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근히 즐거운 산지니시인선 11
표성배 지음 / 산지니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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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노래하는 시 97



고요히 누리는 기쁜

― 은근히 즐거운

 표성배 글

 산지니 펴냄, 2015.4.20.



  비가 오는 날에 자전거를 달립니다. 비가 와도 자전거를 타고 가야 할 곳이 있으니 자전거를 달립니다. 군내버스를 타고 읍내로 갈 수 있지만, 두 시간에 한 번 지나가는 버스가 들어올 때까지 기다릴 수 없기에, 빗줄기를 가로지르면서 자전거를 달립니다. 아이들은 버스를 타든 자전거를 달리든 나들이를 가면 기뻐하니, 비를 맞으면서 자전거를 달립니다.


  왜 굳이 비가 오는 날에 자전거를 달려야 했을까요. 우체국에 가야 했기 때문입니다. 왜 비가 멎은 이튿날 가지 않고 비가 오는 날에 가야 할까요. 날짜에 맞추어서 보내야 하는 편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가방에 편지를 담고, 작은아이는 수레에 태우고, 큰아이는 비옷을 입고 장갑을 낀 손으로 샛자전거에 앉습니다. 우리는 셋이서 빗길을 자전거로 천천히 하느작하느작 달립니다.



.. 우체국 가자 / 좀 멀다 싶으면 자전거라도 타고 가자 / 우체국 가는 길 새로 생긴 우체통 있어도 / 그냥 우체국 가자 ..  (흑백사진)



  두 아이와 비를 맞으면서 자전거를 타는 일은 드뭅니다. 아마 한 해에 한두 차례쯤 되리라 생각합니다. 아이들이 어리니 빗길 자전거를 잘 안 타기도 하지만, 굳이 비오는 날까지 자전거를 달리려 하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비가 오는 날에 자전거를 달리면 비를 맞으면서 빗소리를 듣고 빗물내음을 먹습니다.


  아이들이 아직 태어나지 않고 나도 혼자 살던 지난날에는 비가 오는 날에 퍽 자주 자전거를 달렸습니다. 아니, 나는 혼자 살림을 꾸리며 살던 예전에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몰아치나 벼락이 떨어지나 씩씩하게 자전거를 달렸습니다. 비를 잔뜩 맞은 나머지 멈추개가 망가진 날에도, 비를 여러 시간 맞고 자전거를 달리느라 손가락이 얼어붙은 날에도, 나 스스로 나한테 ‘너 참 씩씩하구나’ 하고 말하면서 자전거를 달렸습니다.


  가만히 돌아보니, 나는 신문배달을 하면서 자전거를 익혔기에, 자전거를 탈 적에 날씨를 안 가리는구나 싶습니다. 신문배달은 한 해 내내 합니다. 비가 오든 눈이 오든 신문을 돌려야 합니다. 날이 푹푹 찌든 모질게 춥든 신문을 돌려야 합니다. 언젠가 비가 억수처럼 쏟아져서 가슴께까지 빗물이 찬 적이 있는데, 신문이 젖지 않도록 비닐로 꽁꽁 싸매고 머리에 짊어지면서 물길을 자전거를 헤치면서 신문을 돌렸습니다. 교통사고가 나서, 그러니까, 신문배달을 하는데 뒤에서 갑자기 자동차가 나를 들이받고는 뺑소니를 치느라 손목과 팔꿈치가 부러진 뒤에도, 아픈 손과 팔에 붕대를 감고 자전거를 달려서 신문을 돌렸습니다.



.. 학생과 선생 사이처럼 빚쟁이와 빚꾸러기 사이처럼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처럼 의사와 환자 사이처럼 사이에 사랑 하나 머물지 못해 진지하다 그런데 시마저 진지하기만 하면 이 사이를 어떻게 좁히느냐며 시 좀 재미있게 쓰잔다 ..  (헐렁했으면 좋겠다)



  표성배 님 시집 《은근히 즐거운》(산지니,2015)을 읽으면서, 표성배 님이 오늘 이곳(표성배 님 삶자리)에서 누리는 즐거운 이야기를 돌아봅니다. 이러면서 내가 오늘 이곳에서 누리는 즐거운 노래를 헤아립니다.


  삶을 노래하는 이야기 가운데 ‘자전거’가 나오는 싯말이 있기에, 아련하게 떠오르는 내 신문배달 삶을 되새기면서, 어쩜 그때 그렇게 일하면서 살았을까 하고 빙그레 웃습니다. 내 자전거 바구니에서 신문을 몰래 한 부씩 훔쳐가던 사람들을 떠올리면서 웃습니다. 한겨울에 길바닥이 꽁꽁 얼어붙은 날 가파른 내리막길에서 안 미끄러지려고 용을 쓰던 일을 떠올리면서 웃습니다. 눈이 너무 쌓인 겨울에 골목동네 오르막길을 자전거로 끌고 올라갈 수 없어서, 자전거는 아래쪽에 두고 신문을 옆구리에 낀 채 오르막길을 깊은 새벽에 엉금엉금 기어서 올라간 일을 떠올리면서 웃습니다. 장마가 이어지는 어느 날, 지국장님 반지하집에 물이 차오른다면서, 신문배달을 마치기 무섭게 옷장이며 살림이며 빼내어 신문지국으로 나르던 일을 떠올리면서 웃습니다.


  우리 삶은 언제나 노래입니다. 슬픈 노래도 있고 기쁜 노래도 있습니다. 아픈 노래도 있고 웃음이 터지는 노래도 있습니다. 이 노래이기에 나쁘지 않고 저 노래이기에 좋지 않습니다. 이 노래만 부를 수 없고, 저 노래는 귀를 막을 수 없습니다.



.. 바람이 있으면 하면 바람이 있었고 // 햇볕이 있으면 하면 햇볕이 있었는데 // 어디 따로 눈 둘 곳 찾지 못해 오늘은 자꾸 멀뚱하다 ..  (장마 탓이다)



  바람이 붑니다. 내가 바람을 불렀으니 나한테 바람이 붑니다. 바람이 멎습니다. 내가 바람을 바라지 않으니 나한테 바람이 불지 않습니다.


  꽃이 핍니다. 내가 꽃을 바라기에 꽃이 핍니다. 꽃이 안 핍니다. 내가 꽃을 안 바라니까 꽃이 안 핍니다.


  그러면, 군사독재정권 같은 것은 무엇일까요? 내가 이런 것을 바랐기에 군사독재정권이 생겼을까요? 전쟁과 핵무기 따위는 무엇일까요? 이런 것도 내가 바란 탓에 생겼을까요?


  나는 사랑과 평화만 바라보려고 하지만, 자꾸 전쟁과 핵무기 따위가 눈에 어른거립니다. 나는 꿈과 노래를 어루만지려고 하지만, 자꾸 따돌림과 괴롭힘 따위가 눈에 밟힙니다.



.. 평생을 기계와 같이 사는 사람 // 평생을 기계를 이고지고 사는 사람 // 평생을 기계를 위해 밥을 하고 물을 끓이는 사람 // 평생을 기계를 위해 아이를 낳고 기르는 사람 ..  (기술자)



  기뻐하는 이웃이 있고, 슬퍼하는 이웃이 있습니다. 노래하는 이웃이 있고, 노래를 잊거나 빼앗긴 이웃이 있습니다. 눈물짓는 이웃이 있고, 웃음을 그치지 않는 이웃이 있습니다. 잔치를 누리는 이웃이 있고, 배고파서 허덕이는 이웃이 있습니다.


  책을 많이 읽은 이웃이 있고, 책 한 권조차 모르는 이웃이 있습니다. 술독에 빠진 이웃이 있고, 술 한 방울 입에 안 대는 이웃이 있습니다. 늘 웃는 이웃이 있으나, 늘 아무 낯빛이 없는 이웃이 있습니다.


  부드럽고 맑은 말씨로 이야기꽃을 피우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말끝마다 온갖 거친 막말을 섞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사랑으로 밥을 차리는 어버이가 있고, 얼렁뚱땅 끼니를 때우는 어버이가 있습니다. 입시지옥에 휘둘리며 아픈 푸름이가 있고, 학교를 안 다니면서 제 꿈을 스스로 찾으려는 푸름이가 있습니다.


  다 다른 사람들한테 다 다른 노래가 있습니다. 다 다른 곳에서 다 다른 이야기가 자랍니다. 다 다른 삶에서 다 다른 시가 한 줄씩 흐릅니다.



.. 솔숲에 가면 솔바람 불고요 / 강가에 가면 강바람 부는데 / 공단에는 무슨 바람 불까 / 가슴만 두근거리네요 ..  (바람)



  시집 《은근히 즐거운》을 차근차근 읽습니다. 빗길을 아이들과 자전거로 달리고 나서 몸을 씻고 빨래를 한 뒤에 읽습니다. 아이들한테 저녁을 차려 주고 나서 기지개를 켜다가 등허리를 펴려고 자리에 살짝 누운 뒤에 읽습니다. 몸이 뻑적지근해서 몇 줄 읽다가 어느새 곯아떨어집니다. 삼십 분쯤 눈을 붙였을까요. 아이들이 저희끼리 잘 노는 소리를 듣고 잠에서 깹니다. 살짝 누웠더니 허리를 펼 만합니다. 두 아이를 하나씩 옆구리에 끼고 방에서 빙글빙글 돕니다. 마당으로 나가서 두 손을 잡고 휘휘 돌립니다. 우리 집 마당에 선 후박나무 가지까지 번쩍번쩍 들어올리거나 하늘 높이 던지고서 받습니다.


  개구리가 노래하고, 사이사이 풀벌레가 노래합니다. 낮새는 고이 잠들었고, 밤새가 일어나서 노래합니다. 아이들이 짓는 웃음은 밤노래가 되어 저 먼 별까지 퍼집니다. 저 먼 별은 우리 집으로 고운 빛줄기를 베풉니다.



.. 고철 더미 속에서 붉은 녹물을 토하는 늙은 기계가 말하고 고철 장이 듣고 있는 가령, // 들리지 않는 소리를 들을 수 있고 보이지 않는 곳을 볼 수 있는 것은 먼저 인사를 건네는 것 // 안녕, 망치야 안녕, 비둘기야 안녕, 그라인더야 안녕, 나의 일터야 ..  (안녕, 망치에게)



  모든 시는 삶을 담습니다. 모든 시는 삶글입니다. 시를 쓰는 모든 사람은 일을 합니다. 애써 ‘노동’이라는 한자말을 빌지 않아도 됩니다. ‘일하는 사람’이 시를 씁니다. 우리는 회사에서도 일하고, 공장에서도 일하며, 시골에서도 일합니다. 부엌에서도 일하고, 책상맡에서도 일하며, 텃밭에서도 일합니다. 자전거를 달리며 일하는 사람이 있고, 두 다리로 걸으며 일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오토바이로 편지를 나르며 일하는 사람이 있고, 짐차를 몰며 일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루 내내 한곳에 꼼짝 않고 서서 일하는 사람이 있으며, 빗자루를 들고 일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모든 글은 삶글이면서 살림글입니다. 살아가며 쓰는 글이기에 삶글이요, 저마다 다르게 하는 일을 가꾸면서 쓰는 글이니까 살림글입니다. 삶을 쓰는 글은 삶노래입니다. 글은 언제나 노래처럼 흐르기에 삶노래입니다. 살림을 쓰는 글이라면 살림노래가 될 텐데, 일을 읊는 노래라면 일노래이기도 하지요.


  들에서 일하면 들노래입니다. 집에서 일하면 집노래입니다. 숲에서 일하면 숲노래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 지구별에 두 다리를 딛고 일한다고 여기면 별노래입니다.


  망치한테 인사하는 표성배 님 시집은 어떤 노래일까 하고 헤아립니다. 고요히 누리는 기쁜 삶을 노래하는 싯말은 어떤 노래가 되어 이 땅에서 고이 흐를까 하고 헤아립니다. 저녁이 깊어 새근새근 잠든 아이들 곁에서 자장노래를 나긋나긋 부르면서 내 삶노래와 살림노래와 꿈노래와 별노래를 하나씩 함께 헤아립니다. 4348.4.29.물.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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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letreeje 2015-04-30 00:03   좋아요 0 | URL
저도 18쪽의 `흑백사진`을 읽으며 절로 함께살기님이 생각나 빙그레 웃었습니다~

모든 시는 삶을 담습니다. 모든 시는 삶글입니다.-
정말 그렇지요.^^

아주 편안하고 즐겁게 읽은 이 시집을, 함께살기님의 느낌글로 다시 읽으니 참으로
기쁘고 고맙습니다~*^^*

좋은 시집에 좋은 느낌글입니다!

숲노래 2015-04-30 00:23   좋아요 0 | URL
우리 스스로 즐거운 이야기를 짓고
다 함께 아름다운 삶이 된다고 느껴요.
appletreeje 님도 오늘 하루를
기쁘게 누리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