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책을 찾는다

 


  온누리에는 온갖 책이 태어난다. 이런 책이 나오고 저런 책이 나온다. 저마다 쓸모가 있어서 태어난다. 쓸모없이 태어난 책이란 없다. 다만, 누군가한테 쓸모있대서 나한테까지 쓸모있지 않다. 이를테면, 누군가는 주식투자를 하지만, 나는 주식이 무언지조차 모른다. 누군가는 자기계발을 할 터이나, 나는 자기계발이 무언지 하나도 모른다. 누군가는 성당이나 예배당이나 절을 드나들 텐데, 나는 시골에서 조용히 살아갈 뿐이다. 누군가는 집안에 텔레비전을 두고 연속극을 볼 테고, 나는 집안에 텔레비전을 안 들일 뿐더러 연속극을 쳐다보지도 않는다. 누군가는 자가용 몰아 골프장을 다닐 테고, 나는 골프를 모르기도 하지만 자가용도 없다.


  어제 서울에 일하러 왔다. 일할 곳으로 가기 앞서 책방 두 군데를 들렀다. 책시렁을 살피면서 시계도 쳐다본다. 일할 곳으로 가야 할 때를 지나고 만다. 택시를 잡아 신나게 달린다. 택시 일꾼이 넌지시 묻는다. “예술 하시는 분인가요?” “예술이라면 예술이고, 예술이 아니라면 예술이 아닌 일을 합니다.” “어떤 일을 하시는데요? 보통 사람 같지는 않아 보이고.” “보통 사람이 안 한다면 안 하는 일이지만, 보통 사람이 하려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에요. 저는 국어사전 만드는 일을 해요.”


  스무 살에 우리 어버이한테서 제금을 나서 혼자 살던 그날부터 두 아이를 낳고 시골에서 네 식구 살림을 꾸리는 마흔 살 오늘까지 ‘한국말사전 만들기’가 내 첫째 일이다. 그런데 한국에서 이런 일을 하는 사람은 몇쯤 될까? 이런 일도 ‘직업 사전’에 오르거나 ‘직업인’ 가운데 하나가 될까? 한국말사전 만들기를 스무 해 남짓 하는 이웃은 몇쯤 될까?


  내가 가장 마음과 힘을 쏟아서 하는 일이란 ‘한국말사전 만들기’인 만큼, 책을 찾아서 읽을 적에도 언제나 ‘한국말사전을 제대로 잘 만드는 길을 걷도록’ 살펴서 읽는다. 아주 마땅한 노릇인데, 한국말사전을 만들자면 이제까지 나온 모든 한국말사전을 모아야 한다. 한국말을 다룬 책과 논문을 챙겨 읽어야 한다. 한국 문화를 알고 배워야 한다. 한국 역사를 살피고 한국 사회와 정치와 경제를 헤아려야 한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다른 나라 말도 돌아보고, 다른 나라 문화와 역사도 아울러 짚을 줄 알아야 한다. 말 한 마디가 사람 마음에 어떻게 스미는가를 짚어야 하고, 학교에서 교사가 학생한테 교육을 어떻게 하는가를 돌아보아야 하며, 집집마다 여느 어버이가 이녁 아이를 어떻게 마주하는가를 알아야 한다. 그런데 이런저런 것보다 숲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 한국뿐 아니라 지구별 모든 나라 모든 겨레에서, 말은 숲에서 태어났다. 도시에서 지식인이나 권력자가 만든 말이 아니라, 시골에서 숲을 돌보고 아끼면서 살아온 사람들이 지은 말이다. 말밑을 헤아리면 알리라. 어느 나라 어느 겨레 말이든 모두 숲(자연)에서 태어났다. 숲말을 바탕으로 온갖 문명과 물질을 가리킨다. 갑작스레 하늘에서 똑 떨어진 말은 한 가지도 없다. 그러니, 한국말사전 만드는 일을 하자면, 다른 어느 대목보다 숲(자연)을 읽을 줄 알아야 하고, 풀과 꽃과 나무를 삶으로 고이 껴안아야 한다.


  지난 스무 해 한길을 걸어오며 내가 시골에서 보금자리를 튼 흐름을 돌아보니, 나로서는 언제나 아름다운 책을 찾는 발걸음이었구나 싶다. 한국말사전 만드는 일을 하는 사람으로서 한국말사전을 제대로 알차게 잘 만드는 길을 차근차근 익히고 배웠구나 싶다. 고등학교 다닐 적에는 한 해에 백 권을 읽자 했고, 스무 살을 넘긴 뒤로 한 해에 천 권을 읽자 했으며, 스물다섯 살 언저리에는 한 해에 이천 권을 읽자 한 뒤, 서른 살을 넘긴 뒤로는 한 해에 삼천 권을 읽자 했다. 마흔 살을 지나면서 더는 숫자를 세지 않는다. 풀포기 하나와 꽃송이 하나를 숫자로 따질 수 없다. 나무를 숫자로 세는 바보가 있겠는가. 구름과 빗물을 누가 숫자로 헤아릴 수 있는가.


  내가 맨 처음 책을 손에 쥔 때가 언제였는지 아득하지만, 어린 나이에 신데랄라를 읽을 적이든 마흔 나이에 임길택이나 권정생을 읽을 적이든 눈물을 흘린다. 내 책읽기는 아름다움을 찾으려는 책읽기이면서, 눈물을 흘리려는 책읽기이다. 눈물을 흘리도록 이끄는 책을 찾아서 살아간다. 내 글쓰기도 내 이웃과 동무 눈가에 맑은 웃음과 눈물이 촉촉히 흐르기를 바라는 글쓰기이다. 남이 읽어 주기 앞서, 내가 내 글을 쓸 적에 눈물을 흘리거나 빙그레 웃으면서 쓴다.


  남들이 몰라준다면? 몰라준다면 모르겠지. 알아준다면? 알아준다면 알겠지. 언제나 그뿐이다. 눈은 눈을 알아주라면서 내리지 않는다. 지구별 땅뙈기가 눈을 바라니까 눈이 내린다. 비는 비를 알아주라면서 내리지 않는다. 지구별 숲이 비를 바라니까 비가 내린다. 나는 글을 쓴다. 나는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사람으로 살면서 한국말사전을 만든다. 오늘 아침에는 고운 이웃님이 노래한 ‘무지개다리’라는 낱말 하나를 살살 노래하고 되새기면서 글을 쓰고 한국말사전 만드는 밑틀을 다진다. 모두 아름다운 사람이요 아름다운 책이자 아름다운 사랑이다. 4347.2.19.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책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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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letreeje 2014-02-19 14:13   좋아요 0 | URL
너무나 훌륭하고 좋은 글, 또 감사히 찜해갑니다~
함께살기님! 오늘도 기쁘고 좋은 날 되세요~*^^*

숲노래 2014-02-20 00:00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서울 일 마치고 고흥으로 돌아온 저한테
가장 즐거운 인사를 띄워 주셨네요 @.@

appltreeje 님도 언제나 아름다운 하루 누리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