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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수는 내가 살게 ㅣ 삶창시선 46
김정원 지음 / 삶창(삶이보이는창) / 2016년 9월
평점 :
품절
시를 노래하는 말 271
요로케 알기 옹삭한 것이 시다냐?
― 국수는 내가 살게
김정원 글
삶창 펴냄, 2016.9.5. 8000원
교사로 일하는 김정원 님이 쓴 시집 《국수는 내가 살게》(삶창,2016)를 읽습니다. 교사로 일하기 때문에 대학교를 코앞에 놓고 시험공부를 해야 하는 아이들을 마주합니다. 앞날이 까마득하다고 여기는 아이들 마음을 달래야 하고, 아이들 마음을 달래다가 김정원 님 스스로 예전에 이녁이 아이로 살던 나날을 돌아봅니다. 그리고 이러한 삶과 이야기를 고스란히 시 한 줄로 옮깁니다.
허기진 길손이라도 불쑥 찾아올까봐 / 저녁마다 초가 아랫목 솜이불 밑에 / 따뜻한 밥 한 그릇 묻어두시던 어머니 (까치밥)
우리 마을 / 큰 느티나무가 쓰러졌다 / 그 아래서 그의 이야기에 / 아이들이 당나귀, 노루귀 같은 / 귀를 쫑긋쫑긋 세우고 / 밤낮으로 푹 빠졌던 / 도서관이 불탔다 (정자나무)
정자나무 한 그루가 쓰러진 모습을 보고 난 뒤 시를 쓸 수 있던 모습을 되새깁니다. 시인 스스로 정자나무 한 그루를 ‘그냥 나무’가 아닌 ‘어릴 적 이야기가 깃든 터전’으로 삼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이렇게 시로 옮길 수 있을 테지요. 정자나무 한 그루는 ‘그냥 나무’를 넘어서 ‘도서관’으로 여길 수 있는 마음이 있기에, 시린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시를 쓸 수 있을 테지요.
9월 수능 모의고사가 끝나고 / 목구멍에 걸린 가시처럼 / 진로 고민을 삼키지 못해 속 앓는 아이와 / 속 풀기 위해 영산강 상류 뚝방에 올라 / 담양 진우네 국숫집에서 / 얼얼한 비빔국수를 시켜 먹는다 (국수는 내가 살게)
수많은 아이들이 대입을 앞둔 모의고사를 치르면서 “진로 고민을 삼키지” 못한다고 합니다. 점수가 잘 나오면 잘 나오는 대로 걱정이요, 점수가 잘 안 나오면 잘 안 나오는 대로 근심이겠지요. 교사로서 아이들한테 들려줄 수 있는 말이란 ‘어느 대학교 어느 학과에 들어가서 어떤 일을 찾아보자’는 대목을 넘어서기 어려우리라 느껴요.
그래도 교사인 시인은 아이를 이끌고 국숫집에 갔다고 해요. 국수 한 그릇을 사 주면서 마음을 달래 주려 했다고 해요. 아마 ‘한 반에 100명이 웃돌던’ 예전이라면 이런 일은 꿈조차 못 꾸었으리라 느껴요. 한 반 100명이 아닌 50명이라 하더라도 교사 한 사람이 모든 아이들을 달래거나 다독이기 어렵겠지요.
아무튼 대입을 앞둔 아이는 ‘선생님이 사 준 국수 한 그릇’에 천천히 마음을 풀어놓는다고 합니다. 시인인 교사도 덩달아 마음이 놓이고, 둘은 주거니받거니 이야기꽃을 피웠다고 해요. 국수 한 그릇 때문이라기보다, ‘나(아이)한테 마음을 기울이면서 시간을 써 주는 어른(교사)’이 있다는 대목 때문에 그 아이는 틀림없이 새롭게 기운을 냈으리라 생각합니다.
“아빠, 내가 왜 만화책 훔치던 버릇을 고친 줄 알아?” // 아버지는 조용히 그의 눈만 바라보았다 // “십계명 때문도, 벌칙 때문도 아니고, 뺨이 아파서도 아니야. 아빠의 눈물을 보고 마음먹은 거야.” (아빠의 눈물)
스스로 마음을 열어 다가서기에 서로 마음을 주고받을 수 있습니다. 스스로 마음을 열지 않는다면 서로 마음을 주고받지 못합니다. 십계명도 벌칙도 뺨따귀도 아이 마음을 움직이지 못한대요. 그러나 아이는 제 아버지가 흘린 눈물을 보고는 마음을 움직였대요. 아버지는 스스로 못 느꼈을는지 모르지만, 아니 아버지는 뺨따귀를 때리고 나서야 아이가 마음을 움직였다고 느꼈을는지 모르지만, 아이는 “아버지가 흘린 눈물”을 보고서 마음을 움직였다고 털어놓았대요.
아버지가 펼쳐보시더니 / …당최 무신 말인지 모르것다야. 요로케 알기 옹삭한 것이 시다냐? / 하셨다 (받아쓰기)
당찬 할머니가 서슴없이 말했다. “기사 양반도 항꾼에 타고 왔응께 절반은 내야 경우에 맞지라우, 앙 그려?” 운전사는 언덕길을 올라 현관 안까지 함박보다 큰 누런 호박을 날라죽고서도 할머니의 큰딸에게 만 원을 더 달라고 차마 입을 떼지 못했다. (더치페이)
시집 《국수는 내가 살게》는 대단한 이야기를 다루지 않습니다. 시인이자 교사인 김정원 님 스스로 ‘미처 마음을 열지 못했을 적’에는 아무런 이야기가 샘솟지 못했구나 하고 느낀 삶이 고스란히 시 한 줄로 드러납니다. 이러다가 ‘아하 이렇게 마음을 열며 서로 만났네 하고 깨달을 적’에는 온갖 이야기가 샘솟았다고 알아차린 삶이 차근차근 시 두 줄로 나타납니다.
시인을 낳아 돌본 아버지는 흙만 만지고 살았다는데, 시인이 어릴 적에 그 아버지한테 ‘시 자랑’을 하려고 보여준 글을 이녁 아버지가 읽고서 투박하게 대꾸해 주던 말마디를 어른이자 교사로 살아가는 오늘날에도 마음으로 또렷이 되새기면서 시 석 줄로 옮깁니다. “알기 옹삭한” 시가 아니라, 알기 좋고 재미나며 즐겁고 아름다우며 사랑스럽고 신나며 멋들어진 춤사위랑 노래가 흐르는 살림을 꿈꾸면서 시 넉 줄을 빚어요.
참말로 그렇지라. 알기 옹삭하게 써서야 무슨 시가 되겠어라? 항꾼에 손 맞잡는 마음이 될 적에 비로소 시가 되지 않겠어라? 2016.11.22.불.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시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