 이제나 예멘사람으로 살아갑니다. 예멘은 ‘두메’도 ‘먼 나라’도 ‘숨은 나라’도 아닙니다.

 “그(일본 여행자)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예멘 남자 복장을 하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어찌나 어색하고 우스꽝스러운지 뒤통수에 대고 비웃었던 기억이 난다(201쪽).” 같은 대목에서도 새삼스레 느낍니다. 예멘사람들처럼 옷을 차려입은 사람이 웃기게 보여서 비웃는다면, 예멘사람들 차림새를 사진으로 찍는 사람은 안 웃겨 보일는지 궁금합니다. 예멘사람이 입는 옷을 장만해서 몸소 입는 사람하고, 예멘사람 차림새를 스쳐 지나가는 눈길로 사진으로 담는 사람하고, 어느 쪽에 예멘 삶을 조금 더 가까이 느껴 보려고 한달 수 있을까요.

 가장 나은 길이라 한다면, 돈을 주고 예멘 옷을 사 입기보다, 예멘땅 어디에서라도 일자리를 얻어 예멘사람하고 함께 일하면서 시나브로 여느 예멘사람 옷차림으로 스며들 때입니다. 지나가며 사진을 찍는 사람이 ‘멈추어 서서 옷을 입은 사람’을 비웃는다면 그야말로 걸맞지 않습니다. 예멘사람이 아닌 일본사람이니까 예멘 옷차림이 어울릴 수 없을 텐데, 어울릴 수 없는 옷차림을 당차게 하면서 거리낌없이 걸어다닐 만큼 고개를 들지 않으면서 얼마나 예멘을 사귀면서 사랑했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사진책을 덮습니다. 《지구별 여행자》라는 책에서 느낌을 따왔다는 《지구별 사진관》이라는 사진책을 덮습니다.

 지구별은 여행하는 곳으로 바라볼 수도 있을 테지만, 지구별은 여행하는 곳이 아닙니다. 지구별은 살아가는 곳입니다.

 지구별에서 사진관을 차릴 수도 있을 테지만, 지구별은 사진찍는 곳이 아닙니다. 지구별은 사랑하는 곳입니다.

 여러 곳으로 여행을 다니면서 사진을 찍는 사람은 ‘어쩌다 찾아와서 한 번 스치고 지나갈 뜨내기’한테 ‘고맙게 사진으로 찍혀’ 주는 ‘착한 사람을 만나는’ 사람입니다.

 《지구별 사진관》은 사진 장비라든지 사진결이라든지, 얼추 스티브 매커리 님 사진결을 닮으려고 애쓴 티가 물씬 납니다. 그러나, 질감이나 빛이나 사진감은 스티브 매커리 님을 따라하지만, 막상 스티브 매커리 님이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을 만나 사진을 찍던 넋을 살피면서 배우지는 못합니다.

 참말, 스티브 매커리 님은 ‘착한 사람을 착한 삶 그대로 껴안으면서 수수하게 보여주는’ 일을 사진찍기로 이루었습니다. 돋보일 까닭이 없는 사진이고, 꼭 이러한 사진결이어야 하기 때문에 스티브 매커리 님은 당신 나름대로 이러한 사진을 이루려 했습니다. 그렇지만 최창수 님은 겉으로 보이는 스티브 매커리 님 사진 질감과 빛깔만 따라하고야 맙니다.

 더 예쁘게 나올 까닭이 없는 사진이고, 더 멋지게 보일 까닭이 없는 사진입니다. 더 대단하게 보여야 하는 사진이 아니요, 더 널리 팔리거나 내보일 사진이 아닙니다.

 사진은, 사람이 살아가는 삶을 착하게 담는 그릇입니다. 사진은, 사람이 부대끼는 나날을 참다이 일구는 호미입니다. 사진은, 사람이 어깨동무하는 누리를 곱게 보듬는 손길입니다.

 더 많은 곳을 돌아다니면서 더 많은 사진을 찍어도 좋습니다. 다만, 더 적은 곳을 돌아다니거나 더 조금 사진을 찍어도 좋아요.

 사진은 남한테 보여주려고 찍을 수 없어요. 찍은 사진을 누군가 본다고 할 테지만, 사진은 남한테 보여줄 마음으로 찍지 않아요. 누구한테 읽히려고 쓰는 글이 아니고, 누구한테 자랑하려고 그리는 그림이 아니에요. 가슴속에서 솟아나는 아름다움을 붓이나 연필이나 사진기를 쥐어 살포시 옮길 뿐입니다.

 착한 사람들이 웃어 줍니다. 웃을 만하니까 웃습니다. 착한 사람들이 시무룩합니다. 시무룩할 만하니까 시무룩합니다.

 아프가니스탄이 왜 아프가니스탄일까요. 예멘은 왜 예멘이고, 이란은 왜 이란인가요. 중동과 아프리카에 넘치는 무기는 누가 만들어서 누가 팔고 누가 사서 누가 쓸까요. 왜 전쟁은 끊이지 않고, 왜 강대국과 선진국은 전쟁무기뿐 아니라 사진예술로까지 장사를 할까요. ‘프로 사진쟁이’와 ‘상업 사진쟁이’는 어떻게 다르고, ‘사진쟁이’와 ‘사진 장사꾼’은 어떻게 다를는지요.

 최창수 님이 두 번째 《지구별 사진관》을 내놓을 생각이 있다면, 두 번째 사진책을 내놓을 적에는 두 번째 책에 담긴 사진으로 찍힌 이들한테 돈을 듬뿍듬뿍 주기를 바랍니다. 모델값을 주어야지요. 초상권이 있잖아요. 가난한 나라이기 때문에 얼굴사진을 찍힌 다음에 돈을 바라지 않습니다. 적어도 이만큼은 초상권 값을 치러야 하기 때문에 내주어야 하는 돈입니다. 티벳사람만 ‘사진으로 찍힐 때에 내 넋이 빠져나간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서양사람이든 일본사람이든 한국사람이든 마찬가지입니다. 잘 찍은 사진이든 잘 못 찍은 사진이든, 찍히는 사람들 넋이 사진에 스며듭니다. 착한 사람들이 착하게 내준 고운 넋을 사진책으로 엮을 때에는 ‘웃는 얼굴’ 사진만으로는 아무런 이야기를 들려줄 수 없습니다. (4344.6.1.물.ㅎㄲㅅㄱ)


― 지구별 사진관 (최창수 사진·글,북하우스 펴냄,2007.10.29./12000원)
 

 

(최종규 .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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