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책빛 2021.11.17.

헌책집 언저리 : 대나무



  책을 훔치는 이는 도둑이 아니라는 말이 있지만, 책까지 훔치면 그만 책을 잊어버리지 싶습니다. 책을 장만할 돈이 없어서 훔칠 수 있을까요? 책을 장만할 돈이 없다면 날마다 책집에 찾아가서 조용히 서서 읽을 노릇입니다. 또는 다른 일을 해서 책값을 넉넉히 장만해야지요. 한 자락만 훔치고서 손을 씻는 책도둑은 얼마나 될까요? 책을 훔쳐서 얻은 앎(지식)은 책도둑한테 얼마나 이바지할까요? 모든 훔침질은 똑같습니다. 땀방울을 가로채는 짓입니다. 모든 훔침짓은 사랑하고 등집니다. 그러나 훔치고 나서 뉘우칠 줄 안다면 확 달라요. 훔치는 짓을 뉘우치고 눈물을 흘리는 사람은 다시는 이웃 땀방울을 함부로 안 건드립니다. 훔치는 짓을 안 뉘우치고 눈물이 없는 사람은 책뿐 아니라 땅도 집도 나라까지도 훔치기 마련입니다. 부산 보수동에 깃든 작은 헌책집지기는 책집을 살짝 비우고서 볼일을 보실 적에 자물쇠로 걸어 잠그지 않습니다. 굵고 기다란 대나무를 척 걸칩니다. 제주섬에 ‘정낭’이 있어요. 헌책집에는 ‘책집 정낭’이 있습니다. 마음을 보라는 나무입니다. 이웃을 생각하라는 나무입니다. 스스로 숨빛을 읽으라는 나무입니다.


ㅅㄴㄹ


* 사진 : 부산 보수동 알파서점. 201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숲노래 책빛 2021.11.15.

헌책집 언저리 : 왁자지껄



  1990년대 한복판에 복사집이 널리 퍼지면서 마을책집이 줄줄이 닫았습니다. 이윽고 피시통신·인터넷이 뿌리내리며 마을책집은 새삼스레 못 버티고, 2000년으로 접어들면서 〈아름다운 가게〉가 큰주먹을 날리고, 2010년을 넘어서자 〈알라딘 중고샵〉은 막주먹을 퍼부었습니다. 이동안 마을책집지기는 “자네가 오늘 처음 온 손님이오.” 하는 말을 으레 들려주었습니다. 이 말씀이 아니더라도 책집에서 서너 시간을 머물며 책을 읽는 동안 다른 책손을 아무도 못 보기 일쑤였습니다. 왁자지껄하게 떠들기도 하고 웃기도 하면서 책 한 자락에서 이야기를 얻고 누리던 발걸음은 어디로 갔을까요. 가만히 보면 ‘마을책집이 해마다 1000곳씩 사라지던 그때’에 나돌던 적잖은 책은 꽤 겉멋스러웠습니다. 마을을 품은 이야기를 다룬 책은 그때까지 매우 적었습니다. ‘누구나 쓰는 글’이 아닌 ‘등단을 하거나 교수쯤 이름이 있는 사람이 아닌 글’은 책이 되기 어렵던, 아니 책으로 받아들이지 않던 무렵이기도 했습니다. 오늘날 새롭게 태어나는 마을책집은 마을을 품은 이야기를 다루는 책을 책시렁에 차츰차츰 널찍하게 들여놓습니다. 굳이 국립중앙도서관 막대기(바코드)를 얻어야 책이지 않습니다. ‘누구나 쓰는 삶글’은 저마다 새롭게 빛나는 즐거운 책입니다. 이제는 겉멋이 아닌 속사랑으로 ‘참나(참다운 나)’를 바라보는 이야기를 스스로 조촐히 여미는, 바야흐로 새롭게 왁자지껄한 마을수다를 이루는 책길로 나아가는 언저리라고 느껴요. 서울 숭인동에서 오래도록 마을책집 살림을 잇던 〈우리글방〉은 숭인동을 통째로 들어내어 잿빛집(아파트)을 세운다는 말이 나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조용히 가게를 접었습니다.

.

ㅅㄴㄹ


* 사진 : 우리글방-숭인동. 200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숲노래 책빛 2021.11.15.

헌책집 언저리 : 큰나무 사이로



  집만 덩그러니 세운 곳은 아직 ‘마을’이란 이름이 어울리지 않습니다. 오랜 우리말에 ‘숲정이’가 있습니다. 마을을 포근히 두른 숲을 ‘숲정이’라 합니다. 큰나무가 우거지며 집집을 푸르게 덮을 적에 비로소 ‘마을’입니다. 아직 나무가 집집을 덮지 않으면 ‘벌판’입니다. 서울이든 큰고장이든 들숲을 밀어내어 집만 잔뜩 올리고 길만 크게 닦기 일쑤였어요. 열 해 남짓은 벌판이라 할 만할 텐데, 열다섯 해를 지나고 스무 해를 지나며, 서른이며 마흔이란 나날을 살아낼 뿐 아니라, 쉰이며 예순을 가로지르는 사이에 비로소 ‘마을’이 됩니다. 곰곰이 보자면, 한자말로 가리키는 ‘고향’이라는 내음이 퍼지기에 ‘마을’이라 할 만해요. 아직 벌판일 적에는 아이어른 모두 고단하거나 심심합니다. 나무가 우거지고 곳곳에 들꽃이 피면서 새가 찾아들어 지저귀고 풀벌레가 깃들어 울 적에 어느덧 ‘마을스럽네’ 싶어요. 오랜마을에 오랜책집이 있고, 이 책집 앞을 마을아이가 달려서 지나갑니다. 달려서 지나가던 아이가 문득 멈춰서 묻습니다. “아저씨, 여기서 뭐 해요?” “응? 이 책집을 찰칵 하고 그림으로 담아.” “책집? 아, 여기! 난 오늘 심부름 가는 길이라, 이다음에 들러 봐야겠다. 아저씨, 잘 찍으세요!”

.

ㅅㄴㄹ

.

* 사진 : 연남서점. 200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숲노래 책빛 2021.11.15.

헌책집 언저리 : 배드민턴



  마을헌책집 곁에 마을글붓집(동네문방구)이 있고, 잇달아 마을가게가 줄줄이 있습니다. 마을가게에서 일하는, 또는 이 마을가게가 깃든 모둠집(연립주택)에서 살아가는 아주머니들은 곧잘 거님길이자 빈터에서 배드민턴을 합니다. 자전거도 수레도 지나가기 어려운 좁다란 거님길이어도 아이들은 부릉이(자동차) 걱정이 없이 걷습니다. 가볍게 깃공(셔틀콕)을 날릴 틈은 있고, 자리를 깔고 앉아서 수다를 떨거나 바람을 쐬거나 가을볕을 누릴 만합니다. 마을책집이란 바로 이 틈새가 있는 쉼터라고 느낍니다. 마을가게란 언제나 이 틈새를 누리는 즐거운 마당이지 싶습니다.


ㅅㄴㄹ


* 사진 : 삼선서림. 200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숲노래 책빛 2021.11.12.

헌책집 언저리 : 곁에 있습니다



  책집은 북적길에 있어야 할까요? 책집은 커야 할까요? 책집은 굳이 북적거리는 길목에 있지 않아도 좋고, 엄청나게 커다랗지 않아도 됩니다. 책집은 책을 돌보는 손빛을 나누는 쉼터이면 넉넉합니다. 책집은 저잣거리 한켠에 있을 만합니다. 책집은 호젓한 마을 어귀에 있을 만합니다. 책집은 시골 기스락에 있을 만합니다. 책집은 어린배움터 둘레에 있을 만합니다. 1만이나 10만이나 100만에 이르는 책을 잔뜩 놓기에 눈부시거나 훌륭한 책집이지 않습니다. 1000은커녕 100자락 책을 곱다시 모실 줄 아는 손빛을 밝혀도 아름답거나 즐거운 책집입니다. 책집은 언제나 우리 곁에 있습니다. 서둘러 걸어가면 책집을 못 봅니다. 빠르게 부릉부릉 지나치면 책집을 안 봅니다. 스스로 삶이 고단하다고 여기면 책집을 눈여겨볼 틈이 없고, 남이 시키는 대로 휩쓸리는 나날이라면 책집하고 이웃이 되기 어렵습니다. 책 한 자락을 장만할 적에 돈이 엄청나게 들지 않습니다. 책을 많이 사서 읽어야 하지 않습니다. 애써 장만한 책을 두고두고 되읽으면서 마음을 다스리면 됩니다. 새책이 버겁다면 헌책으로 장만해도 흐뭇합니다. 반들거리는 겉모습인 책이 반짝거리는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습니다. 낡거나 닳은 책이기에 케케묵거나 해묵은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아요. 숲에서 자라던 아름나무한테서 얻은 종이로 묶은 책입니다. 모든 책에는 숲빛이 흐릅니다. 숲에서 크던 아름나무한테서 얻은 연필로 쓴 책입니다. 모든 책에는 숲내음이 서립니다. 책집은 늘 곁에 있습니다. 우리가 여태 너무 바빠서 알아보지 않았을 뿐입니다. 마을책집에 마을 이야기가 있고, 마을책집에 마을 숨결이 있어요. 곁에 있는 마을책집에 사뿐히 발을 들여놓아 봐요. 먼먼 곳에서 얻는 이야기가 아닌, 우리가 저마다 스스로 짓는 삶자락에서 가만히 피어나는 이야기를 느껴 봐요.


ㅅㄴㄹ


* 사진 : 대전 중앙로. 200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