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티나무·느티꽃·느티빛
봄느티꽃 만나고서 느티나무 이야기를 쓴다. 봄날 만나는 느티꽃 수십만 송이는 갑갑하던 내 머리를 환하게 열어젖힌다. 나는 무엇 때문에 머릿속을 갑갑하게 가두었을까 헤아려 본다. 수십만 송이가 될는지 수백만 송이가 될는지, 어마어마하게 가지를 벌려 앙증맞은 풀꽃 피우는 느티나무 푸른 빛깔 같은 머릿속 아닌, 왜 어지럽거나 어수선한 생각조각으로 갑갑한 삶 옭죄는가 하고 돌아본다.
누구라도 봄느티꽃 앞에서 아늑한 마음 된다. 언제라도 봄느티잎 앞에서 고요한 마음 된다. 아이들 살찌우는 마음밥은 윽박지름에서 태어나지 않는다. 어른들 북돋우는 사랑밥은 돈푼에서 샘솟지 않는다. 아이들은 따사로운 눈길로 하루하루 일구는 어버이하고 지내면서 마음밥 먹고 자란다. 어른들은 너그러운 손길로 하루하루 가꾸는 옆지기하고 살아가면서 사랑밥 먹고 큰다.
무엇을 써야 할까. 마땅히 사랑을 써야지. 어떤 글을 쓸 때에 좋을까. 마땅히 사랑을 쓸 때에 좋지. 글은 어떻게 써야 어여쁠까. 마땅히 사랑스럽게 써야 어여쁘지.
글쓰기를 다루거나 밝히는 온갖 길잡이책 쏟아진다만, 이런 틀 저런 얼개 갖춘다고 해서 글이 빛나거나 아름답지 않다. 이런 틀이 아니어도 되고 저런 얼개 없어도 된다. 글에는 사랑 한 타래 살포시 담으면 된다.
느티나무를 바라보자. 느티나무한테 어떤 틀이 있는가. 느티나무 잎사귀에 어떤 얼개가 있는가. 아무것 없다. 아무런 틀도 얼개도 없다. 느티나무는 그저 느티나무대로 이녁 삶을 사랑하며 자랄 뿐이다. 지난해에 큰 비바람 불며 이백 살쯤 먹은 나뭇가지, 또는 오백 살쯤 먹었다 할 나뭇가지, 아주 굵다란 나뭇가지 하나 부러졌다. 그런데 새봄 맞이해 새 잎사귀 틔우고 새 풀꽃 피우는 모습 바라보니, 우람한 나뭇가지 꺾인 티 하나 안 보인다. 그저 맑고 푸른 느티나무일 뿐이다.
논술시험이라든지, 무슨 보고서라든지, 어떤 논문이라든지, 이런저런 자료나 책이나 기사라든지 하면서, 스스로 틀을 세우면 글맛이 사라진다. 반드시 지켜야 할 말법이나 말틀은 따로 없다. 번역 말투이건 일본 한자말이건 그리 대수롭지 않다. 잘 모르면 모르는 대로 쓰면 된다. 다만, 사랑 하나를 담으면 된다. 사랑 하나 담아서 쓸 줄 알면 된다. 어설픈 말투야 나중에 손질하면 되지. 엉뚱한 말틀이야 나중에 추스르면 되지. 글을 쓸 때에 정작 담아야 할 알맹이인 사랑이 없으면, 무슨 즐거움으로 글을 읽겠는가. 맞춤법이나 띄어쓰기 아무리 잘 맞추면 무얼 하나. 글을 읽으며 누릴 사랑이 없으면, 무슨 보람으로 글을 읽나. 글월을 짧게 끊는대서 읽기 좋은 글이 아니다. 사랑을 담지 못한 글은 이래저래 틀을 짜맞춘다 하더라도 읽는 멋조차 없다.
느티꽃을 떠올린다. 느티빛을 마음에 담는다. 느티나무 모습 사진으로 환하게 찍는다. 아니, 느티나무 스스로 더없이 환하기에 누가 이 느티나무를 사진으로 찍는다 하더라도 참으로 환한 빛살 드리우리라 느낀다.
누가 찍더라도, 누가 보더라도, 누가 읽더라도, 느티나무 느티꽃은 싱그럽게 푸르다. 누가 쓰더라도, 누가 어떤 글 쓰더라도, 사랑을 곱게 실으면 넉넉하다. 글은 삶이기도 하지만, 글은 무엇보다 사랑이면서 삶이다. 글쓰기는 삶쓰기이기도 하지만, 글은 참으로 사랑쓰기이면서 삶쓰기이다. 글읽기, 다시 말하자면 책읽기란, 언제나 삶읽기이기도 하지만, 책읽기는 늘 사랑읽기이면서 삶읽기이다. 4346.4.14.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