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값, 책읽기, 도서정가제

 


  책을 삽니다. 읽으려고 책을 삽니다. 나는 내가 읽을 책을 사려고 돈을 씁니다. 책은 책방에서 삽니다. 책방은 새책방이 있고, 헌책방이 있습니다. 새로 나온 책은 새책방에서 사고, 새책방에서 사라진 책이라든지 처음부터 새책방에 들어가지 않는 책은 헌책방에서 삽니다. 비매품이나 관공서 자료나 동인문학지나 자비출판물 들은 헌책방에 들어오기에 아주 고맙게 살 수 있습니다. 따끈따끈하게 새로 나오는 책들은 새책방에 정갈하게 꽂히기에 늘 고맙게 살 수 있습니다.


  내가 인천이나 서울에서 살림을 꾸리던 때에는 걸어서 찾아갈 가까운 책방이 많았고, 때로는 자전거를 몰아 찾아갈 조금 먼 책방이 많았습니다. 인천이나 서울에서 살던 때에는 언제나 매장책방을 들락거립니다. 도시를 떠나 식구들 함께 시골에서 살아가니, 매장책방 찾아갈 길이 없습니다. 시골마을에는 책방이 없기도 하고, 도서관이 없기도 합니다. 나 스스로 내가 도서관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읽고픈 책은 내 살림집에 서재를 꾸려 건사해야 하고, 언제라도 돌아볼 자료와 묵은 책은 나 스스로 도서관처럼 꾸며 알뜰히 보살펴야 합니다.


  우리 식구처럼 두멧시골에서 살아간다든지, 또는 섬에서 살아가는 이라면, 매장책방을 쓸 수 없으니 인터넷책방을 써야 합니다. 택배값을 들이더라도 인터넷책방에서 책을 장만합니다. 시골에서 읍내나 도시로 찾아가느라 들이는 품과 겨를을 헤아리면, 인터넷책방에서 책을 살펴 장만할 수 있는 일은 참 고맙습니다. 두멧시골에서는 읍내를 다녀오는 데에도 하루를 써야 해요. 집에서 인터넷을 켜서 책을 주문하고는 택배로 받을 수 있으니 품과 겨를을 얼마나 줄이는지 모릅니다.

 

  도시에서 살아가며 헌책방마실을 할 적에는 ‘나라밖 예쁜 책’을 헌책방에서 값싸게 사들일 수 있는 대목도 참 고맙다고 느꼈습니다. 나는 일본도 미국도 독일도 프랑스도 나들이하지 못합니다. 비행기삯도 없고 여권도 없으며 돈도 없습니다. 그런데, 헌책방마실만 하면, 나라밖 온갖 사진책을 여러모로 만날 수 있어요. 바라는 모든 ‘나라밖 멋진 사진책’을 만나지 못하지만, 한 해 두 해 열 해 스무 해 다니고 보니, 재미나며 아기자기한 나라밖 책을 참 많이 만납니다.


  내가 사고 싶은 책을 갖추어 주니 고마운 책방입니다. 내가 사고 싶다 생각하던 책이 아니지만, 문득 코앞에서 마주쳤을 때에 ‘어, 이런 책이 있었네.’ 하고 깨닫게 해 주니 고마운 책방입니다. 나는 내 머릿속에 담긴 지식으로만 책을 살필 수 없습니다. 내 머릿속에 안 담긴 책을 꾸준히 만나면서 내 마음밭을 일굽니다. 생각을 틔우고 마음을 열고 싶어 새로운 책을 꾸준히 만나려 합니다. 사랑을 살찌우고 꿈을 북돋우고 싶어 새로 나오는 ‘새책과 헌책’을 꾸준히 돌아보려 합니다.


  삶을 읽도록 부추기는 책을 손에 쥐면서 흐뭇하게 웃습니다. 내가 책 한 권 장만하면서 치르는 값이란, 내 웃음값입니다. 내가 책 두 권 장만하면서 내는 값이란, 내 기쁨값입니다.


  책을 한 푼이라도 에누리해서 장만했다고 기쁜 적은 없습니다. 내가 읽을 책을 살 적에 기쁠 뿐입니다. 내가 읽지 않고 책꽂이에 모시기만 하는 책을 값싸게 장만한들 조금도 기쁠 일이 없습니다. 읽지 않고 모시는 책은 으레 짐덩이입니다. 읽을 때에 책이고, 읽지 않고 모실 때에는 짐이면서 겉치레입니다. 4346.1.22.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3)


댓글(6)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oren 2013-01-22 11:35   좋아요 0 | URL
저도 어릴때 시골에서 살아봐서 '책 한 권'이 얼마만큼 귀한 줄을 체험해 봤어요.

초등학교에 다닐 땐 '군립도서관'에 그득한 '세계명작동화'를 읽기 위해 우리 마을에서 읍내까지 왕복 30리길을 혼자서 곧잘 다녀왔어요. 검정고무신을 신고 자갈 투성이의 신작로길을 걸어다녔지요. 여름방학땐 그나마 나았지만 추운 겨울방학땐 몹시도 추웠어요. 그렇지만 군립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나올 때의 그 뿌듯함이란 어떤 말로도 표현하기 힘들 정도였죠.

중1때는 국어선생님이 여름방학을 맞아 독후감을 써오라는 숙제를 주셨는데, 읽어야할 책들이 김동인의 <감자>, <발가락이 닮았다>,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 주요섭의 <사랑손님과 어머니>, 염상섭의 <표본실의 청개구리> 등이었어요.

저희 동네엔 그런 책들이 있는지 없는지조차 잘 몰라 마침 제 짝궁한테 물어보니 자기네 친척집엔 그런 책들이 아마도 있을 꺼라고 하더라구요.(그 친구가 사는 동네는 조지훈 시인의 고향으로 유명한 '주실마을'이었고, 마침 제 짝궁도 '주실조씨'였어요. ㅎㅎ) 그래서 여름방학 중 어느날 우리 동네의 제 친구와 함께 '제 짝궁이 사는 동네'까지 신작로를 걸어서 다녀온 적이 있었어요. 편도로는 30리, 왕복으로 60리길이었는데 아침 일찍 나섰다가 제 짝궁을 만나 <근대문학전집>이라는 두꺼운 책들을 빌린 뒤에 오후 늦게 우리 마을로 되돌아왔어요. ㅎㅎ

그렇게 힘들게 구해온 책들이었기 때문에 그걸 펼쳐 읽는 기쁨은 정말 흥분되는 일이었죠. 그래도 까마득한 옛날에 우리 선조들이 책 한 권 읽기 위해 직접 책을 '필사'했던 노고에 비하면 정말 아무 것도 아닌 셈이라 느껴요.

숲노래 2013-01-22 12:29   좋아요 0 | URL
어마어마한 이야기를 간직하시네요.

어릴 적 다닌 '책마실' 이야기는
찬찬히 적바림해 보시면
'책 한 권'이 될 만하겠는걸요?

그때 그렇게 다니면서 보고 듣고 느낀
시골과 숲과 마을과 사람
이야기 솔솔 풀어내시면서
하루하루 누리시면,
아이들한테도 다른 여러 사람들한테도
참으로 아름다운 삶과 사랑이 되리라 믿어요!

페크pek0501 2013-01-22 14:31   좋아요 0 | URL
" 내가 책 한 권 장만하면서 치르는 값이란, 내 웃음값입니다. 내가 책 두 권 장만하면서 내는 값이란, 내 기쁨값입니다." "읽을 때에 책이고, 읽지 않고 모실 때에는 짐이면서 겉치레입니다."
- 좋은 글입니다.

숲노래 2013-01-22 18:30   좋아요 0 | URL
도서정가제 문제는
누가 옳고 그르냐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책을 마주하는 우리 마음을 돌아보는 길을
새로 찾는 데에서 찾아야지 싶어요.

transient-guest 2013-01-23 02:12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저도 중학교 다닐때 읽고싶은 책을 사려고 일주일 동안 점심값을 아껴서, 토요일에 집에 오는 길에 서점에 들려 한 권씩 사들인 기억이 나네요. 그러고서는 주머니가 텅텅 비어서, 집까지 4-5정거장을 걸어왔었죠. 지금도 책을 구입하는 기분은 좋지만, 그때처럼 설레이거나 하지는 않네요.

숲노래 2013-01-23 02:17   좋아요 0 | URL
오... 그러셨군요.
그러고 보면, 저도 버스삯을 아껴 늘 걸어다니면서,
버스삯 아껴 모은 돈으로
책도 사고 우표도 사고 편지종이도 사고 하면서
책이랑 편지쓰기를 즐기던 어린이요 푸름이로 살았던 일이 떠오르네요 @.@

설레는 마음이란 참 중요하다고 새삼스레 느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