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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브라시카의 첫 여행 ㅣ 안녕, 체브라시카 2
예두아르트 우스펜스키 원작, 야마치 카즈히로 엮음, 김지현 옮김 / 어린이작가정신 / 2014년 12월
평점 :
절판
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468
사이좋게 마실하는 세 사람
― 체브라시카의 첫 여행
에두아르트 우스펜스키 원작
야마치 카즈히로 엮음
김지현 옮김
어린이작가정신 펴냄, 2014.12.23.
내가 네 살 적에 어떻게 놀거나 지냈는지 하나도 못 떠올립니다. 다섯 살이나 여섯 살 적에 어떻게 놀거나 지냈는지 도무지 못 떠올립니다. 세 살이나 두 살 적 일도 도무지 못 떠올립니다. 아마 우리 형은 내 어릴 적 모습을 꽤 떠올리리라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나로서는 어느 한 가지조차 제대로 그리지 못합니다.
우리 집 두 아이를 지켜보면서 가만히 헤아립니다. 큰아이는 제 동생이 어떤 하루를 누리거나 보내는지 찬찬히 살핍니다. 작은아이는 제가 어떤 짓이나 놀이나 말을 하는지 잊거나 못 떠올릴는지 몰라도, 큰아이는 작은아이 몸짓이나 놀이나 말을 여러모로 되새기거나 떠올릴 수 있습니다.
.. 게나와 체브라시카가 막 여행을 떠나려고 해요. 게나가 악어라는 건 금세 알아차릴 수 있어요. 그렇다면 체브라시카는 무엇일까요? 곰은 아니에요. 원숭이도 아니고요. 체브라시카는 체브라시카 .. (2쪽)
두 아이를 데리고 마실을 하자면, 큰아이가 작은아이를 이모저모 많이 챙깁니다. 아버지는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는데다가 모든 짐을 커다란 가방에 잔뜩 짊어지면서 다녀야 하는 줄 큰아이가 잘 알기 때문입니다. 작은아이는 마실길이건 어디에서건 졸리면 그냥 잡니다. 작은아이는 어디에서나 졸릴 적에 잠들면 아버지가 안거나 업어서 데리고 다닙니다. 작은아이는 아버지를 믿고 몸을 맡깁니다. 이때에 큰아이는 저도 졸릴 테지만 졸음을 씩씩하게 참습니다. 씩씩하다 못해 대견할 때가 있고, 딱하다 싶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면 나는 큰아이한테 말하지요. 얘야, 아버지는 너희 둘을 다 안을 수 있으니 걱정하지 말고 졸리면 그냥 자면 돼. 아버지가 너희 둘을 안고 걷다가 정 힘들면 택시를 불러서 타면 되니까, 너무 힘들게 참지는 말자.
큰아이는 가끔 ‘아버지 가방’을 들거나 나르겠다면서 용을 씁니다. 큰아이 몸무게보다 훨씬 무겁고 큰 가방을 들 수는 없을 노릇이지만, 이를 악물고 용을 써서 번쩍 들어올릴 때가 있으나 들고 나르거나 움직이지는 못합니다. 작은아이는 아예 들어 볼 생각조차 않는데, 큰아이는 아버지 가방을 건드려 본 일이 마음속에 남는지, “나도 짐을 들래.” 하면서 작은 가방 하나를 달라고 합니다.
.. 게나는 짐을 많이 들고 있었어요. “내가 도와줄게.” 체브라시카가 가장 작은 상자를 건네받았어요. “고마워. 그럼 내가 너를 들어 줄게.” 게나는 체브라시카를 안아 주었어요 .. (11∼12쪽)
세 사람이나 네 사람이 다니는 마실은 만만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곁님과 함께 네 사람이 마실을 다니면, 곁님이 곧잘 작은아이를 안을 수 있으니 훨씬 홀가분합니다. 그런데 이때에는 큰아이가 어김없이 아버지한테 안기거나 업히지요. 작은아이가 어머니한테 칭얼거리면서 안기면, 큰아이는 아버지한테 칭얼거리면서 안기고 싶어요. 어버이 눈길로는 ‘칭얼거림’이라 할 테지만, 아이로서는 ‘사랑받기’를 바라는 목소리라고 느껴요.
그림책 《체브라시카의 첫 여행》(어린이작가정신,2014)을 읽으면서 생각합니다. 2015년에 여덟 살로 접어드는 큰아이는 거의 모든 한글을 혼자 읽어냅니다. 동생한테 그림책을 읽어 주기도 합니다. 체브라시카 이야기도 동생한테 틈틈이 읽어 줍니다.
에두아르트 우스펜스키 님이 빚고, 야마치 카즈히로 님이 새롭게 엮은 이 그림책을 보면, 체브라시카라는 아이가 게다라는 아저씨하고 나들이를 떠나는 이야기가 흘러요. 그리고, 체브라시카랑 게다랑 오붓하게 나들이를 떠나는 모습을 지켜본 사포클라크 할머니는 시샘과 부러움으로 이 나들이에 끼어들지요.
.. “게나, 딸기가 있어.” “딸기가 아니라 작은 나무 열매란다.” “작은 집이 있어.” “그건 작은 집이 아니라 버섯이야.” “있잖아, 게나, 숲은 재미있어 보여.” “그러니?” “여행 대신 숲에 가자.” “좋은 생각이구나.” .. (15쪽)
사이좋게 나들이를 하는 둘을 지켜보는 다른 하나는 그 자리에 끼고 싶습니다. 얼마나 오붓하고 애틋해 보이는지, 함께 둘러앉아서 이야기꽃을 피우고 싶습니다. 그러나, 할머니 나이까지 살며 오랜 동무를 사귀지 못한 사포클라크는 먼발치에서 지켜보다가 짓궂은 장난을 칩니다. 마치 아이처럼 장난을 쳐요.
그래요, 할머니가 아이처럼 장난을 쳐요. 왜냐하면, 나이로는 할머니이지만 마음으로는 아이라 할 테니까요. 나이로만 보면 늙은 사람이지만 마음으로 들여다보면 착하고 맑은 넋이라 할 테니까요.
수줍음이 장난으로 드러납니다. 한 발 두 발 다가서고 싶은 몸짓이 장난이 되어 나타납니다. 체브라시카와 게다는 알았을까요? 몰랐을까요? 짓궂은 장난 때문에 먼 길을 걸어야 하니 고단했을 테지만, 외려 기차에서 내려야 했기에 숲을 만납니다. 외려 먼 길을 땀을 뻘뻘 흘리며 걸어야 했기에, 게다와 체브라시카는 서로서로 한결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을 키웁니다.
.. 체브라시카가 지붕 위 게나 곁으로 왔어요. “옆에 앉아도 돼?” “좋아. 그런데 왜 올라왔어?” “게나와 함께 있고 싶으니까. 사포클라크 할머니도 올라왔어요. “나도 옆에 앉아도 될까?” “좋아요. 그런데 왜 올라오셨어요?” “네 노래가 듣고 싶어서 말이지.” .. (39쪽)
체브라시카는 체브라시카입니다. 다른 어느 것도 아닙니다. 게다는 게다입니다. 나이가 지긋한 악어가 아닌 게다입니다. 사포클라크는 사포클라크입니다. 짓궂거나 장난스러운 할머니가 아닌 그저 사포클라크입니다. 그리고, 사포클라크가 아끼는 커다란 쥐 라리스카는 또 라리스카이지요.
셋은 함께 놀면서 즐겁습니다. 아니, 셋이 아닌 넷은 함께 놀면서 즐겁습니다. 서로 한식구라도 되는듯이 즐겁습니다. 마음으로 사귀고 마음으로 아낍니다. 마음으로 마주하고 마음으로 이야기꽃을 피웁니다. 표를 끊어서 어디에서 어디로 꼭 가야만 하는 나들이가 아니라, 살가운 벗님과 도란도란 웃고 노래하면서 길을 나서는 나들이입니다.
마실길이 즐겁고, 삶길이 즐겁습니다. 마실을 다니는 하루가 즐겁고, 서로 사랑하는 하루가 즐겁습니다. 4347.12.31.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시골 아버지 그림책 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