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군포시에서 내는 문화잡지 가을호에 실은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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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넋 40. 삶을 비추는 거울

― 가을에 부는 바람과



  제비는 팔월 끝무렵에 한국을 떠납니다. 삼월 끝무렵부터 사월 첫무렵에 한국으로 날아오는 제비는 한국에서 옛집을 손질해서 알을 낳고 새끼를 돌보다가 칠월 첫무렵에 새끼들한테 날갯짓을 가르치고는 팔월 끝무렵에 다시 태평양을 가로지르기까지 바지런히 날개힘을 키웁니다. 나는 시골에서 아이들과 살림을 가꾸기에 언제나 제비를 바라보면서 제비 한살이를 읽습니다. 해마다 몇 월 몇 일에 제비가 돌아오는지 읽고, 언제쯤 알을 낳으며, 알을 낳은 뒤로는 수컷 제비가 얼마나 자주 제비집을 들락거리고, 알에서 새끼가 깐 뒤로는 암수 제비가 얼마나 자주 먹이를 물어다 나르는지를 가만히 지켜봅니다. 날마다 제비집을 살피면서 새끼가 얼마나 자라는가를 헤아립니다. 이윽고 제비가 둥지를 떠나는 날을 돌아보고, 마을 너른 들에 제비가 무리를 지어 마지막 춤사위를 벌이다가 다 같이 태평양으로 힘차게 날아가는 모습을 바라봅니다.


  누군가 제비 한살이를 좇아서 지은 책을 읽어도 제비 한살이를 알 수 있습니다. 제비 한살이를 책으로 엮자면 퍽 여러 해 동안 제비를 지켜보았을 테니, 책만 보아도 여러모로 도움이 됩니다. 박쥐라든지 소쩍새라든지 꾀꼬리 한살이 이야기도 누군가 알뜰히 엮은 책을 장만해서 읽으면 고맙게 여러 가지 이야기를 알 수 있어요. 우리가 곁에 두는 한국말사전도 이와 같지요. 뜻있는 여러 사람이 오랫동안 땀을 흘려서 엮은 사전을 뒤적이면서 말을 새롭게 살펴서 익힐 수 있으니 고맙습니다.


  아이들이 어버이 곁에서 모든 삶을 배웁니다. 아이들은 책으로 배우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말을 책이 아닌 어머니와 아버지와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읊는 말을 귀여겨들으면서 배웁니다. 아이들 몸짓과 말짓은 모두 어버이한테서 삶으로 물려받습니다. 어버이는 학교나 학원이나 텔레비전이나 인터넷이 아닌 삶을 가르칩니다.


  가위질을 책으로 배우지 않습니다. 수저질을 책으로 익히지 않습니다. 고무줄놀이나 소꿉놀이를 책으로 배우는 아이는 없습니다. 자전거를 타거나 뜀박질을 할 적에 책으로 익히는 아이는 없습니다. 요즈음은 요리학원이나 요리책이 많기는 합니다만, 먼먼 옛날부터 밥짓기는 늘 삶으로 물려주고 물려받았습니다.


  우리는 한국말사전을 아주 쉽게 넘길 수 있습니다. 종이책이 아니어도 인터넷이나 손전화 기계에서 찾아보면 말풀이를 곧장 알아볼 수 있습니다. 놀라운 문명이라고 할 만합니다. 그런데, 종이사전뿐 아니라 인터넷사전이 가까이 있으면서도 정작 한국사람이 한국말을 제대로 모르기 일쑤이고, 슬기롭게 못 쓰곤 합니다.


  아주 쉽게 말풀이를 찾아볼 수 있는데 왜 오늘날 사람들은 한국말을 더 모르고, 한국말을 더 잘못 쓰며, 일본 말투라든지 번역 말투에 왜 자꾸 길들거나 물들기만 할까요? 대학 교육 받는 사람이 늘고, 요즈음은 초·중·고등학교를 거의 모든 사람이 꼬박꼬박 다니는데, 왜 한국사람이 한국말을 아름답게 못 쓰고 참다웁게 못 쓰며 사랑스럽게 못 쓸까요?


  예부터 말을 ‘한국말사전’이나 ‘책’이나 ‘교재’로 가르치는 일은 없었습니다. 예부터 말은 어버이가 아이한테 삶으로 가르쳤습니다. 게다가 옛날 사람들은 사전도 책도 교재도 없었지만, 아주 많은 말을 아주 쉽고 빠르며 즐겁게 아이한테 물려주었어요. 오늘날 사람들은 학교를 오래 다니고 사전도 책도 교재도 많지만, 정작 한국말을 제대로 쓰지 못합니다.


  잘 생각해 보면 됩니다. 오늘날 한국말사전에 담은 낱말은 모두 옛날 사람들이 ‘머리에 담아서 언제 어디에서나 홀가분하게 흔히 쓰던 말’입니다. 지식이 아닌 말이었고, 정보가 아닌 말이었습니다. 옛날 사람들은 한국말사전이나 도감이 없었어도 풀과 물고기와 나무와 꽃과 새와 짐승과 온갖 이름을 다 알았어요. 이름을 다 알 뿐 아니라 쓰임새나 한살이나 빛깔과 무늬를 모두 알았어요.


  오늘날 우리들은 ‘베틀’이나 ‘절구’나 ‘물레’라는 이름을 압니다. 그러나 베틀을 어떻게 만들고, 베틀로 어떻게 천을 짜는지 모릅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기둥’이나 ‘처마’나 ‘들보’라는 낱말을 압니다. 그러나 어떤 나무를 어떻게 베어 어떻게 손질할 때에 기둥이 되고 처마가 되며 들보가 되는 줄 모릅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스스로 나무를 베어 손질한 뒤 집을 지을 줄 모릅니다.


  바람이 붑니다. 사월에서 오월로 접어드는 바람빛이 다르고, 칠월에서 팔월로 넘어가는 바람결이 다릅니다. 오월에서 유월로 넘어설 때 바람맛이 다르며, 팔월에서 구월로 들어서는 바람내음이 다릅니다. 아니, 하루하루 바람노래가 달라요.


  선선하게 부는 바람을 쐽니다. 얼마 앞서까지는 후끈후끈한 바람을 쐬었다면, 이제는 보들보들 산뜻한 바람을 쐽니다. 우리 식구는 유월부터 칠월을 지나 팔월까지 마을 골짜기로 나들이를 다닙니다. 자전거를 몰거나 두 다리로 걸어서 골짜기로 가요. 우리 식구는 이를 ‘골짝마실’이라 합니다. 골짝마실을 하면 골짝물에 몸을 담급니다. 파랗게 눈부신 하늘을 올려다보고, 푸르게 우거진 숲에서 흐르는 물소리를 듣습니다. 물소리는 언제나 물노래입니다. 냇물노래이고 골짝물노래입니다.


  우리 마을 뒤쪽을 감싸는 멧자락에 있는 골짜기는 아직 깨끗합니다. 다슬기와 가재와 도룡뇽과 송사리가 함께 삽니다. 이곳에는 아직 개똥벌레가 밤에 춤을 추리라 생각합니다. 군청에서 시멘트로 덮은 데가 있으나, 흙바닥이 그대로인 곳이 있으니, 개똥벌레도 다른 숲짐승과 숲벌레도 이곳에 보금자리를 틀거나 알을 낳을 만합니다. 흙이 있을 때에 비로소 숲이 이루어집니다.


  바람이 철을 알려줍니다. 바람은 철과 달과 날을 알려줍니다. 바람을 읽고 구름을 읽으면 하루와 한 해를 내다볼 수 있습니다. 예부터 지구별 모든 겨레는 숲과 바람과 해와 흙과 풀을 읽으면서 말을 짓고 넋을 가꾸면서 삶을 지었습니다. 어머니 품이란, 시골에서 흙을 가꾸는 포근한 손길로 아이를 사랑하는 넋입니다. 아이가 어머니와 아버지한테서 물려받는 말이란, 푸르게 우거진 숲을 사랑하고 맑게 부는 바람을 누리는 즐거운 빛입니다. 삶을 아름답게 바라보면서 느끼고 찾을 때에 우리가 쓰는 말은 아름답게 거듭납니다. 삶을 사랑스레 가꾸고 나누는 하루를 새롭게 열 적에 우리가 쓰는 글은 살가이 짓는 웃음노래가 됩니다. 4347.8.8.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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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양물감 2014-12-17 21:31   좋아요 0 | URL
군포시에서 문학잡지도 나오나요?

그건 그렇고 낱말은 알지만 그 쓰임새나 내용을 모른다는 것, 그래서 글은 읽었지만 내용을 모르는 사람이 많은것같습니다. 누구는 한자교육을 안해서라고 말하던데, 실은 삶에서, 생활에서 그것들을 보고 배울 일이 없어서 그런거겠지요.

숲노래 2014-12-18 07:31   좋아요 0 | URL
올해에 네 차례 우리말 이야기를 실었는데...
막상 이 글을 올리려니
그 책 이름이 생각이 안 나서... ^^;;;;
`군포시 사외보`라고 해야 할까요?
그런 책이 아주 멋지게 나온답니다.

한자말을 잔뜩 쓴 논문 같은 인문책을 알아듣자면 한자를 가르쳐야 할 테지요 ^^
그러나, 지식으로는 다 `읽`어도 `알`지는 못하기 마련이에요.
하양물감 님 말씀이 옳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