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라도
김영갑 / 눈빛 / 1995년 2월
평점 :
절판




 사진길을 걷는 한 사람
 [내 삶으로 삭인 사진책 31] 김영갑, 《마라도》



- 책이름 : 마라도
- 사진 : 김영갑
- 펴낸곳 : 김영갑 갤러리 두모악 (2010.8.30.)
- 책값 : 45000원


 (1) 사진길


 날마다 새 하루가 열립니다. 어느 사람은 새 하루를 기쁘게 맞이하지만, 어느 사람은 새 하루에 숨을 거둡니다. 이윽고 숨이 멎을 사람이 있고, 곧 태어날 사람이 있습니다. 언제나 똑같이 찾아들면서 맞이할 하루인데 사람마다 다 달리 받아들입니다.

 지나온 어제 하루를 돌이킵니다. 어제는 불러들이지 못합니다. 어제 쓴 글을 읽거나 어제 찍은 사진을 더듬는다 해서 어제가 오늘이 되지 않습니다. 어제는 어제로 발자국으로 남고, 오늘은 오늘대로 내 몸을 움직이며 살아갑니다. 어제 하루 밥그릇을 열 비웠다 해서 오늘은 배가 안 고플 수 없습니다. 어제는 쫄쫄 굶었대서 오늘도 배고플 수 없습니다.

 삶은 삶입니다. 책은 책이고 사진은 사진입니다. 책은 어제나 그제나 오늘이나 똑같이 책입니다. 삶은 어제도 그제도 오늘도 똑같이 삶이듯, 책은 늘 똑같은 책입니다. 삶은 꾸리는 사람에 따라 달라집니다. 삶은 일구는 사람 손에 따라 새롭습니다. 마땅히, 책은 읽는 사람에 따라 달라집니다. 이렇게 읽으려 하면 이렇게 읽히고, 저렇게 읽으려 하면 저렇게 읽힙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은 이렇게 읽을 뿐이요, 저렇게 살아내는 사람은 저렇게 읽어치웁니다.

 제아무리 훌륭하다 싶도록 쓴 책일지라도, 읽는 쪽에서 훌륭히 읽어 주지 못한다면 책 하나란 부질없습니다. 제아무리 아름다이 찍은 사진일지라도, 보는 쪽에서 아름다이 바라보지 못한다면 사진 하나란 덧없습니다.

 글을 쓰는 사람부터 훌륭히 써야겠지요. 그런데 글을 읽는 사람 마음밭에 훌륭한 씨앗이 없으면 어떠한 훌륭한 글이라 하더라도 읽히지 못합니다.

 사진을 찍는 사람부터 아름다이 찍어야겠지요. 그러나 사진을 바라보는 사람 마음바탕에 아름다운 사랑이 없다면 어떠한 아름다운 사진이라 하더라도 녹아들지 못합니다.

 아름다움을 찍어 나누는 사진이 아니라고 누군가 말합니다. 아름다움만 찍어서는 사진이 아니라고도 누군가 말합니다.

 그렇지만 이런 말에 선뜻 고개를 끄덕일 수 없습니다. 아니, 고개를 절레절레 젓습니다. 아름다움을 찍어 나누기에 사진이요, 아름다움만 찍을 수 있는 사진이라고 느낍니다.

 내가 아름답다고 느끼지 않는데 사진으로 찍을 수 없습니다. 내 마음결에 아름답다 싶은 이야기가 스치는데 사진으로 안 담을 수 없습니다.

 기쁘면서 아름다운 삶이 있고, 슬프면서 아름다운 삶이 있습니다. 아프며 아름다운 삶이 있고, 웃음지으며 아름다운 삶이 있어요. 괴로우며 아름다운 삶과 홀가분하며 아름다운 삶이 있습니다. 때로는 엉터리인데 아름다운 삶이 있을 테고, 누군가는 바보스레 살아가지만 이 바보스러움이야말로 아름다움이기도 합니다.

 글이란, 훌륭히 살아가는 넋을 담아 나누는 그릇이라고 느낍니다. 사진이란, 아름다이 살아내는 얼을 빚어 나누는 그릇이라고 느낍니다. 훌륭히 살아가는 넋을 담는 글은, 착하고 참다우며 고운 매무새를 돌보아야 합니다. 아름다이 살아내는 얼을 빚는 사진은, 따스하며 넉넉하고 슬기로운 몸가짐을 추슬러야 합니다.

 훌륭한 글을 이루는 밑틀은 사랑입니다. 아름다운 사진을 이끄는 밑바탕은 믿음입니다. 사랑은 믿음이 되기도 하고, 믿음은 사랑으로 거듭나기도 합니다. 착하기에 따스하고, 따스하기에 착합니다. 참답기에 넉넉하며, 넉넉한 터라 참답습니다. 고운 결이니 슬기로운 가운데, 슬기로운 결은 곱습니다.


.. “아씨 진짜로 정체가 뭐꽈?” “마라도를 들락거린지 몇 년이나 됨수꽝?” “아주방 간첩인 거 담수다, 수상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우당.” “이 양반 또 와수강, 코딱지만 한 섬에 죙이새끼 고팡 드나듯이 잘도 드나드는 이유가 무슨 거꽝?” 섬사람들은 신기해 한다. 나에 대해 궁금해 하는 점들이 많다 ..  (눈빛 판/127쪽)


 깊은 밤에 마당에 나와 쉬를 하니 날씨가 차지만 그렇게까지 춥지 않습니다. 바람이 고요히 잠드니 날은 차더라도 몸은 덜 춥다고 느낍니다. 날이 오늘보다 덜 차더라도 바람이 모질면 몸은 훨씬 춥다고 느낍니다. 바람 하나로 날씨는 사뭇 달라진다고 느낍니다. 햇살이 드리울 때하고 햇볕을 쬘 수 없을 때하고 날씨를 몹시 다르게 느낍니다.

 그래도 겨울은 겨울입니다. 내가 선 자리와 내가 사는 곳에 따라 겨울을 달리 받아들일 테지만, 겨울은 겨울입니다. 겨울은 겨울로 맞아들이면서 내 삶을 돌아봅니다. 겨우내 내가 어찌 지내고, 겨우살이 어떻게 꾸리며, 겨울눈을 치우느라 얼마나 고단한가를 헤아립니다.

 겨울이기에 겨울을 느끼며 찍는 ‘겨울 사진’은 아름답습니다. 차가움과 추움과 시림과 쓸쓸함과 매서움과 모짐을 느끼는 그대로 사진으로 담으면서 아름답구나 하고 생각합니다. 바야흐로 봄을 맞이하면 봄에는 봄결을 고스란히 살려서 사진으로 담겠지요. 내가 좋아하며 사랑하는 삶을 보듬으면서 봄빛을 사진빛으로 다시 태어나도록 이끌 테지요.

 그러니까 사진을 하는 길이란 삶을 꾸리는 길입니다. 사진을 좋아하는 길이란 삶을 좋아하는 길입니다. 사진을 나누는 길이란 삶을 나누는 길입니다.

 삶을 꾸리듯이 사진을 꾸릴 뿐입니다. 삶을 보듯이 사진을 볼 뿐입니다. 삶을 어루만지듯이 사진을 어루만집니다. 삶을 마주하듯이 사진을 마주합니다.

 내 삶이 온통 돈벌이투성이라면 내 사진은 똑같이 온통 돈벌이투성이입니다. 내 삶이 온통 한길로 미쳤다면 내 사진도 온통 한길로 미칩니다. 내 삶이 온통 내 살붙이를 사랑하는 보금자리라면, 내 사진이란 시나브로 이 결을 아끼며 흐릅니다. 내 사진 또한 온통 내 살붙이를 사랑하는 보금자리로 흘러요.

 다만, 이렇게 사진을 찍든 저렇게 사진을 찍든 내 사진입니다. 내 삶을 담아 보여주는 내 사진입니다. 아직 어리숙한 풋내기라 한다면 어리숙한 풋내기 그대로 좋은 내 삶이요 내 사진입니다. 오래도록 갈고닦아 빈틈 하나 보이지 않는 사진쟁이라 한다면 오래도록 갈고닦아 빈틈 하나 보이지 않는 그대로 반가운 내 삶이면서 내 사진이에요. 더 거룩한 삶이 없고, 더 거룩한 사진이 없습니다. 더 모자란 삶이 없으며, 더 모자란 사진이 없어요.

 김영갑 님이 마라도를 찍든 말든 김영갑 님 삶입니다. 김영갑 님이 골목길을 찍든 말든 김영갑 님 삶입니다.

 사진으로 찍힌 모습과 터전과 사람을 바라보면서 김영갑 님 삶을 만납니다. 김영갑 님 삶을 만난 사람은 김영갑 님이 찍은 사진에서 숱한 사람과 삶터와 보금자리와 자연을 함께 만납니다. 둘은 그대로 좋은 이웃이고, 둘은 둘대로 반가운 동무입니다. 좋은 사진쟁이는 좋은 사람을 찾아다니면서 만나고, 좋은 사람은 좋은 사진쟁이를 만나서 스스럼없이 웃거나 울며 이야기를 주고받습니다. 사진길은 사람길이면서 사랑길이고 삶길입니다.


 (2) 다시 태어난 사진책 《마라도》


 2010년 11월 바람 몹시 불던 날, 제주섬 마실을 했습니다. 집식구 모두 함께 제주마실을 했습니다. 자가용 없고 자가용 몰 줄 모르는 우리들은 고마운 분이 태워 주는 차를 얻어타고 두모악 김영갑갤러리도 찾아갑니다. 여러 차례 보았던 사진이고, 아이는 차에서 까무룩 잠든 바람에 헐레벌떡 슥 돌고는 부랴부랴 밖으로 나옵니다. 나오는 길에, 까만 천옷을 입고 새로 나온 《마라도》를 봅니다. 1995년에 처음 나온 《마라도》가 떠오릅니다. 예전 사진책에 실린 사진을 고스란히 다시 실었을까? 예전 사진에는 못 실었던 사진도 실었으려나?

 충주 멧골집으로 돌아와서야 사진책 《마라도》 비닐을 뜯어서 넘깁니다. 펼친 두 쪽에 사진 한 장만 넣는 판짜임입니다. 모든 사진은 똑같은 크기로 싣습니다. 이리하여, 1995년판에는 실린 사진이 2010년 8월 30일에 ‘시중 책방에는 없고 두모악갤러리에서만 파는’ 이 새 사진책 《마라도》에는 안 실리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1995년판 《마라도》에 실려 내 마음을 설레게 하던 살가운 사진은 알뜰살뜰 제자리를 찾습니다. 1995년판은 판짜임이 엉성할 뿐 아니라 펼침새(두 쪽에 걸쳐 나오는 사진을 제대로 보려고 책을 펼치는 매무새)가 형편없습니다. 1995년판 《마라도》는 사진이 가운데에 씹힐 뿐 아니라 책이 쉬 망가집니다. 크기가 골고루라 할 수 있습니다만, 사진 엮음새는 뒤죽박죽이라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다만, 1995년판 《마라도》에는 김영갑 님 목소리가 글로 나타나 곳곳에 드러납니다. 2010년판 《마라도》에는 김영갑 님 목소리가 잘 안 들립니다. 꽤 많이 실린 김영갑 님 1995년 글이 2010년판에는 많이 잘립니다.

 1995년판과 2010년판은 똑같은 사진을 써서 엮은 사진책이지만, 두 책은 서로 다른 책이 됩니다. 1995년판은 사진을 더 많이 실어 주었으나 사진에 서린 이야기를 찬찬히 헤아리기에는 모자랍니다. 2010년판은 사진을 덜 실었으나 사진에 깃든 이야기를 곰곰이 되새기기에 좋습니다. 1995년판은 사진과 글을 함께 돌아보면서 마라도 사람들과 삶터와 자연을 살피기에 좋습니다. 2010년판은 마라도를 머나먼 옛이야기로 거슬러 올라가며 살피도록 합니다. 2010년판 《마라도》가 조금 더 김영갑 님 사진결을 보듬었더라면 한쪽(오른쪽)에만 사진을 싣는 틀이 아니라 두 쪽 모두 사진을 실으면서 이야기를 빛냈을 테고(딱 한 번 두 쪽에 사진 두 장을 실었습니다), 또는 왼쪽에는 김영갑 님 글을 실어 주면서 이야기를 꽃피도록 했겠다 싶습니다.

 사진책은 멋스럽거나 예쁘장하다고 해서 사진책이 아닙니다. 사진책은 사진과 이야기가 실린 책이라서 사진책입니다. 사진책은 사진으로 삶을 이야기하기에 사진책입니다.


.. 섬사람들은 바람을 두려워한다. 섬사람들이 오랜 세월 바람과 싸우며 흘린 눈물이 섬의 역사이며, 바람의 역사이다 … 눈을 뜨면 하늘이요, 바다다. 눈을 감아도 하늘이요, 바다다. 앉으나 서나 하늘·바다. 동서남북 어디에 있든 하늘·바다. 섬은 온통 하늘과 바다뿐이다 … 섬사람들에게 바다는 생명이다. 사랑도 미움도 행복도 불행도 시작은 바다. 웃음도 울음도 바다에 있고, 슬픔도 기쁨도 바다에 있다 ..  (눈빛 판/18∼19, 33쪽)


 헌책방마실을 바지런히 하더라도 1995년판 《마라도》를 만나기는 어렵습니다. 제주마실을 해야 비로소 2010년판 《마라도》를 만날 수 있습니다. 이래도 만만하지 않고 저래도 꽤 벅찹니다. 인터넷으로 우지끈 똑딱 하면 모든 일을 다 할 수 있다는 오늘날인데, 김영갑 님 《마라도》는 이런 책으로든 저런 책으로든 여느 사람들이 쉽게 만질 수 없습니다.

 참 힘들구나 싶지만, 힘든 그대로 좋은 사진책이 《마라도》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은 김영갑 님 사진을 ‘김영갑 사진’으로 받아들이는 매무새가 안 되었기 때문입니다.


.. 환경이 식물에게뿐만 아니라 살아숨쉬는 모든 것들의 삶에 미치는 영향은 절대적이다. 바람을 이해하고 나면 마라도의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돌 하나 무심히 스쳐 지날 것이 없다. 바람과의 싸움 속에서 생명은 이어가는 식물이나 사람들의 살아가는 모양새를 관심을 가지고 살피노라면 마라도가 소중한 이유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자그마한 섬에 세상살이에 필요한 지혜들이 무궁무진하게 숨어 있는 보배로운 섬이다. 마라도가 특별히 볼거리가 있는 섬은 아니지만, 마음먹기에 따라 여행의 목적을 극대화할 수 있는 작지만 소중한 섬이다 ..  (두모악갤러리 판/106쪽)


 김영갑 님 사진을 ‘김영갑 사진’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은, 내 사진을 ‘내 사진’으로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김영갑 님 사진을 ‘김영갑 사진’으로 받아들이자면 김영갑 님 삶을 ‘김영갑 삶’으로 읽어야 할 뿐 아니라, 김영갑 님 사진에 담긴 마라도 사람들 삶을 ‘마라도 삶’으로 읽어야 합니다.

 내 사진을 ‘내 사진’으로 맞아들이자면 ‘내 삶’을 먼저 옳고 바르며 참답고 착하게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내 삶을 제대로 모르면서 내 사진을 알 수 없습니다. 내 삶과 내 사진을 모르는데, 김영갑 님 삶과 사진을 알 길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오늘날 사람들도 참으로 많이 압니다. 신문을 알고 방송을 알며 인터넷을 압니다. 주식을 알고 스포츠를 알며 학력을 압니다. 서울을 알고 부산을 아는 오늘날 사람들입니다. 도시를 알고 돈을 아는 오늘날 사람들이에요.

 그렇지만, 우유는 알지만 소젖은 모르는 오늘날 사람들입니다. 소한테서 얻어 만드는 우유인 줄 모르는 오늘날 사람들입니다. 소한테서 얻어 만드는 우유가 되기까지, 소가 무엇을 먹고 소가 어떠한 우리에서 몇 해를 살아가는지 모르는 오늘날 사람들입니다. 마트에 잔뜩 놓인 우유만 아는 오늘날 사람입니다. 마트마다 우유값이 어떻게 다른가를 알기만 하는 오늘날 사람입니다.

 삶을 참다이 모르기에 사진을 참다이 모릅니다. 모른대서 바보나 멍청이라는 소리가 아닙니다. 모르니까 모른다는 이야기입니다. 삶을 모르고 사진을 모르기에 김영갑이나 김영갑 사진을 알 턱이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김영갑이나 김영갑 사진을 알 턱이 없으니, 《마라도》 1995년판을 헌책방에서 찾아내어서 넘기든, 《마라도》 2010년판을 45000원 온돈을 치르며 제주섬 두모악갤러리에서 장만하여 펼치든, 이 사진책이 어떠한 결과 무늬와 내음과 빛깔이 고루 섞이어 살점과 뼈를 이루는가를 톺아볼 수 없습니다.


.. 수없이 몰려오는 관광객을 지켜보면서 남아 있는 사람들은 소외감을 느끼고 있다. 도회지 사람들이 조용한 섬에서 평화롭게 사는 것이 부럽다 이야기하면, 열이면 열 모두 부정적으로 대답한다. 와서 한번 살아 보라고. 작은 섬, 마라도를 해상 관광지로 개발하기 위해 87년 남제주군에서 국립공원으로 지정하여 개발을 진행시키고 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유람선이 왔다 가고 자리덕·살레덕에 대합실이 생겼다. 쓰레기 소각장, 간이 화장실, 태양열 발전소, 복지관 등 새로운 건물들이 들쑥날쑥 들어서고 있다. 최남단이요, 외딴 섬이기에 대통령·장관·국회의원·도지사·교육감 등 많은 사람들이 찾아온다. 그래서인지 다른 섬에 비해 정부의 혜택을 많이 받았다. 살기 좋은 섬으로 변해 가지만 토박이들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학생이 둘뿐인 마라분교에는 컴퓨터·피아노·비디오·풍부한 학습교재·실험 도구 등 부족한 것이 없다. 최남단 외딴 섬이기에 명선이와 영신이는 수없이 나들이를 했다. 그들은 청와대까지 구경했다. 마라도를 다녀간 이들은 외딴 섬의 어린 새싹들을 위해 학용품도 보내 주고, 학습교재도 보내 주는 등 학생들에게 필요한 것은 모두 보내 준다. 최남단 섬에 산다고 명선이와 영신이는 컴퓨터 광고 모델도 했고, 매스컴도 탔다. 그런데도 이 섬에는 아이들이 없다 ..  (눈빛 판/102쪽)


 제주섬을 찍었기에 대단하게 손꼽을 김영갑 님이 아닙니다. 제주섬 오름을 사람들한테 널리 알렸기에 훌륭하다 추켜세울 김영갑 님이 아닙니다. 두모악갤러리를 알차게 일구었으니 멋스럽다 자랑할 김영갑 님이 아닙니다.

 사진 한길을 즐거이 걸었기에 반가운 김영갑 님입니다. 사진 한길을 제주사람이랑 마라도사람이랑 손을 맞잡고 걸었기에 달가운 김영갑 님입니다. 사진으로 살아가는 길을 호젓하게 보듬으면서 사랑했기에 좋은 김영갑 님입니다.

 내 옆지기는 내 옆지기대로 좋습니다. 내 옆지기네 어머님과 아버님은 내 옆지기네 어머님과 아버님대로 좋습니다. 내 어버이는 내 어버이대로 좋습니다. 내 이웃은 내 이웃대로 좋습니다.

 내 옆지기가 나와 같아야 좋을 수 없습니다. 내 옆지기는 나와 같지 않고 내 옆지기라서 좋습니다. 내 어버이는 나와 비슷하거나 닮기에 좋지 않습니다. 내 어버이는 나와 달리 내 어버이 삶이라서 좋습니다.

 김영갑 님은 바로 김영갑 님 삶을 일구면서 김영갑 사진을 했습니다. 김영갑이 마라도에서 마라도사람이랑 함께 살아가며 사진기를 들었기에 김영갑 사진이요, 사진책 《마라도》입니다. 1995년 눈빛판 사진책하고 2010년판 두모악갤러리 사진책은 아직 이 대목을 옳게 짚지 못합니다.


.. 옛날 섬사람들은 양식만 있으면 살았다. 바다에 나가면 반찬거리는 널브러져 있다. 생활수준도 비슷했다. 민박집이 생기면서 생활수준의 차이가 커졌다. 남편은 민박집을, 아내는 물질을 하기에 여유가 생겨 기름보일러를 놓고, 가스레인지를 사용한다. 여유가 없는 가정도 옛날보다 씀씀이는 늘어났다. 문명의 편리함을 알았기에 전기·전화요금·가스비·연탄값 등 지출이 많다. 양식이나 채소도 모두 사다 먹는다 ..  (두모악갤러리 판/107쪽)


 사진 하나가 있기에 살아온 김영갑 님은, 꼭 김영갑 님 목숨값에 알맞게 일하고 사랑하며 눈물짓다가 흙으로 돌아갑니다. 사진 하나를 찍으며 살아온 김영갑 님은, 더도 덜도 아닌 김영갑 님 사랑씨앗에 걸맞게 놀고 잠자며 웃음짓다가 바람이 됩니다. 사진 하나를 얼싸안으며 살아온 김영갑 님은, 무지개와 같이 몸뚱이를 움직여 사람과 사진 사이에 징검다리를 놓았습니다.

 손으로 잡을 수 없는 무지개 징검다리이고, 폴짝 뛰어 건널 수 없는 무지개 징검다리입니다. 가까이 다가선다고 보거나 만지지 못하는 무지개 징검다리이지만, 너무 멀리 떨어지면 거짓말같이 보이다가 금세 사라지는 무지개 징검다리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참 바보라서, 두모악갤러리에 찾아가든 용눈이오름에 찾아가든 제주섬이나 마라도에 찾아가든, ‘김영갑이 보고 찍은 모습’에 눈이 먼 채, ‘김영갑이 숨쉬며 살았던 터전’은 부둥켜안지 못합니다. ‘내가 숨쉬며 살아갈 터전’은 느끼거나 찾거나 바라보지 못합니다.

 2010년판 《마라도》가 여느 새책방 책꽂이에도 꽂히면 참 좋겠지요. 그렇지만, 부러 제주마실을 해서 제주버스를 타고 돌아돌아 찾아가서 퍽 만만하지 않으나 그리 비싸지 않은 값을 치르며 사야만 볼 수 있도록 내놓은 모양새도 참 좋습니다. 사진기를 장만하듯 사진책을 장만해야 합니다. 사진기를 장만하는 매무새가 사진책을 장만하는 매무새이고, 사진을 찍는 매무새가 사진을 읽는 매무새입니다. (4344.1.16.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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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ANN vol.6 (雜誌)
荒木經惟 徐美姬 竹之內祐幸 岡部桃 Peter Hujar Santiago Mostyn / フォイル / 2010년 10월
평점 :
품절


(한국판은 18000원짜리인데, 한국판은 목록에 없고 일본책만 목록에 뜨네...) 



 시골사람은 시골 사진을, 도시사람은 도시 사진을
 [찾아 읽는 사진책 13] 사진잡지 《IANN 6호 : Freedom from the known on the line》


 시골에서 살아가는 사람도 도시 사람들 삶터와 삶자락을 사진으로 담거나 글로 쓰거나 그림으로 그리거나 노래로 부르거나 춤으로 보여줄 수 있습니다.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도 시골 사람들 보금자리와 삶무늬를 사진으로 찍거나 글로 적거나 그림으로 옮기거나 노래로 나누거나 춤으로 선보일 수 있습니다.

 시골사람이래서 시골 모습만 즐겨야 하지 않습니다. 도시사람이기에 도시에만 머물 까닭이 없습니다.

 아파트로 숲을 이룬 곳에 산달지라도 달동네로 사진마실을 나올 수 있습니다. 달동네에 살더라도 아파트숲으로 찾아가 오늘날 도시 모습을 고스란히 사진으로 옮길 만합니다.

 골목동네 삶자락을 사진으로 찍기에 ‘가난한 사람 모습’을 살가이 담지 않습니다. 아파트숲을 사진으로 그리기에 ‘잘사는 사람 모습’을 꾸밈없이 보여주지 않아요. 골목동네에도 잘사는 사람 많고, 아파트숲에서도 못사는 사람 많습니다. 골목동네에서 가난하게 살지만 아름다이 사는 사람 많고, 아파트숲에서 부자로 지내지만 슬픈 사람 많습니다.

 어디에나 사람이고 삶입니다. 어디에서든 사랑이며 살내음입니다. 사진이든 글이든 그림이든, 사람이 복닥이면서 어우러지는 이야기를 끌어내면서 나누는 길을 찾아야 합니다. 철거민을 찍거나 농사꾼을 찍었기에 더 훌륭하다 싶은 사진이 되지 않습니다. 이름난 정치꾼을 찍었거나 손꼽히는 재벌 회장을 찍었다 해서 쓸모없는 사진이 되지 않아요. 내 중학교 적 교사나 내 유치원 적 선생님을 찍은 사진으로도 다큐사진 이야기를 이룹니다. 내 동무들 삶을 돌아보면서 패션사진이든 상업사진이든 얼마든지 이룹니다. 사진기와 사진장치와 사진기법과 사진소재는 모두 덧없습니다. 사진을 하는 내 마음이 어떠한가에 따라 사진이 태어나거나 사진이 죽습니다. 글을 쓰는 사람한테도 어떠한 글감을 찾아 어떠한 틀로 적바림하느냐는 대수롭지 않습니다. 내 삶 이야기를 글로 실어 내느냐가 대수롭습니다. 어떤 이야기를 글로 펼치려 하느냐를 대수로이 여겨야 합니다.

 백두산을 그리거나 한라산을 그렸기에 놀라운 그림이 아닙니다. 김영갑 님처럼 용눈이오름을 좋아해야 무언가 그럴듯한 그림이 나오지 않습니다. 우리 동네 뒷산도 좋고, 서울 남산도 좋습니다. 마을사람조차 이름을 잘 모르는 야트마한 멧중턱도 괜찮습니다. 어떠한 자리이든 좋은 멧자락이요 멧길이며 멧누리입니다.

 골목길이나 고샅길이 더 호젓하지만은 않습니다. 시멘트길이든 아스팔트길이든 괜찮습니다. 나 스스로 아름다이 살아가는 가운데 껴안을 수 있는 길이어야 합니다. 내가 디디는 걸음걸이가 참다우며 착해야 합니다. 마음으로 다가서지 않고서야 이야기 하나 나누지 못합니다. 마음으로 마주할 때에 비로소 이야기를 살포시 나눕니다. 이야기를 나누지 못할 때에는 사진 십만 장이나 백만 장을 찍었더라도 작품이라 이름할 사진은 나오지 않습니다. 이야기를 나눌 때에는 다문 한두 장이나 열 몇 장만 찍었더라도 사진책 하나를 이룰 만합니다. 《내셔널지오그래픽》 한 꼭지를 맡는 사람은 으레 ‘필름 천 통’을 찍는다고 들었는데, 필름 천 통, 곧 삼만육천 장을 찍었어도 정작 잡지에 쓰는 사진은 스무 장이 안 됩니다. 그러니까, 필름 천 통을 쓰면서까지 이야기를 찾아야 한다는 소리인 가운데, 이야기를 나누거나 즐기는 가운데 꼭 필름 한 통만 써서도 잡지를 너끈히 채울 만하다는 소리입니다.


- 산티아고 모스틴, 히로유키 타케노우치, 켈리 코넬, 김진희, 미키 조, 피터 후져, 배찬효, 김인숙, 모모 오카베, 노부요시 아라키


 한 해에 두 차례 나오는 사진잡지 《IANN》 6호를 봅니다. 《IANN 6호 : Freedom from the known on the line》은 ‘성별 울타리’를 다룹니다. 남성과 여성, 또는 여성과 남성이라는 성별 울타리가 어떠한가를 사진으로 보여줍니다. 모두 열 사람이 열 갈래 삶자락에서 열 가지 눈빛으로 열 가지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진을 나눕니다.

 한국사람 셋, 나라밖 사람 일곱 사진을 바라봅니다. 한국사람 사진은 금세 티가 나고, 나라밖 사람 사진도 얼른 알아챕니다. 나라밖 사람 사진 가운데 일본사람과 서양사람 사진도 쉬 가릴 수 있습니다.

 저마다 삶터가 다르니 사진이 다릅니다. 놀거나 일하거나 어울리는 터전이 사뭇 다르니, 사진으로도 참 다른 모양새를 마주합니다.

 《강운구 사진론》이라는 사진책을 읽으며, ‘얼마 안 된 지난날’ 나라밖에서 볼일을 마치고 나라밖 사진책을 사들고 들어오다가 공항에서 빼앗기는 대목(169쪽)을 보았습니다. 이래서 안 되고 저래서 안 된다며, ‘한국 아닌 다른 나라’에서는 벌써 예술이나 문화로 자리잡은 훌륭한 작가들 작품 하나 마음껏 들여오지 못하는 슬픈 이야기를 보았습니다.

 한국은 예나 이제나, 또 얼마 앞서나 오늘날이나, 더욱이 요즈음이나 앞으로나 영 엉터리요 엉망입니다. 사회도 정치도 문화도 교육도 과학도 체육도 어느 하나 잘되거나 제대로 된 구석이 없습니다. 지난날에는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마르크 리보, 다이안 아버스 사진책들을 공항에서 빼앗았다지만, 오늘날에도 한국에서는 이들 사진책을 펴내지 못합니다. 아니, 펴내지 않는다 해야 옳겠지요. 저작권 삯을 안 치르고 1999년 12월 31일까지 팔던 조그마한 사진문고로 그럭저럭 나오기는 했습니다만, 나라밖 사진쟁이와 출판사한테 제값을 치르며 내놓던 사진작품책이란 아직까지 없습니다. 잘 나가고 잘 팔린다는 나라밖 글쟁이한테는 몇 억씩 안기며 책을 사들이지만, 이름있을 뿐 아니라 훌륭하다는 나라밖 사진쟁이한테는 인세 5%이든 10%이든 아깝다 여길 뿐 아니라, 애써 내놓아도 제작비를 건질 수 없는 형편입니다.

 이리하여 한국은 엉망이고 엉터리입니다. 뜻있는 사진잡지사나 사진책 출판사는 돈이 적습니다. 뜻없는 출판사는 돈이 많습니다. 뜻은 있으나 가난한 사람이 많고, 뜻은 없는데 돈은 넘치는 사람이 많아요. 돈이 없는 사람은 돈을 바라고, 돈이 있는 사람은 헤프게 씁니다.

 생각해 보면, 돈이 없으면 없는 대로 즐겨야 합니다. 돈이 없으니 아무것도 못한다가 아니라, 돈이 없을 때에는 돈 없는 삶결대로 글이든 그림이든 사진이든 노래이든 춤이든 영화이든 즐기면 됩니다. 모든 영화가 돈이 많을 때에 훌륭히 찍을 수 있지 않아요. 모든 노래꾼이 돈 넉넉할 때에 목소리와 가락을 뽐내며 사랑받을 작품을 내놓지 않아요. 어떤 사진쟁이라 하더라도 매한가지입니다. 돈·이름·힘으로 사진을 찍지 않습니다. 땀방울과 사랑과 믿음으로 사진을 찍습니다. 브레송이나 아버스 사진책을 공항 들머리에서 북북 찢는 철딱서니없는 짓이 얼마 앞서까지 벌어지던 한국일 뿐 아니라, 브레송이나 아버스 사진책을 코앞에 들이밀어도 뭐가 어떻게 좋아 내 가슴이 울렁울렁한다고 느끼는 사람이 몹시 적은 한국입니다. 사진은 이름값이 아니라 작품이지만, 이름을 밝혀야 알아듣고 이름을 밝히지 않으면 아예 쳐다보지 않아요.

 사진잡지 《IANN 6호 : Freedom from the known on the line》을 들여다보면 한국땅 사진쟁이 사진은 무척 답답합니다. 어쩔 수 없는 노릇인데, 한국 삶터가 참으로 답답하게 꽉 막혔기 때문입니다. 이 막힌 곳에서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합니다. 싱그럽거나 맑은 숨을 홀가분하게 들이마시기 어렵습니다. 골방에 갇혀야 하고, 억지로 꾸며야 합니다. 연극을 하거나 몸을 사려야 합니다.

 그런데, 달리 생각하면, 골방에 갇혀야 하는 한국 글쟁이·그림쟁이·사진쟁이는 골방에 갇힌 삶결을 고스란히 옮기면 됩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가난한 살림살이 그대로 예쁘며 아름다이 일구는 삶터를 예쁘며 아름다이 보여주면 됩니다. 슬프게 살아가니까 슬픈 삶을 적바림합니다. 기쁘게 살아가면 기쁜 삶을 적바림합니다.

 자랑이나 우쭐거림이 아닌 문화이자 예술인 사진이고 그림이며 글입니다. 삶을 차곡차곡 실어내는 문화이며 예술인 사진이요 그림이요 글이에요.

 나쁘다 할 대목이 없으며 좋다 할 구석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삶은 삶이기 때문입니다. 삶을 놓고 더 나쁘다느니 더 좋다느니 할 수 없습니다. 삶은 그저 삶이고, 사진은 그예 사진입니다. 좋아하는 대로 살아내면서 나누는 이야기이기에 이야기꽃으로 피어납니다. 받아들이면서 즐기는 삶이라서 삶꽃으로 거듭납니다.

 앞으로도 한국사람들은 더 도시로 몰려들고, 더 도시에서 복닥이며, 더 도시에서 맴돌리라 생각합니다. 한국에서 사진을 하는 사람들도 시골에서는 사진을 안 하겠구나 싶고, 도시에서 지내더라도 작은 도시에서는 사진을 못 하겠다고 느낍니다. 시골자락에서는 마땅한 책 하나 변변한 사진책 하나 찾아 읽기 어렵습니다. 인터넷을 뒤지면 무슨 책이든 못 사겠느냐만, 다리품을 팔아 내 손으로 뒤적이며 고르는 책읽기를 할 만한 책쉼터가 없는 시골이고 작은 도시예요. 사진은 골방에 갇혀서 똑딱똑딱 지어내지 못해요. 다리품을 팔아 내 손으로 책을 뒤적이며 고르듯, 내 다리를 움직이고 내 몸을 쓰며 내 마음을 기울이는 가운데 내 손으로 이루는 삶이요 사진입니다.

 이 나라에서 동성애자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시골에 살림집을 마련하여 시골사람으로 살아가는 가운데 사진을 찍는다면 어떠한 이야기열매를 맺을는지 궁금합니다. (4344.1.13.나무.ㅎㄲㅅㄱ)


― IANN 6호 : Freedom from the known on the line (이안북스 엮어 펴냄,2010.9.3./18000원) 

 http://www.iannmagazin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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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보이 한대수
한대수 지음 / 생각의나무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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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즐기는 삶으로 즐기는 사진찍기
 [내 삶으로 삭인 사진책 32] 한대수, 《올드보이 한대수》



- 책이름 : 올드보이 한대수
- 글·사진 : 한대수
- 펴낸곳 : 생각의나무 (2005.11.18.)
- 책값 : 13000원



 (1) 즐거운 삶과 즐거운 사진


 어떠한 일이건 즐기지 않는다면 힘듭니다. 어떠한 일이든 즐길 때에는 홀가분합니다. 어떠한 사진이건 즐기지 않는다면 그저 그렇습니다. 어떠한 사진이든 즐길 때에는 아름답습니다.

 어떠한 일이건 뜻있기에 할 수 있지 않습니다. 뜻있는 일이라서 힘겨운 데에도 참으며 할 만하지 않습니다. 어떠한 일이건 이야기가 있는 삶이기에 할 만합니다. 이야기가 있는 삶인 일인 까닭에 힘겹다고 느끼지 않으면서 즐겁게 나눕니다.

 사진을 하나 찍는 자리에서도 즐거움과 이야기를 헤아립니다. 먼저 즐거웁자고 찍는 사진이지, 뭔가 그럴듯한 그림을 보여주거나 자랑하려고 찍는 사진이 아닙니다. 이름을 얻는다거나 돈을 번다거나 힘을 거머쥐려고 사진찍기를 할 수 없어요. 사진을 말하는 ‘사진비평’도 마찬가지입니다. 권위자가 된다거나 대학교수가 되려고 사진비평을 할 수 없습니다. 즐겁게 사진을 찍고, 즐겁게 사진을 말할 뿐입니다.

 사진찍기란 이야기를 찍는 일입니다. 사진찍기란 거룩한 뜻이나 대단한 뜻이나 놀라운 뜻이나 훌륭한 뜻을 사진 하나로 보여주는 일이 아닙니다. 사진찍기란 내 삶을 이야기로 여미어 사진이라는 틀로 담는 일입니다. 사진찍기란 내 삶과 네 삶을 우리 삶으로 아로새기면서 다 함께 어깨동무하자는 테두리에서 얼싸안는 놀이입니다.

 누군가는 ‘사진 한 장으로 온누리를 바꾼다’거나 ‘사진 한 장으로 뒤틀린 누리 속내를 보여준다’거나 ‘사진 한 장으로 참목소리를 들려준다’는 목적의식이나 소명의식을 내세웁니다. 어려운 말로 목적의식이나 소명의식인데, 쉽게 말하자면 한 마디로 ‘뜻’입니다.

 어쩌면 바꿀 수 있는지 모릅니다. 어쩌면 까밝히거나 드러낼는지 모릅니다. 어쩌면 알리거나 보여줄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어떠한 삶을 어떠한 삶으로 바꾸려나요. 잘잘못을 밝힐 때에 무엇이 ‘잘’이고 무엇이 ‘잘못’이며, 이를 알아보거나 가누는 잣대란 무엇인가요. 가난한 사람들을 드러내거나 아리따운 몸매를 보여주는 일은 누구한테 반가운가요. 사건과 사고를 굳이 사진으로까지 담아서 알리지 않는다면 사건과 사고란 일어나지 않은 일이 되나요.

 아름다움을 바라보는 눈길이 없다면 아름다운 모습을 사진으로 옮기지 못합니다. 그런데 아름다움을 바라보는 눈길을 얻자면, 나 스스로 아름다운 삶을 일구어야 합니다. 아름답게 살아가지 않고서는 아름다움을 알아보지 않습니다. 아름다운 사람이 아니고서는 아름다운 벗이나 이웃이나 살붙이를 알아채거나 느끼지 못합니다.

 ‘미학’이라는 지식으로 아름다움을 안다고 할 수 없습니다. 미학이라는 지식은 그예 지식입니다. 사진은 지식이 아니요, 사진찍기는 지식찍기가 아닙니다. 주어진 틀대로 옮기는 일이 사진이 아닙니다. 사진은 아름다움을 꽃피우는 삶입니다. 꼭 사진기를 들었을 때에만 아름다움을 볼 줄 아는 삶이 아니라, 사진기가 없을 때에도 언제나 아름다움으로 꾸리는 삶이어야 합니다. 글을 쓰든 그림을 그리든 만화를 그리든 노래를 부르든 춤을 추든 밥을 하든 설거지를 하든 빨래를 하든 아이를 돌보든 길을 걷든 자전거를 타든 할머니 팔을 붙잡고 짐을 들어 드리든 사진기를 쥐든 노상 아름다운 내 삶일 때에 비로소 내 두 눈으로 바라보는 곳에서 아름다움이 무엇인가를 느끼면서 사진기 단추를 찰칵 하고 누릅니다.

 맛나 보이는 밥도 있겠지만, 맛나 보이는 밥이 맛이 있지는 않습니다. 맛있는 밥이 맛있는 밥입니다. 잘 찍은 사진은 잘 찍은 사진일 테지요. 기계질을 잘하거나 셈틀을 잘 만진다면 잘 찍었다 싶은 사진을 잘 만들겠지요.

 그러나 내 삶을 따로 기계로 꾸미거나 겉모습을 덧바르거나 어찌저찌 만들 수 없습니다. 하루하루 주어진 나날을 살아갑니다. 아침에 해가 뜨고 낮에 따사로우며 저녁에 해가 집니다. 새벽에 잠을 깨고 바지런히 일을 하거나 놀이를 한 다음 고단하게 잠자리에 듭니다. 아이하고도 복닥이고 짝꿍이나 이웃이나 동무하고도 부대낍니다. 한 번 선물받은 삶을 스무 해 만에 접기도 하지만 백 해까지 잇기도 하고, 그럭저럭 쉰이나 예순이나 일흔 즈음에 마무리짓기도 해요. 그예 흐르는 삶이고, 이처럼 흐르는 삶결에 맞추어 차분히 담아내는 사진입니다.

 사진은 배우지 못합니다. 사진은 가르치지 못합니다. 살아내는 하루하루대로 살아내는 무늬를 이루면서 사진을 이룹니다. 사진은 살아내는 내 나날입니다. 사진학교를 다니거나 사진강의를 듣는다고 사진에 눈을 뜰 수 없습니다. 좋은 사진책을 수천 수만 권 간직한다든지 읽었다 해서 사진읽기를 잘하지 않아요. 좋은 삶을 좋은 넋으로 일구면서 좋은 말로 사랑을 나누면서 살아가는 사람일 때에 비로소 사진읽기를 즐깁니다. ‘잘하기’ 아닌 ‘즐기기’입니다.

 우리는 ‘사진찍기’나 ‘사진읽기’나 ‘사진하기’ 모두 배우지 못하고 가르치지 못합니다. ‘사진하는 마음’이나 ‘사진 찍히는 삶’이나 ‘사진 이루는 손길’을 배우거나 가르치지 못합니다. 우리는 오로지 ‘사진기 다루는 솜씨’를 배웁니다. ‘사진이 걸어온 발자취’를 배웁니다. ‘사진쟁이 이름’과 ‘사진책 목록’을 배웁니다. 사진을 갈래에 따라 나누어 놓은 학문을 배웁니다. 사진을 갈래에 따라 나눈 다음 이런 사진은 어떻고 저런 사진은 저떻다 하는 이론은 배웁니다.

 사진을 좋아하고 싶으면 내 삶을 좋아하면 됩니다. 사진을 사랑하고 싶다면 내 삶을 사랑하면 넉넉합니다. 사진을 아끼고픈 꿈이라면 내 삶을 아끼는 꿈날개를 펼칠 노릇입니다.

 사진하는 마음이란 살아가는 마음입니다. 내가 사진을 한다면 내 사진하는 모습은 내가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사진찍는 매무새란 살아가는 매무새입니다. 내가 사진을 찍는 매무새란 고스란히 내가 살아가는 매무새입니다.

 사진읽는 눈썰미란 살아가는 눈썰미입니다. 내가 사진을 읽는 눈썰미 그대로 온누리와 사람과 삶을 바라봅니다.

 우리들은 삶을 즐겨야 합니다. 사진이 아닌 삶을 즐겨야 합니다. 작은 들꽃을 즐기고 눈 덮인 겨울산을 즐겨야 합니다. 자전거를 즐기고 제주섬을 즐겨야 합니다. 용눈이오름이든 한라산이든 즐겨야 합니다. 골목길이든 고샅길이든 즐겨야 합니다. 예쁘장한 연예인이나 영화배우나 노래꾼이나 다 좋으니 좋은 동무나 이웃으로 삼아 하루하루 즐겨야 합니다. 우리 집 딸아이를 즐기고 사랑스러운 짝꿍을 즐기며, 학교를 즐기고 회사를 즐기며 나라를 즐겨야 합니다. 바다를 즐기고 딱정벌레를 즐기며 저어새를 즐겨야 합니다.

 즐길거리는 가득합니다. 우표를 즐기든 책을 즐기든 고무줄을 즐기든 좋습니다. 내가 즐기는 삶을 아끼며 사랑하면 됩니다. 내가 즐기는 모두를 좋아하며 보듬으면 됩니다.

 사진이란, 내가 즐기는 삶을 가만히 적바림하거나 나누는 어깨동무입니다. 사진이란, 내 일기장입니다. 사진이란, 내 사랑입니다.


 (2) 살아가는 대로 사진을 찍은 한대수 님


 사진찍기를 새로 배우려는 사람이라든지 글쓰기를 남달리 익히고파 하는 사람이든지 꽤 많습니다. 사진찍기를 배우려는 사람을 볼 때면 참 딱하구나 싶고, 글쓰기를 익히려는 사람을 볼 때에도 몹시 슬프다고 느낍니다. 사진찍기랑 글쓰기는 배울 수 없는 일인데 배우려 하니 딱하거나 슬프기도 하지만, 사진찍기하고 글쓰기를 가르치려는 사람들 또한 딱하거나 슬픕니다. 가르칠 수 없는데 가르치려 하니까 딱하면서 슬픕니다.

 사진찍기를 정 가르치려 한다면 사진기를 목에 걸거나 가방에 쑤셔넣은 다음 너른 방 한켠에서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우면 됩니다. 또는 쭐레쭐레 골목마실을 하거나 산을 타거나 들놀이를 다녀오면 됩니다. 이러다 보면 ‘가르치는 쪽이든 배우는 쪽’이든 스스럼없이 저절로 사진을 찍으며 스스로 알아차리거나 깨닫습니다. 글을 쓰는 사람이든 글을 가르치는 사람이든 똑같이 알아내거나 헤아립니다.

 수다 한 자락이 사진입니다. 마실 한 번이 글입니다.


.. 작곡을 하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이 음이다. 사람들이 내 노래를 듣고, 가사가 훌륭하다고 하지만 사실 좋은 음이 없으면 아무리 훌륭한 가사도 무의미해진다. 가사 없는 훌륭한 음악들이 많지 않은가? 클래식 심포니 대부분, 그리고 재즈와 뉴에이즈의 음악이 좋은 예다. 음이 인간의 몸매라면 가사는 옷이다. 일단 몸매가 완벽해야 무슨 옷을 입혀도 매력적이다 … 한국 사진작가들이 몽골의 저임금을 활용해 포르노 사진을 찍다 발각되어 논란을 불러일으킨 적도 있었다고 한다. 한 작가는 현재 3개월째 감금돼 있는 상태다. 나도 한국인인지라 그런 의심을 받을 뻔했다 ..  (26, 244∼245쪽)


 한대수 님은 즐겁게 노래를 불렀습니다. 먼저 즐겁게 노래를 짓고, 즐겁게 노래를 들었습니다. 즐겁게 노래를 부르던 한대수 님이지만, 한대수 님이 살던 이 나라 권력자나 공무원은 하나도 안 즐겁게 일했습니다. 아니, 이들 권력자와 공무원은 조금도 즐거웁지 않게 ‘돈·이름·힘’ 세 굴레에 얽매이거나 허덕였습니다. 즐겁게 노래부르는 한대수 님이 즐겁게 살거나 즐겁게 노래부르도록 놓아 두지 않았습니다.


.. 35년 동안의 뉴욕 생활을 생각한다면 영어 노래와 분위기의 변화는 이상한 일이 아니다. 요즘 한국에 오래 머물면서 한글 작사가 자연스레 되는데, 그것과 마찬가지다 … 가이드가 한국어로 모두 통역을 해 주면 그들은 지역 주민과 섞일 일이 전혀 없다. 그들은 커피조차도 스스로 주문해 보지 못한 채 그저 한국으로 돌아와 “노르웨이에 다녀왔노라!” 혹은 “파리에 다녀왔노라!”라고 자랑할 것이다. 물론 그들은 뭔가를 보기는 했겠지만 ‘결코 진지한 대화를 나눌 만큼의 경험은 하지 못했을 것’이다 ..  (32, 298∼299쪽)


 한대수 님은 미국으로 건너가서 사진을 찍을 때에, 사진찍기로 돈을 벌었으나 언제나 즐겁게 사진기를 쥐어들었습니다. 더 큰 돈을 벌거나 더 높은 이름을 얻을 생각으로 사진을 찍지 않았어요. 사진도 찍으며 돈도 벌었으나, 돈벌이 사진이 아니라, 삶을 즐기는 사진이었습니다.


.. 내 가족들 중 누구도 내가 무지션, 특히나 록뮤지션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클래식 음악이라면 뭐 좋다고 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들이 옳았습니다. 왜냐하면 음악은 모든 이를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지선 씨가 음악을 사랑한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가장 먼저 훌륭한 재능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인생에서 누릴 수 있는 많은 편안함을 희생하고 포기할 각오를 해야죠. 마지막으로 당연히 음악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  (44쪽)


 이야기책 《올드보이 한대수》(생각의나무,2005)를 읽습니다. 이 책은 이야기책이지 사진책이 아닙니다. 사이사이 사진을 제법 곁들였지만 사진책 아닌 이야기책에 넣을 만합니다.

 그러나 저는 《올드보이 한대수》를 이야기책이라기보다 사진책으로 읽습니다. 왜냐하면 이 책에는 ‘한대수 삶’이 고이 담겼거든요. 삶은 곧 사진이요, 사진이 다시금 삶인 까닭에, 《올드보이 한대수》를 읽으면서 사진쟁이 한대수를 만나고, 사진쟁이 한대수를 만나면서 한대수 님이 어떠한 삶으로 사진을 껴안았는가를 살핍니다.

 사진을 곁들인 책이기에 한대수 님 사진밭을 톺아볼 수 있습니다만, 사진이 따로 없더라도 한대수 님이 어떠한 사진을 즐기면서 어떠한 넋으로 어떠한 삶을 일구었는가를 넉넉히 헤아릴 수 있습니다.


.. 틀에 박힌 생활이 강요되는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가끔 해방의 느낌을 주는 탈출구가 필요하다 … 옷을 기워 10년씩 입든가 자동차를 고쳐 20년씩 사용한다면 자본주의 체제에 큰 타격을 안겨 줄 것이다. 끊임없이 새로운 모델과 새로운 유행상품이 쏟아져나오고, 그것들을 더욱 ‘쉽게’ 소비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신용카드의 역할이 절대적인 것이다 … 그때나 지금이나 몽골의 매력은 다른 어떤 나라와도 비교할 수 없는 ‘대자연’이다. 끝없는 초원의 대지, 그리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푸른 하늘,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을 추상이 아닌 실제로 체험할 수 있는 나라다 … 노르웨이의 진짜 보물은 바로 아름다운 대자연이다. 이곳의 풍경을 진지하게 감상하려면 적어도 몇 달은 잡아야 할 터!..  (146, 164∼165, 233, 289쪽)


 이른 새벽에 쌀을 씻어 불리고, 아침에 밥을 안치며, 이윽고 조기국을 끓이면서 된장국을 나란히 끓이는 가운데, 밥을 안치기 앞서 깎아 놓은 밤 열두 알을 여린 불로 삶습니다. 옆지기랑 아이는 새근새근 잠든 채 일어나지 않았고, 아빠가 조기국을 얼추 다 끓일 무렵 아이부터 일어납니다.

 바지런히 밥상을 닦고 수저를 놓습니다. 밥냄비를 옮기고 국냄비를 옮깁니다. 밥그릇마다 밥을 퍼 담고, 조기를 국에서 건집니다. 물고기 살을 발라서 아이 밥그릇에 담습니다. 밥 한 술에 고기 몇 점을 먹이고, 된장국으로 끓인 두부랑 버섯과 양파를 먹입니다.

 아침저녁으로 밥을 차리고 먹이며 치우는 데에 몇 시간이 걸리는 지 잘 모릅니다. 시간을 헤아릴 겨를이 없습니다. 식구들 밥 먹는 모습을 가끔 사진으로 담지만, 아이한테 밥을 먹이면서 사진을 찍기란 몹시 어렵습니다. 애 엄마가 밥을 먹이면 아빠가 사진을 찍을 테고, 애 아빠가 밥을 먹일 때에 애 엄마가 몸이 느긋하다면 사진을 찍어 주겠지요. 그러나 사진으로 담든 못 담든 날마다 두 차례씩 벌이는 즐거운 밥잔치입니다. 밥잔치를 한 번 치르고 나면 온몸에서 기운이 쏙 빠져나가는 듯해서 졸음이 쏟아집니다. 한 번 눈을 붙이지 않고서야 새힘을 내지 못합니다.

 설거지할 그릇을 한쪽에 수북히 쌓아 놓고는 《올드보이 한대수》를 새삼스레 다시 펼치고는 덮습니다. 쉰아홉에 아이를 낳은 한대수 님 가시버시인데, 한대수 님네 아이는 우리 아이하고 동갑이거나 한 살이 많거나 하지 싶습니다. 한대수 님도 당신 아이 무럭무럭 자라나는 모습을 사진으로 담을까요? 아마, 담겠지요? 어떤 모습으로 한대수 님 아이 삶을 사진으로 담으려나요? 《올드보이 한대수》는 아직 아이가 없던 때 이야기를 담은 책인데, 아이를 함께 키우는 삶을 하루하루 사랑하는 오늘 이야기를 새롭게 책으로 여민다면 어떠한 글과 사진으로 우리한테 즐거운 꿈을 들려줄 수 있을까요.


.. 나는 스카피타에게 컴퓨터를 이용해 디지털로 작업하면 그런 작업은 2시간이면 완성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렇게 응수했다. “그러나 내 방식대로 하면 내가 찍은 사진들이나 촬영 장소, 혹은 당시 주변에서 들렸던 소리, 또는 촬영하면서 겪었던 어려움 등 모든 경험들에 대한 이야깃거리가 생긴다 …….” ..  (191쪽)


 즐기는 삶만큼 좋은 삶은 없다고 느낍니다. 즐기는 사진만큼 좋은 사진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즐기는 운동이 가장 좋은 운동이요, 살을 빼거나 힘살을 붙이는 운동은 덧없구나 싶어요.

 한대수 님 노래를 듣고, 한대수 님 글을 읽으며, 한대수 님 사진을 보는 분들 누구나 즐거운 넋과 즐거운 꿈과 즐거운 삶을 따사롭고 넉넉히 부둥켜안는다면 참으로 기쁘겠지, 하고 조용히 생각해 봅니다. (4343.12.31.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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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동네
유동훈 글.사진 / 낮은산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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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난한 골목’을 사진으로 찍을 때
 [찾아 읽는 사진책 12] 유동훈, 《어떤 동네》(낮은산,2010)


 인천 동구 만석동에는 ‘기차길 옆 공부방’이 있습니다. 이곳에서 아이들하고 어우러지는 하루하루를 보내는 유동훈 님이 사진으로 동네 이야기를 담은 책 《어떤 동네》를 내놓았습니다. 유동훈 님은 인천 동구 만석동 가난한 아이들 삶을 바라보면서 “어떤 아이는 노동자로 성장해 조선소에서 계약직 노동자로 용접을 한다. 또 어떤 친구는 특수교사의 꿈을 꾸고, 어떤 친구는 가게의 점원으로 일을 하며 성실히 자신의 장래를 설계한다(24쪽).”고 이야기합니다. “이곳(만석동)은 볼품없고 가난한 동네. 빼앗기고 힘없고 상처 입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곳이다. 그곳에서 아이들은 더욱 약하고 여리다(20쪽).”는 이야기를 덧붙입니다.

 가난하게 살아가는 아이와 어른이 있으니 가난한 동네라 할 만하고, 이 아이들은 계약직 노동자도 되고 대학생도 되며 군인도 됩니다. 그런데 이곳 아이들과 어른들은 다른 동네하고 견주면 돈이 좀 적고 집이 좀 비좁다뿐, 한 사람이 살아가며 누릴 모든 것이 없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이 동네 아이들과 어른들한테는 사랑이 있습니다. 사랑이 있기에 ‘기차길 옆 공부방’이 태어날 수 있지, 사랑 한 줌 없는 데에 공부방이든 예배당이든 절집이든 구멍가게이든 태어나지 않습니다.

 가난하기에 도와주어야 하거나, 도와주어야 하기에 여는 공부방이 아닙니다.

 가난하다면, 돈이 적어 가난한 사람이 있다 할 테고, 마음이 텅 비어 가난한 사람이 있다 할 테지요.

 흔히들 ‘공부방’이라 하면 가난하다고 일컫는, 아니, 돈없고 힘없으며 이름없는 사람들 동네라 하는 곳 아이들을 도우려는 마음으로 엽니다. 아무래도 돈이고 힘이고 힘이고 없으니까 우리 사회 따순 손길이 적게 뻗친다 할 만하고, 의료 혜택이나 교육 혜택을 덜 받는데다가, 아이들 어버이는 돈벌러 집을 오래 비울 테니 아이들이 심심하거나 걱정스럽다 할 만합니다. 그러면, 돈 잘 버는 동네 아이들은 어버이하고 오래오래 따숩게 보내려나요. 서울 강아랫마을 아이들은 제 어버이랑 얼마나 오랜 나날 오랜 동안을 보내려나요. 이 마을 아이들은 제 또래나 손위나 손아래 동무하고 얼마나 어울리려나요.

 어버이 되는 어른들은 아이를 낳았으니 아이하고 더 오래도록 어울리면서 아이들 가르치는 몫을 도맡아야 한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이를 낳은 어버이 되는 어른들이 바깥에서 돈을 더 벌어들여야 아이들을 한결 잘 키울 수 있다거나, 아이들을 여러 학원이나 학교에 넣는다고 아이들이 더욱 씩씩하고 슬기롭게 자란다고는 느끼지 않습니다.

 아이들이 땅바닥에 손가락이나 돌멩이로 죽죽 금이나 동그라미를 그리며 하루를 보낸다 해서 심심하기만 하거나 딱해 보인다고는 느끼지 않습니다. 학교를 열어 꾸리는 삶도 좋으나, 학교 없이 꾸리는 삶 또한 좋습니다. 지내는 사람 스스로 어떠한 삶인가에 따라 즐거운지 안 즐거운지가 갈립니다. 살아가는 사람 스스로 어떠한 넋인가에 따라 아름다운지 안 아름다운지가 나뉩니다. 공부방은 틀림없이 좋은 쉼터일 테고, 뒷간 없는 비좁은 집 자그마한 방 또한 훌륭한 쉼터입니다. 예배당은 어김없이 너그러운 만남터일 테며, 햇볕 반 토막 곱다시 깃드는 비좁은 골목 한켠 또한 재미난 만남터입니다.

 가난함이든 가멸참이든 죄악도 아니요 빛줄기도 아닙니다. 가난한 삶이 구지레할 수 없고, 가멸찬 삶이 지저분할 수 없습니다. 골목집을 어둡거나 사라져 가는 모습으로 깎아내릴 까닭 없고, 아파트를 밝거나 새로운 모습으로 추켜세울 까닭 없습니다. 골목집을 살가웁거나 더 따스한 추억으로 돌아볼 까닭 없고, 아파트를 차디차거나 무시무시한 돈벌레로 내리깎을 까닭 없습니다. 있는 그대로 맞아들이면서 오붓하게 손을 잡을 때에 즐겁습니다. 마을솥을 걸어도 좋으나, 전기밥솥을 써도 좋습니다. 너른터에서 줄넘기를 해도 좋고, 좁은터에서 공기놀이를 해도 좋습니다. 살아가는 이야기를 글이나 그림이나 사진으로 담아도 좋지만, 살아가는 이야기를 그저 입으로만 읊으며 그날그날 잊고 다시 떠들고 또 잊으며 새삼 주워섬겨도 좋습니다.

 《어떤 동네》를 내놓은 유동훈 님은 말합니다. “미술가들이 가난한 동네의 벽과 집을 꾸민다며 그림 작업하는 것을 보게 되는 경우가 있다. 생활과 예술을 결합한다는 의도에 수긍 가는 면도 없지 않지만 골목을 지나다 보게 되는 숨겨진 동네 예술가들의 작품을 보면 이벤트로 진행되는 전문 예술가들의 그 작업이 동네를 아름답게 꾸민다는 것이 가당키나 한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109쪽).”고. 참으로 맞는 말씀입니다. 미술가이든 예술가이든 제아무리 좋다는 뜻을 내세운달지라도 골목동네 살림집 벽에 그림을 죽죽 그리는 일은 하나도 아름답지 않으며, 조금도 훌륭하지 않고, 터럭만큼도 멋스럽지 않습니다. 그림쟁이들이 할 일은 살림집 벽에 섣불리 페인트를 발라대는 일이 아닙니다. 그림쟁이들은 동네를 건성건성 구경하듯 지나친다면, ‘구경꾼으로 지나친다’고 해서 반드시 나쁜 눈길이 아니기 때문에, 구경꾼 눈길로 지나치는 동안 바라보며 느낀 ‘좋은 삶’을 당신들 붓끝으로 좋게 담아서 즐기면 됩니다. 예술쟁이들은 동네에 뿌리내릴 방 하나 얻어 지낸다면, ‘한동네에서 함께 살아간다’고 해서 꼭 좋은 이웃이 되지는 않기 때문에, 한 동네 사람으로 살아내는 동안 마주하며 느낀 ‘좋은 삶’을 당신들 몸짓으로 좋게 실어서 즐기면 됩니다.

 이름을 남기려는 삶이 아닌 사람들을 마주하면서 내 이름이 남을 만한 일을 한다면 미술도 예술도 사진도 창작도 교육도 사회운동도 봉사활동도 아닙니다. 손이 시려 죽을 판인데도 그물을 꿰매고 굴을 까는 삶을 꾸리며 하루하루 밥벌이를 해 온 이들을 가만히 보자면, 참 고단하거나 괴롭거나 슬퍼 보일 만합니다. 매캐한 공장 연기를 잔뜩 들이마시면서 공동뒷간에서 한참 줄을 서야 하는 삶이란 더없이 팍팍하거나 메마르다 할 만합니다.

 그러나,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가난한 삶을 왜 ‘가난’이라는 굴레로 옥죄며 바라보아야 하는가를 잘 모르겠습니다. 제 어린 나날 살림살이가 제 동무보다 나았는지 모자랐는지 알 노릇이 없습니다. 그저, 우리 어버이 살림살이는 이웃보다 나았다면 나았고, 모자랐다면 모자랐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런저런 느낌을 하나도 모릅니다. 살림살이가 나았더라도 어릴 적부터 아버지하고 말을 섞은 일은 거의 없습니다. 살림살이가 나았달지라도 어머니는 하루 내내 집안일뿐 아니라 할아버지 병수발에다가 부업에 바빴습니다. 제 동무들 집에 놀러가 보면, 동무들 어머님은 우리 어머니처럼 언제나 부업을 하셨고, 집안일이든 집안 어르신 병수발이든 바쁘셨습니다. 누구네 아버지가 한 달 일삯을 몇 만 원 더 번다고 더 잘난 살림이 아니지만, 누구네는 아버지 없이 어머니 혼자 일해서 한 달 살림돈이 몇 만 원 더 적다고 더 못난 살림이 아닙니다. 없으면 없는 대로 이웃한테서 얻습니다. 있으면 있는 대로 이웃한테 나눕니다. 곗돈이라는 이름으로 돈이 돌기도 하지만, 무슨 성금이다 무슨 회비(육성회비 따위)다 하며 돈을 갖다 바쳐야 할 때면 으레 집집마다 돈 빌러 다니느라 바빴습니다. 한 집에서 빌린 돈이 또 다른 집으로 빌려지는 일이 잦고, 반찬통이나 접시에 고작 김치나 지짐이 몇 점 담았을 뿐인데 여러 집을 쉬 돌 뿐 아니라, 아이들 옷은 푸름이 나이가 되어도 온갖 집을 거치곤 합니다. 어느 집 어린이이든 두어 집이건 서너 집을 거친 옷을 입기 마련입니다. ‘내 옷’이 아니라 ‘함께 입는 옷’입니다. 딱히 어느 단체나 시설이나 동회나 관청에서 도와주러 온 일이 없으나, 애써 도와주라 바란 적이 없습니다. 쪼물딱쪼물딱 쪼그랑뱅이 사람들끼리 쪼물쪼물하면서 살아왔습니다. 그림쟁이라 하든 예술쟁이라 하든, 벽그림 그리기가 내키지 않는 까닭은 이런 데에서 비롯합니다. 뭣보다 삶이 없는 한편, 하나도 안 예쁘거든요. 그나마 예쁘게라도 그리면 낫지요. 예쁘게 그릴 줄 모르면서 페인트 찍찍 발라 봤자 한두 해쯤 되면 빛이 바래고 너덜너덜해지며 더 볼썽사납습니다.

 사진책 《어떤 동네》를 생각해 봅니다. 책겉을 아로새기는 사진부터 내 마음을 건드리지 못합니다. 왜 아이들을 벽에 세워 놓고 사진을 찍어야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냥저냥 수수하거나 투박하게 살아가거나 해바라기를 하거나 꾸벅꾸벅 졸거나 하는 모습을 조용히 사진으로 담아도 넉넉할 텐데요.

 이 사진책 《어떤 동네》란 ‘기차길 옆 공부방’ 아이들을 담은 사진책인지요? 사진을 찍은 유동훈 님은 당신 소개글에든 책 몸글에든, 이 사진책에 실린 아이들이 ‘공부방 아이들’인지 아닌지를 또렷하게 밝히지 않으나, 거의 모든 아이들은 공부방 아이들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해맑게 웃는다든지 수수한 낯빛으로 가만히 담벼락에 기댄다든지 하는 사진들을 보면, 아이들이 공부방에서 배우거나 놀거나 살아내는 모습을 소담스럽거나 조촐하거나 꾸밈없이 담아내지 못했습니다(유동훈 님은 공부방에서 아이들과 함께 지내는 분입니다). ‘가난한 동네 아이들이지만 활짝 웃는다’는 느낌은 있습니다. 그러면, 이 아이들이 뒤로 하는 모습을, 아이들 뒷자리 살림집이 골목동네가 아닌 아파트라면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 사진책이 되려나요. 이 아이들 얼굴빛하고 살림집과 골목과 동네는 이 사진책에서 얼마나 살갑거나 알뜰히 어우러지려나요.

 가난한 동네 공부방 아이들을 담은 사진을 그러모았다고 해서 일부러 ‘뒷모습이 될 동네 삶자리’가 꾀죄죄해 보이거나 어두워 보여야 할 까닭이란 없습니다. 어두운 가운데에서도 밝게 살아간다는 뜻으로 아이들이 활짝 웃는 모습을 사진으로 담을 까닭 또한 없습니다.

 《어떤 동네》라는 사진책을 처음부터 ‘공부방 아이들을 담은 사진책’이라고 또렷이 밝히면서 ‘공부방 아이들과 보낸 나날’이라는 이름을 붙였다면 또다른 이야기를 길어올릴 수 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너무 뻔한데다가 틀에 박히게 찍는) 맑게 웃는 얼굴을 담는 사진에 그치지 말고, 맑게 웃는 얼굴이 살아가는 동네 모습을 꾸밈없이 보여줄 수 있는 사진으로 거듭나야 비로소 공부방이든 만석동이든 골목동네이든 가난한 동네이든, 더 낫거나 덜 떨어지거나 한 삶이 아니라, 서로 사랑스러우며 살가운 이웃을 보듬을 이야기가 피어나는 삶터로구나 하고 느끼도록 나아가는 사진으로 자리잡을 수 있습니다.

 어떤 동네는 수수한 동네이고, 어떤 동네는 흔한 동네이며, 어떤 동네는 여느 동네입니다. 가난하다고 나쁜 삶이 아니요, 가난하다고 즐겁지 않은 삶이 아닙니다. 아픈 사람이기에 늘 괴롭거나 고단한 나날이 아닙니다. 안 아픈 사람들은 언제나 즐겁거나 신나는 나날이 아닙니다.

 제가 인천에서 태어나고 자랐기 때문에 이렇게 말하지는 않습니다. 제가 태어난 곳은 도화1동 624번지이고, 주안1동과 주안2동을 거쳐 신흥동3가에서 살았기에 이런 말을 할 수 있지는 않습니다. 제 동무나 다른 살붙이들이 용현1·2·3동이나 숭의1·2·3·4동이나 선화동이나 신흥동1가·2가·3가, 율목동, 도원동, 송월동3가, 만석동에 살았거나 살기에 이처럼 말하지는 않습니다. 혼인을 하고 아이를 낳아 이웃한 어른들이 창영동, 금곡동, 송림1·2·3동, 송현1·2동, 내동, 경동, 화평동, 화수1동에 산다고 이처럼 말할 까닭은 없습니다. 다만, 가난하면 가난하다뿐입니다. 집이 좀 낡았으면 낡았다뿐입니다. 가난한 이웃들한테서 사랑을 느끼면 사랑을 느끼는 대로 반가우며 즐겁습니다. 집이 좀 낡았으면 낡은 대로 살 만하며 재미나고 구수한 보금자리입니다.

 ‘콘트라스트를 강렬하게’ 한다든지 ‘흑백으로 찍는다’든지 ‘밤에 작은 등불에 기댄 모습을 담는다’든지 ‘입자를 거칠게 한다’든지 해야 골목동네 모습이 아니요, 가난한 골목동네 삶자락이 아닙니다.

 《괭이부리말 아이들》이라는 동화책이 나왔을 적에 ‘가난한 동네 사람들 삶이라 해서 늘 꾀죄죄하거나 못날 까닭이 없는데, 그예 이렇게 못박아 버린다는 느낌’ 때문에 적잖이 못마땅했지만, 책장을 넘길 때에는 두근두근했습니다. ‘사람들이 사람을 바라볼 때에 가난이라는 굴레가 아닌 삶이라는 아름다움을 바라본다’면 《괭이부리말 아이들》이건 다른 이야기책이건 사뭇 다른 틀로 거듭날 텐데, 이렇게 되기는 참 힘든 듯합니다. 그래도 내 동무가 살아가고 내 동무와 즐겁게 돌아다니며 노는 동네 이야기가 어린이책 무대로 나타난 대목은 반가웠습니다. 만석동에서 태어나 살아가는 내 동무와 동무네 누나와 동무네 어머님과 동무네 아버님 삶을 어디에서 엿볼 수 있을까 하면서 조마조마했습니다. 동화책을 다 읽고 나서 갑갑하며 답답한 마음을 억누르지 못했지만, 만석동 동무한테 책을 한 질(1·2권) 사다 주었습니다. 동무네 식구들이 돌려가며 읽었다지만, 읽었다뿐, 책이야기는 나누지 않았습니다. 아니, 책이야기를 나누지 못했습니다. 나눌 만한 이야기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글감(소재)’은 그리 크게 돌아볼 대목이 아닙니다. ‘글감’이 아니라 사람들이 어우러지는 이야기가 무엇인가를 크게 돌아볼 노릇입니다. ‘사진감’ 또한 그다지 크게 돌아볼 만하지 않습니다. 무엇을 찍든 매한가지입니다. 인천 만석동을 찍든 서울 상계동을 찍든 똑같습니다. 가난한 동네 아이들을 찍든 부잣집 아이들을 찍든 다를 바 없습니다.

 아픈 사람은 ‘가난하다는 동네’ 만석동에서도 아프지만 ‘새로 지은 큰 아파트들 가득하다는 동네’ 연수동에서도 아픕니다. 슬픈 아이들은 만석동하고 이웃한 북성동이나 화수동에서도 슬프지만, 연수동하고 맞닿은 선학동이나 관교동에서도 슬프겠지요. 아픔을 다루거나 슬픔을 다룬다고 해서 더 빛날 문학이 아닙니다. 가난을 담는다 해서 다큐사진이 되거나 ‘사진이 되지’ 않아요.

 세바스티앙 살가도 님이 가난한 사람들이나 아픈 사람들을 담은 사진을 내놓았지만, 막상 당신 사진을 읽을 때에 ‘아, 가난한 사람이구나!’라든지 ‘아, 아픈 사람이구나!’라고 느끼기는 어렵습니다. 그냥 ‘아, 사람이구나!’라고만 느낍니다. 사람이구나 하고 느끼면서, 이 사람들마다 다 달리 꾸리는 삶과 이야기를 느낍니다.

 사진책 《어떤 동네》는 나라안에서 ‘가장 가난하다’는 이름이 높다는 인천 동구 만석동 한켠 모습을 사진으로 담아내어 보여준다는 대목에서는 놀랍다고 여길 만합니다. 그렇지만, 놀랍다고 여길 만한 대목 하나로 내보이는 사진책이라면 쓸쓸합니다. 사랑을 나누고 믿음을 나누는 사진책으로 거듭난다면 더 반가울 텐데요. 사랑을 얻고 믿음을 보낼 사진책으로 태어난다면 참말 기쁠 텐데요.

 사진을 찍은 분은 인천 만석동에서 좋은 넋과 마음으로 좋은 공부방을 아기자기하게 꾸리는 줄 압니다. 그러면, 이곳에서 담는 사진 또한 ‘좋은 넋과 마음으로 담는 좋은 사진’이기만 하면 됩니다. 굳이 ‘가난한 동네를 더 가난하게’ 보이도록 한다든지, ‘가난한 동네니까 더 눈여겨보거나 사랑해야 한다’는 느낌이 들도록 사진을 찍을 일이 아닙니다.

 가난하건 가난하지 않건 모두 사랑스러운 이웃입니다. 내 집이 있건 삯집에서 얹혀 지내건 따스한 동무입니다.

 가난하다는 동네 골목 한켠 시멘트 틈을 뚫고 꽃 한 송이 피어납니다. 흙 한 줌 없는 시멘트 골목바닥인데, 골목이웃이 꽃그릇 조촐히 마련해서 꽃밭과 텃밭을 일굽니다.

 구멍가게 작은 평상에서든, 볕바른 골목 한켠 돗자리에서든, 할매와 할배가 모여 이야기꽃을 나누는 모습이란 굳이 사진으로 담지 않아도 어여쁩니다. 굳이 사진으로 담아서 보여줄 모습이란 나부터 아름답게 살아가는 하루요, 나와 내 이웃이 아름다이 웃는 얼굴이요, 나 스스로 디딘(동네 살림꾼으로든 지나치는 구경꾼으로든) 이 마을 이 터전에서 아름다이 피어나는 풀과 꽃과 나무입니다. (4343.12.18.흙.ㅎㄲㅅㄱ)


― 어떤 동네 (유동훈 사진·글,낮은산 펴냄,2010.11.30./13000원)
 

 

 

......  

(만석동 사진을 몇 장 붙여 본다. 책에는 이런 사진이 안 실린다. 내가 찍은 사진들이다. 만석동 동무를 만나러 오가던 길에 담은 사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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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2-20 16: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숲노래 2010-12-21 11:17   좋아요 0 | URL
아... 저는 맞춤법이랑 띄어쓰기를 좋아하지 않아요 ^^;;;
우리가 살아가는 결에 맞추어 알맞게 새말을 잘 지어서 쓰면 되리라 생각하거든요.

jooferry 님 말마따나, 저는 이분이 예전부터 하던 활동과 성과를 익히 알고 있지만, 이번에도 어쩔 수 없이 예전과 다를 바 없는 '가난한 동네를 돕는 이름'을 너무 앞세운 나머지, 동네사람 수수한 아름다움하고 자꾸 멀어지기만 했어요.

참 슬프답니다. 그래서 일부러, 제가 이 동네에서 살아가는 동무를 만나러 오가던 길에 찍은 사진을 주루룩 걸쳐 놓았답니다.... ㅠ.ㅜ

댓글 고맙게 잘 읽었습니다~
 
산골분교운동회 - 강재훈의 두 번째 분교 이야기
강재훈 지음 / 가각본 / 2006년 5월
평점 :
품절




 맑은 날 큰잔치 사진이 너무 어둡다
 [찾아 읽는 사진책 11] 강재훈, 《산골분교운동회》(가각본,2006)



 ‘좋은 책’을 읽는다고 ‘좋은 사람’이 되지는 않아요. 좋은 책 ‘읽기’만으로는 좋은 사람 ‘되기’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좋은 책을 읽으면서 내 삶을 좋은 삶으로 일굴 때에 하루하루 천천히 좋은 사람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좋은 사진책을 많이 읽는다고 ‘좋은 사진 읽는 눈’을 기를 수 있지 않으며, 좋은 사진책을 많이 보았기에 ‘좋은 사진 찍는 손’을 다스릴 수 있지 않습니다. 좋은 사진책을 가까이하는 삶도 아름답기는 하지만, 좋은 사진책 ‘읽기’에 머물지 않아야 비로소 좋은 사진 ‘찍기’와 ‘헤아리기’로 이어집니다. 좋은 사진책을 읽으며 받아들인 사랑을 내 가슴 활짝 열어젖히면서 넉넉히 담으며 곰삭이는 가운데 차근차근 두루 나눌 때에 바야흐로 좋은 사진 ‘찍기’란 무엇이며 좋은 사진 ‘헤아리기’란 어떠한가를 깨달아요. 좋은 책 좋은 삶 좋은 사진이에요. 좋은 책에서 곧바로 좋은 사진으로 이어지지 않는답니다.

 사진책 《산골분교운동회》를 읽습니다. 《분교, 들꽃 피는 학교》(학고재,1998)에 이어 여덟 해 만에 선보이는 사랑스러운 사진책이라 할 만한 《산골분교운동회》를 읽습니다. 사진책은 2006년에 진작 나왔으나 지난 네 해 동안 이 사진책을 따로 찾아 읽지 않다가, 네 해 만에 비로소 장만하여 한 장 두 장 넘깁니다. 첫 사진책 《분교, 들꽃 피는 학교》가 태어났을 때에는 떨리는 손길과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곧장 사진잔치 자리로 달음박질해서 포스터랑 책이랑 기쁘게 장만했습니다만, 여덟 해 만에 둘째로 태어난 《산골분교운동회》에는 선뜻 눈길하고 손길이 가 닿지 못했습니다. 첫째 사진책에는 “들꽃 피는 학교”라는 이름이 붙었으나, 둘째 사진책에는 딱히 다른 이름이 안 붙고 “강재훈의 두 번째 분교 이야기”라는 이름이 붙었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들꽃 피는 학교” 사진책은 겉그림부터 마음을 부드러이 사로잡았습니다만, “강재훈의 두 번째 분교 이야기” 사진책은 겉그림부터 썩 달갑지 않았습니다. 강재훈 님이 힘들게 다리품을 들이며 찾아다닌 산골 분교나 시골 분교 운동회 자리는 언제나 ‘맑고 따뜻하며 보드라운 햇살과 바람과 하늘과 구름과 흙’을 바탕으로 햇살사람과 바람사람과 하늘사람과 구름사람과 흙사람이 어우러졌는데, 막상 이 사람들 삶내를 꾸밈없이 펼쳐 보이는 데에서는 그만 어긋났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아, 이 맑은 날 큰잔치 사진이 왜 이렇게도 어둡게 나와야 했을까요. 《분교, 들꽃 피는 학교》는 흑백사진이면서 빛그림이 곱게 살았는데, 《산골분교운동회》는 왜 굳이 흑백사진으로 이야기를 엮으려 했을까요. 흑백사진으로도 얼마든지 다큐사진을 할 만할 뿐 아니라, 즐겁고 신나는 분교 운동회 삶자락을 담을 수 있습니다. 흑백사진이기에 더 차분하면서 애틋한 느낌을 살포시 실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흑백사진이면서 밝은 자리와 그늘진 자리를 섣불리 가르면 안 좋아요. 하나도 어둡지 않은 ‘산골분교운동회’인데, 너무 어두운 사진이 되고 말았어요. 아이들이나 어른들 숫자가 많건 적건, 운동회 잔치날 모두 살가이 얼크러지면서 하하호호 낄낄깔깔 히히흐흐 웃고 자지러지는데, 이 웃음을 웃음 그대로 담아내지 못했구나 싶어요.

 사진은 틀림없이 ‘기록’을 하는 예술이자 문화이지만, ‘기록만 하는’ 보도매체는 아니에요. 강재훈 님으로서는 당신이 몸담은 신문사에서 기자살이를 하느라 겨를을 내기 빠듯해 더 많은 곳을 더 바지런히 못 다니는 바람에 아쉽다고 느낄 만하지만, 산골분교운동회란 100군데 학교 100군데 운동회 자리 모습을 골고루 담아야 사진책 하나로 마무리되지 않아요.

 강재훈 님, 아시지요? 누구보다 강재훈 님 스스로 잘 아시지요? 강원도 인제군 기린면 기린초등학교 진동분교장 한 곳 운동회 잔치날 사진을 꼭 한 해치만 찍었어도 얼마든지 사진책 하나가 태어나요. 경기도 가평군 북면 목동초등학교 명지분교장 한 곳 운동회 놀이터 사진을 꼭 하루치만 담았어도 너끈히 사진책 여러 권 태어나요.

 두어 군데 산골분교 운동회를 해마다 꾸준히 찾아가면서, 해마다 새삼스러운 삶자락과 놀이자락과 이야기자락을 길어올리면 흐뭇해요.

 《산골분교운동회》는 모두 179쪽이더군요. 강재훈 님이 더 잘 알리라 생각하는데, 이 사진이야기는 꼭 100쪽으로도 살가이 엮을 만합니다. 이 사진이야기는 500쪽이나 1000쪽으로 시원스레 여밀 만합니다. 50쪽짜리 조그마한 사진책을 네 권이나 다섯 권으로 나눌 수 있어요. 산골분교 한 곳마다 따로따로 한 권씩 내놓아도 참 좋습니다. 아니, 강재훈 님으로서는 당신이 찾아다닌 산골분교 사진이야기를 저마다 다른 빛깔과 무늬와 목소리와 살결로 아리땁게 내놓으려는 매무새여야 한다고 느껴요. 이러한 매무새를 바탕으로 《산골분교운동회》는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느껴요.

 흑백은 흑백대로 아름다운 사진이지만, 빛깔은 빛깔대로 어여쁜 사진이에요. 흑백은 흑백대로 차분히 이야기를 펼치는데, 빛깔 또한 빛깔대로 고즈넉히 이야기를 나누어요. 흑백이냐 빛깔이냐에 앞서 ‘삶’과 ‘사랑’과 ‘사람’입니다.

 아름다운 사람들 품과 품앗이와 품새를 따뜻하게 어루만지고픈 넋을 예쁘게 보여주는 《분교, 들꽃 피는 학교》를 내놓은 강재훈 님이었기에, 둘째 이야기는 “작은 운동회, 맑은 하늘 업은 학교”로 선보였어야 한결 사랑스러웠으리라 느낍니다. 운동장을 힘차게 달리는 아이들 사진으로도 운동회 모습이지만, 이번 사진책에서는 놓친 대목이 퍽 많을 뿐더러, 운동회라 할 때에, 또 산골분교 운동회라 할 때에, 어떠한 운동회이고 어떠한 빛깔이며 어떠한 숨결인 가운데 어떠한 어깨동무인가 하는 대목에서 무척 흐릿흐릿합니다.

 사진은 서둘러 찍을 수 없는 문화임을 다시금 헤아려 주셔요. 사진은 섣불리 담을 수 없는 예술임을 새삼스레 깨달아 주셔요. 사진은 나 스스로 사랑하는 사람하고 막걸리잔을 부딪히든 손을 맞잡든 부둥켜안든 말없는 웃음꽃 주고받든 하는 삶임을 천천히 곱씹어 주셔요.

 한 해에 한 번 얼굴 마주하더라도 반가운 이웃이라면, 한 해에 한 번 마주하며 담은 필름 한두 통으로 사진이야기 엮어 주셔요. 열 해에 한 번 가까스로 마주하더라며 고마운 벗님이라면, 열 해에 한 번 마주하며 얻은 필름 몇 통으로 사진이야기 갈무리해 주셔요.

 바쁘게 다니지는 말아 주셔요. 힘들게 찾아다니지는 말아 주셔요. 좋은 이웃을 만나러 기쁘게 마실하면서 사진으로 만나 주셔요. 따스한 동무랑 살가운 아이들하고 웃고 떠들려는 착한 마음밭을 건사하면서 사진으로 징검돌을 놓아 주셔요.

 강재훈 님 셋째 사진이야기는 산골 분교나 시골 분교에서 싱그러운 눈물과 해맑은 웃음을 골고루 부둥켜안는 빛살 고운 삶이야기가 되도록 곁을 내주셔요. 산골 분교나 시골 분교 어른과 아이는 강재훈 님한테 넉넉히 곁을 내주었는데, 강재훈 님은 외려 곁을 잃어버린 《산골분교운동회》가 되고 말았어요. 슬픕니다.


.. 신문사의 기자생활을 하면서 산골 분교 운동회를 찾아다니기는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주어진 시간의 부자유, 그 이유로 사진 작업이 서울에서 가까운 경기도와 강원도에 국한된 것이 좀 안타까운 부분이다. 하지만 무작정 시간을 탓할 수만은 없는 일. 올해 못 가면 다음해 가면 된다는 각오로 시간과 기회가 닿을 때마다 산골 분교로 달려갔다. 가는 길이 멀면 밤새 달려 새벽에 도착했고 돌아오는 길이 멀면 아예 새벽길을 달려 서울로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한 번 인연을 맺은 분교들을 몇 해 거듭해 찾아가니 자연히 아이들은 물론 지역 주민들과도 친해졌다. 사진을 찍다 말고 손님 찾아 달리기에 호명되어 아이들과 함께 뛰기도 하고, 부모가 오지 못한 아이가 있을 때는 대신 그 아이의 부모가 되어 발 묶고 달리기도 해야 했다. 내가 하려고 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먼저 나를 포함시킨 채 운동회를 진행하는 것이었다. 산골 분교 운동회는 그렇게 한 사람이라도 더 함께 하기를 말없이 원하고 있었으며, 부르지 않았어도 찾아온 사람에게는 이웃처럼 반갑게 곁을 내주었다 ..  (107쪽)


 이런 이야기는 더 읽고 싶지 않습니다. 따로 이처럼 글로 적어 놓지 않았어도, 사진만 읽으면서도 너무 슬펐습니다. 너무 바쁘게 일하며 다니시는 나머지 무엇을 사랑하고 아끼며 보살폈는지, 또 누구한테서 사랑을 받고 아낌을 받으며 보살핌을 받았는지를 잊어버리셨네요. (4343.12.10.쇠.ㅎㄲㅅㄱ)


― 산골분교운동회 (강재훈 사진,가각본 펴냄,2006.5.25./2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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