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가면 1
스즈에 미우치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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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책 즐겨읽기 499



첫걸음을 내딛으려는 꿈

― 유리가면 1

 미우치 스즈에 글·그림

 해외단행본팀 옮김

 대원씨아이 펴냄, 2010.4.30.



  아기가 첫걸음을 뗍니다. 아기는 걷고 싶기 때문에 첫걸음을 뗍니다. 첫걸음을 뗀 아기는 몇 걸음 더 나아가지 못하고 자빠지거나 주저앉습니다. 그렇지만 다시 기운을 내어 일어서려 합니다. 날마다 더 기운을 내고 또 기운을 내어 두 걸음과 세 걸음을 잇달아 내딛습니다.


  처음부터 모든 일을 잘 하는 사람이 있을 테지만, 한참 지났어도 어떤 일이든 잘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잘 하는 사람은 잘 하니까 어떤 일이든 그야말로 기운차게 뻗습니다. 잘 못하는 사람은 잘 못하니까 어떤 일이든 주눅들 수 있지만, 그래도 꿋꿋하게 이 일 저 일 맞아들입니다.


  어느 일을 맞아들이건, ‘잘 할까, 못 할까’를 따지면, 나는 늘 ‘잘 할는지, 못 할는지’와 같은 굴레에 사로잡힙니다. 어느 때에는 잘 하겠지만, 어느 때에는 잘 못하겠지요. 어느 때에는 잘 하면서 기쁠 테지만, 어느 때에는 잘 못하면서 슬플 테지요.



- “나, 할 거야! 몽땅 배달할게!” “마야!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마! 호낮서 120군데나 배달할 순 없어!” “난 할 거야! 그러니까, 그러니까 꼭 〈춘희〉 입장권을 줘.” (23쪽)

- “단념해. 너한테 연극 구경은 과분해. 배달이나 하는 주제에 건방지게.” (34쪽)

- “어떻게 비비 역을 연구했지?” “연구라니, 그런. 단지 TV나 코미디 같은 걸 보고.” “그렇다면 넌 사람들 흉내를 내고 있는 것뿐이야. 비비를 연기하는 건 너야. 비비의 심리를 파악하지 못하면 비비의 가면을 쓸 수가 없는 거야.” (84쪽)





  걸음은 잘 걸어야 하지 않습니다. 걸음은 꼭 뚜벅뚜벅 걸어야 하지 않습니다. 걸음은 굳이 반듯하게 걸어야 하지 않습니다. 걸음은 그저 걸으면 됩니다. 이렇게 걷든 저렇게 걷든 대수롭지 않습니다. 빨리 걷든 느리게 걷든 대단하지 않습니다. 그저 내가 갈 길을 걸어가면 돼요.


  걸어가다가 넘어질 수 있어요. 걷다가 담벼락에 꽈당 부딪힐 수 있어요. 가던 길이 끊어져서 멀리 에돌아 가야 할 수 있어요. 아무튼 다 됩니다. 이래도 되고 저래도 되어요. 나는 내 길을 갈 수 있으면 됩니다.


  내 삶을 가만히 돌아봅니다. 누구나 제 길을 제 힘으로 가면 되는데, 때때로 ‘제 숨결’을 잊거나 놓칩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바라볼까 하는 생각 때문에 그만 쭈뼛거립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바보스럽게 바라보지 않을까 하고 걱정하면서 그만 움찔합니다.



- “하지만 알고 계세요? 마스미 씨, 오노데라 씨. 저 애는, 〈춘희〉의 무대를 단 한 번 본 것뿐이에요. 그런데도 3시간 반짜리 무대의 대사를 한 마디, 한 구절도 틀리지 않고, 배우들의 연기 포즈까지 통째로 암기해 버린 겁니다.” (56∼57쪽)

- ‘연극! 연극에 나간다! 내가! 처음이야! 남에게서 칭찬받은 것은.’ (61쪽)

- ‘선생님이 날 비비 역으로 정한 건 우리 집이 가난하기 때문? 다른 역할은 의상비가 많이 드니까?’ (63쪽)





  나는 다른 사람 눈치에 따라 걸어야 할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 내 걸음걸이가 예쁘면, 참말로 내 삶도 예쁘다고 할 만한지 생각해 봅니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 내 걸음걸이가 미우면, 참으로 내 삶도 밉다고 할 만한지 생각해 봅니다.


  내 젓가락질이 서툴어 보인다고 하면, 나는 젓가락질을 ‘잘 못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젓가락질을 못 하니까 밥을 못 먹을까요? 내 삽질이 어설퍼 보인다고 하면, 나는 삽질을 ‘잘 못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삽질을 못 하니까 나무를 못 심을까요? 자전거가 익숙하지 않아서 두발자전거를 도무지 못 타는 사람이 있어요. 두발자전거를 도무지 못 타는 사람이니까, 이 사람은 자전거를 모른다고 할 수 있을까요?



- “연기하기에 따라서 이 역은 주역보다 더 주목을 받게 될지도 몰라. 그렇지 않으면 완전히 무시당하게 될지도.” “아줌마.” “말해 두는데 마야, 배역의 좋고 나쁨은 문제가 안 돼. 맡겨진 역을 멋지게 연기해 내면 되는 거야. 무대 위로 한 걸음 나서면, 그때부터 넌 이미 네 자신이 아닌 거다.” (64쪽)

- ‘모습을 감추고 가면을 쓴다. 그 여자의 기분으로, 그 여자의 성격으로, 그 여자의 마음으로!’ (66쪽)

- 기타지마 마야, 13세. 아빠는 돌아가셨고 엄마는 자그마한 중국요리집의 보잘것없는 더부살이 종업원. 그 아침, 뭐 하나 볼 것 없는 이 작은 소녀의 가슴속에 정열적인 불새 한 마리가 눈을 떴다.“ (71쪽)





  미우치 스즈에 님 만화책 《유리가면》(대원씨아이,2010) 첫째 권을 새롭게 읽습니다. 아직 모든 이야기가 마무리되지 않은 《유리가면》인데, 1970년대에 처음 나온 이야기를 2010년대에 새삼스레 다시 들춥니다. 예전에 다 읽은 이야기이지만, 문득 어떤 생각이 들어서 천천히 첫 쪽부터 새롭게 읽어 봅니다.


  《유리가면》에는 커다란 기둥 구실을 하는 아이가 둘 나옵니다. 아이 하나는 스스로 언제나 기쁨을 노래하면서 삶을 누리려 하면서 ‘둘레 기운’을 고스란히 받아들입니다. 아이 둘은 어버이한테서 물려받은 피를 되새기면서 더 빼어난 연극배우가 되려는 꿈을 키웁니다. 아이 하나는 기쁨과 노래와 삶으로 연극길을 걷습니다. 아이 둘은 어버이한테서 물려받은 피를 더 끓어넘치게 하려는 삶으로 연극길을 걷습니다.



- 극단원들의 비웃는 소리 따위는 마야에게 전혀 들리지 않았다. 다만, 아유미의 훌륭한 연기만이 온통 마음속을 차지하고 있을 뿐. (138쪽)

- “봄밤의 공기는 정말 상쾌해. 잠이 싹 달아나네. 뭐 좋아! 첫 열차가 다닐 때까지 철길을 따라 걸어가지 뭐. 자! 도쿄를 향해 출발!” (158쪽)

- “어째서 좀더 관대한 눈으로 이 애를 봐주지 않는 겁니까? 왜 이 애 안에 잠자고 있는 가능성을 찾아내 보려고도 하지 않는 겁니까? 이 애가 아무 쓸모도 없는 애인지 어떤지, 나라면 단 하나의 재능이라도 찾아내서 키워 줄 수 있어요.” (178쪽)




  두 갈래로 다른 두 사람 가운데 어느 한쪽이 높거나 낫거나 뛰어나다고 할 수 없습니다. 두 갈래로 다른 두 사람은 그저 두 갈래로 다를 뿐입니다. 다른 아이 눈치를 본다면 내 연극길을 갈 수 없습니다. 다른 아이가 잘 하는구나 싶은 대목을 흉내내려 한다면 내가 잘 하는구나 싶은 대목을 드러낼 수 없습니다.


  이를테면, 한 번 본 연극을 통째로 외울 수 있다고 해서 대단하거나 훌륭하지 않습니다. 이 아이는 그저 ‘한 번 본 연극을 통째로 외울’ 뿐입니다. 어느 아이는 연극을 수없이 보았어도 대사 한 줄조차 제대로 못 외울 수 있습니다. 대사 한 줄조차 제대로 못 외운다고 해서 연극을 못 하거나 어설피 하지 않습니다. 그저 대사를 잘 못 외울 뿐입니다.


  값진 냄비를 써야 밥을 더 잘 하지 않습니다. 익숙한 냄비만 써야 밥을 더 잘 하지 않습니다. 밥 한 그릇은 언제나 우리 손길로 짓고, 우리 마음으로 지으며, 우리 사랑으로 짓습니다. 손길과 마음과 사랑이 고루 어우러지는 살림이 된다면, 어떤 냄비를 쓰고 어떤 불을 지피더라도 맛있는 밥 한 그릇을 짓습니다.




- “얼굴은 배우의 생명이에요. 끓는 물을 뒤집어쓰고 얼굴에 화상을 입으면 그 아이의 일생은 엉망이 되어 버립니다.” (180쪽)

-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신을 믿고, 한 걸음 한 걸음 계단을 올라가는 것뿐! 그리고 지금은 그 첫걸음!” (185쪽)



  저마다 꿈으로 나아가려고 첫걸음을 뗍니다. 첫걸음이 놀랍도록 대단해서 눈부실 수 있고, 첫걸음이건 두걸음이건 세걸음이건 그저 자빠지거나 넘어지기만 할 수 있습니다. 어떤 모습이든 아랑곳할 일은 없습니다. 어떤 모습이든 나는 내 길을 가면 되고, 내 길을 사랑하면 되며, 내 길을 씩씩하게 보듬을 수 있으면 됩니다.


  첫발을 내딛으면서 두발을 내딛을 수 있습니다. 처음 한 번 씩씩하게 발을 내딛었으면, 이제부터 언제나 새롭게 한 발씩 내딛을 수 있고, 바야흐로 걸음이 됩니다.


  걸음은 어설퍼도 됩니다. 걸음은 매끄럽거나 멋있어도 됩니다. 어떤 걸음이라 하든, 내가 이 길을 왜 걷고 어디로 걷는가를 알면 됩니다. 내가 걷는 길을 제대로 바라보면서 웃고 노래할 수 있으면 됩니다. 꿈으로 가는 길에서는 늘 웃음노래가 환하게 퍼집니다. 4348.4.10.쇠.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시골에서 만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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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찬샘 2015-04-10 2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어린 시절 잠 안 자고 읽었던 그 만화네요.

숲노래 2015-04-10 22:13   좋아요 0 | URL
연극과 삶을 그리는
앞자락은 참으로 아름다운 이야기라고 느껴요.
마무리를 안 짓는 요즈음은... 여러모로 아쉽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