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말도 익혀야지
(861) 시간 읽기 1
이것만 끝냈는데도 시계를 보니 다섯 시 오 분 전이었다. 망했다. 보나마나 외할머니 잔소리를 벗어날 수 없는 거다
《강무지-다슬기 한 봉지》(낮은산,2008) 108쪽
다섯 시 오 분 전이었다 (x)
네 시 오십오 분이었다 (o)
언제부터인가 한국사람이 한국말로 이야기를 주고받지 않습니다. 한국말을 버리고 한자말을 잔뜩 쓸 뿐 아니라, 한국 말투를 잃거나 버립니다. 서양 말투가 한국 말투에 스며들고, 일본 말투가 한국 말투로 뿌리를 내립니다.
‘-적’과 ‘-의’를 아무 데나 함부로 붙이는 일은 일본 말투 탓입니다. “한 잔의 커피”나 “또 하나의 가족”이나 “동네의 한 어른”이나 “한 프랑스사람”처럼 쓰는 일은 서양 말투 탓입니다. 그리고, 시간을 읽을 적에 “몇 시 몇 분 전”처럼 쓰는 일은 서양 말투에 물든 모습입니다.
한국말로 ‘다섯 시 오 분 전’이라 할 적에는, “다섯 시하고 오 분이 아직 안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다섯 시 삼 분이나 다섯 시 사 분이라 할 적에 ‘다섯 시 오 분 전’인 셈입니다. 이와 달리, 서양사람은 “네 시 오십오 분”을 가리키려고 ‘다섯 시 오 분 전’처럼 말합니다. 서양사람은 “아직 다섯 시가 안 된 때”를 가리키려고 ‘다섯 시 오 분 전’이나 ‘오 분 전 다섯 시’처럼 말합니다.
다섯 시가 거의 다 되었다
다섯 시까지 오 분을 남겼다
오 분 더 있으면 다섯 시였다
오 분만 있으면 다섯 시였다
나는 중학교에서 영어를 처음 배웠습니다. 그때는 1988년입니다. 아직도 그무렵 일을 떠올릴 수 있는데, 그무렵 나한테 영어를 가르치던 중학교 교사는 ‘시간 읽기’를 영어로 가르치면서 ‘다섯 시 오 분 전’이라는 말투가 참 얄궂다고, 시간을 어떻게 이렇게 읽느냐고 푸념을 했습니다. 한국말이나 한겨레 삶으로는 도무지 와닿지 않는 영어 말투라고 우리한테 가르쳤어요. “네 시 오십오 분”을 ‘다섯 시 오 분 전’처럼 말하면 헷갈리거나 잘못 알기 마련이니까요.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무렵 다른 동무도 ‘다섯 시 오 분 전’ 같은 말투가 영 어울리지 않는다고, 이처럼 말해서는 시간을 제대로 알 수 없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나 몇몇 동무는 이런 말투를 차츰 장난처럼 따라하며 놀았고, 나중에는 ‘한국말과 한겨레 삶과 어울리지 않는 말투’를 아무렇지 않게 씁니다. 몇 해 동안 영어 말투에 익숙하거나 길들다 보니, 어느새 이러한 말투가 ‘한국사람 말투’처럼 퍼지거나 뿌리를 내립니다.
아직 다섯 시가 안 됐다
조금 있으면 다섯 시이다
막 다섯 시가 넘었다
이제 다섯 시가 넘었다
다섯 시를 조금 넘겼다
다섯 시가 조금 안 되었다면 “다섯 시가 조금 안 되었다”고 하면 됩니다. 다섯 시를 막 넘겼다면 “다섯 시를 막 넘겼다”고 하면 됩니다. 언제나 있는 그대로 주고받는 말입니다. 내가 느끼는 그대로 옆사람도 그대로 느낄 수 있도록 나누는 말이에요. 4342.1.7.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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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만 끝냈는데도 시계를 보니 네 시 오십오 분이었다. 젠장. 보나마나 외할머니 잔소리를 벗어날 수 없다
‘망(亡)했다’는 ‘끝났다’나 ‘끝장이다’로 손봅니다. ‘젠장!’이나 ‘이런!’이나 ‘제기랄!’로 손보아도 어울립니다. “벗어날 수 없는 거다”는 “벗어날 수 없다”나 “벗어날 수 없겠다”로 다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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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말도 익혀야지
(1031) 시간 읽기 2
물론 나를 위해 한 말이었지만 별 효과는 없을 것 같았다. 옷장 구석에서 작은 인형을 꺼내 치마 주머니 속에 넣었다. 주머니는 크고 인형은 작아서 딱이었다. 2분 전 한 시여서 나는 서둘러 갔다
《미리암 프레슬리/유혜자 옮김-행복이 찾아오면 의자를 내주세요》(사계절,1997) 169쪽
2분 전 한 시여서
→ 열두 시 오십팔 분이어서
→ 한 시가 거의 되어서
→ 한 시가 다 되어서
→ 2분 뒤면 한 시여서
→ 한 시까지 2분이 남아서
…
영어를 쓰는 서양사람 말투대로 시간을 읽으면 영 어설플 뿐 아니라 엉성하고 얄궂습니다. 영어 말투로는 ‘열두 시 오십팔 분’을 ‘이 분 전 한 시’처럼 적을는지 모르나, 한국 말투로는 이처럼 안 적습니다. 게다가, 한국 말투로 시간을 나타낼 적에는 온갖 말투를 씁니다. 똑똑하게 몇 시 몇 분이라고 적는 한편, 어느 때가 다 되었다고 적고, 몇 분 뒤에 어느 때가 된다고 적습니다. 어느 때까지 몇 분이 남았다고 적기도 합니다. 4347.11.25.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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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나를 생각해 한 말이었지만 썩 도움이 안 될 듯했다. 옷장 구석에서 작은 인형을 꺼내 치마 주머니에 넣었다. 주머니는 크고 인형은 작아서 딱이었다. 열두 시 오십팔 분이어서 나는 서둘러 갔다
‘물론(勿論)’은 ‘그저’나 ‘다만’이나 ‘마땅히’나 ‘말할 것도 없이’로 다듬고, “나를 위(爲)해”는 “나를 생각해”로 다듬습니다. “별(別) 효과(效果)는 없을 것 같았다”는 “아무 도움이 안 될 듯했다”나 “썩 도움이 안 될 듯했다”로 손봅니다. “주머니 속에 넣었다”는 “주머니에 넣었다”로 바로잡습니다. 어디에 무엇을 넣을 적에는 “서랍에 넣다”나 “주머니에 넣다”나 “통에 넣다”처럼 적어야 올바릅니다.
(최종규 . 2014 - 우리 말 살려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