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박헌영 트라우마 - 그의 아들 원경과 나눈 치유 이야기
손석춘 지음 / 철수와영희 / 2013년 4월
평점 :
무엇을 생각하는 삶인가
[따뜻한 삶읽기, 인문책 59] 손석춘, 《박헌영 트라우마》
- 책이름 : 박헌영 트라우마, 그의 아들 원경과 나눈 치유 이야기
- 글 : 손석춘
- 펴낸곳 : 철수와영희 (2013.4.17.)
- 책값 : 13000원
고흥군 봉래면 봉래산 편백나무 숲길 한켠에 피나물밭 있습니다. 피나물 아는 이한테는 피나물밭이요, 피나물 모르는 사람한테는 아무것 아닙니다. 모르는 사람한테는 피나물이 안 보일 뿐더러, 노랗게 피어나는 꽃 또한 안 보이지요. 줄기를 톡 꺾거나 잎을 톡 뜯을 적에 나오는 발그스름한 물을 보며 피나물이라 하기도 하고, 노란 꽃송이 바라보며 노랑매미꽃이라 하기도 합니다.
풀이름이 피나물인 만큼 나물입니다. 먹는 풀입니다. 누군가는 꽃만 바라보며 꽃 사진 찍을 테지만, 누군가는 이야 맛난 풀이로구나 하면서 줄기와 잎을 톡톡 끊어 나물로 삼습니다. 또, 누군가는 사진으로도 안 찍고 나물로도 안 먹을 테지요.
사람들마다 피나물꽃 바라보는 삶이 다릅니다. 사람들마다 풀 한 포기 마주하는 삶이 다릅니다. 집일 도맡는 누군가 피나물 뜯어서 날푸성귀로 밥상에 차린다면 먹을 테지요. 양념을 해서 나물무침으로 밥상에 차려도 먹을 테지요. 살짝 데쳐 나물버무림을 해서 밥상에 올려도 먹을 테지요. 그러나, 정작 스스로 피나물 뜯으러 멧마실 다니는 사람은 매우 적습니다. 식구들한테 피나물 먹이려고 멧마실 다니며 숲바람 마시는 사람은 참 적습니다.
.. 박정희가 일본 육사에서 일본 왕에게 충성을 굳게 맹세하고 있을 때, 대다수 자칭 ‘민족주의자’들이 일제의 앞잡이로 전락해 갈 때, 박헌영은 불굴의 의지로 독립운동을 이어갔다 … 박헌영은 살인적인 감옥 생활을 이겨가며 1939년 만기 출옥했다. 박헌영은 다시 혁명 활동에 들어가 지하조직인 경성콤그룹의 지도자로 활동했다. 1945년 8월 15일 현재 그는 광주에서 벽돌공장 노동자로 은신하며 지하운동을 벌여 나가고 있었다. 따라서 그해 9월 서울에서 조선공산당이 재건될 때 그가 지도자인 책임비서가 된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이었다. 박헌영 이상으로 일제와 줄기차게 투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 (7, 28∼30쪽)
고흥군 봉래면 버스터에서 군내버스를 탑니다. 여섯 살 세 살 아이들 데리고 버스에 타니, 어른 한 사람 버스삯만 치릅니다. 도화면 동백마을 우리 집으로 돌아가야 하니, 포두면까지 가는 버스를 탑니다. 버스삯 3100원입니다. 서울이나 부산 같은 큰도시라면 이만 한 거리 달리는 데에 버스삯 2000원조차 안 나오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시골이니 이만 한 삯 치릅니다.
누군가, 이만 한 버스삯 비싸다 여길 수 있습니다. 누군가, 이만 한 버스삯 내느니 자가용 타겠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자가용 장만하는 값이나 기름값은 쌀까요. 게다가, 군내버스로 3100원 내는 거리라면, 시골에서 택시 타고 달릴 적에 31000원쯤 나오는 거리입니다. 도화면 동백마을 우리 집에서 고흥읍내까지 군내버스로 1500원인데, 택시삯으로 치면 15000원 나와요.
참말, 사람들마다 다 다르게 느낄밖에 없습니다. 다 다르게 느낄밖에 없는 까닭은, 사람들마다 삶이 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더 깊이 살핀다면, 고흥군 봉래면, 곧 바깥나로섬 옛사람은 나로다리 놓이기 앞서는 굳이 이만 한 길 달릴 까닭 없어요. 바깥나로섬 옛사람은 바깥나로섬에서 밥과 옷과 집을 스스로 건사하며 살았지요. 안나로섬 옛사람도 굳이 다른 데 돌아다니지 않고 스스로 이녁 마을에서 밥과 옷과 집을 손수 건사하며 살았어요.
아이들과 군내버스를 타고 시골마을 구비구비 돌아서 집으로 갑니다. 원세동세거리에서 군내버스를 내리고는, 고흥읍에서 우리 마을 거쳐 도화면소재지와 지죽까지 달리는 군내버스를 새로 잡아 탑니다. 두 가지 군내버스를 타면서, 그야말로 시골자락 골골샅샅 홀가분하게 누빕니다. 이웃마을 봄맞이를 버스 창밖으로 바라봅니다. 바닷바람 쐬고 들바람 쐬며 숲바람 쐽니다. 버스삯 3100원과 1100원으로 한 시간 남짓 시골마실 흐드러지게 즐깁니다.
아마 누군가 이 길을 자가용으로 달린다면, 군내버스로 달릴 때처럼 느긋하게 즐기지 못하리라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자가용을 모는 사람은 앞만 보아야 하니까요. 이쪽도 저쪽도 실컷 내다볼 수 없어요. 자가용은 어디에든 멈추어 마음껏 돌아볼 수 있다지만, 멈추기 앞서까지는 거의 아무것도 제대로 누리지 못해요.
.. “김삼룡의 얼굴을 아는 사람이 너밖에 없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러니 중부경찰서로 가서 그가 잘 있는지 보고 오랬습니다. 그래서 가 보니 아저씨가 진짜 거기 있더라고요. 나무로 된 긴 의자에 앉아 있는데 한쪽 가랑이는 피로 말라붙어 검붉었어요. 어디가 어떻게 다쳤는지, 다친 다리가 왼쪽인지 오른쪽인지 모르겠고, 수갑이 나무에 채워져 있었어요.” “김삼룡과 눈이 마주쳤나요?” “네. 저는 하도 놀라 말도 못 하고 그냥 바라보고 있었거든요. 아저씨가 무서운 눈빛으로 저를 봐요. 아는 척을 못 하게 하는 거예요. 아예 접근을 못 하게끔 압박합니다. 저는 뒷걸음질쳐서 복도에서 나왔어요.” .. (52∼54쪽)
나는 인천에서 나고 자랐습니다. 우리 집 큰아이는 인천 골목동네에서 태어났고, 작은아이는 충청북도 음성 멧골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나는 어릴 적 인천에서 늘 제비를 바라보며 골목동무하고 뛰놀았습니다. 국민학교를 마치는 1987년까지 제비를 보며 놀았는데, 중학교에 들어서는 1988년부터 새벽 일찍 학교에 붙들리고 밤 열 시 넘어서야 비로소 자율학습과 보충수업에서 풀려나느라, 이때부터 제비 구경은 한 차례도 못합니다. 눈으로는 참고서와 교과서를 쳐다보아야 하는 수험생이 되었지만, 마음으로는 교실 창밖을 바라보면서 제비들 날갯짓 올려다보며 동무들과 골목에서 뛰놀던 일을 떠올렸습니다.
두 아이와 고흥 시골자락에 깃들어 지내면서 처마 밑 제비들 날마다 만납니다. 지난해 봄에는 둥지 하나만 있었는데, 여름 끝물에 어미 제비가 낡은 둥지 하나를 바지런히 손질해서 둥지가 둘 되었습니다. 올해 봄, 지난해 우리 집에서 태어난 새끼 제비들 모두 돌아와서 두 군데 둥지에 깃들며 놉니다. 어른인 나도, 우리 집 두 아이들도 늘 제비를 보고 제비 노랫소리 들으며, 제비똥 떨어지는 섬돌 언저리 신을 바라봅니다. 똥받침 달았어도 제비들은 어디에든 똥을 떨굽니다.
이른새벽부터 늦은밤까지 가만히 제비를 바라보며 생각합니다. 나는 중학생 되고부터 이 제비들하고 어울리지 못했지만, 우리 아이들 열너덧 살 될 무렵 갑자기 제비하고 등을 지고 마는 굴레에 갇히도록 할 생각 없습니다. 우리 아이들은 언제나 제비 노랫소리 듣고, 개구리 노랫소리랑 풀벌레 노랫소리 그득그득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풀내음 맡고 숲바람 쐬며 들햇살 먹는 싱그러운 숨결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점수따기 피 튀기는 끔찍한 싸움터에 아이들 내몰리도록 하고 싶지 않아요. 밥이랑 옷이랑 집을 아이들 손수 건사하고 마련하며 보듬을 수 있도록, 맑고 씩씩한 삶 누리는 길 함께 일구고 싶어요.
.. 일제 강점기에 살인적인 고문을 이겨내며 혁명 운동에 나선 사람들을 ‘간첩’으로 몰아 죽인 사실은 아무리 한국전쟁의 참화에 누군가 책임을 져야 할 상황이었다고 하지만, 사회주의자로서 금도를 벗어난 야만이었다. 그 과정에서 끔찍한 고문이 자행됐다는 증언은 그들이 진정으로 사회주의 혁명에 헌신한 사람들이었는가를 회의하게 해 준다 … 평생을 민족독립과 사회주의 혁명에 바친 박헌영을 죽인 것은 일본 제국주의자들도, 미군정도, 이승만 정권도 아니었다. 김일성이었다 .. (93, 104쪽)
손석춘 님이 원경 스님 만나 주고받은 이야기를 갈무리하면서 찬찬히 엮은 인문책 《박헌영 트라우마》(철수와영희,2013)를 읽습니다. 원경 스님은 ‘원경’이요 ‘스님’인 한편, ‘박헌영 아들’이라고 합니다. 소설쓰는 김성동 님하고 자동차 타고 멧길 달리다가 그만 비탈길에서 고꾸라져 다친 이야기를 읽고는, 아, 그때 그분이 바로 이분이었네, 하고 무릎을 칩니다. 그무렵 다쳤을 때에 왜 김지하 님한테 연락할 생각 못했나 하고 읊는 대목 읽다가, 그렇구나, 모두 그렇게 이어지는 끈이었네, 하고 무릎을 칩니다. 나는 이 이야기를 이 책 《박헌영 트라우마》에서 글로 만나기 앞서, 다른 사람한테서 먼저 들었어요. 1970년대에 잡지 《뿌리깊은 나무》 편집장으로 일하던 윤구병 님이 있고, 윤구병 님 옆지기로 김미혜 님이 있는데, 두 분이 슬기를 모아 엮은 《보리 초등국어사전》을 만들 때에 나는 두 분하고 함께 일했습니다. 나는 편집장이었고, 윤구병 님은 기획자였으며, 김미혜 님은 출판사 사장님이었습니다. 일하다가 쉬며 차 한 잔 마실 때에, 함께 도시락 펼치고 밥을 먹을 때에, 김미혜 님이 곧잘 지난날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는데, 그때 그 교통사고 이야기는 오래도록 잊히지 않았어요. 김성동 님이 그 교통사고 뒤로 얼굴 사진 안 찍는다 하던 이야기도 새삼스레 떠오릅니다.
삶이지요. 살기도 하고 죽음 문턱을 넘나들기도 하는 삶이지요. 서로 만나고, 서로 이야기하며, 서로 어울리는 삶이지요. 슬픈 일이 찾아들다가도, 기쁜 일이 찾아들고, 서글픈 일이 몰려들다가도, 아름다운 일이 넘실거리는 삶이지요.
더없이 마땅한 흐름이라고 느낍니다. 가을날 서늘서늘 바람 찾아들어 들판에 풀포기 거의 다 말라죽을 무렵, 모든 풀과 나무는 씨앗을 한껏 흙바닥에 떨굽니다. 이러면서 풀잎과 나뭇잎 씨앗 위로 내려놓아 씨앗이 얼어죽지 않도록 보듬고, 기나긴 겨울 동안 눈이 소복소복 내리면서 씨앗들은 시나브로 흙 품으로 스밉니다. 햇살 따사롭게 거듭나며 새로 봄이 찾아오면, 지난해 흙 품에 안긴 씨앗 하나둘 천천히 깨어납니다. 새 숨결 틔우며 새 잎 올립니다. 다시금 싱그럽게 푸른 잎사귀 내놓고, 마알갗 꽃망울 터뜨립니다. 풀과 나무는 해마다 삶과 죽음 갈마들면서 한결 푸르고 맑으며 씩씩합니다. 사람도 이와 같아요. 사람들 누구라도 봄이 있고 여름과 가을이 있으며 겨울이 있어요. 그리고, 다시 봄이지요.
.. “그것보다도 어머님이 계셨다는 사실 자체가 보통 충격이 아니었습니다. 진작 알았다면 그리워하기라도 했을 텐데, 외로울 때 가서 멀리 그림자라도 보고 올 수 있었을 텐데.” … “한산 스님이 사실을 역사적으로 보라고 일러 주었습니다. 아버지의 죽음은 역사가 심판하고 다뤄야 할 것이지, 인간이 인간을 상대해서는 안 된다고 했어요.” … “안기부에다 제가 박헌영 아들이라는 사실을 고발한 스님도 있어요.” … “아버지의 복권은, 우리 손 선생님이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저는 급한 게 아니라고 봅니다. 대신 남로당 전체, 이름 없이 산화된 그 사람들의 명예를 정말이지 바로 찾아야 합니다.” .. (130, 132, 148, 159쪽)
박헌영이라 하는 분 삶은 어떤 빛이었을까요. 봄빛이었을까요. 겨울빛이었을까요. 일본 제국주의자가 후려갈기던 주먹질을 견뎌야 하는 겨울빛이었을까요. 일본 제국주의자 물러간 자리에 ‘일본 제국주의자한테 빌붙은’ 이들이 권력을 뽐내며 우쭐거리던 등쌀에 다시금 허덕여야 하던 시리디시린 겨울빛이었을까요. 아니면, 어느 정당 높은 자리에 올라 어떠한 혁명을 이룰 수 있던 여름빛이나 가을빛이었을까. 이 땅 가난한 농사꾼들이 지주한테 시달리던 굴레를 벗겨내는 평등과 자유와 민주를 바라던 꿈결 어여쁜 한창 새싹 돋는 푸른 봄빛이었을까요.
박헌영 님은 이슬처럼 죽습니다. 박헌영 님 둘레에 있던 숱한 사람도 이슬처럼 죽습니다. 북녘에는 북녘대로 어떤 권력자가 독재를 부리듯 숱한 사람을 죽이며 권력을 거느립니다. 남녘에는 남녘대로 어떤 권력자가 독재를 부리듯 숱한 사람을 죽이며 권력을 거머쥡니다. 한국전쟁이 일어났을 적에 죽은 사람은 권력자가 아닙니다. 남녘에서도 북녘에서도 ‘여느 시골마을 흙일꾼’이 싸움터로 붙들려 나가 죽습니다. 한국전쟁통에 ‘지주’나 ‘일제 앞잡이’가 죽지 않았습니다. 미군 부대 폭격기가 퍼부은 폭탄은 시골마을 조그마한 살림집을 몽땅 불태웠고, 이 나라 예쁜 숲과 들을 온통 불질렀습니다.
전쟁은 권력자와 권력자가 다툰 힘싸움이나 힘겨루기가 아닙니다. 마을을 살찌우고 나라를 북돋우는 ‘가장 밑자리에 있는 시골 흙일꾼’을 총알받이로 내세우고 꼭둑각시로 세웁니다. 싸우려면 권력자끼리, 우두머리끼리 싸울 노릇이지, 막상 전쟁통에 우두머리는 어딘가에 숨어서 힘여린 사람들을 죽음터로 내몰기만 합니다. 혁명이란 무엇이길래 시골 흙일꾼 손에 총자루를 쥐어 주었을까요. 민주란 무엇이기에 시골 흙일꾼 손에 칼자루를 안겨 주었을까요.
서로서로 죽여야 평화가 찾아오거나 통일이 되거나 혁명이 되거나 민주를 이루는가요. 서로서로 흙을 만지면서 살림을 꾸리지 않고도 평화나 통일이나 혁명이나 민주를 이룰까요.
북녘 김일성이나 김정일이라 하는 사람도 밥을 못 먹으면 죽습니다. 남녘 이승만이나 박정희리 하는 사람도 밥을 안 먹으면 죽습니다. 그러면, 이들이 먹는 밥은 누가 짓는가요. 이들 스스로 짓는가요. 아니지요. 바로 시골 흙일꾼이 짓지요. 이들 권력 우두머리가 지내는 궁궐 같은 집은 누가 짓나요. 이들 권력 우두머리가 입는 으리으리한 옷은 누가 깁나요. 이들 권력 우두머리가 타고다니는 자동차는 누구 돈으로 장만하는가요. 바로 시골 흙일꾼 피땀이 있기에 권력 우두머리도 권력을 누립니다.
.. “우리 후세대들이 김일성이나 전쟁 책임 이런 걸 떠나서, 지금과는 다른 세계관에서 남북이 서로 이야기할 수 있을 때, 그때 통일이 이루어지지 않을까요” … “외롭고 배고픈 이웃을 생각하면서, 뭔가를 나누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고 봅니다.” … “상대방의 시각으로도 세상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생각은 금을 그을 수가 없는 거거든요.” .. (170쪽)
인문책 《박헌영 트라우마》를 읽으며 생각을 가다듬습니다. ‘아버지 박헌영’이 꿈꾸던 혁명이란, 곧, ‘아버지 박헌영’이 한겨레 삶자리를 아름답게 일구려 한 밑바탕은 무엇이었을까 하고 헤아려 봅니다. ‘아들 원경’이 바라는 삶이란, 곧 ‘아들 원경’이 한겨레 보금자리를 사랑스레 돌보려 한 밑힘은 무엇일까 하고 가누어 봅니다.
책을 읽다가 틈틈이 밥을 짓습니다. 아이들 먹일 밥을 짓습니다. 아이들 밥을 먹이고 손과 낯 씻긴 뒤 이를 닦입니다. 숨을 살짝 돌리고서, 아이들 옷가지를 빨래합니다. 방바닥을 쓸고 닦습니다. 이불을 들어 마당에서 팡팡 턴 다음 햇볕을 쪼입니다. 아이들 마당으로 쪼르르 따라나와서 까르르 웃으며 놉니다. 아이들 웃음소리 들으며 비로소 기지개를 켜고는 다시 책을 손에 쥡니다.
혁명이란 삶을 바꿀 때에 혁명입니다. 민주란 삶을 아름답게 돌볼 때에 민주입니다. 삶은 어떻게 바꾸어야 할까요. 저마다 스스로 밥과 옷과 집을 짓는 삶이 되도록 바꾸어야겠지요. 책을 읽거나 이론을 외운대서 혁명이 되지 않아요. 총이나 칼을 들기에 혁명이 이루어지지 않아요. 혁명은 낫과 호미로 이룹니다. 민주 또한 제도나 선거로 이루지 못해요. 책을 읽든 학교를 다니든 신문을 읽든 민주하고는 동떨어집니다. 민주는 들과 숲과 메와 바다를 골고루 사랑하는 손길일 때에 민주입니다. 멧자락에 구멍내어 고속도로 내는 짓은 민주가 아닙니다. 도시에서 펑펑 쓰는 전기를 뽑으려고 시골 아름다운 터전에 핵발전소랑 화력발전소 아무렇게나 때려짓는 짓은 민주가 아닙니다. 밥을 나눌 때에 평화라고 말들은 하지만, 돈 많은 기업이나 재산꾼들 스스로 밥(엄청난 재산)을 기꺼이 이웃하고 나누지 못해요. 돈은 많이 움켜쥐지만, 사랑은 조금도 붙잡지 못해요.
이제 책을 다 읽었으니 내려놓습니다. 아이들이 아버지를 부릅니다. 같이 놀자고, 같이 노래하자고, 같이 춤추자고 부릅니다. 그래, 아버지는 아이들 손에 이끌려 같이 놀고 같이 노래하며 같이 춤춥니다. 이론이나 학문으로 따질 것 없이, 육아지침서나 육아이론서를 들출 것도 없이, 아이들 노랫소리가 책입니다. 아이들 웃음소리가 혁명입니다. 아이들 이야깃소리가 민주요 평화요 통일이며 사랑입니다.
무엇을 생각하는 삶인가요. 우리들은 무엇을 생각하는 삶을 일구는가요. 아니, 삶을 일구기나 일구는가요. 생각을 하기는 하는 삶인가요. 인문책 《박헌영 트라우마》는 꼭 한 가지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박헌영 아들’이 아닌 ‘스님 원경’이 삶을 어떻게 바라보고 사랑하면서 하루하루 웃음꽃으로 누리는가 하는 이야기 한 자락 들려줍니다. 잘 읽었습니다. 책 아닌 삶을 잘 읽었습니다. 4346.4.9.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