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 쓰는가

 


  아이들 어머니가 집을 비운 지 열하루째 지난다. 이제 아흐레나 열흘 기다리면 집으로 돌아온다. 나도 옆지기도 아이들하고 이처럼 오래 떨어진 채 지낸 적이 아직 없다. 나도 옆지기도 아이들이 어느 나이에 이를 때까지 곁에서 함께 살아가며 서로 아끼고 보살피는 하루 누려야 한다고 생각하며 지냈다. 그러나, 이번에 옆지기한테 아주 뜻있고 보람있을 배움자리 하나 있어, 스무 날 남짓 집을 비운다. 이동안 나는 아버지로서 두 아이하고 지낸다.


  둘레 사람들이 자꾸 말한다. ‘사내(아버지)가 아이 둘 혼자 건사하는 일’이 쉽지 않으리라고. 그러면, ‘가시내(어머니)가 아이 둘 혼자 건사하는 일’은 쉬울까. 아버지들은 아이들을 제대로 건사하지 못하니, 노상 어머니들한테 ‘아이키우기(육아)’를 몽땅 도맡겨야 하는가. 사내들은 아이 맡아 돌보는 삶을 배울 생각을 안 해야 하는가. 사내들은 스스로 핑계거리 만들어 아이 맡아 돌보는 삶하고 자꾸 스스로 멀어질 생각인가.


  사내도 가시내도 아기로 태어나 어린이로 자라며 푸름이로 빛나다가는 어른으로 살아간다. 곧, 사내이든 가시내이든 아이들 마음을 곱게 건사하면서 어른이 되는 넋을 다스릴 때에 아름답다. 아버지로 살든 어머니로 살든, 두 사람 모두 어버이 넋을 보듬으면서 어린이 넋을 어루만질 줄 아는 착하며 참다운 숨결이 되어야 사람답다 할 만하다. 그런데, 왜 자꾸 사내(아버지)들은 스스로 사람다운 길하고 멀어지려 할까. 왜 자꾸 사내(아버지)들은 스스로 얼마나 아름답게 빛나는 숨결인가를 안 깨달으려 할까.


  나는 옆지기한테 말했다. 스무 날이 아니라 석 달이고 세 해이고 아랑곳하지 말라고. 해야 하는 만큼 하고, 할 수 있는 만큼 하면서, 이녁 스스로 몸과 마음을 튼튼하게 돌보는 길 찾을 때까지 하라고.


  내가 여기에 있건 저기에 있건, 또 옆지기가 거기에 있건 여기에 있건, 아무것 아닌 일이다. 모두 같은 하늘 밑에서 지내는 삶이다. 하루 떨어지건 한 해 떨어지건 다르지 않다. 열흘 못 보건 백 해 못 보건 대수롭지 않다. 서로 마음으로 만날 수 있을 때에 삶이고, 서로 마음으로 보살필 수 있을 때에 사랑이다. 입으로 떠드는 얘기가 아니라, 삶이란 이렇고 사랑이란 이러하다.


  두 아이들 고단하도록 놀리고, 두 아이들 배부르도록 먹이고, 두 아이들 즐겁도록 노래하고, 두 아이들 웃도록 함께 마실을 다니면서 하루하루 돌아본다. 나 스스로 잘한다거나 못한다거나 생각하지 않는다. 아이들과 함께 하고픈 일을 찾고, 아이들이랑 나란히 누리고픈 놀이를 살핀다. 글은 언제 쓰는가. 가장 쓰고 싶으면서 가장 하고픈 말이 터져나올 때에 쓴다. 글은 언제 읽는가.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을 만나고 싶을 때에 읽는다. 4346.4.7.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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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letreeje 2013-04-07 16:32   좋아요 0 | URL
정말, 아름답고 좋은 글..
감사히 마음에 꾹꾹 담아 갖고 갑니다.*^^*

숲노래 2013-04-07 17:24   좋아요 0 | URL
에고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