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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술을 열면 ㅣ 창비시선 418
김현 지음 / 창비 / 2018년 2월
평점 :
시를 노래하는 말 328
입술을 열어 어떤 말을 하는가
― 입술을 열면
김현
창비, 2018.2.10.
뱃살이 늘어간다
그걸 평화라고 부를 수 있겠지
뱃살의 평화 (빛의 뱃살/30쪽)
아침에 일어난 아이들이 “아버지, 잘 주무셨어요?” 하고 입술을 엽니다. 저도 아이들을 바라보며 “그래, 즐겁게 꿈을 꾸었니?” 하고 입술을 엽니다.
말을 하려면 입술을 엽니다. 입술을 열지 않고서는 말을 하지 못합니다. 입술을 달싹이지 않고 속으로 꿍얼거리면 알아듣기 어렵습니다. 제대로 생각을 나누어 말을 섞자면 입술을 제대로 열어야 합니다.
그게 어느새 / 늙어버린 우리 얼굴 // 견딜 수 없는 / 얼굴을 사이에 두고 // 우리는 우리를 본다 / 우리는 다 알겠다는 표정으로 (조선마음 11/51쪽)
입술은 곱게 열 수 있습니다. 곱게 여는 입술로 곱게 이야기꽃을 피웁니다. 입술은 밉게 열 수 있겠지요. 밉게 여는 입술로 밉게 가시 돋힌 이야기를 퍼부울 수 있어요.
겉보기로는 입술을 여는 똑같은 모습일 테지만, 우리 마음에 따라서 말씨가 사뭇 다릅니다. 서로 즐거운 입술짓이 될 수 있으나, 서로 지치거나 싫은 입술질이 될 수 있어요.
물은 딱딱한 돌 / 한번에 여러번 죽어간 인간들을 보면 알 수 있지 // 보릿자루를 풀었다 / 묶었다가 // 하루아침에 생명을 다 썼다 (무서운 꿈/122쪽)
김현 님 시집을 읽습니다. 마치 영화처럼 꾸미고 싶었다는 《입술을 열면》(김현, 창비, 2018)입니다. 시마다 글이름에 어깨무늬를 달고서 끝자락에 덧말을 붙여요. 시는 시대로 이야기를 풀어내고, 덧말에는 덧말대로 이야기를 풀어냅니다. 시 한 꼭지마다 두 가지 이야기를 섞는다고 할 만합니다.
우리는 시 한 꼭지에 달리는 두 가지 이야기를 나란히 읽어도 되고, 하나만 읽어도 됩니다. 둘을 함께 살펴도 좋고, 하나만 살펴도 좋습니다. 시를 쓴 분은 우리가 영화를 보며 저마다 좋아하는 흐름을 살피거나 좇듯, 시를 읽을 적에도 ‘시를 쓴 마음을 읽’되 ‘시를 읽는 우리 스스로 어떤 마음인가를 새롭게 헤아리며 읽’기를 바라는구나 싶습니다.
귀에 대고 말을 하면 / 말은 귀에 담긴다 // 내 입술이 / 네 귀와 가까워지려는 말 (귓속말/166쪽)
새로운 틀을 세우고 싶은 마음이 가득한 시가 흐르는 《입술을 열면》을 읽으면서 때때로 놀라기도 합니다. 시인은 살섞기하고 얽힌 낱말을 갑자기 거침없이 풀어놓기도 하거든요. 그러고 보면, 김현 시인은 이 시집하고 《질문 있습니다》라는 산문책을 나란히 내놓았습니다. 김현 시인이 쓴 산문책은 ‘문단 성폭력’을 비롯한, 우리 사회 한켠에 꽁꽁 감춰진 이야기를 낱낱이 풀어내는 책이라지요. 시인이라는 자리에 앞서 평등하고 인권을 살피고픈 활동가로 지켜보고 맞닥뜨린 아픔이랑 생채기를 고스란히 드러내는 책이라 하고요.
산문책에서는 이 땅 한켠에서 아프거나 괴로운 이웃이 얼마나 아프거나 괴로운가를 줄줄이 풀어내는 글로 들려준다면, 시집에서는 이러한 이야기를 여러 눈으로 바라보자는 뜻을 어깨무늬+덧말로 그린다고 할 만합니다.
아이는 일요일 아침을 세계화하는 데
쓴다
그림일기는
꼬맹이들의 몫
아이의 왼쪽 팔 옆에는 딸기스무디가
엄마와 형이 있고
아이는 영양가 있는 세계라는 말을
배워서 곧이곧대로 사용한다
어른들은 영양가라는 말에 사족을 못 쓴다 (일요일 아침 태현이는/135쪽)
김현 시인이 들려주는 시는 꽤 어렵다고 할 만합니다. 그런데 이 어려움이란 글재주를 부려서 어렵다기보다는 우리 사회가 ‘일요일 아침 태현이’가 겪는 하루처럼 입시·대학·점수·돈·취업 같은 데에 얽매여 아이들을 다그치는 몸짓에서 비롯했다고 할 만하지 싶어요.
아이들은 어른이 쓰는 말을 고스란히 받아들여서 씁니다. 아이들은 어른이 보는 새소식을 같이 지켜보며 방송이나 신문에 흐르는 말을 하나하나 받아들여서 씁니다. 아이들은 시사상식을 살펴서 받아들이고, 사회비평을 하며 논술을 하는 훈련을 학교나 학원에서 해요. 아이들 입에서 ‘세계화·영양가 있는 세계’ 같은 말마디가 아무렇지 않게 흐른다고 할 수 있어요.
우리는 입술을 어떻게 열어야 즐거울까요? 우리는 입술을 언제 어떻게 열어야 아름다울까요? 우리는 입술을 언제 어떻게 왜 열면서 어떤 말로 이야기를 지펴야 서로 어깨동무를 할 수 있을까요? 입술을 열기 앞서 마음을 열고, 마음을 열면서 생각을 열며, 입술·마음·생각을 열며 사랑도 함께 열 줄 아는 어른으로 살 노릇이라고 느낍니다. 2018.3.9.쇠.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시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