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체는 너무 오래 울고 있다 - Pamphlet 1
박노해 지음 / 느린걸음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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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을 찍고 싶은 이야기
 [내 삶으로 삭힌 사진책 37] 박노해, 《아체는 너무 오래 울고 있다》(느린걸음,2005)

 


- 책이름 : 아체는 너무 오래 울고 있다
- 사진·글 : 박노해
- 펴낸곳 : 느린걸음 (2005.11.7.)
- 책값 : 9800원

 


  (1) 아체에서 사람을 읽는다


  사진을 찍고 싶다고 느끼기에 사진을 찍습니다. 사진에 담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고 생각하기에 사진을 찍습니다. 나는 내 사랑을 들려주고 싶기에 사진을 찍습니다. 나는 네 사랑을 듣고 싶어서 사진을 찍습니다.


  사진 한 장에는 내 사랑이 고스란히 담깁니다. 사진 두 장에는 네 사랑이 나란히 담깁니다. 사진을 찍는 내 손길을 타고 내 마음이 흐릅니다. 사진으로 찍히는 이녁 눈길을 타고 이녁 마음이 흐릅니다. 사진기는 서로를 잇는 징검다리가 됩니다. 사진기에서 나온 사진 한 장은 서로 꿈꾸는 삶을 보여줍니다. 사진기로 빚은 사진 두 장은 우리들이 누리고 싶은 아름다운 꿈누리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 그래도 쓰나미 재앙으로 계엄치하의 아체 땅에 외국인들이 찾아와 자신들의 오래된 고통을 들여다봐 주는 것이 위안이고 힘이라고, 아무 힘 없는 나를 반겨 주는 것이었다 … 그는 말했다. “인도네시아 정부는 구호금이나 착복하며 뒷짐지고 웃고만 있다.” 정말이지 정부가 움직인 흔적은 아무것도 없었다. 천막을 쳐 주는 것도 식량을 공급하는 것도 세계의 구호단체들이었다. 그나마 그런 구호의 손길도 인도네시아 정부가 조성한 집단 난민촌에만 집중되고 있었다 … 난민촌은 바닷가 자기 집터와 생계 터전에서 한두 시간씩 멀찍이 떨어진 곳이다. 인도네시아 정부는 2차 쓰나미에 대비하기 위해서라고 하지만, 이곳에서 그들이 할 일이라곤 아무것도 없다. 난민들은 수동적으로 주는 것을 받아먹기만 하다 보니, 배급 이권 다툼에나 관심이 갈 수밖에 없다 ..  (34, 48∼49, 68쪽)


  나는 한국에서 살아갑니다. 나한테는 한국사람이라는 이름표가 붙습니다. 한국에는 주민등록증이 있습니다. 나는 내가 태어난 1975년 12월 7일이라는 숫자를 앞에 박아 ‘751207’로 여는 주민등록번호를 받습니다. 이곳 한국에서 살아가자면 나는 내 어버이나 내 아이들 이름을 잊더라도 내 주민등록번호 숫자는 외워야 합니다. 이 나라 한국에서 일거리를 얻자면 나는 내 동무 이름을 모르거나 내 이웃 이름은 잊더라도 내 주민등록번호 숫자는 아로새겨야 합니다.


  주민등록번호가 박힌 주민등록증에는 내 앞얼굴 사진이 실립니다. 주민등록증을 만들 때에 담는 사진은 ‘웃어’도 ‘울어’도 ‘찡그려’도 안 됩니다. 고개를 옆으로 돌리거나 살짝 삐딱하게 있어도 안 됩니다. 주민등록증 사진은 뒤쪽을 까맣게 하거나 파랗게 합니다. 집에서 찍은 사진은 주민등록증에 못 넣습니다. 맑거나 밝거나 곱구나 싶은 옷을 입어도 주민등록증에 못 넣습니다. 사내는 서양 정장을 걸쳐야 합니다. 가시내는 깔끔한 정장이나 정장 비슷한 차림새여야 합니다. 한복을 입고 사진을 찍으면 무언가 다른(?) 사람으로 여깁니다. 수염을 안 깎거나 머리를 기른 채 사진을 찍는 사내 또한 어딘가 다른(?) 사람으로 살핍니다. 그러니까, 주민등록증에 담는 사진은 온통 ‘범죄자로 여기는 모습’이라고 할까요. 이름은 ‘증명’사진이지만, ‘앞으로 범죄자가 될 수 있는 사람을 미리 보여주는(증명)’ 사진인 셈입니다.


  그런데 이 주민등록증을 가리켜 ‘신분증’이라 가리킵니다. 내 신분을 가리키는 쪽종이라고 합니다. 여느 때에 주민등록증을 꺼낼 일이란 없습니다. 어쩌다 주민등록증을 꺼내야 할 일이 있을 때면 새삼스레 생각합니다. 이 작은 쪽종이가 어떻게 ‘나를 말하’거나 ‘나를 보여주’는 그림이 될 수 있을까 궁금합니다. 내 마음 어느 구석이 이 작은 쪽종이에 담겼을까 궁금합니다. 내 생각이나 내 꿈이나 내 삶이나 내 사랑 가운데 어느 한 가지가 이 작은 쪽종이에 깃들었을까 궁금해요.

 

 


.. 아체 고아들 입장에서 보면 식민 본국의 수도에 와 있는 것이었다. 아체에서는 아체어를 썼는데 이곳에서는 인도네시아어를 쓴다. 언어 때문에 이중의 고통을 겪는 아이들도 있었다 … 뚜띠 총장은 내게 성금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자꾸만 기숙사 시설을 증축해야 한다는 등의 언질을 주었다. 그럴 만한 돈도 없지만 시설에 투자해 봐야 고아원 것이지 아이들 것은 아니다 … 그들(이름난 구호단체 자원봉사자)은 정치에 무관하다고 하지만 ‘쓰나미 정치’가 벌어지고 있는 아체에서 사실상 ‘무관심의 정치’를 하고 있는 셈이다 ..  (53, 60, 72쪽)


  나는 내 신분을 모릅니다. 내 신분이 거룩한지 초라한지 모릅니다. 나는 그저 나일 뿐이라고 느낄 뿐, 내가 어떤 나인지 모릅니다. 나를 무엇이라고 말해야 할는지 모릅니다. 내가 아는 나란, 풀과 나무와 벌레와 새를 사랑하려는 나요, 옆지기와 아이들과 이웃하고 어깨동무하려는 나입니다. 해와 흙과 달과 바람을 좋아하려는 나요, 지구별 동무랑 곱게 손잡으려는 나입니다.


  문득 궁금합니다. 아체라는 곳에도 신분증이 있을까요. 인도네시아와 아체를 가르는 신분증이 있을까요.


  제주사람이 쓰는 제주말을 ‘뭍사람’은 쉬 알아듣지 못합니다. 곰곰이 생각을 기울이면 소리와 결과 느낌에 따라 어떤 뜻인가 읽을 수 있으나, 오늘날 여느 제도권교육을 받으며 ‘표준말’에 길드는 사람은 제주말을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곧, 제주말과 전라말이 다르고, 제주말과 서울말이 다르며, 제주말과 강원말이 달라요. 삶도 제주살이와 경기살이가 다르다 할 만하고, 제주살이와 경상살이가 다르다 할 만해요.


  그렇다면, 제주도 사람들이 ‘제주 자치 나라’를 세우겠다고 한다면, 뭍사람은 어떻게 여길까요. 말도 삶도 다르니까 흐뭇하게 받아들여 자치정부를 세우라 할까요. 제주도에서 푸는 물을 사들일 때에는 세금을 더 내고, 제주도로 관광하러 갈 때에는 출입국 수수료를 내라는 말을 스스럼없이 받아들이려 할까요.


.. 그(울렐르 마을 젊은이)는 말했다. “우리더러 거지가 되라는 말입니까? 우리가 여기를 떠나 버리면 그건 인도네시아 정부가 원하는 것을 해 주는 겁니다. 우리는 일을 해야 합니다. 우리 자신의 힘으로 일어설 겁니다. 인도네시아 정부는 절대 안 해 줍니다.” … “우리가 키울 겁니다. 한국에서는 이런 아이들을 고아원으로 보냅니까?” … 압도적인 무력과 외교력을 가진 인도네시아는 아체를 결코 내어주지 않을 것이다. 동티모르처럼 독립을 허락하기에는 아체에 자원이 너무 많다 … 정말이지 아체는 계엄군과 무장 경찰이 훨씬 더 많다. 여자와 아이들보다 더 많고, 밥집과 찻집보다 더 많고, 학생과 선생보다 더 많고, 나무와 꽃보다 더 많고, 깜빙과 짐승보다 더 많다 … 이렇게 불의한 전쟁은 인도네시아의 돈만 낭비한 것이 아니다. 노동자의 땀과 전문가의 창의성과 아이들의 미래마저 탕진한 것이다 ..  (77, 78, 93, 175, 208쪽)

 

 


  아체는 인도네시아에 깃들 수 있습니다. 아체는 ‘아체 나라’가 될 수 있습니다. 어느 쪽에 서든 아체사람 스스로 생각하며 걸어갈 길입니다. 아체에 인도네시아 군대나 경찰이 머물러야 하지 않습니다. 아체 교육과 문화와 사회와 복지와 경제에 인도네시아 중앙정부가 남 내놔라 배 내놔라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인도네시아 중앙정부는 군대와 경찰을 잔뜩 이끌고 아체를 식민지처럼 주무릅니다. 아체사람을 노예로 부리며 석유를 캐거나 광석을 캐거나 논밭을 일구도록 시키면서 모든 권리를 빼앗습니다. 중앙정부한테 한마디를 하면 총알 하나로 목숨을 빼앗습니다.


  새삼스레 한국을 돌아봅니다. 한국에서 중앙정부한테 한마디를 한대서 총알 하나로 목숨을 빼앗지는 않습니다. 때때로 명예훼손이라느니 공무집행방해라느니 해서 무시무시한 벌금을 물리곤 하지만, 목숨을 쉬 빼앗지는 않습니다. 다만, 군사독재자가 우두머리 자리에 있을 때에는 사람 목숨도 파리 목숨처럼 함부로 꺾었어요. 이제 한국에서는 사람 목숨이 파리 목숨에서 벗어난 지 스무 해 즈음 되었어요. 그런데, 사람 목숨이 파리 목숨에서 벗어났다고는 하나, 중앙정부한테 외치는 목소리가 스며든다고는 느끼기 어려워요. 아니, 중앙정부 아닌 지방정부한테 외치는 목소리조차 스며든다고는 느끼기 힘들어요. 신분이 높거나 계급이 높거나 돈이 많거나 이름이 알려졌거나 어떤 권력 한 가지라도 손에 쥐어야 중앙정부한테 목소리를 낼 만해요. 중앙정부가 세운 제도권 틀에서 벗어나려 하면 거의 모든 권리를 빼앗겨요. 주민등록을 안 한다든지, 주민등록증에 손그림을 안 찍는다든지, 제도권학교에 안 다닌다든지, 공공기관이나 회사에 일자리를 얻지 않는다든지, 주민세나 보험세를 안 낸다든지 하면, 머잖아 ‘사람이지만 사람 아닌 것’으로 다루어집니다.


.. (한국 마산·창원 지역 이주노동자였던) 그는 “한국에서 많이 맞고 억울하고 분했는데, 여기까지 찾아준 당신을 봐서 다 용서할게요.” 하며 너털웃음을 터트린다 ..  (173쪽)


  내 삶은 주민등록증 같은 쪽종이 하나에 담지 못합니다. 내 이야기는 고등학교나 중학교 졸업장 같은 쪽종이 하나에 담지 못합니다. 내 사랑은 주민등록번호 같은 숫자에 담지 못합니다. 내 꿈은 내 은행계좌에 찍힌 숫자에 담지 못합니다.


  내 삶은 오직 내 마음에 담습니다. 내 이야기는 내 마음을 살찌우며 쓰는 글에 담습니다. 내 사랑은 내 마음에 실어 내 몸으로 이 땅에 심습니다. 내 꿈은 내 마음에 실어 내 손가락을 놀릴 때에 사진 한 장에 가만히 심습니다.

 


  (2) 시인이 찍은 사진


  시를 쓰는 박노해 님이 찍은 사진으로 엮은 《아체는 너무 오래 울고 있다》(느린걸음,2005)를 읽습니다. 박노해 님은 시인으로서 여러 시집을 내놓았습니다. 그런데 박노해 님은 시인이면서 노동자였습니다. 노동자로 살아가며 시를 쓰던 사람입니다. 돈을 버는 길은 노동자였으며, 마음을 밝히는 길은 시인이었어요.


  이제 박노해 님은 노동자로 살아가지 않습니다. 따로 어떤 이름표를 붙일 만한 일자리를 마련하지 않습니다. 그예 ‘사람’으로 살아가요. 사람으로서 스스로 가장 하고픈 일을 해요. 사람답게 스스로 가장 사랑할 만한 곳을 찾아다니면서 일을 해요.


.. 사진 속의 공포 어린 얼굴 표정들을 보자 15년 전 나 자신의 악몽이 그대로 되살아 왔다. 안기부 지하 밀실에서 24일간의 고문 끝에 감옥에 입감되면서 나는 수번이 적힌 팻말을 들고 사진을 찍었다. 그때 내 사진도 이렇게 살벌할 것이다 ..  (82쪽)

 


  시를 쓰는 마음으로 글을 씁니다. 시를 쓰는 마음으로 한국을 떠나 이라크로 버마로 아체로 찾아가서 사람들을 만나고, 사람들 만난 이야기를 글로 갈무리합니다. 사람들 만난 이야기를 글로 갈무리하기 앞서 사진으로 하나둘 아로새깁니다.


  박노해 님이 좋은 사진기를 쓰는지 값진 사진기를 쓰는지 모릅니다. 박노해 님이 시를 쓸 때에 좋은 연필이나 값진 만년필을 쓰는지 모르는 만큼, 어떤 사진기를 쓰는지 알 길이란 없겠지요. 어떤 연필을 쓰는지 궁금하지 않을 뿐더러, 어떤 사진기를 다루는지 궁금할 일이 없겠지요.


  왜냐하면, 어떤 시를 쓰는지를 대수롭게 바라볼 노릇이니까요. 왜냐하면, 어떤 사진을 찍는지를 대수롭게 헤아릴 노릇이니까요.


.. 전쟁보다 더 무서운 것은 전쟁의 후폭풍이라는 것을 나는 이라크에서 경험했다 … 그래도 아체의 밤하늘에는 은하수가 흐르고 밤벌레 소리는 야생의 적막감을 더한다 … 아체 아이들은 울지 않고 이제 스스로 웃음꽃을 피운다 … 가진 것 없는 가난한 삶은 스스로 강인하게, 스스로 지혜롭게 흘러간다 ..  (114, 117, 122쪽)

 


  시를 쓰는 마음으로 사진을 찍기에, 아체 밤하늘을 바라보며 미리내를 느낍니다. 아체에서도 밤벌레 노랫소리를 듣습니다. 한국에서도 밤하늘 바라보며 시를 썼겠지요. 한국에서도 밤벌레 노랫소리를 들으며 감옥에서 시를 썼겠지요.


  아체 아이들뿐 아니라 아체 어른들 누구나 스스로 웃음꽃을 피웁니다. 스스로 웃음꽃 피우는 사람들을 마주하면서, 박노해 님도 스스로 피울 한 가지란 눈물꽃 아닌 웃음꽃이로구나 하고 깨닫습니다. 박노해 님이 스스로 쓸 글이란 울음꽃 같은 글이 아니라 웃음꽃 같은 글이로구나 하고 느낍니다. 곧, 박노해 님이 손에 사진기를 쥐고 사람들을 만날 때에 담을 사진이란, 환한 웃음꽃이 되고 맑은 웃음꽃이 되며 빛나는 웃음꽃이 될 사진이에요.


  해님 같은 사진입니다. 달님 같은 사진입니다. 꽃님 같은 사진입니다. 눈님 같은 사진입니다. 흙님 같은 사진입니다. 물님 같은 사진입니다.


  박노해 님은 무얼 사랑할까요. 미루나무를 사랑할까요. 갯벌을 사랑할까요. 꼬막을 사랑할까요. 석류를 사랑할까요. 고구마를 사랑할까요. 나락을 사랑할까요. 어떤 사랑을 헤아리면서 아체사람 이야기를 사진으로 그러모으고 싶을까요.


.. 절박한 마음으로 단순하게 짓는 성벽보다 오래 가는 아름다움이 어디 있으며, 절실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그린 원시 벽화보다 아름다운 그림, 간절한 마음으로 골판지 위에 쓴 ‘군고구마 잇슴니다’ 같은 글씨처럼 아름다운 서예가 어디 있겠는가 ..  (126쪽)

 

 


  시쟁이 한 사람이 사진쟁이로 살아갑니다. 사진쟁이 한 사람이 시쟁이로 살아간다면 어떤 모습일까 하고 그려 봅니다. 그림쟁이 한 사람이 시쟁이로 살아가거나 사진쟁이로도 살아간다면 어떤 무늬일까 하고 그려 봅니다. 노래쟁이 한 사람이나 춤쟁이 한 사람이 시쟁이나 사진쟁이로 살아간다면 어떤 빛깔일까 하고 그려 봅니다.


  아이들은 날마다 춤을 춥니다. 아이들은 날마다 노래를 부릅니다. 아이들은 이리 구르고 저리 달립니다. 이리 어지르고 저리 뒹굽니다. 그러나, 어른 눈길로 볼 때에 ‘어지르기’이지, 아이 삶으로는 ‘놀기’예요. 놀며 이것저것 만지다가 다른 놀거리를 느껴 자리를 옮기느라 ‘안 치울’ 뿐이에요. 다른 데에서 이것저것 만지며 놀다가 또 이리로 와서 ‘안 치우고 둔 놀거리’를 마음껏 누려요.


  아이들하고 한마음이 되는 사람은 아이들을 사진으로 담습니다. 골목동네 이웃하고 한마음이 되는 사람은 골목동네 이웃을 사진으로 담습니다.


  한마음이 될 때에 찍을 수 있는 사진입니다. 섣부른 구경꾼은 사진을 찍지 못해요. 섣부른 구경꾼은 ‘기록’을 남기거나 ‘증명’을 할 뿐이에요. 어설픈 예술꾼은 ‘예술’을 하거나 ‘문화’를 빚는다 하겠지요. 곧, 사진을 찍으려면 구경꾼도 예술꾼도 되어서는 안 돼요. 구경이나 예술이 나쁘다는 뜻은 아니에요. 구경을 누리려면 구경을 하면 되고, 예술을 즐기려면 예술을 하면 돼요. 구경을 하면서 ‘구경’에 ‘사진’이라는 껍데기를 씌우면 거짓이 되고 말아요. 예술을 하면서 ‘예술’에 ‘사진’이라는 옷을 입히면 이때에도 거짓이 되고 말아요.


  공무원이 행정을 맡을 때에도 ‘일’이고, 회사 사장이 서류에 이름을 적을 때에도 ‘일’이에요. 어느 일이 올바르고 어느 일은 일 같지 않다고 나눌 수 없어요. 그런데, 사진쟁이로 살아가며 사람을 마주하며 사진을 찍을 때에는 ‘행정 처리하’듯 사진을 찍을 수 없어요. 서류에 이름만 적고 끝내는 회사 사장처럼 사진을 찍을 수도 없어요.


  사진을 찍는 사람은 두 다리로 이 땅에 우뚝 서서 맑게 웃는 사람이에요. 사진을 찍고 싶은 사람은 가방에 웃음보따리 짊어지고는 이곳저곳 신나게 마실하는 사람이에요.


  박노해 님 가방에는 ‘구호 성금’이 들었다지요. 그런데 참말 구호 성금일까요? 박노해 님은 구호 성금이라는 ‘돈’이 아니라, 이 자그마한 물건으로 피워낼 ‘웃음꽃’을 생각하며 가방을 꾹꾹 눌러 챙기지 않았을까요? 웃음보따리를 가방에 꾹꾹 눌러 채운 다음, 사진기 몇 대를 가붓하게 챙겨 지구별 이웃을 사귀려고 나들이를 떠나지 않을까요?

 


.. 록스마웨의 모습은 사진에 담을 수 없었다. 수동카메라는 아예 꺼낼 수도 없었다. 달리는 차 속에서 작은 디지털카메라로 사진 몇 장 찍다가 긴급출동한 무장 군인들에게 곧바로 체포되었기 때문이다 ..  (183쪽)


  록스마웨 모습은 박노해 님 시로도 내 마음속으로 그릴 수 있어요. 꼭 어떤 ‘그림으로 보여지는’ 사진을 찍어서 베풀지 않아도 좋아요. 박노해 님 눈이 사진을 찍었어요. 박노해 님 마음이 사진을 찍었어요. 눈으로 찍은 사진을 글 한 줄에 차곡차곡 갈무리합니다. 마음으로 찍은 사진을 책 한 권에 알뜰살뜰 여밉니다.


  사진 100장을 찍어서 책에 실어야 아체살이를 잘 보여주지는 않습니다. 사진 1000장이나 1만 장이나 10만 장이 되어야 비로소 아체살이를 낱낱이 보여주지는 않아요. 사진 한 장으로도 넉넉해요. 사진 열 장으로도 즐거워요.


  부디 사랑을 길어올려 주셔요. 부디 사랑을 담은 웃음꽃을 터뜨려 서로서로 예쁘게 어깨동무해 주셔요.


  아체는 너무 오랫동안 울었다지요. 어쩌면 앞으로도 오랫동안 울는지 몰라요. 그런데, 어떤 사람 눈에는 울음이 보이지만, 어떤 사람 눈에는 ‘마음으로 기운을 북돋우며 웃는 해님 같은 꽃봉오리’가 보일 수 있어요. (4345.8.30.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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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2-08-30 15: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정성 들여 꼼꼼히 쓴 리뷰는 우선 서재 메인으로 보내야지요.
저도 슬픔의 힘을 믿고 싶어요. ^^

숲노래 2012-08-30 18:50   좋아요 0 | URL
에고고 고맙습니다.

박노해 님이 사진을 찍도록 이상엽 님이 여러모로 도와주었다고 책끝에 나오더군요. 박노해 님 사진은 앞으로 널리 빛날 수 있으리라 생각해요.

카스피 2012-08-31 2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된장님은 정말 사진관련 책이 많으신것 같으시네요.사진관련 책들중에 좋은 책들이 많긴 하지만 의외로 많은 분들이 읽진 않는것 같더군요.

숲노래 2012-09-01 00:30   좋아요 0 | URL
사진책을 다룬 글도 잘 안 읽으시는걸요,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