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 입에서 나오는 말
[말사랑·글꽃·삶빛 9] 고사성어 아닌 삶말

 


  우리 집 첫째 아이가 다섯 살을 살아가는 어느 날 아침입니다. 이슬이 들판을 곱게 적십니다. 나란히 햇살을 받으며 마당에 섭니다. 들새 소리에 귀를 기울이다가, 문득 한 마디 합니다. “아버지 왜 (저 새들은) ‘은지 은지 은지’ 해요?” 함께 들새 노랫소리 듣던 아버지는 ‘찌삣 찌삣 찌삣’처럼 들었으나, 아이는 ‘은지 은지 은지’처럼 듣습니다. 아이 말을 되새기며 들새 노랫소리를 맞추어 봅니다. 아버지와 아이는 들새 이름을 모르지만, 이 들새가 노래하는 소리는 ‘은지 은지 은지’라 해도 잘 들어맞는구나 싶습니다. 다른 분들이 이 들새 노랫소리를 듣는다면 이와는 달리 적을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아이는 마당에 놓인 자전거를 타려다가 “어, 젖었네.” 하면서 옷섶으로 자전거 안장을 닦습니다. 아버지는 곁에서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젖지 않았어. 거기엔 이슬이 앉았어.” “이슥?” “아니, 이슬. 자, 여기도 봐. 여기 풀잎에 물방울이 맺혔지. 이 물방울을 이슬이라고 해.” “아, 이·슬.”


  차츰 밝고 노랗게 빛나는 햇살을 올려다보다가는, 마당 빙 둘러 자라는 들풀에 맺힌 이슬을 함께 내려다봅니다. 아이는 한손을 휘휘 저으며 손가락마다 이슬을 붙입니다. 풀잎 이슬을 아이 손가락으로 옮기는 이슬놀이를 합니다.


  아버지는 집으로 들어와 이불을 빨래합니다. 손으로 비누를 바르고 비빔질을 하다가 빨래기계에 넣습니다. 아버지는 아이한테 ‘빨래기계’라 말하기에, 아이는 아버지 곁에서는 ‘빨래기계’라는 말을 익힙니다. 우리 시골집에 나들이하는 다른 분들은 우리 식구가 드디어 ‘세탁기(洗濯機)’를 들이며 손빨래에서 벗어난다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우리 집 아이는 바깥 손님이 있는 자리에서는 ‘세탁기’라는 말을 들으면서 천천히 익힙니다.


  아이 어머니가 당근을 갈아서 잔에 담습니다. 아이 어머니가 ‘당근즙(-汁)’이라 말하면 아이는 ‘당근즙’이라는 말을 들으며 배웁니다. 아이 어머니가 ‘당근 간 물’이라 말하면 아이는 새삼스레 ‘당근 간 물’이라 들으며 배웁니다.


  아이는 “나 밥 먹을래.” 하고 말합니다. 아이 아버지도 어머니도 늘 ‘밥’을 먹기 때문입니다. 아이 아버지와 어머니가 여느 때에 “자, 우리 식사(食事)하자.”처럼 말했다면, 아이는 “나 식사 할래.” 하고 말하겠지요.


  얼마 앞서 읽은 책 《어머니전》(호미,2012)을 생각합니다. 《어머니전》이라는 이야기책은 섬마을 두루 도는 분이 섬마을 할머니들 삶을 조곤조곤 여쭙고 들은 말마디를 하나하나 아로새깁니다. 25쪽을 보면, “첫 숟갈에 배부를까. 방죽을 파 놔야 머구리(개구리)가 뛰어들제. 그물코도 삼천 코면 걸릴 날 있다고, 차분히 맘먹고 사시오.” 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43쪽을 보면, “마도를 똥막대기 만든다.” 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섬마을 할머니, 곧 ‘섬할매’ 입에서는 “첫 숟갈에 배부를까”라든지 “방죽을 파놔야 머구리가 뛰어들제”라든지 “그물코도 삼천 코면 걸릴 날 있다고”라든지 “똥막대기 만든다”라든지, 당신들 살아오며 몸으로 겪은 말마디가 톡톡 튀어나옵니다. 하나둘 샘솟습니다.


  한국말을 살피는 학자들은 섬할매 말마디를 으레 ‘속담(俗談)’이라든지 ‘격언(格言)’이라는 이름을 붙여 가리킵니다. 또다른 이름으로 ‘상말(常-)’이 있습니다. 그런데, 국어사전에서 ‘상말’ 뜻을 찾아보면 “점잖지 못하고 상스러운 말”이라 나옵니다. 여느 사람들이 으레(常) 쓰는 말이기에 ‘상말’이라는 이름이 붙는데, 여느 사람들이 으레 쓰는 말이 “점잖지 못하고 상스러운 말”이라 합니다. ‘상(常)스러운’이란 무슨 뜻일까요? 사람들이 얘기하는 ‘상스러운 말’이란 어떤 말일까요? ‘상스럽다’는 “말이나 행동이 보기에 천하고 교양이 없다”를 뜻한다 합니다. ‘속담’이란 “속된(俗) 말(談)”을 가리킵니다. ‘속되다’는 “(1) 고상하지 못하고 천하다 (2) 평범하고 세속적이다”를 뜻한다 합니다. 그러니까, 한국말 살피는 학자들 학문에 따른다면, 섬할매들 말마디는 ‘속되거나 상스러운 말’인 셈이요, 낮고 나쁜 말이라 일컫는 셈입니다.


  섬마을 두루 도는 어느 분이 섬마을 할매들을 만나지 않고, 서울이나 부산에서 교수님이나 학자님을 만났더라면 아마 ‘속담’이나 ‘상말’이 아닌 ‘고사성어’나 ‘사자성어’를 으레 들었으리라 봅니다. 이녁이 책을 낼 때에도 이녁 책에는 고사성어와 사자성어가 가득하리라 생각합니다.


  고사성어나 사자성어란 ‘한자로 엮은 말’입니다. ‘고사성어’는 ‘중국 옛일을 한자로 적은 말’이요, ‘사자성어’란 ‘사람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을 한자 넉 자로 적은 말’이에요.


  아이들은 늘 배웁니다. 아이들은 둘레 어른들이 나누는 말을 듣고 배웁니다. 아이들이 전라남도 고흥에서 살아가면 전라남도 고흥말을 듣고 배웁니다. 아이들이 경상남도 통영에서 살아가면 경상남도 통영말을 듣고 배웁니다. 아이들이 시골할매하고 만나며 살아가면 아이들은 시골할매 말을 듣고 배웁니다. 아이들이 학원을 다니거나 학교를 다니면 아이들은 학원 강사나 학교 교사 말을 듣고 배웁니다. 아이들이 텔레비전을 보면 텔레비전에서 흐르는 말을 듣고 배웁니다.


  어른들도 노상 배웁니다. 어른들 스스로 어디를 일터로 삼느냐에 따라 어른들 스스로 듣고 배우는 말이 달라집니다. 어른들 스스로 찾아 읽는 책이나 신문이나 잡지에 따라 어른들 스스로 읽고 배우는 말이 바뀝니다.


  고장말을 듣고 자라는 아이는 고장말을 듣고 익힙니다. 사자성어나 고사성어 같은 한자말을 듣고 자라는 아이는 사자성어나 고사성어 같은 한자말을 익숙하게 여기며 익숙하게 씁니다. 영어를 으레 듣고 자라는 아이는 영어를 으레 받아들이며 영어로 아이 생각을 밝히며 살아갑니다.


  고운 말을 듣고 자라는 아이는 고운 말로 생각하며 이야기를 꽃피웁니다. 맑은 글을 읽고 자라는 아이는 맑은 글로 생각을 키우며 사랑을 나눕니다. 살가운 말을 들으며 자라는 아이는 살가운 말로 생각하며 꿈을 이룹니다. 따스한 글을 읽고 자라는 아이는 따스한 글로 생각을 돌보며 믿음을 다스립니다. (4345.5.21.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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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2-05-21 13:23   좋아요 0 | URL
어머, 이뻐라,
벼리가 '왜 새가 은지은지 해요?' 하던가요?
그렇게도 들리는구나... 하기사, 짹짹 삐약삐약 등 하나의 말로 한정짓기엔
너무 아까운 아름다운 소리잖아요.

댓글 달면서, '한정짓기엔'을 우리말로 풀어쓰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한참 망설이는데
생각나질 않아요. 가르쳐주세요, 된장님.

숲노래 2012-05-22 04:47   좋아요 0 | URL
'뭉뚱그리다'라 하면 돼요.

또는 "삐약삐약 같은 말로만 적기엔"처럼 적어도 되고요.

토씨 '-만'이 있으니
알맞게 잘 살리면 됩니다~

hnine 2012-05-21 15:51   좋아요 0 | URL
지난 번에 읽은 이정록 시인의 책에도 충청도 사투리가 나오는 대목은 저도 모르게 따라 읽어보게 되던데요. 이 책도 그럴 것 같아요. Thanks to하고 구입합니다 ^^

숲노래 2012-05-22 04:46   좋아요 0 | URL
어머니전 장만하시는가 봐요?
오오~
아무쪼록 즐거이 누려 주시리라 믿어요~ ^^