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그림놀이] 내가 갈 길 (2014.9.9.)



  내가 앞으로 갈 길이 무엇인지 다시 헤아려 본다. 책상맡에 놓고 늘 돌아볼 그림을 새로 그리기로 한다. 먼저 숨을 고르고 종이를 바라본다. 빛연필을 하나씩 집어 하나씩 그림을 넣는다. 우리 보금자리와 도서관과 배움터가 한데 어우러질 수 있는 푸른 숲을 그린다. 이곳에서 아이들이 호미를 쥐고 연필을 들면서 노래하고 춤출 수 있기를 꿈꾼다. 나무가 우리를 감싸고, 풀과 꽃이 우리를 살찌운다. 별과 새가 하늘을 누비고, 풀벌레가 노래잔치를 베푼다. 아름다운 사랑이 푸릇푸릇 깨어나기를 바라면서 노란 해와 달과 미리내를 살그마니 찍으면서 그림을 마무리짓는다. ㅎㄲㅅㄱ


(최종규 .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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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시 깨기



  두 아이가 부엌에서 저지레를 했다. 하얀 접시 하나를 깼다. 접시 깨뜨린 소리를 듣고는 문득 ‘오랜만’이라는 생각이 났다. 오랜만? 그렇구나. 오랜만에 접시를 깼구나. 큰아이도 작은아이도 접시를 깰 만한 나이를 살짝 지났다고 할까. 접시를 떨어뜨리거나 유리잔을 떨구는 짓을 거의 안 할 만한 나이라고 할까. 아이들도 깨고 나도 깨고 곁님도 깨서, 우리 집에서 짝이 잘 맞는 그릇이나 접시가 드물다. 접시는 아이들만 깨지 않는다. 나도 설거지를 하다가 손에서 잘못 미끄러져 깨뜨린 적이 있다. 설거지를 하다가 접시를 깨고는, 허허허 웃었다. 설거지를 하다 미끄러져도 깨지는구나 싶어 놀랐다. 그러니까, 접시는 아주 쉽게 깨질 수 있다. 아주 잘 건사해야 한다.


  새로운 접시를 아이들과 함께 장만해야겠지. 새로운 그릇을 곁님하고 같이 마련해야겠지. 4347.9.15.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아버지 육아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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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고마운 아이들



  하루 내내 신나게 뛰논 아이들이 곧 곯아떨어진다. 오늘은 저녁 여덟 시가 안 되어 두 아이 모두 바로 잠든다. 팔과 다리와 몸과 머리를 꾹꾹 주무른다. 작은아이는 한참 주무르는 사이에 꿈나라로 간다. 큰아이는 쉬를 누고 물을 마시러 일어났다가 이내 잠든다. 이 아이들 사이에서 함께 누워서 자고 싶기도 하지만, 새롭게 기운을 내어 책상맡에 앉는다. 이 아이들 앞날을 헤아리면서 차근차근 엮는 ‘새 한국말사전 원고’를 쓴다. 요 며칠 사이 ‘어리석다’와 ‘멍청하다’라는 낱말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를 놓고 골머리를 앓았는데, 생각보다 쉽게 실마리를 푼다. ‘멍하다’와 ‘맹하다’를 함께 떠올리면서 차근차근 느낌과 쓰임새를 가누어 본다. 이렇게 한 뒤, ‘어설프다’와 ‘엉성하다’와 ‘설다’와 ‘서툴다’와 ‘섣부르다’를 한묶음으로 다루어 새롭게 실마리를 연다.


  곰곰이 생각해 본다. 내가 혼자 절집이나 외딴집에 틀어박혀서 머리를 싸맨다면 ‘새 한국말사전 원고’를 더 빨리 더 알차게 더 힘껏 엮을 수 있을까? 아침부터 저녁까지 돌볼 일이 많고 쳐다볼 일이 많으면 더 느리거나 더 엉성하거나 더 힘이 들까?


  나는 아무래도 아이들 목소리를 먹으면서 기운을 내지 싶다. 아이들 웃음과 노래를 들으면서 기운을 차리지 싶다. 이 아이들은 아버지가 차리는 밥을 먹고, 아버지가 씻기며, 아버지가 옷을 갈아입히고, 아버지가 이불깃을 여미는데다가, 아버지가 자장노래를 부르지만, 내 마음속에 사랑이라는 씨앗을 뿌려서 가꾸는 몫을 아이들이 싱그럽게 북돋아 주는구나 싶다. 언제나 고맙다. 4347.9.13.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아버지 육아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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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졸업장



  소설쓰는 김훈이라는 분이 있습니다. 나는 이분이 쓴 책이나 글을 거의 안 읽습니다. 어쩐지 나한테는 안 맞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분이 쓴 책이 새로 나와도 궁금하지 않을 뿐 아니라, 책이 새로 나온 줄 아예 모릅니다.


  엊그제인데, 이웃 한 분이 한 가지 이야기를 알려줍니다. 소설쓰는 김훈이라는 분이 1980년대에 ‘전두환 찬양 기사’를 무척 많이 썼고, 2000년대가 넘은 뒤에는 ‘여성비하’와 ‘인종차별’ 이야기를 줄줄이 쏟아놓았다고 알려줍니다.


  그런가 하고 고개를 갸우뚱하다가 ‘전두환 찬양 기사’가 궁금해서 살펴보니, 참으로 그악스러운 ‘전두환 용비어천가’를 많이 썼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이런 ‘전두환 용비어천가’를 놓고 소설쓰는 김훈을 비판하거나 나무라거나 꾸짖은 사람은 매우 드문 듯합니다.


  그나저나, 소설쓰는 김훈이라는 분은 2000년 10월 5일치〈한겨레21〉하고 만난 자리에서 아마 처음으로 ‘전두환 찬양 기사 자기고백’을 했지 싶습니다. 이 때문에 〈시사저널〉 편집장 자리에서도 물러나야 했다는데, 2002년에 〈한겨레〉 사회부 기자로 특별채용이 되어요. 조금 더 알아보니, 소설쓰는 김훈은 〈한겨레〉에 특별채용으로 들어간 일을 나중에 이야기하는데, 신문사에 들어가니 이녁더러 ‘대학교 졸업 증명서’를 달라고 했답니다. 그래서 ‘대학교 졸업 증명서’는 없고 ‘고등학교 졸업 증명서’는 있으니 그것을 주면 되느냐고 물었다고 해요. 소설쓰는 김훈은 대학교에 살짝 발을 담근 적이 있으나 그만두었기에 ‘고졸 학력’입니다.


  이 대목을 알아보고 나서 문득 내 지난날이 떠오릅니다. 나도 ‘고졸 학력’입니다. 나는 1999년 2월에 〈한겨레〉 이사 한 분한테서 ‘특별채용’ 제안을 받았습니다. 그무렵까지 〈한겨레〉에 없던 특별채용이라고 했는데, ‘신문배달을 하던 젊은이를 기자로 채용’하려고 했어요. 그때에 〈한겨레〉 이사로 있던 분은 나한테 ‘대학교 졸업을 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대학교 교육이 너무 부질없고 제대로 학문을 닦지 않는다고 여겨 자퇴했다’고 말했습니다. 〈한겨레〉 이사로 있던 분은 ‘한겨레는 학력제한을 두지 않으니 괜찮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나는 〈한겨레〉에 못마땅하게 여긴 대목이 있었어요. 특별채용을 한다니 무척 기뻤습니다만, 입사시험 자격으로 토익 점수를 내라 했어요. 그래서 이 대목을 여쭈었지요. 학력제한을 두지 않는다고 하면서 토익 점수를 내라고 한다면, 지원자는 처음부터 대학교 졸업장이 있어야 하는 셈 아니냐고, 영어 시험을 보려 하면 ‘1:1 면접’으로 영어 시험을 보아야 하지 않느냐고 여쭈었습니다. 특별채용이니 입사시험을 안 치러도 되지만, 나처럼 ‘고졸 학력’으로 기자가 되고 싶은 사람이 틀림없이 있을 테니, 그런 조항이 사라져야 한다고 느꼈어요. 졸업장이 아닌 스스로 갈고닦은 솜씨로 서류를 내고 입사시험을 치를 수 있어야 올바르니까요. 그때 〈한겨레〉 이사로 있던 분은, ‘젊은이 말이 맞는데, 회사 규칙이라서 어쩔 수 없다’고 했습니다.


  고마운 제안을 받고 나서 곰곰이 헤아렸습니다. 신문배달을 이제 그만두고 신문기자가 되느냐 하는 갈림길이었습니다. 엉성한 회사 규칙은 회사에 들어가서 얼마든지 바꿀 수 있는 노릇입니다. 그러나 나로서는 그 대목이 자꾸 마음에 걸렸습니다. ‘토익 점수’를 바라는 일은 ‘대학교 졸업장’을 바라는 일하고 똑같습니다. 학력제한이 없다는 말은 허울입니다. 허울을 스스로 없애지 않는다면 제대로 된 신문이 될 수 없습니다. 제대로 된 신문이 될 수 없다면, 〈한겨레〉가 아무리 올바른 목소리로 ㅈㅈㄷ신문을 나무라거나 꾸짖는다 하더라도 스스로 올바른 삶이나 넋이 못 됩니다.


  “말씀이 무척 고맙지만, 아무래도 고졸 학력을 넉넉하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조직이지 싶어서, 이사님 제안은 사양하겠습니다. 저는 아무래도 〈한겨레〉 기자가 되는 꿈은 접어야겠습니다. 오늘 술이나 한잔 사 주셔요. 신문배달 월급으로는 술도 못 사 마십니다.”


  소설쓰는 김훈이라는 분은 ‘고졸 학력’이면서 어떻게 신문기자 노릇을 했을까요? 1970년대 신문사에서는 학력제한이 없었을까요? 소설쓰는 김훈은 그무렵에 특별채용으로 뽑혔을까요? 글을 잘 쓰기만 하면 누구라도 신문기자가 될 수 있을까요?


  졸업장은 사람을 알려주지 못합니다. 자격증은 사람을 밝히지 못합니다. 졸업장은 학교를 마친 증명일 뿐입니다. 학교를 마쳤기에 더 많이 배우거나 잘 알지 않습니다. 자격증이 있기에 기계를 더 잘 다룬다든지 어떤 지식이 더 빼어나지 않습니다.


  아기는 어머니나 아버지한테 졸업장을 묻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어버이가 차린 밥을 먹으면서 어버이한테 자격증을 묻지 않습니다. 졸업장이 있어야 문학을 할 수 있지 않습니다. 자격증이 있어야 신문을 만들어 기사를 쓸 수 있지 않습니다. 그뿐입니다. 4347.9.11.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내 마음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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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아이 뜨개옷 자랑



  2014년 9월 8일 아침, 밥상을 차리느라 부산한 아버지는 부엌에서 머리카락 휘날리면서 뚝딱뚝딱 밥을 짓는다. 일곱 살 네 살 두 아이는 마루와 부엌과 이 방 저 방 뛰어다니면서 논다. 이러다가 문득 일곱 살 누나가 동생을 보며 “(내 옷에) 하트 있다!” 하면서 자랑을 한다. 이때 네 살 동생은 제 옷을 내려다보고 돌아보며 살짝 생각을 한 끝에, “나는 구멍이 있다!” 하면서 자랑을 받아친다.


  그래, 산들보라야, 네 옷에는 구멍이 있구나. 네 어머니가 더운 여름에 시원하게 입으라고 구멍이 숭숭 난 뜨개옷을 마련해 주었구나. 너한테는 뜨개옷이 ‘구멍옷’이네. 가을이 무르익는 요즈음에도 네 살 산들보라는 이틀이나 사흘마다 구멍옷을 챙겨 입는다. 빨아서 말리는 동안에만 구멍옷을 못 입는다.


  가만히 보면, 구멍옷, 그러니까 뜨개옷은 여러모로 입기에 좋다. 여름에는 시원할 뿐 아니라, 빨래를 하면 가장 먼저 마른다. 다만, 뜨개옷은 겨울이 되면 가장 늦게 마른다. 겨울에는 따뜻한 뜨개옷인 터라 실이 많이 들어가기도 하고 두껍기도 하니까, 따뜻한 겨울볕을 이틀 먹여야 비로소 뜨개옷 한 벌이 다 마른다. 4347.9.11.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아버지 육아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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