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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오덕 일기 1 :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가? ㅣ 이오덕 일기 1
이오덕 지음 / 양철북 / 2013년 6월
평점 :
갑갑한 나라에서 살아가는 빛
[이오덕 선생님 책읽기 1] 《이오덕 일기》 1권
겨울에는 별이 빛나는 소리를 들으면서 밤을 누립니다. 아이들도 어버이도 밤별 환하게 빛나는 하늘 가만히 바라보면서 새근새근 잠듭니다. 봄을 맞이하면 멧새들 둥지에 깃들면서 봄꽃 돋는 소리를 들으며 밤을 누립니다. 아이들도 어버이도 새와 꽃이 어우러지는 들판 찬찬히 느끼면서 고단히 잠듭니다. 여름에는 무논에 개구리 노래하는 소리로 마음이 아늑합니다. 도시에서는 낮에도 밤에도 아침에도 저녁에도 온통 자동차투성이입니다. 도시에서는 한갓지게 잠을 이루기 어렵습니다. 밤이 너무 시끄럽고, 지나치게 밝으며, 몹시 어수선합니다. 자동차뿐 아니라 오토바이조차 들어설 수 없는 비알진 골목동네 안쪽에 살림집 있지 않고서야 조용하며 맑은 밤을 누리지 못해요.
시골마을 가을밤은 개구리 노랫소리 살며시 수그러들면서 온통 풀벌레 노래잔치입니다. 풀벌레는 나뭇잎과 풀잎 사이사이 깃들어 노래를 베풉니다. 나무와 풀은 저마다 밤바람에 나부끼면서 물결이 치는 듯한 가락을 사이사이 곁들입니다. 곡식 익는 냄새에 풀잎과 나뭇잎 물드는 내음 휘감기면서 아름다운 사랑 어디에서 피어나는가 하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 아무도 말을 하지 않는다. 선생질 하고 싶은 아이는 없는 모양이다. “너희들 생각이 좋다. 농사짓는 것도 좋고, 국수 빼는 일도 좋다. 부디 모두 착한 사람, 부지런한 사람 되어라. 다른 것 다 좋은데, 너희들 제발 선생질은 하지 마라. 참 선생질 못할 짓이다. 이렇게 돈 없는 아이들 졸라서 울리고, 날마다 성내고 고함치고 해야 하니 말이다. 난 이제라도 이런 선생 노릇 치우고 다른 일을 해서 돈을 많이 벌고 싶다. 그래서 그 돈으로 너희들같이 돈 없는 아이들에게 공책도 사 주고, 연필도 사 주고, 크레용도 사 주고, 과자도 사 주고 싶다.” (1962년 9월 19일)
- 공부를 못해서 시간마다 꾸지람을 듣는 아이들은 학교생활이 얼마나 괴롭겠는가? (1962년 9월 21일)
- 그렇다. 나는 통일이나 되면 교감이든지 교장이든지 하겠다. 아니, 통일이 되면, 그때야말로 아이들 앞에서 참선생 노릇을 하겠다. 그날이 오기까지 나는 밑바닥에 깔려서 신음하는 사람들과 숨 쉬며 살아갈 것이다. (1967년 3월 9일)
내 어릴 적 동네를 떠올립니다. 나는 인천에서 태어나 자랐습니다. 일곱 살 밑이었던 때는 어떻게 지냈는지 하나도 못 떠올립니다. 국민학교 1학년 적에도 일곱 살에 어떻게 뛰놀았는지를 못 떠올리고, 국민학교 3학년 적에도 여섯 살이나 일곱 살 적에 누구랑 무엇을 하며 놀았는지를 못 떠올립니다. 생각을 기울이고 기울여도 내 일곱 살 밑은 도무지 떠오르지 않습니다. 여덟 살 적부터 또렷하게 하나하나 되새깁니다. 경인고속도로 들머리요 인천부두 곁에 있는 5층짜리 열다섯 동 아파트마을에서 어린 날을 누렸습니다. 아파트마을에서 벗어나면 고속도로 어귀에 커다란 짐차 우글거리며 시끄럽습니다. 아파트마을 앞은 왕복 십이차선이었는지 찻길이 대단히 넓습니다. 건널목 건너자면 한참 걸립니다. 건널목 빨간불일 때에는 부두와 고속도로 사이로 커다란 짐차 우글거리며 귀가 찢어지는 소리를 내고, 건널목 푸른불 들어오면 비로소 모든 시끄러운 소리 멎으면서 ‘자동차가 이렇게 귀를 찢었구나.’ 하고 새삼스레 느낍니다.
그런데, 열다섯 동 아파트 모인 조그마한 마을로 한 걸음 두 걸음 들어서면 차소리가 사그라듭니다. 세 걸음 네 걸음 접어들면 내 또래와 동생과 언니 들 목소리가 울려퍼집니다. 퍽 넓게 펼쳐진 모래밭 놀이터에는 언제나 아이들이 가득했고, 웃고 울며 뒹구는 소리 넘쳤습니다. 자가용 가진 이는 매우 드물어 주차장은 언제나 또다른 놀이터가 되었습니다. 학교에서 칠판 지우는 주번 일을 하다가 주머니에 슬쩍슬쩍 감춘 몽당분필로 주차장 바닥에 금을 긋습니다. 어느 동에나 아이들이 많으니 놀이터를 차지하며 공을 차거나 치거나 어울리지 못하는 날 잦습니다. 저마다 이곳저곳에서 길바닥에 금을 긋고 놉니다. 금을 안 그어도 재미난 놀이 많고, 금을 그으며 새로운 놀이를 빚습니다. 주차장만큼 넓은 꽃밭에 경비 아저씨 몰래 들어가서 돌을 줍습니다. 돌치기 놀이를 하고 딱지치기를 합니다. 제기를 차고 술래잡기와 숨바꼭질을 합니다. 얼음땡을 하고, 어느 날은 ‘동 대항 달리기’를 합니다. 열다섯 동으로 이루어진 아파트마을에서 아이들 우루루 모여 아파트를 빙빙 도는 달리기대회를 거의 날마다 엽니다. 아파트마을 통틀어 자가용 가진 이가 손가락으로 꼽을 만큼 적은 터라 길바닥이며 주차장은 모두 우리 차지가 되어 어떤 놀이이든 실컷 합니다.
겨울이 되면 곳곳에 온갖 눈사람이 수도 없이 섭니다. 이곳저곳에서 눈싸움이 벌어집니다. 아이도 어른도 ‘아이들 눈싸움 놀이’를 하는 결에 날아오는 눈덩이 맞지 않도록 살피며 걸어야 합니다.
새해를 맞이하면 집집마다 아이들 밖으로 뛰쳐나와 연을 날립니다. 한두 연 아닌 수십 개 연, 때로는 백 개쯤 될 만한 연이 아파트마을 하늘을 뒤덮습니다. 연줄에 풀을 먹입니다. 유리가루 먹이면 더 단단하며 연싸움에서 이긴다 하지만, 나는 유리가루까지 먹이지는 못했습니다. 유리가루 먹이면 연줄을 어찌 잡나 싶었어요. 아이들 누구나 손수 연을 만들 줄 알고, 실을 감을 줄 압니다. 집에서는 언제나 어머니 거들며 바느질도 하고 갖은 집일을 다 하지요. 웬만큼 찢어진 옷은 사내도 가시내도 스스로 기웁니다. 아이들 누구나 바느질 못한다 하면 놀림을 받았어요.
- 교사들이 말하는 지극히 당연한 교육적인 견해가 여지없이 짓밟혀 버리는 곳에 아이들의 인권을 키워 가는 참교육이 이뤄질 수 없는 것은 너무나 환하다. (1963년 1월 6일)
- 두 아이가 다 산문이라고 쓴 것이 절실한 감정을 호소하여 글줄도 감정의 파동을 그대로 자연스럽게 끊어 썼기에 훌륭한 생활 시, 또는 생활 서사시로 되어 있었다. (1963년 5월 13일)
- 어른들은 그림을 그리든지 글을 쓰든지 관념적으로 개념적인 것을 그리고 쓰고 한다. 그런데 아이들은 구체적인 것, 현재 살아 있는 것을 보여준다. (1963년 6월 8일)
- 백일장 행사가 글짓기 교육을 망치고 있다. 작품의 심사도 제대로 되기를 바랄 수 없다. 출제도 옳게 못 하는 사람들이 작품인들 어찌 바로 보겠는가 … 잔디밭에 가서는 씨름을 하고, 또 그밖에 아이들은 온갖 재미있는 놀이를 생각해 내었다. 글짓기고 시 짓기고 그까짓 것이 다 뭘까? 천진하게 뛰노는 아이들의 모습보다 더 아름다운 시가 어디 있는가? 저녁때가 되어도 아이들은 가고 싶어 하지 않았다. (1964년 6월 6일)
커서 어른이 되면 무엇이 되거나 무엇을 할는지 걱정하지 않습니다. 나이 한 살 먹기도 되게 힘든데, 언제 어른이 되는 줄 알 턱이 없습니다. 생일떡 한 번 먹자고 한 해를 기다리는 나날이 몹시 길었습니다. 아침부터 밤까지, 공부하기 아닌 놀기로 보내다 보니, 하루가 참 길었겠지요. 아침부터 밤까지 즐기던 놀이 가짓수를 헤아리자면, 아마 백 가지가 넘을 테고, 이백 가지쯤 될 수 있어요. 집에서도, 마을에서도, 학교에서도, 길에서도, 또 동무네 집에서도, 언제나 새롭게 놀이가 떠오릅니다. 아이들마다 새로운 놀이를 몇 가지씩 생각해서, 저마다 생각한 놀이를 모두 다 합니다.
놀이를 할 적에는 사내나 가시내를 가리지 않습니다. 그저 똑같이 합니다. 국민학교 때에는 사내보다 키와 덩치가 큰 가시내 많았고, 사내보다 힘센 가시내도 많았습니다. 구태여 서로를 가르지 않아요. 때로는 사내와 가시내가 따로 무리를 지어 겨루기도 하는데, 사내 쪽이 밀릴 때가 많습니다.
놀고 싶으면 혼자 놀아도 되고, 동무를 불러도 됩니다. 동무를 부르고 싶으면 동무네 집 앞에 가서 섭니다. 동무 이름을 큰소리로 외칩니다. 한 번 척 부르면 창문 쾅 소리 나게 열고는 “알았어! 나간다!” 하는 소리가 나옵니다. 두 번이나 세 번 불러도 맞받는 소리가 나지 않으면, 거의 어김없이 이 아이가 집에서 꾸중을 듣습니다. 숙제도 공부도 않고 놀기만 한다고 집에서 꾸지람 듣겠지요. 동무 얼굴 아닌 동무 어머님 얼굴 쏙 나오면서 잔뜩 찌푸린 낯으로 빽 소리 지르시면 엉덩이에 불이 난듯 내뺍니다.
그러나, 혼쭐이 난대서 놀기를 그칠 아이들이 아니지요. 부르고 또 부릅니다. 내빼고 또 내뺍니다. 동무네 어머님은 지친 나머지 아이를 풀어 줍니다. 어느 때에는 “얘들아, 숙제는 하고 놀게 하자.” 하고 우리를 부릅니다. 그러면 “네.” 하고 말씀드리고는 동무네 집으로 들어갑니다. 둘이 머리를 맞대고 숙제를 하지요. 이십 분쯤 숙제를 하노라면 동무네 어머님이 무언가 주전부리를 내어줍니다. 내 국민학교 적에는 웬 숙제를 날마다 멧더미처럼 안기는지, 하루에 두어 시간 들여도 다 못할 적 많아요. 숙제더미를 해내느라 골을 썩이다가 겨우 마치면, 두 팔 번쩍 치켜들고는 “야, 이제 놀자!” 하고 외칩니다. 동무도 나도 숙제 사슬에서 풀려 홀가분하게 뛰쳐나갑니다.
- 꽃을 꺾지 말라, 나무를 꺾지 말라고 하는 것은 꽃과 나무를 보고 즐겨야 한다는 이유에서만이 아니다. 생명을 아끼고 귀하게 여기는 마음을 길러 주는 일, 이것이 교육의 근본이 되기 때문이다. (1964년 4월 22일)
- 어디 아늑한 마을 한쪽에서 아무도 몰래 살아가고 싶은 마음, 구수한 마을 사람들의 얘기나 들으며, 마을 아이들의 귀여운 웃음과 뛰노는 모습이나 바라보면서, 채소를 가꾸고 염소라도 먹이면서 살아가고 싶은 마음은, 앞으로도 이 고장 구석구석을 돌아다니게 할 것 같다. (1967년 3월 7일)
- 선생들은 손해를 안 보려고 한사코 아이들을 조르는 것이고, 이렇게 다른 직원들이 모두 보는 앞에서도 예사로 잔인한 체벌을 가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아이들이 자라나서 교사와 학교와 교육, 그리고 사회 전체에 대해 증오와 복수심을 갖게 되는 것이 당연하다 … 내 머리는 지금 너무나 어지럽다. 학교 돈을 걷어 먹으려고 눈이 뒤집힌 교장, 술, 아이들이 수라 장판이 되어도 방치해 두는 교사, 기성회비를 안 낸다고, 아니, 안 낼 것이라고 미리 예방 삼아 혹독한 체벌을 주는 ‘모범 교사’, 내가 살고 있는 곳이 바로 지옥이다. (1967년 3월 23일)
학교에서 우리들은 벌을 서면서도 놉니다. 두 팔을 들며 벌을 서지만 서로 키득키득 웃으며 놀다가 걸려, 교실 밖으로 쫓겨납니다. 교실 밖 골마루에 서서 또 서로 키득키득 웃으며 놀다가 걸려 흠씬 얻어맞고는 운동장을 빙빙 돕니다. 그러면, 운동장을 헉헉거리며 달리더라도, 또 서로 키득키득 웃으며 놀아요.
그런데, 국민학교 적에도 교사들은 몽둥이로 두들겨팰 뿐 아니라 손바닥으로 따귀를 때렸고, 주먹으로 머리와 가슴과 배를 후려쳤습니다. 구두 신은 발로 정강이를 차거나 배와 옆구리를 걷어차기도 하고, 쇠자로 팔뚝과 손가락과 손등과 허벅지를 벌겋게 때렸습니다. 당구채로 손톱 끝을 때려 피멍 들게 한 교사가 있고, 출석부 찢어지도록 머리통 후려갈긴 교사가 있습니다. 힘이 그닥 안 센 아줌마 교사나 할머니 교사(할머니 아닌 그저 나이가 쉰 줄 넘거나 예순 줄 가까운 교사였겠지요)는 플라스틱자를 세워 톡톡 내리쳐요. 그러면 손가락이며 손등이며 허벅지이며 빨간 줄이 죽죽 생길 뿐 아니라, 아픔이 오래도록 남습니다. 머리카락 휘어잡아 교단으로 끌어당기는 교사가 있고, 분필을 던져 눈자위에 푸른 멍 들게 하는 교사가 있습니다. 분필지우개를 던져 머리에 분필가루 하얗게 묻도록 하면서 분필가루 못 털게 하는 교사가 있어요. 밀걸레자루로 엉덩이에 피멍 들게 때리는 교사가 있는 한편, 밀걸레를 얼굴에 비비며 ‘걸레만도 못한’ 같은 막말을 아이들한테 퍼붓는 교사가 있었어요.
내가 다닌 국민학교는 좀 많이 가난한 아이들이 많이 모인 데였습니다. 학교도 가난하고 아이들도 가난합니다. 그러나 교사들은 대놓고 돈봉투를 바랐고, 아침모임이나 저녁모임 자리에서 우리더러 돈봉투 가져오라고 밝히는 날이 퍽 많았습니다. 아이들 집살림 어떠한 줄 뻔히 알면서 돈을 바랍니다. 아이들 집살림 걱정하지 않으면서 돈을 내놓으라 윽박지릅니다.
무엇이 그토록 교사들을 ‘악마’로 만들었을까요. 왜 그토록 교사들이 ‘악마’가 되어야 했고, 무엇이 이들을 손찌검과 주먹질과 막말을 일삼도록 이끌었을까요.
나와 동무들은 교사로 오랜 나날 일한 사람이 새해에 담임이 되면 고개를 푹 숙이며 아무 말 못합니다. 누구라도 ‘갓 대학교 마쳐 새로 교사가 된 젊은 여 선생님’이 우리 담임이 되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대학교를 갓 마쳤더라도 남 선생님은 주먹다짐이 드셀 뿐 아니라, 기운이 넘쳐서 신나게 매타작을 합니다. 게다가 군대까지 다녀온 남 선생님이라면 아찔합니다. 이와 달리 스물 조금 넘기고 교사살이 처음 하는 여 선생님은 우리들을 막말이나 주먹다짐으로 다스리려 하지 않아요. 개구쟁이들과 복닥이며 두 해 세 해 네 해 지나고서야 비로소 막말과 주먹다짐이 몸에 붙지요. 당신들 생각하기로는 이 개구쟁이들은 때리고 나무라고 마구 퍼부어야 ‘말을 듣는다’고 여겼을 테고, 무엇보다 학교에서 걷어야 하는 돈과 폐품과 숙제 따위가 어마어마하게 많았어요.
- “남을 욕하는 것은 어째서 나쁜가?” 대답이 없다. 한참 있다가 한 아이가 손을 들었다. 김일겸이다. “그 아이 마음이 나빠집니다.” 옳다. 뜻밖의 대답이다. 이런 대답이 나올 줄은 몰랐다. 참 좋은 대답이다. 남을 욕하거나 놀리거나 때리는 사람은 그 사람의 마음이 나빠지니 좋지 못한 것이다. (1970년 4월 23일)
- 여름마다 아이들은 곤충채집이란 이름으로 생명을 학살하는 훈련을 강요받는다. 이런 아이들이 어떻게 아름다운 심성을 가질 수 있으며, 자라나 어른이 되었을 때 평화로운 통일 민주 국가를 만들어 갈 수 있겠는가? (1970년 4월 28일)
- 나라의 행정 전체가 도시 중심, 있는 사람 중심인데, 말단 월급쟁이들이 이런 산골짜기까지 가난한 사람들 위해 찾아오기 싫어하는 것은 당연하다. (1970년 6월 23일)
1962년부터 2003년까지 교사 한 사람이 쓴 일기를 그러모은 책을 읽습니다. 이 가운데 1962년부터 1977년 사이에 쓴 일기를 먼저 읽습니다. 《이오덕 일기》(양철북 펴냄)입니다. 《이오덕 일기》는 모두 다섯 권으로 갈무리해서 나왔고, 1권에는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가?”라는 이름이 붙습니다.
무엇을 가르쳐야 할까요? 네, 삶을 가르쳐야지요. 어떤 삶을 가르쳐야 할까요? 네, 아름답게 누릴 삶을 가르쳐야지요. 아름답게 누릴 삶은 어떻게 가르쳐야 할까요? 네, 사랑으로 가르쳐야지요. 아름답게 누릴 삶을 사랑으로 가르치면 어떻게 될까요? 네, 아이들 모두 사랑을 받아먹으면서 아름다운 어른으로 자라겠지요.
1975년에 도시인 인천에서 태어나서 1982년에 국민학교에 들어간 내 지난날을 더듬으면서 《이오덕 일기》 1권에 나오는 시골마을 아이들 삶을 곰곰이 돌아봅니다. 시골마을 아이들 삶에다가, 시골마을 아이들을 만나며 삶을 가르치려 하는 이오덕 선생님 모습을 떠올립니다.
나는 1982년부터 1987년까지 여섯 해에 걸쳐 국민학생으로 지내는 동안, 교사들이 왜 이다지도 ‘악마’와 같이 모질고 짓궂으며 끔찍한 짓을 저지르는지 도무지 알 길이 없었습니다. 왜 이 사람들은, 그러니까 나한테 작은아버지뻘이거나 사촌형이거나 이웃집 아저씨 같은 이 사람들은, 또 나한테 작은어머니뻘이거나 사촌누나이거나 이웃집 아줌마 같은 이 사람들은, 왜 이렇게 무시무시한 얼굴로 아침부터 저녁까지 우리를 들볶으며 괴롭히는지 궁금했습니다.
왜 우리한테 숙제 지옥을 날마다 선물했을까요. 왜 우리한테 시험 지옥을 다달이 여러 차례 베풀었을까요. 왜 우리한테 체벌과 폭력과 따돌림과 편애와 인권침해와 인격모독을 언제나 끊임없이 쏟아부었을까요. 왜 우리한테 그토록 많은 돈을 거두어들이면서 당신들은 날마다 숙직실에서 술잔치를 벌였을까요.
남 선생님이 담임이 되면, 이들은 으레 아침 수업을 안 합니다. 남 선생님들은 아침 한두 시간쯤 으레 자습(자율학습)을 시킵니다. 지난밤에 술을 잔뜩 먹은 나머지, 교실에 있는 ‘교사 책상’에 엎디어 자기 일쑤요, 때로는 양호실 침대에 누워서 자기도 하고, 어느 날에는 숙직실에서 못 일어나 곯아떨어진 채 있기도 해요. 주번이 되면 숙직실이나 양호실이나 어디 빈 교실 돌아다니면서 ‘우리 담임’이 어디에서 술에 절어 뻗는 바람에 수업에 안 들어오는지를 찾기 일쑤였습니다.
- 이 벙어리 같은 아이들을 어떻게 하면 좋은가? 그런데, 이 아이들이 저희들끼리 골목이나 운동장에서 놀 때나 싸울 때는 조금도 거침없이 내뱉는 말이 있다. 개새끼! 씨팔년! 하는 말이다. 이런 욕설밖에 배운 말이 없다는 것인가 … 원인은 바로 이것이다. 군대식 훈련, 통제와 강압적인 명령으로 이뤄지는 교육, 여기에 무슨 민주적인 대화가 있으며, 협의와 토론과 참된 의견의 교환과 삶의 창조가 있을 수 있겠는가? 위에서 내려오는 지시 명령만의 질서와 체제에서는 아이들이 벙어리가 될 수밖에 없고, 노예처럼 길들여지는 동물이 될 수밖에 없다. (1971년 10월 23일)
-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 현실 속에 서민성을 찾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는가 싶다. 귀족과 서민은 이조 시대나 그 이전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있다. (1973년 10월 14일)
- 동화책 하나 변변히 읽지 못하는 아이들, 책이라고는 교과서밖에, 그것도 그냥 겉읽고 지나갔을 이 아이들, 노래 하나 배우지 못하고, 배웠더라도 그런 것은 다 잊어버리고 유행가와 욕설과 도시 동경 병에 걸려 있는 이 아이들, 이 아이들을 어찌하겠는가! (1974년 2월 11일)
내 이학년 일학기 때에 담임을 맡은 분은 우리 가운데 어느 누구도 안 때렸습니다. 우리들을 주먹으로도 손바닥으로도 몽둥이로도 출석부로도 밀걸레자루로도 안 때린 이학년 일학기 때 담임 여 선생님은 그만 일학기 마치고 학교를 떠나셨습니다. 학교를 떠나는 날에는, 한 반 예순 아이들 모두한테 다 다른 선물과 편지를 마련해서 하나씩 안겨 주며 울었습니다. 그때에는 하나도 생각하지 못했는데, 이분은 교무실에서 다른 교사들한테서 어떤 말을 들었을까요. 교무주임과 교감과 교장한테서 어떤 말을 들었을까요. 왜 아이들을 안 때려서 당신 수업 때에는 아이들이 시끄럽게 떠드느냐는 핀잔을 어떻게 견뎠을까요.
내 육학년 이학기 때에 갑자기 새로 와서 담임이 된 분은 남 선생님인데에도 으레 싱글벙글 웃는 얼굴이었습니다. 학교에서 남 선생님은 누구나 차갑고 매서운 얼굴로 우리를 쏘아보기만 했습니다. 여 선생님조차 우리를 바라보며 안 웃기 일쑤였어요. 아이들한테 웃음을 보이면 얕잡힌다고 생각했을까요. 아이들한테 웃어 보이면 헤벌레 하다고 생각했을까요. 싱글벙글 웃으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산수 깜지 쉰 장’을 숙제로 내주는 무서운 사람이었는데, 다른 남 선생님들과 달리 공도 같이 차고, 웬만한 놀이를 함께 하면서 하루를 보냈습니다. 졸업사진첩 사진을 찍을 때에 내가 이분 곁에서 옆구리를 간지럽히고 코딱지 파는 모습을 보여주어도 나를 꾸짖지 않고 ‘사진 찍는데 웃기지 마라’ 하면서 웃음을 참으며 모두를 귀엽게 바라보았습니다. 육학년 일학기까지 ‘남 선생님들 술에 절어 아침마다 숙직실에서 해롱거리는 모습’ 지켜보기 일쑤였지만, 이분을 찾으러 숙직실에 간 적은 떠오르지 않아요.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우리를 모질게 때리고 우리한테 거친 말 일삼던 분들은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우리한테 상냥한 눈빛과 웃음으로 나긋나긋 조곤조곤 이야기를 건네던 분들은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교육대학에서는 무엇을 가르쳐 주었을까요. 교과서는 우리한테 어떤 어른으로 크라는 이야기를 담았을까요. 동시는 왜 이쁘장한 말재주 놀이만 가득하고, 우리가 학교에서 보내는 삶은 왜 한 줄로도 보여주지 않았을까요. 학교에서는 왜 뻔질나게 돈을 걷고, 걷은 돈은 어디로 갔을까요. 방위 성금, 불우이웃돕기 성금, 평화의댐 성금, 때때로 전투기 성금과 구축함 성금 같은 돈은 모두 어느 주머니로 들어갔을까요. 학교에 왜 어린이은행이 있었고, 이 어린이은행은 왜 육학년 졸업을 해야만 돈을 찾을 수 있었을까요. 학교에서는 왜 다달이 쌀을 걷었으며, 학교에서는 왜 빈병과 신문종이를 잔뜩 모으느라 부산을 떨어야 했을까요. 교육대학은 이런 짓 하라고 교사를 길렀나요. 교육대학에서는 이런 짓 시키는 교육을 하고, 아이들 때리고 윽박지르며 얕잡아보는 교육이론을 가르쳤을까요.
- 그까짓 교육장들 비위 맞춰 동네사람들 등지는 것보다 교육장 꾸중 들어도 지방사람들이 나를 믿어 주는 것이 마음 편한 것이다. 학교는 교육장이 주인이 아니다. 아이들과 그들의 부모가 주인이어야 하니까. (1975년 11월 25일)
- 가장 중요한 것은 아이들을 정직하고 진실하게 길러 보겠다는 교사의 사랑이다. 이것만 있으면 그 다음의 방법은 모두 각자가 창조해서 할 일이다. 여러분들이 이론을 만들고 교육을 할 것이지 무슨 유명한 문학가들의 말을 너무 믿지 말라고 강조했다. (1976년 8월 19일)
- 국민학교 아이들은 선으로 어떤 모양을 그린다는 것이 아주 서툴고, 한편 색채로 감정을 나타내는 일에서는 색의 선택에서나 색의 조화에 있어서 선천적인 자질을 가지고 있는 것이 확실하다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지금까지 색채로 그리는 일에만 주로 의존하고 있었고, 따라서 색으로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아주 중요한 것임을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 … 이웃 아이들의 그림을 보고 흉내내고부터 그만 그림이 아주 엉망이 되어 버리고 전혀 창의성이 없어져 버린 것이다 … 오늘날같이 아이들이 억압된 상태에 있어서는 감정의 해방이 지극히 중요하며, 이것은 사물을 리얼하게 표현하는 일에 어쩌면 앞서야 할지 모른다. (1977년 11월 22일)
《이오덕 일기》를 읽으며 곰곰이 생각합니다. 내 국민학교 담임으로 이오덕 선생님이 한 해, 아니 한 학기, 아니 하루라도 있었으면 얼마나 즐거웠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왜 교사들은 구타와 폭력과 체벌과 인권침해와 인격모독과 편애와 돈걷기와 점수매기기와 차별과 따돌림을 일삼아야 했을까요.
즐겁게 일하고 즐겁게 놀면 아름다운 삶 될 텐데요. 즐겁게 웃고 즐겁게 사랑하면 저절로 교육 이루어질 텐데요. 채찍질을 한대서 말이 잘 달리지 않아요. 당근과 채찍을 함께 써야 하지 않아요. 아이들은 노예가 아니에요. 아이들은 기계가 아니에요. 아이들은 바보가 아니에요. 아이들은 장난감이 아니에요. 아이들은 아이들이에요.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아요. 교사로 일하는 어른들 모두 아이들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아요. 어버이가 된 어른들 모두 아이들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아요. 아이들과 두 눈 똑바로 마주하면서 이야기를 해 봐요. 아이들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주먹질을 하든 막말을 퍼붓든 해 봐요. 할 수 있나요? 할 수 있겠습니까? 할 만한가요?
어른도 아이도 사랑받을 때에 즐겁게 웃어요. 어른도 아이도 사랑받을 때에 즐거워요. 교육이란 사랑이에요. 사랑을 하지 않으면 교육을 이루지 못해요. 아이들은 사랑을 배우려고 학교를 다녀요. 교사들은 사랑을 가르치려고 학교를 다녀요. 교과서를 배우려고 학교 다니는 아이란 가여워요. 교과서를 가르치려고 학교 다니는 어른이란 불쌍해요. 교과서를 배우러 학교에 간다면, 처음부터 학교에 갈 까닭 없어요. 집에서 며칠 달달 외우면 그만인 교과서예요. 교과서 달달 외우도록 시키려는 교사라면, 처음부터 교사가 될 까닭 없어요. 교사가 없어도 아이들은 교과서 얼마든지 달달 외울 수 있어요.
아이들한테 무엇을 가르쳐야 할까요? 바로 어른들 스스로 배우고 싶으며 누리고 싶고 즐기고 싶은 사랑을 가르쳐야지요. 아이들한테 무엇을 보여주어야 할까요? 바로 어른들 스스로 이녁 삶 사랑하는 아름다운 눈빛과 손길과 마음밭을 보여주어야지요. 4346.6.23.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