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새 11
데즈카 오사무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02년 6월
평점 :
절판


 


 하늘에서 살면 하늘나라
 [만화책 즐겨읽기 167] 데즈카 오사무, 《불새 (11)》

 


  새벽 다섯 시가 조금 넘어 일어납니다. 밤새 거센 비바람이 불어 이리저리 살피느라 늦게 잠자리에 들었더니, 새벽에도 퍽 늦게 일어납니다. 퍼뜩 눈을 뜨고 일어나니 바깥이 조용합니다. 거센 비바람은 밤 사이 물러난 듯합니다. 바람도 비도 모두 멎었습니다. 멧새 노래하는 소리가 들리고, 처마에서 물방울 똑똑 떨어지는 소리가 들립니다. 멧새 몇 마리 우리 집 후박나무로 찾아들어 아침을 먹는 소리가 들리며, 이웃집 할아버지 경운기 소리가 들립니다.


  마당으로 내려옵니다. 거센 비바람은 자전거수레를 마당 끄트머리까지 날렸습니다. 수레에 무거운 책을 꽤 실었어도 거센 비바람은 수레를 날릴 만큼 힘이 세군요. 옆지기 신 한 짝도 멀찌감치 날렸습니다. 이밖에 딱히 날아간 다른 것은 없습니다. 부러지거나 넘어지거나 쓰러진 것도 없습니다. 그토록 바람이 거세게 불었어도 후박나무 가지는 끄떡없습니다. 다른 나무도, 풀도, 이웃집 논배미 벼도 그대로 잘 있습니다.


- “야, 야스라이 춤?” “그런 것도 모르나? 오곡을 빌고 풍년을 기원하는 전통 깊은 춤이라네. 매년 이 춤을 보지 않고는 봄이 왔다는 실감이 나지 않을 정도인걸.” “하하, 저런 걸 보지 않아도 봄은 와요.” (12쪽)
- “도성에서는 이런 예쁜 빗을 꽂고, 많은 여자들이 큰길을 돌아다니지?” “응, 그야 뭐.” “얼마나 멋있을까. 나도 도성에 가고 싶어. 도성으로 이사가고 싶어.” “또 그 소리. 넌 내 색시가 될 사람이야. 그리고 난 도성으로 이사가지 않을 거야.” “그럼 나무꾼을 그만두면 되잖아. 나무꾼 따위 싫어! 겨우 입에 풀칠이나 하는 게 고작이잖아. 벤타라면 짐꾼이든 뭐든 될 수 있을 거야.” (25쪽)

 

 


  바람이 불 때면 으레 가만히 옹크리고 앉아 풀을 바라보곤 합니다. 바람에 이리 눕고 저리 눕는 풀을 곰곰이 들여다보곤 합니다. 가녀린 풀포기는 어린이가 꼬옥 쥐고는 쏙 잡아뺄 수 있고 끊을 수 있습니다. 쉽게 뽑히고 쉽게 꺾이는 풀포기입니다. 그러나, 이 풀포기는 어떤 어마어마한 비바람이 몰아치더라도 뽑히지 않습니다. 그러고 보니, 적잖은 사람 목숨을 앗고 집도 절도 부수었다는 비바람이 몰아친다 하더라도, 풀포기가 뽑히는 일이란 없습니다. 흙이 무너진다든지, 이를테면 골짜기가 넘치면서 멧자락 한켠에 무너지거나 땅뙈기 한켠이 휩쓸린다든지 할 때에야 비로소 풀도 함께 떠내려 갑니다. 이때 말고는 풀포기가 비바람에 꺾이는 일이 없어요.


  거센 비바람을 견디다 못해 나무가 부러지는 일은 있지만, 그 어떤 거센 비바람이라 하더라도 풀포기를 부러뜨리거나 꺾거나 넘어뜨리지는 못해요.


  누군가 이렇게 말할는지 모르지요. 거센 비바람이 몰아친 탓에 벼가 몽땅 드러눕기도 하지 않느냐고. 그래요, 거센 비바람에 논배미 벼가 드러눕는 일이 더러 있어요. 그런데 오늘날 벼농사란 무언가요. 농약이랑 비료랑 항생제로 하는 벼농사잖아요. 약 먹고 비료 먹으며 알곡만 크고 무겁게 달리도록 하는 ‘유전자 건드린 벼’예요. 이제는 알곡이 크고 무겁게 달리되, 줄기가 조금만 자라도록 하는 ‘새삼스레 유전자 다시 건드린 벼’가 나온다고 해요. 사람들이 ‘더 많이 더 크게 더 빨리’ 거두려고 유전자를 건드려 논밭에 오직 한 가지 곡식이나 푸성귀만 심을 때에는 얕은 비바람에도 그만 쓰러지는 풀포기가 생겨요. 자연에서 스스로 꽃을 피우고 씨를 맺어 다시 흙으로 돌아가 뿌리를 내리는 풀포기는 비바람에 끄떡하지 않아요.


  억지로 길들이려 하면 스스로 서는 힘이 없어요. 자연스레 사랑하려 하면 스스로 서는 힘을 키워요.


- “응? 왜 벌레를 일부러 피해서 걸어가죠?” “그야 신이니까 그렇지. 살아 있는 건 무엇이든 죽이지 않아.” “그럼 물고기나 새도 먹지 않나요? 덩치가 그렇게 좋은데. 나무열매나 잎사귀만 먹고 그 덩치를 유지할 수 있나요?” (85쪽)
- “이제 슬슬 이 늙어빠진 몸뚱이와도 작별할 때가 온 것 같구나. 하지만 그리 멀지 가지는 않을 거야. 이 산의 한 줌 흙이 되는 거니까 …… 잘 보아라. 저 석양을. 내가 태어났을 때부터 저것은, 조금도 변치 않고, 몇 십 번, 몇 백만 번이나 같은 모습으로 저물어 갔다. 내가 세상을 원망하는 마음으로 사람들을 죽였을 때도, 스승과 함께 전국을 유랑했을 때도, 양팔을 잃고 이 산에서 몸을 맡겼을 때도, 저 석양은 언제나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너희도 저 석양처럼 살아라. 부침 많은 인간사의 흐름에 휩쓸리다 보면, 이 대자연의 아름다움을 맛볼 수 없게 되느니” (109∼111쪽)

 

 

 

 


  비가 들이부으면 비옷을 입고 빗물로 마당을 쓸까 했지만, 마당을 쓸 만큼 비가 오지는 않았습니다. 아침에 첫째 아이가 일어나면, 이 아이하고 함께 마당을 쓸면서 놀아 볼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아이는 이모저모 심부름을 잘 하겠지요. 마당을 깨끗이 쓸고 나서 아이는 마당에서 예쁘게 놀 수 있겠지요. 바람소리와 새소리와 구름이 잔잔히 흐르는 소리를 들으면서 하루를 기쁘게 맞이할 수 있겠지요.


  아이는 몸이 작아 바람이 조금 세게 불면 몸이 기우뚱합니다. 어른은 몸이 크다지만 바람이 제법 세게 불면 몸이 휘청거립니다. 아이와 어른이 서로 손을 잡는다든지, 어른이 아이를 안고 서면 꽤 세게 부는 바람에도 그리 흔들리지 않습니다. 퍽 씩씩하게 바람을 맞아들일 만합니다.


  세차게 부는 바람에 빨래가 금세 마릅니다. 빨래 말리기는 따순 햇살이 가장 좋고, 시원스러운 바람이 둘째로 좋습니다. 생각해 보면, 사람이 살아가는 나날에서도 따순 햇살이 드리우는 하루가 가장 좋고, 시원스레 부는 바람이 있으면 둘째로 좋다 말할 만할까 싶습니다. 아니, 맨 먼저 따순 햇살이 있고, 이 다음으로 시원스러운 바람이 있습니다. 여기에 맑게 흐르는 냇물이 있고, 푸르게 빛나는 숲이 있습니다. 숲에 우거진 나무에는 좋은 열매가 가득 달립니다. 사람은 여느 풀짐승처럼 열매랑 풀을 먹으며 몸을 살찌울 수 있어요. 햇살과 바람과 냇물과 숲을 누리면서 마음을 북돋울 수 있어요.


  러시아사람 톨스토이는 한 사람한테 땅이 얼마나 있어야 할까 하고 물었어요. 나도 한 가지 묻고 싶습니다. 나는 나한테 묻고 싶습니다. 나 한 사람 살아가는 보금자리 곁에는 무엇이 얼마나 있어야 할까 하고 묻고 싶습니다. 내가 누리는 삶에는 무엇이 얼마나 있어야 즐겁고, 내 보금자리는 어떤 살림을 어떻게 건사할 때에 사랑스러울까 하고 묻고 싶습니다.


- “싫어! 무예는 배우겠지만, 무사가 되는 것만은 죽어도 싫어! 무사는 우리 집도 불태우고 우리 부모님도 죽였어! 무사는 나의 원수야! 그뿐만이 아니야. 무사는 우리 마을 사람들을 바보 취급 하고 거드름 피우면서, 그동안 얼마나 못살게 굴었는데, 왜 같은 인간이면서 그 녀석들은 우리를 벌레 취급 하는 거지?” (188∼189쪽)

 


  기쁘게 누릴 삶은 무엇이 있어서 기쁠까요. 재미나게 뛰노는 삶은 무엇이 있기에 뛰놀 만한가요. 사랑스레 빛낼 삶은 무엇이 있어서 사랑스럽게 빛날까요.


  어떤 상장을 받기에 기쁘지 않습니다. 놀이공원에 갔으니까 신나게 뛰놀 만하지 않습니다. 내가 활짝 웃으며 집식구 모두 활짝 웃습니다. 아이들과 옆지기가 빙긋 웃으며 서로서로 빙긋 웃습니다. 내가 낯을 찡그리며 집식구 모두 낯을 찡그립니다. 아이들과 옆지기가 골을 부릴 때에 나도 그만 골을 부립니다.


  하늘에서 살면 하늘나라입니다. 지옥에서 살면 지옥나라입니다. 꿈으로 살면 꿈나라입니다. 미움으로 살면 미움나라입니다. 웃음으로 살면 웃음나라요, 눈물로 살면 눈물나라예요.


  내가 바라는 대로 내 하루를 맞이합니다. 내가 좋아하는 대로 내 삶을 일굽니다. 내가 생각하는 대로 내 새날을 엽니다. 내가 사랑하는 대로 내 이야기를 엮습니다.


  나는 언제나 하늘사람입니다. 나는 언제나 땅사람입니다. 나는 늘 바람사람입니다. 나는 늘 꽃사람입니다. 나는 노상 바다사람입니다. 나는 노상 멧사람입니다. 내 가슴에서 샘솟는 하늘 같은 사랑입니다. 내 마음에서 피어나는 바다 같은 꿈입니다.


- “너희들은 내 기분을 알기나 해? 좋아하는 여자를 잃은 고통을 아냐구. 평생을 함께하기로 맹세한 사이였는데.” (274쪽)
- “그만 됐어. 용서해 주자.” “네?” “이 여자는 내 마누라인걸. 남편의 물건을 훔쳐 가다니 잠깐 나쁜 마음을 먹은 걸 거야. 그래, 그거야.” (293쪽)

 

 

 


  데즈카 오사무 님 만화책 《불새》(학산문화사,2002) 열한째 권을 읽습니다. 만화책 《불새》 열한째 권에서도 ‘어리석은 사람들이 스스로 저지르는 전쟁’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어쩜 이렇게 사람들은 전쟁놀이를 즐기는가 싶으나, 하나하나 따진다면, 참말 ‘사람 역사’가 생겼다고 하던 이야기를 들려주는 역사책이나 역사 교과서는 온통 ‘전쟁을 벌이고 땅따먹기 하던 발자국’이 가득 담겨요. 한국역사이든 세계역사이든 서로 마찬가지예요. 어느 나라가 군대를 얼마나 키워 어느 이웃나라로 쳐들어가서 땅뙈기를 넓혔다 하는 이야기만 가득합니다. 고구려이든 백제이든 신라이든 가야이든, 그저 전쟁으로 땅뙈기 넓히고 줄인 이야기만 다룹니다. 고려이든 조선이든 먼먼 옛조선이든, 으레 전쟁 이야기만 들려줘요. 사람들 스스로 빛낸 삶이나 사람들 스스로 사랑한 삶을 들려주는 역사책이 없어요.


  어느 역사책을 들여다보아도 기원전 3000년 무렵 사람들이 어떠한 밥을 어떻게 마련해 어떻게 즐기면서 살림을 일구었는가 하는 이야기를 들려주지 못합니다. 아니, 서기 10년대 이야기이든, 서기 1000년대 이야기이든, 오늘날 2000년대 이야기이든, 사람들 스스로 예쁘며 아름답게 빛내는 삶을 이룩한 이야기는 한 줄로조차 다루지 않아요. 전쟁놀이 이야기, 전쟁놀이에서 우두머리로 나선 바보 이야기, 전쟁놀이 못지않게 바보스러운 돈놀이에 나서는 우두머리 이야기 같은 안쓰럽고 어리석은 이야기만 가득합니다.


  임금님 이름을 외운대서 역사를 알 수 없어요. 훌륭하다는 정책을 빚었다는 지식인 이름을 외운대서 역사를 배울 수 없어요. 사람이 살아온 발자국을 알아야지요. 사람이 살아오며 빛낸 사랑을 알아야지요. 사람이 살아오며 사이좋게 어깨동무하며 일군 꿈을 알아야지요.


- “난 다시 태어나고 싶어. 솔직히 난 죄가 많으니 지옥 행은 당연한 일이야. 그래도 다시 한 번 인간으로 태어나고 싶어. 웃지 말게, 묘운. 난 진지하게 묻는 거야.” “지옥, 극락은 이 세상에 있습니다. 가령, 나리는 나라의 신사와 사찰을 모두 불태워 버렸습니다. 만일 나리께서 그 일로 고민하신다면 나리는 지금 지옥에 있는 겁니다. 인간은 죽으면 다시 태어납니다. 단, 증인은 없습니다. 어쩌면 본인도 깨닫지 못하는지 모릅니다.” (315쪽)


  나 스스로 하느님이 되어 오늘 하루 살아갈 때에, 우리 아이들은 어버이한테서 ‘하느님 마음’과 ‘하느님 사랑’을 즐겁게 마주하면서 예쁘게 이어받을 수 있습니다. 아이들은 아이들 나름대로 한결 따사롭게 ‘하느님 마음’을 북돋우고 한껏 너그럽게 ‘하느님 사랑’을 보살피겠지요.


  내가 누리고픈 두 가지는 좋은 마음과 좋은 사랑입니다. 내가 물려주고픈 두 가지는 좋은 마음이랑 좋은 사랑입니다. 여기에 한 가지를 덧붙이면, 좋은 꿈입니다. 좋은 마음과 사랑과 꿈이라면, 내 삶도 옆지기 삶도 아이들 삶도 어여삐 빛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4345.7.19.나무.ㅎㄲㅅㄱ)

 


― 불새 11 (데즈카 오사무 글·그림,최윤정 옮김,학산문화사 펴냄,2002.6.25./4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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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2-07-19 2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데즈카 오사무의 평생의 역작이 불새라고 하지요? 그나 저나 이 책은 작가가 죽어서 결국 미완성이라고 하던데 맞는지 모르겠습니다.

숲노래 2012-07-20 01:25   좋아요 0 | URL
죽어서 미완성이라기보다,
데즈카 오사무 님은 스스로 그릴 수 있는 만큼 그렸어요.

읽는 몫은 우리한테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