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 해 책읽기
서울에서 스무 해 넘은 아파트 사잇길 걷는다. 지은 지 스무 해 넘다 보니, 처음 지으며 ‘옮겨 박은’ 나무들 모두 스무 해라는 나날을 살아냈다. 스무 해라는 나날은 나무로 치면 손톱 끝 때처럼 아주 짧은 겨를일 뿐이지만, 제법 키 자라고 줄기 굵으며 잎사귀 넓적하고 꽃망울 흐드러진다.
서울사람은 알까? 저 아파트 한 채 두 채보다 이 아파트 사이사이 자라는 스무 해 넘은 나무들이 훨씬 빛나고 아름다우며 사랑스러운 줄? 그러나, 나중에 아파트 재개발이니 재건축이니 하는 얘기 나돌면서 이 시멘트집 허물 적에 나무를 제대로 파내어 살뜰히 옮겨 다른 데에서 살릴 만한 건축계획이나 도시계획은 없으리라 느낀다. 내가 몰라서일는지 모르나, 나는 아직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마흔 해 묵은 아파트 나무’라든지 ‘쉰 해 먹은 아파트 나무’를 잘 건사해서 옮겨심어 살렸다는 소리를 못 들었다.
헌 아파트를 헐고 새 아파트 지을 때에는 언제나 ‘아파트 나무’ 잘라내어 버리기만 한다. 건축설계를 하든 토목공사를 하든, 건축과 토목 일을 하는 사람들 어느 누구도 나무한테 마음을 두지 않고 눈길을 기울이지 않는다. 마흔 해 묵은 나무를 옮겨심으면 아무리 새로 지은 아파트라 하더라도 머잖아 예순 해 살아낸 나무가 되고, 쉰 해 먹은 나무라 하면 일흔 해 살아가는 나무가 될 뿐 아니라, 헐고 새로 지은 아파트를 또 헐 무렵에는 백 해 즈음 살아내는 나무가 된다.
아직 도시사람은 나무 소담스러운 줄 모르는데, ‘아파트 나무’라 하더라도 백 해를 살아낼 수 있다면, 이제부터 이 나무 때문에 도시는 숲이 될 수 있다. 백 살 넘은 나무가 줄지어 있는 동네라면 이 동네는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보금자리 될 만하다.
오늘날 시골을 둘러보면 안다. 조선 끝무렵, 개화기,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해방, 이승만·박정희 독재정권 거치며 시골자락 나무들 온갖 뭇칼질에 시달리고 들볶인 나머지, 깊은 멧골에서조차 백 살 넘은 나무 찾아보기 어렵다. 나무를 심어 꽃을 보든 열매를 얻든, 나무 한 그루 적어도 백 살은 살아내고 삼백 살쯤은 숨쉬면서 우리 곁에서 푸르게 뿌리내리도록 북돋아야지 싶다. 집짓는 소나무 되자면 섣불리 가지치기 하지 않으며 곧게 자라도록 돌보아 삼백 살이나 오백 살은 살도록 지켜야 한다. 마을나무 되자면 천 살이나 이천 살쯤은 살아내어 둘레에 풀밭을 마련하거나 평상 하나 놓을 수 있어야 한다.
나무 한 그루는 오천 살을 살아간다. 오천 살이란 역사학자들 말하는 한겨레 발자국하고 같은 길이가 된다. 반 만 해라는 발자국이 되게 긴 듯 역사학자들 말하지만, 고작 나무 한 그루 살아내는 길이만 할뿐이다. 나무 한 그루는 한겨레 발자국을 고스란히 지켜보며 살아간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 나라 어디에 한겨레 발자국 고스란히 지켜보며 살아낸 오천 살 먹은 나무 있는가. 천 살 먹은 나무조차 몇 안 된다.
나무가 오래오래 살아가도록 보살피지 않으면서, 사람들은 스스로 마음밭 얼마나 깊고 그윽할 수 있는가를 잊는다. 나무가 푸르게 뿌리내리도록 마음 쓰지 않으면서, 사람들은 이웃과 동무를 사랑하는 마음씨를 스스로 잃는다. 서울 아파트마을 한복판을 걷다가 생각한다. 고작 스무 해 남짓 살아낸 ‘아파트 나무’라 하더라도, 스무 살 넘은 나무 있는 이 아파트마을은 조금이나마 ‘사람 깃들 만’한 동네가 되겠다고. 4346.4.22.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