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이라는 책읽기
모든 이야기는 인문학이다. 인문학이 아닌 이야기는 없다. 따로 ‘인문학’이라는 말을 쓸 까닭이 없다. 그러나, 사회에서는 자꾸 ‘인문학’을 말하려 하고, 정부마저 소매를 걷어붙이고 나서서 ‘인문학 살리기’를 한다고까지 말한다.
돈을 들이거나 학자·작가·전문가를 끌어들이면 인문학을 살릴 수 있을까? 아마, 어떤 경제나 사회나 교육이나 문화로 헤아릴 인문학은 살릴 만하리라. 돈이 될 만한 인문학은 살릴 만하겠지. 그렇지만, 모든 이야기가 인문학인 줄 제대로 바라볼 수 있다면, 이리하여 스스로 삶을 짓는 길로 나아가면, 바로 이때에 오롯하면서 아름다운 이야기가 찬찬히 태어나는 줄 느끼리라 생각한다.
밥 한 그릇이 삶이면서 인문학이고, 아이들 놀이가 삶이면서 인문학이다. 어깨동무하면서 부르는 노래가 삶이면서 인문학이요, 따사로운 사랑으로 서로 아낄 줄 아는 손길이 삶이면서 인문학이다. 인문학은 ‘책’이나 ‘강단’이나 ‘학교’나 ‘정치·사회·문화 얼거리’에는 없다. 책에는 책이 있고, 강단에는 강단이 있으며, 학교에는 학교가 있다.
모름지기 ‘삶이면서 이야기’인 인문학이기에, 삶을 마주하고 바라보면서 손수 지어야 ‘인문학다운 인문학’이 되고, 내가 내 삶을 사랑하면서 스스로 이야기를 길어올려야 ‘인문학이라 할 인문학’을 누리는 셈이다.
스스로 아무런 이야기가 없다고 밝히려는 뜻에서 자꾸 ‘인문학’이라는 허울과 옷을 입히려고 한다고 느낀다. 텅 빈 수레이니까 여러모로 ‘인문학’이라는 껍데기를 씌우려고 하는구나 싶다. 4348.4.11.흙.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삶과 책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